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선생의 만경대 방문
해마다 4월이 오면, 1948년에 들어서 미제와 그 앞잡이 이승만이 우리조국을 허리 잘라 분단해서 이남 땅에 미제의 신식민지 예속정권을 만드는 일을 반대하여 남북 전체 인민들이 투쟁하던 일이 생각나며, 조국의 분단이라는 절박한 위기를 맞이하여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소집하고 평양에서 회동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북위38도선으로 허리가 잘린 지 3년, 내왕이 자유롭지 못하여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국의 남북 지도자들은 만남이 소원해서 이북의 참다운 형편과 안부가 궁금했고 공적이나 사적이나 모두 반가운 만남과 소식을 주고받기도 하며 반가움과 실상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거듭거듭 이야기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하나로 김구선생의 만경대 방문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구선생은 경자유전의 토지개혁으로 이북 농민들의 희희낙락하는 모습과, 8시간노동제와 무상교육, 무상의료로 사회의 주인으로 된 노동자의 활기찬 노동 그리고 나라와 사회의 주인이 된 인민들의 인민민주주의제도를 보시고, 오랜 세월 좌우명처럼 여겨온 ‘반공’이라는 것이 바로 시대착오의 못난 꿈이었고 무지와 편견이 낳은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아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김구선생뿐만 아니라 이남에서 가신 어른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셔서 그런는지는 몰라도 연석회의의 협상이 그처럼 순조로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김구선생은 4월 27일 오후 북조선인민위원회 김일성 위원장의 고향집을 방문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측근자들과 여러 명의 기자들까지 수십 명이 함께 김구선생과 같이 갔다고 합니다.
선생은 평양교외에 있는 혁명자유가족학원을 참관하고 만경대에 새로 건설 중이던 이 학원 청사를 돌아보기 위하여 이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학원신축교사를 돌아보고 만경봉에 올라 일망무제하게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떠날 줄 모르던 선생은 이윽고 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김일성 장군께서 탄생하시고 어린 시절을 보내시며 애국의 큰 뜻을 키우신 만경대고향집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농촌에서도 볼 수 있는 추녀 낮은 그 초가집이 김일성 장군의 생가임을 알게 된 김구선생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장군님의 고향집은 보통사람들의 집과는 달리 으리으리한 대궐일 것이고 무장한 군대가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을 것이며 또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와보니 오랜 세월 모진 풍파에 찌들고 그을린 자그마한 초가집이며 경비하는 군인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선생이 더욱 놀란 것은 이 수수한 초가집에서 김일성 장군님의 할아버님이신 팔순의 김보현선생께서 오랜 농사일에 시달려 오신 모습그대로 일손을 놓지 않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고향집 사립문 밖에서 울바자를 엮고 계시던 할아버님을 뵙게 된 김구선생은 몹시 놀라면서 황급히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를 드렸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김구선생의 손을 굳게 잡으시고,
“선생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니 참 반갑습니다. 원로에 오시어 큰일을 하시느라고 수고가 많겠습니다.”
라고 치하하시었습니다.
이에 가슴이 뭉클해진 김구선생은 흙살이 앉은 거친 할아버님의 손을 꼭 잡고 감동의 빛을 감추지 못한 채,
“장손이 장군님이신데 여생을 편히 쉬시지 않으시고 고생하십니까.”
라고 하셨습니다.
김보현선생께서는 햇볕에 끄슬린 주름 많은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내 손자는 그렇지만 나는 농민이 아니요. 예로부터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 했는데 우리가 농사를 잘 지어야 손자가 보는 나라의 정사가 잘될 것 아니요.”
김보현선생의 이 말씀에 김구선생은 크게 탄복했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숭엄한 감정에 휩싸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선생의 그 고상한 정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할아버님의 거룩한 모습을 우러르며 할아버님의 그 말씀에서 위대한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가슴 벅찬 심장의 고동을 느겼을 것입니다.
다른 이남 대표들과 기자들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귀에도 할아버님의 그 말씀이 가장 숭고한 진리로 들려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장군님께서 이처럼 훌륭한 가문에서 탄생하셨기에 인민의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자세히 아시고 풀어주시며 그처럼 간고했던 해방투쟁의 긴긴 노정에서 그 어느 때나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폐부로 느끼며 어서 빨리 장군님의 생가 안에 들어가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구선생도 낯익은 만경대의 장군님의 생가에 들어가 보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면서 주저하시다가 그만 떠나려고 했습니다.
이때 할아버님께서는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안타까워하는 일행의 심정을 헤아리신 듯,
“우리 집을 앞에 두고 문전 과차할 수 있겠습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라고 하시며 김구선생의 손을 뜨겁게 잡으시고 뜰 안으로 이끄시었습니다.
할아버님의 안내로 김구선생이 사립문 안에 들어서자 뒤따라 동행하던 이남의 대표들과 기자들이 물밀 듯이 들어갔습니다. 수십 명이 좁은 마당 안에 들어서니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김구선생을 윗방에 안내하셨습니다. 김구선생은 존경하는 할아버님의 이를 데 없이 검소하신 생활에 경탄의 빛을 숨기지 못하면서 장판도 아닌 삿자리방 노전에 앉았습니다.
이윽고 할아버님께서는,
“선생은 우리 집에 첫 길이 아니지요?”
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김구선생은 존경하는 할아버님의 비상한 기억력에 놀라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김구선생은 1896년 치하포에서 왜놈장교 츠지다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인천감옥에서 고생하던 중 탈옥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만경대 근방 영천암 주지로 은신해있으면서 만경대에 여러 번 왔으며 할아버님 댁에도 네댓 번 동냥온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김보현선생님께서는 이 일을 잊지 않고 계셨던 것입니다.
김구선생은 인사를 차리지 못하고 떠나려고 한 데 대하여 송구해하면서,
“할아버님, 기억력이 참 좋으십니다. 그때 몇 차례 왔댔습니다.”
라고 하시며 옛일을 잊지 않고 회상하시는 존경하는 할아버님께 옷깃을 여미고 다시금 정중히 사례하셨습니다.
김보현 할아버님께서는 김구선생의 인사를 받으시면서,
“그런데 선생은 왜 하필 몹쓸 미국 놈들이 강점하고 있는 남조선으로 들어왔습니까?”
라고 물으셨습니다.
정통을 찔린 김구선생은 지난날 해방 후의 여러 일에 자책을 느끼며 머뭇거리다가 나라가 해방된 후 다 함께 움직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만 대답을 올리고,
“이제는 연세도 높으신데 좀 쉬셔야지요.”
하고 화제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손을 놓고서야 사는 보람이 있는가요.”
라고 하시는 할아버님의 말씀에 더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야기가 잠간 동강난 사이에 이남의 기자들은 재빨리 존경하는 할아버님께 집 살림살이를 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농사꾼네 집에 무얼 볼 것이 있겠소만 소원이 그렇다면 마음대로 보시오.”
라고 쾌히 허락하셨습니다.
할아버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바쁘게 남조선 대표들과 기자들은 아래 윗방의 검소한 가구들과 부엌세간들, 옛 세월의 가난을 말해주는 헛간의 모지랑 호미와 나무쟁기들을 다 돌아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쌀독과 김칫독까지 열어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해 했습니다. 양식이라고는 중독에 좁쌀이 절반쯤 있었고 작은 항아리에 입쌀이 절반쯤 있었으며 움에는 비운 김치독과 무 동침 반독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햇곡식이 날 때까지의 농량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검소한 살림살이를 놓고 말과 글을 직업으로 하는 남조선 정치인들과 기자들도 무엇이라고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김일성장군께서 조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시어 나랏일에 그처럼 바쁘심에도 가끔 시간을 내시어 김정숙 동지와 자제 분들과 함께 조부모님을 찾으시어 문안을 드리신다는 말과 할아버님께서 즐기시는 담배(장수연)만은 꼭꼭 보내드리시면서도 식량은 절대로 보내지 않으시고 할아버님과 숙부님께서 농사지으신 것으로 1년 계량을 하도록 하신다는 말을 듣고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저 그들은,
“참으로 위대한 분이시다.”,
“평 백성 중에서도 평 백성의 가문이시다.”,
“백성의 집안에서 백성을 위한 정치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라고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할머님 이보익여사께서와 숙모님께서는 손님들에게 무엇인가 대접하려고 입쌀과 좁쌀을 섞어 밥을 지으시고 무 동침을 썰어 찬을 준비하시느라고 서두르시었습니다. 여기에 약간의 술과 안줏감을 따로 구한 것이 손님들에게 대접할 음식의 전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많은 손님을 치르기에는 일손이 모자랐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이남 기자들이 제집에 온 듯이 팔소매들을 걷어 올리고 아궁에 불을 땐다, 반찬을 만든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자리를 만든다 하면서 저마다 존경하는 할머님과 숙모님의 일손을 도와나섰습니다. 이리하여 소박한 ‘연회’가 마련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장군님의 조부님을 모시고 뜻깊은 ‘연회’상에 둘러앉은 이남의 대표들과 기자들의 기쁨은 한량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밥에 고기국은 다른데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하면서 김일성장군님 생가의 입쌀과 좁쌀을 섞어지은 밥과 무 동침이 별맛이라고들 떠들썩하며 맛있게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인민적 풍모에 대하여, 만경대 생가의 검소한 살림살이에 대하여, 미제와 이남 반동들의 허위선전에 대하여 끝없이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윗방에 존경하는 김보현선생님을 모시고 앉은 김구선생은 할아버님께서 권하시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무짠지를 안주로 비우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습니다.
이 소박한 술좌석에서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성스러운 것을 가슴 뜨겁게 느낀 김구는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이남에 있을 때 이런 줄을 몰랐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그토록 만백성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시는 분이시니 어찌 사사에 생각이 있으시겠습니까. 장군님과 할아버님의 청렴하고 고결하신 인품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이러한 기품은 오직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와 할아버님께서만이 지니실 수 있습니다.”
김구선생의 이 말은 조국광복을 위하여 무엇인가 크게 한 것처럼 자처했던 자신께서 위대한 김일성장군의 생가방문은 생각을 고치게 하는 커다란 충격적 작용을 했던 것입니다.
땅거미가 든 지 이슥하여 만경대를 떠나면서 존경하는 할아버님의 두 손을 뜨겁게 잡고 울먹한 목소리로 부디 만년장수하시라고 작별인사를 하는 김구의 표정은 자못 심중했습니다.
그는 숙소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측근자들에게,
“김일성장군님께서 평범한 백성의 집안에서 태어나셨으니 백성을 생각하시는 것이 어찌 우연하다고 하겠소. 참으로 인정(어진 정치)을 베푸시는 분이시오.”
라고 감탄을 금치 못해 했습니다.
사상적 경향이 다른 것으로 하여 북조선에 체류하는 기간 별로 말이 없이 마지못해 자기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김구선생의 아들 김신도 김일성장군님의 할아버님의 생활이 그렇게 소박한 줄은 몰랐다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장군님의 생가에서 받은 깊은 인상으로 흥분된 김구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다음날 아침 김구는 측근자들을 모두 모이게 하고 심중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나는 어제 김일성장군님의 만경대 생가를 방문하여 장군님의 조부모님을 만나 뵙고 참으로 느낀바가 크오. 나는 일생을 ‘반공’으로 살아왔는데 김일성장군님과 같은 분을 일찍이 뵈옵지 못한 것이 크게 한이 되오. 내 한생의 오류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요. 김일성장군님과 같은 분이 진정한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공산주의가 나쁘다고 하였겠소. 나는 지금까지 많은 정객들과 대한 바 있소. 그렇지만 김일성장군님과 같은 분은 생각도 못했소. 소박하고 청렴한 보통농가와 별다른 것이 없는 그 초가에서 고령의 조부모님께서 아직도 험한 일을 하시며 농사를 짓고 계시는 그 성스러운 모습을 보고 감동된 바가 많았소. 더 말이 나오지 않소.
효성이 지극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고령에 계시는 조부모님을 생각하시여 댁에 모셔다가 고이 쉬도록 하셨는데 조부모님께서는 일생을 농사로 늙은 몸이 고이 놀면서 일손을 놓으니 도리어 몸에 병이 온다고 하시며 사흘 만에 끝내 만경대로 돌아가셨다고 하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였소. 평범한 백성의 집안이니 장군님께서 백성을 생각하시는 것이 어찌 우연하다고 하겠소.
조선은 참으로 훌륭한 지도자를 만났소. 김일성장군님께서 지도하시는 조선은 행복하게 될 수 있겠소. 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가시는 길을 함께 하겠소. 이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요.”
백두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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