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황후(?-?)
고려는 역사가 흐르는 내내 북방 민족과의 충돌이 멎지 않았던 나라입니다.
거란과 여진을 모두 이겨냈지만, 몽고에게는 아쉽게도 어느 정도 패배했습니다.
그렇다고 일제 강점기처럼 아예 국권을 빼앗긴 건 아니구요,
원의 간섭이 엄청나게 심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
간섭과 동시에, 원에서는 고려에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 중 하나가 공녀였는데요. 쉽게 말해 여자를 바쳐라, 뭐 그런 거죠.
이 공녀들은 출신 성분에 따라서 여러 삶을 살았는데,
외국에서 끌려온, 그 것도 수탈을 당하는 나라에서 끌려온 여자들이
평탄한 삶을 살기란 쉽지 않았겠지요.
기생이 되는 경우도 많았고, 왕가나 고위 관직의 처첩이 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대체적으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오죽하면 공녀로 전해진 집에서는 곡소리가 며칠 동안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울부짖다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고,
기절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고 할 정도니까요.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기른 딸을 타국에, 그 것도 고려를 압박하는 나라에
보내려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겠지요.
기 황후도 그렇게 원에 바쳐진 공녀였습니다.
고려에 있을 때부터 미색과 지성을 갖춘 아가씨였다고 하죠.
그런 그녀를 눈여겨 본 것은 고려로부터 온 환관들이었습니다.
고려인 환관, 이상해 보이시나요 ? 원은 거대 제국이었잖아요.
게다가 정복왕조입니다. 한족을 누르며 거대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정치적, 학문적으로 훌륭한 인재가 많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고려에서도 그런 유능한 환관을 많이 끌어갔는데,
그 환관들은 원에서 자기들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굳히기 위해
고려 여인을 황제의 곁에 두고자 했던 겁니다.
그리고 때마침 눈에 든 것이 소녀 기 황후였습니다.
이렇게 이들에 의해 기 황후는 원 순제의 차(茶) 시중을 드는 궁녀가 되어
원의 궁궐에 들어가게 됩니다.
게다가 운 좋게도(?) 당시 원 순제의 황후 타나시리의 입지는 굳건하지 못했습니다.
그 황후의 아버지가 순제의 아버지를 죽이고 순제를 유배보냈던 사람이었거든요.
일이 그렇게 되다니 참 묘한 운명의 장난이라면 장난이지요.
아무튼 ! 순제가 그런 그녀를 사랑하기에는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때 마침 그 때 딱 궁녀 기씨(순제의 황후와 헷갈리니까 여기서만 이렇게 부릅시다.;)가
나타난 겁니다. 나이스 타이밍 ! 순제의 마음은 순식간에 궁녀 기씨에게 기울었습니다.
궁녀에 이방인인 소녀가 순제의 마음을 빼앗으니 황후도 마음이 편하진 않았겠죠.
황후는 그를 질투해서 궁녀 기씨를 채찍으로 때리고 인두로 몸을 지지기까지 했다고 해요.
타국에 가 있는 것도 서럽고, 하나하나 다 새로운 것들뿐이었을텐데,
그 와중에 그런 무서운 일까지 당했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작은 소녀에게 가혹한 일이었지만, 궁녀 기씨에게도 볕은 찾아옵니다.
황후의 형제들이 순제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거든요.
이 때 황후도 사약을 받아 황후의 가문이 싹 제거되었습니다.
순제는 이 때 기씨를 황후로 책봉하려 하지만,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힙니다.
당시 원에는 황후를 배출할 수 있는 가문이 정해져 있었거든요.
결국 이 때에는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지만, 순제의 총애와
그녀를 입궐시켰던 고려 출신 환관들이 있는 한 그녀는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한 실력가였죠.
게다가 여기서 1339년, 순제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굳히기 한판'이 따로 없죠.
결국 그녀는 외국인의 신분을 불사하고 같은 해, 제2황후에 봉해집니다.
제2황후, 문자 그대로 제1황후 아래 있는 위치였지만,
그 해 제1황후의 아버지가 권력다툼에서 져서 제거되었던 겁니다.
이 때부터 이미 모든 권력은 기 황후의 손 안에 있었고,
1365년 제1황후가 죽으면서 이 때에서야 제1황후의 자리에 오르지만,
실상 이 때 죽은 제1황후는 그 이전부터 이름만 있었던 거나 다름없어요.
비록 태생은 고려지만 원의 여인들보다도 높은 위치에 오른 상태였죠.
재미있는 사실은, 이 때쯤 그녀는 고려의 왕자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이 때 기 황후가 만난 소년이 바로 훗날 공민왕이 되는 강릉대군이예요.
당시 12살이었던 강릉대군은 베이징에 인질로 와서 10년간 원에 머물렀습니다.
원에서는 고려가 반란할 수 없게 고려의 왕이 될 사람을 원에 인질로 데려와서
원에서 교육을 시켜 반원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한 다음 돌려보내 왕으로 만들었거든요.
아무튼 이 때 강릉대군은 영특하다는 칭송을 많이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결국 이후 고려에 돌아와 '큰일'을 해내지요.
아무튼 기 황후는 그 이후로 실권하지 않고 승승장구해 나갑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저 황제의 총애만 기다리는 '궁궐의 꽃'으로만 있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며 정치에도 참여했다고 합니다.
탁월한 정치가였던 동시에 심지어는 군사권까지 장악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네요.
그럼 그 때 황제는 뭐했냐구요 ?
원 순제는 황제로의 기질은 많이 없는, 방탕한 인물이었다고 하네요.
그를 대신해 기 황후는 뛰어난 정치가로 많은 활동을 합니다.
민심도 다스리고, 봉기에도 대처했습니다.
아, 정복 왕조인 원은 한족을 강하게 차별했습니다. 세금도 더 많이 걷었구요.
그러니 중국 왕조의 원류인 한족이 들고 일어나는 일도 빈번했겠죠.
그녀 이름으로 개인 돈을 풀어서 시체를 파묻고 구호사업을 벌이기도 했다고 하네요.
△ 드라마 <신돈>에 묘사된 기 황후의 모습.
선이 날카로운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자, 그럼 여기서 기 황후에 대한 두 가지 엇갈린 평가를 볼까요.
기 황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대체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것은 고려 말기에 기철을 비롯한 그녀의 오빠들이
고려에서 원을 믿고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지요.
글쎄, 전 그 것이 그녀 '본인'에 대한 평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그녀가 부정적으로 많이 평가된 이유는,
그녀를 평가한 <원사>, <고려사> 등의 책이 유학적인 책이었기에
여성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죠.
(그래서 신라의 여왕들에 대한 평가가 많이 냉담했습니다.
국사에서 정치에 참여한 여자들을 볼 때에는 그걸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국사만 놓고 보면 공민왕을 폐위시키려 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펴고 고려를 원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하려 부단히 노력했기에,
그런 공민왕을 폐위시키려 했다는 사실에 우리가 많이 분노하기도 했죠 ^^;
하지만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악녀'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크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의 생활은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 있을 거예요.
(여담이지만 신돈이 아니었으면 기 황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지금보다 더 적었겠죠.
교과서에 언급되긴 합니다만, 중요한 인물로는 아니라서 그냥 스쳐가는 정도니까요.)
그녀는 공녀로 끌려갔던 사람입니다. 작은 소녀로서 외국에 끌려가서
느끼는 무서움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죠.
그래서 기 황후는 공녀 징발을 금지시켰습니다.
80년간 지속되던 제도를 폐지했으니, 대단한 정치적 수완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저는 어째서인지 여기서 그보다도 그녀의 마음에 뼈아프게 박혀 있었을
타지에서의 울분과 두려움, 서러움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안쓰럽습니다:)
아무 잘못 없이 단순히 누군가의 질투를 사서 온몸을 인두로 지지고 채찍질을 당하고,
분명 모욕적인 말도 많이 들었겠죠. 조국에서 당해도 아플 일을
타지에서 겪었으니 얼마나 아팠을까요. 아마 그런 아픔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또 환관의 징발을 축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한 일 중 가장 주목할 일 중 하나는 따로 있는데,
당시 원에서 <고려를 원에 속한 성(城)으로 만들자>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주장을 폐지시킵니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원이 망할 때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하면 아찔해집니다.
(물론 그녀가 실패했다면 역사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렀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한다면 완전히 소설 한 편 완성되니까 거기까진 그만둡시다 -_-;)
결국 기 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이지만,
그녀는 사실 국력이 약해 타국에 끌려가서도 자신의 조국을 잊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열심히 챙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공민왕의 폐위와 관련해서 그녀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는 뭘까요.
재미있는 사실이죠, 여기서 공민왕과 기 황후의 명암이 엇갈리게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공민왕은 왕이 되어 반원 정책을 강하게 실시합니다.
기 황후 입장에서는 자신 덕에 왕이 된 공민왕이 자신의 오빠를 죽이고
자기에게 '대드는' 모습이었을 테니까,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겁니다.
고려인이지만 그녀는 한 나라의 국모, 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했을 겁니다.
게다가 오빠까지 죽임당했으니 아무리 과거에 예뻐했던 공민왕이라지만,
이제 그녀의 입장에서는 공민왕이 적이었겠지요.
그래서 공민왕을 폐위하려 한 겁니다, 1만여 군사도 내려보내지만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서 모두 전멸당하고 복수는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과 함께 원의 마지막도 함께 다가오게 됩니다.
1366년, 명나라 초대 황제가 될 주원장에게 쫓겨 몽고 초원으로
순제와 함께 도피합니다. 야사에 의하면 떠나면서도 고려를 향해
원망의 눈물을 계속해서 흘리며 떠났다고 하네요.
아무튼 2년 후, 순제는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아들 즉 황태자는
북원(원-> 북원. 송이 남송으로 국호를 바꾼 것과 같은 이치예요.)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미미합니다.
아마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최후를 맞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고려 입장에서 보면 기 황후는 결국 공민왕을 끌어내리려 했던 사람이지만,
한 나라의 국모는 철저하게 그 나라를 생각해야 하는 자리잖습니까.
게다가 공녀로 끌려가 친족에게 느끼는 감정이 유달랐을 그녀에게 오빠의 죽음은,
아마 큰 충격이었을 거고, 공민왕이 그만큼 미웠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고려에 있어 부정적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조국을 끝끝내 잊지 않고 조국을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하며 나름대로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한도껏 많은 일들을 했지요.
게다가 인간만 놓고 비춰 봐도 14살 작은 소녀가 타국에서
온갖 고통을 이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엄청난 권력을 얻고,
정치적 수완까지 발휘하여 '원 최초이자 최후의 고려인 황후'로
남은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단하지요.
그런 그녀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것들만 가득하면,
저세상의 기 황후가 정말로 원망의 눈물을 흘리고 싶어지겠지요^^;
노국대장공주(?-1365)
△ 무속 신앙에서 쓰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이라고 합니다.
진짜 초상은 연산군 때 소실되었다고 하네요.
덧글로 지적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노국대장공주는 시호에서 알 수 있듯 원의 공주입니다.
굉장히 유력한 황족 가문 출신이예요, 당시 유력했던 위왕의 딸입니다.
이름은 보탑실리. 고려의 왕비이자 공민왕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럼 고려에 시집온 원의 공주가 분명 많았는데도,
그녀가 유달리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요 ? 단지 남편이 공민왕이기 때문에 ?
뭐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그녀 본인부터가 다른 공주들과는 달랐습니다.
당시 원의 공주들이 고려에 내려오면 어땠을까요. 자신의 나라인 원보다
낮은 나라로 왔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오만한 공주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노국대장공주는 그런 오만함이 아닌 부덕을 갖추고 있었으며,
정략적으로 훌렁 맺어진 게 아니라 공민왕과 진심으로 서로 사랑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