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9월 러더퍼드는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연구를 설명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원자에 입자를 충돌시켜 원소를 변환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이때 나오는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원자핵이 변환할 때 나오는 에너지가 아주 작아 그 에너지를 이용하려는 것은 달빛을 이용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성자로 분리한 원자핵에서 두 개 이상의 중성자가 방출된다면,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어
독일에서 나치를 피해 영국에 온 레오 스릴라드(Leó Szilárd, 1898~1964)는 신문에서 러더퍼드의 연설내용을 읽었다.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스릴라드는 베를린 대학에서 플랑크, 아인슈타인과 같은 유명한 물리학자들에게 물리학을 배웠고, 졸업 후에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가 아인슈타인과 함께 냉매를 사용하지 않는 냉장고를 설계한 것은 베를린 대학에 있을 때였다. 그들이 설계한 냉장고는 실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타임지에 실린 러더퍼드의 연설 내용을 읽은 스릴라드는 핵에너지에 대한 러더퍼드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연설문을 읽은 후 원자와 원자핵, 원자핵이 내는 에너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스릴라드가 쓴 [사실에 관한 그의 생각]에 그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다음 며칠 동안 러더퍼드의 말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했다. 목욕하면서 생각했고 공원을 거닐면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그 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어 길을 건널 때 갑자기 만약 중성자로 원자핵을 분리할 수 있고, 이때 두 개 이상의 중성자가 방출된다면, 연쇄반응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쇄 핵분열반응을 착안한 레오 스릴라드.
연쇄 핵분열 반응을 이용하면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스릴라드의 생각
스릴라드는 원자핵을 이용하여 많은 에너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두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단계는 연쇄 핵분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충분히 많은 물질을 확보하여 연쇄반응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릴라드의 아이디어는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원소의 원자핵이 쉽게 분열될 수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당시는 한과 스트라스만이 중성자를 이용하여 우라늄 원자핵을 분열시키는 실험을 하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연쇄 핵분열 반응을 이용하면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스릴라드의 생각은 가상적인 시나리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스릴라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1934년 3월 12일 그는 중성자를 이용한 원소변환에 관해 15페이지의 특허 출원서를 제출했다. 원자핵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폭탄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는 특허 출원서를 영국 해군 본부에 제출했다. 아직 원자핵 분열 실험이 성공하기도 전에 핵분열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특허를 내려 했던 것이다.
우라늄의 연쇄 반응은 엄청난 에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고, 이는 원자폭탄의 개발로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아이디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른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지만 누구의 관심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는 리제 마이트너와 접촉했다. 그는 그녀가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원자핵을 가진 원소를 찾아내는 실험을 해주기를 원했다. 스릴라드는 캐번디시 연구소로 러더퍼드를 찾아가 자신이 실험할 수 있도록 실험실 공간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지만 러더퍼드는 그의 제안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드디어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 우라늄을 찾다
우라늄이 들어있는 피치블렌드. 우라늄은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출처 : kgrr at en.wikipedia.com>
스릴라드는 그 후 옥스퍼드 대학, 로체스터 대학 등에서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을 찾기 위한 실험을 하였고, 1938년에 아인슈타인의 추천으로 록펠러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도 연쇄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원소를 찾아내는 외로운 연구를 계속했다. 스릴라드는 베릴륨으로 실험했지만, 중성자는 베릴륨 원자핵을 분열시키지 않았다. 그다음 그는 인듐으로 실험했다. 우라늄이 그가 찾던 원소였지만 그는 우라늄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실험을 계속 하고 있었다.
중성자에 의해 우라늄 원자핵이 분열한다는 것을 알아낸 사람은 독일의 오토 한과 프리츠 스트라스만 그리고 리제 마이트너였다. 그들의 발견은 곧 나치 관리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독일 관리들은 이 새로운 발견이 이전의 폭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닌 폭탄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과 이러한 폭탄을 먼저 만들어 사용하는 국가는 다른 나라보다 월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은 1938년에 점령한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우라늄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것은 영국이나 미국의 과학자들에게 경고가 되었다. 그들은 독일에 남아 있는 하이젠베르크나 오토 한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알고, 스릴라드는 동료인 아인슈타인에게 도움을 청해
원자폭탄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던 스릴라드는 아주 빠르게 진행되는 새로운 발견과 세계 정세 변화에 깜짝 놀랐다. 1939년 7월이 되자 독일 과학자들이 핵분열 연구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스릴라드는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정치가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가들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스릴라드는 베를린 대학에서부터 자신과 가까이 지냈던 아인슈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는 정치가들이 아인슈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뉴저지 주에 있는 프린스턴에 살고 있었지만 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페코닉에서 오두막 하나를 세내어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1939년 7월 12일 스릴라드는 이곳으로 아인슈타인을 만나러 갔다. 스릴라드는 운전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친구였던 유진 위그너가 운전했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핵의 연쇄반응에 대한 스릴라드의 특허나 핵분열의 발견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지만, 스릴라드가 설명하자 원자폭탄이 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납득했다.
원자폭탄에 대한 경고,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다
처음 스릴라드는 아인슈타인이 그의 친구인 벨기에 여왕에게 벨기에의 우라늄 광물을 독일에 넘겨주지 못하도록 경고해주기를 바랐다. 아인슈타인은 동의했지만 여왕이 아니라 벨기에 대사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더 좋겠다고 했다. 그들은 함께 편지를 작성했다.
뉴욕에 돌아온 스릴라드는 이 모든 일에 대해 경제학자로 루즈벨트 대통령의 비공식적인 고문이었던 알렉산더 작스에게 이야기했다. 작스는 이 편지를 벨기에 대사가 아니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독일의 핵무기 개발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작스는 자신이 그 편지를 대통령에게 전달하겠다고 했다.
스릴라드는 네 장짜리 새로운 편지를 써서 7월 19일에 아인슈타인에게 우편으로 보낸 후 다시 직접 아인슈타인을 방문해 편지에 서명을 받았다. 이 편지는 작스를 통해 1939년 8월 2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제일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하였다.
대통령께
“저에게 원고로 전해진 E. 페르미와 L. 스릴라드의 최근 연구는 빠른 시일 내에 우라늄 원소가 새롭고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최근 진행되는 상황으로 보아 행정부에서 이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하며, 필요하다면 빠른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저는 대통령께 다음과 같은 경고와 추천을 해드리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4개월 동안 프랑스의 졸리오와 미국에서의 페르미, 스릴라드의 연구에 의해 많은 양의 우라늄이 연쇄반응을 통해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으며, 동시에 라듐과 같은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런 일들은 가까운 장래에 가능해질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이 새로운 현상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폭탄을 만드는 데도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폭탄 하나를 배로 싣고 가서 항구에서 폭발시킨다면 항구 전체와 주변 지역이 파괴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폭탄은 매우 무거워서 비행기로 나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략)...
제가 알기로는 독일이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광산으로부터 우라늄의 판매를 금지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독일 물리학자들이 우라늄에 대한 미국에서의 연구를 반복하고 있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 배속된 것과 연계하여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편지는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중요한 편지가 되었다.
글 곽영직 / 수원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터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수원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이다. 쓴 책으로는 [과학이야기] [자연과학의 역사] [원자보다 작은 세계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