1948.10.19 여수 순천 반란사건 발발
麗順사건
1948년 10월19일 밤, 4ㆍ3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떠날 예정이던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ㆍ순천 일대를 장악하고 인민위원회를 건설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기도 한 이 사건은 군내의 남로당계 좌익 세력만이 아니라 광복군계를 포함한 대부분의 반(反)이승만계 인맥을 솎아내는 대규모 숙군의 계기가 되었다.
여순 반란의 주체인 제14연대는 1948년 5월 초 확군 작업의 일환으로 광주 국방경비대 제4연대 1대대를 주축 삼아 창설됐다. 이 연대에는 지창수 상사,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 등 여순사건의 주모자가 될 좌익계 간부들이 사병들에게 영향을 끼칠 만한 자리에 포진해 있었다.
남한만의 5ㆍ10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그 해 4월 제주도에서 봉기한 좌익 무장세력은 각처에서 토벌대를 위협했고, 이승만 정권은 계속적인 병력 투입으로 이에 맞섰다.
국방경비대 사령부가 제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을 내린 것은 10월15일이었다. 14연대 내 좌익계 군인들은 출동 시각인 19일 오후 8시까지 나흘 사이에 동족상잔과 반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됐다. 그들은 뒤쪽을 택했다.
반란은 정부군이 10월23일 순천을 점령한 데 이어 27일 여수를 점령함으로써 종결됐다.
그러나 반란군의 여수ㆍ순천 지역 점령 기간에 이뤄진 경찰과 그 가족, 공무원들의 처형과 반란 진압 이후 이른바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이뤄진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은 지역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냈다.
이 비극은 여수ㆍ순천만의 일도 아니었다. 해방 얼마 뒤부터 6ㆍ25 종전까지 이런 보복극은 한국의 방방곡곡을 피로 물들였다.
/한국일보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이 발발하였습니다.
해방 후 한반도 남쪽에서 좌익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그들의 활동은 비합법적인 지하로 전환하였다.
1948년 총선과 대한민국 건국이 다가오자 그들은 온갖 수단으로 총선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 일원에 폭동사건이 발생하였다.
현지 주둔 병력과 경찰이 합동으로 진압작전을 벌였으나 진압이 안돼 증원 병력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그 해 10월,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병력 약 3,000명의 제주도 급파를 결정하였다.
이 14연대에는 이미 공산당의 프락치가 침투되어 있었다.
국군 제14연대가 여수항을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1948년 10월 20일을 하루 앞둔 19일 밤, 반란군의 총지휘자 김지회(金智會) 중위 ·이기종(李起鍾) ·박기암(朴基岩) 등 주모자들은, 미리 포섭해 놓았던 행동대 약 40명을 은밀히 규합하여 새벽에 병기고를 장악한 후 반란을 일으켰다.
1,000여 명의 반란군은 날이 밝기 전에 경찰서를 비롯한 여수의 주요 관공서를 장악하고, ‘인민 해방’을 부르짖으며, 인공기를 게양하였다.
10월 27일,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주일 만에 토벌군의 손으로 반란이 진압되기까지, 반란군은 한때 순천 ·남원 ·광주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토벌군에게 쫓기는 반란군 중 상당수는 토벌군에 투항하였으며, 지리산 쪽으로 도주하던 나머지 세력은 대부분 사살되었다.
불타고 있는 여수 시가지.
1948년 10월 제주도 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 병력은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사실 이 여수시가지의 화재는 반란군이 지리산 일대로 퇴각하고, 진압군이 들어온 후, 반란동조자 색출 명목으로 진압군에 의해 저질러졌다.
정부수립 후 불과 2개월 만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가 한때 반란군의 손에 들어갔다.
전남 순천근교 1948.10. 반란군에 의해 희생된 경찰관들과 의용단원들의 시신.
남로당 지도부는 좌경 모험주의와 우경 투항주의를 번갈아 범하며, 특히 투쟁에서는 극단적인 모험주의를 드러냈다.
전남광양 1948. 10.
경찰은 반란군에 좆겨 후되하면서 가둬두고 있던 좌익 사상범 용의자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갔다.
희생자의 가족들이 광양과 순천의 경계에 있는 덕내리 골짜기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내 거두고 있다.
이들중에서 반란군에 협조한 혐의가 있는, 이른바 부역자들을 골라내 징계했다.
뒤쪽으로 남산동 산 벌판이 보인다.
1948. 10. 27
진압군들에 의하여 여수서초등학교 교정으로 붇찹혀 온 여수시민 청장년들이 자기 집들이 불타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으로 잡혀있는 광경.
반란 동조 혐의자로 판명되면, 이곳 학교 뒤 교정에서 즉결처형(참수&총살) 되었다. 오른쪽 대열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부역 혐의자들로서, 이들 중 89명이 11월 1일 처형되었다.
여순반란사건[ 麗順叛亂事件 ]
1948년 10월 20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에서 좌익계열의 장병이 일으킨 사건.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공산분자들은 이를 저지하고자 온갖 수단으로 방해공작을 폈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폭동사건이 일어나자, 국군과 경찰은 합동으로 진압작전을 펴던 중 증원을 필요로 하여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에서 약 3,000명을 제주도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제14연대에는 공산당의 지하조직이 침투하여 있었으며, 이들은 소련혁명기념일을 전후하여 무력혁명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추진해왔다. 이 과정에서 오동기(吳東起)소령 등이 혁명의용군사건에 관련되어 체포되었다.
부대 안의 지하조직에 대한 검거선풍이 한층 강화될 것을 우려한 좌익극렬분자들은 김지회(金智會)중위, 홍순석(洪淳錫)중위, 지창수(池昌洙)상사 등을 중심으로 행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때마침 제주도폭동의 진압을 위하여 제14연대의 1개 대대가 출동명령을 받게 되자, 그 준비로 부대 전체가 바쁜 틈을 이용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경 작전투입대대의 출항을 한 시간 가량 앞두고 승선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 연대 인사계 지창수상사는 핵심세포 약 40명에게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케 하였다.
그리고 비상나팔을 불어 연대의 전병력을 집결시킨 다음 “지금 경찰이 우리를 공격해 오고 있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출동을 반대한다. 지금 북조선 인민해방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하여 38선을 넘어 남진해 오고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이 된다.”라고 외치며 선동을 개시하였다.
병사들의 대부분은 삽시간에 군중심리에 휩쓸려 폭도로 돌변하였다. 광복 직후부터 경비대와 경찰 사이의 빈번한 마찰로 병사들은 일반적으로 경찰에 대하여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므로 경찰을 타도하자는 선동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반대의사를 나타내던 병사들 중 3명이 즉석에서 사살되자 동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를 만류하던 장교들도 대부분 사살되었다.
약 2,500명의 반란군은 무기와 탄약을 나누어 가지고 20일 자정 여수시내로 침공하여 경찰서를 점령한 다음 살육을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이튿날 아침 9시경에는 모든 관공서와 은행 등 요소를 비롯하여 시내 전역이 반란군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던 좌익계열의 민간인과 학생들까지 합세하여 사건은 확대되었다. 반란군들은 6량의 열차를 이용하여 순천으로 향하였다.
당시 순천에는 같은 연대 예하의 2개 중대가 홍순석 중위의 지휘 아래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내 반란군에 가담하였다. 한편, 전라남도 경찰국은 순천경찰서 관내인 의암지서에 전투지휘소를 설치하고 반란군의 진출을 막아내기 위하여 230명의 경찰병력을 투입하였다.
이 때 광주(光州)에 주둔하고 있던 제4연대의 1개 중대도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순천으로 출동하였으나 불순분자들이 장교를 사살한 다음 반란군에 합세하여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20일 오후 순천경찰서를 유린하고 순천시내를 장악한 반란군은 곳곳에 적기(赤旗)를 내걸고 공산주의사상에 감염된 남녀학생과 민간인 동조자들을 앞세워 군인·경찰·우익인사·지방유지·일반시민을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인민재판에 넘긴 다음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실로 여수와 순천일대가 방화와 약탈, 파괴와 살인의 생지옥으로 일변한 가운데 반란군은 그 공격방향을 세 갈래로 나누어 북으로는 학구(鶴口), 동으로는 광양(光陽), 서로는 벌교(筏橋)를 향하여 진격을 계속하였다.
10월 21일 육군총사령부는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에 설치하고 제2여단과 제5여단 예하의 제3·제4·제6·제12·제15연대 등을 투입하여 순천시의 외곽지역을 봉쇄하고 포위망을 압축하기 시작하였다.
22일에는 대통령이 여수·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한편, 국방부장관은 반란군에 대한 최후의 경고로 투항을 권고하는 내용의 전단을 공중살포하였다.
이날 오전 작전부대는 순천시가로 돌입, 소탕작전을 벌여 저녁 무렵에는 전 지역을 탈환하였다. 이윽고 순천시가는 작전부대로 메워졌으며 장갑부대와 경찰도 들어와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치안이 점차 회복되었다.
일부 작전부대는 보성·벌교·광양 등 주변지역으로 진격하여 반도의 잔당을 몰아내는 동시에, 포위망을 벗어나 소백산맥으로 달아나는 상당수의 반란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24일에는 광주에 있던 전투사령부가 순천으로 옮겨오면서 최종목표인 여수를 탈환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해군은 충무공호를 비롯한 7척의 경비정을 배치하여 여수항을 봉쇄하였고, 부산에서 출동한 제5연대의 1개 대대병력은 이들 함정 위에서 상륙을 준비하였다. 쫓기는 반도들은 곳곳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그들의 꾐에 빠진 상당수의 여학생들은 99식 소총으로 저항을 하는가 하면, 더러는 물을 주겠다고 진압부대의 병사를 유인하여 권총으로 사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시가를 뒤덮은 초연 속에서 작전부대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지하에 숨어 공포에 떨고 있던 시민들이 달려나와 만세를 부르며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 여수일원은 27일 저녁 무렵에는 완전히 수복되었다.
포위망을 벗어난 약 1,000명의 잔당은 김지회·홍순석 등의 지휘 아래 덕유산 일대로 숨어들어가 저항을 꾀하였다. 그러나 국군은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산악험지에 따라들어가 수색과 토벌을 계속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 4월 이들 두 사람은 작전부대에 의하여 사살되었다.
1950년 2월에는 그 추종자들의 대부분이 소탕되어 호남지구에 내려졌던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군은 3차에 걸친 대대적인 숙군작업에 착수하여 경비대시대 이래 내부로 침투하여 있던 좌익계열의 화근을 뽑고 멸공구국의 전열을 새로이 가다듬게 되었다.
≪참고문헌≫ 共匪討伐史(陸軍本部, 1954)
≪참고문헌≫ 韓國戰爭史 1(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1966)
≪참고문헌≫ 陸軍發展史 上(陸軍本部, 1970)
≪참고문헌≫ 北韓對南工作史(中央情報部, 1972)
≪참고문헌≫ 北傀挑發三十年(宋孝淳, 北韓硏究所, 1978)
/네이트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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