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 십년 전, 민족주의에 관한 토론에서 제시한 글인데 철학적 내용이라서 그 의미는 지금도 드러낼 만 하다고 생각되어 블로그에 게재해 둡니다.]
민족주의는 파시즘인가
요즘 지식인 사회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서구사상을 학문의 기초로 하고 있는 스스로 진보적 지식인으로 자처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또는 이른바 세계화를 지상과제로 여기는 자칭 중도적 지식인들 중에서, ‘민족’이나 ‘민족주의’라고 하면 우선 정신적으로 과민반응을 나타내곤 합니다.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민족주의란 자본주의사회가 형성되면서 만들어진 사상으로 노동계급의 국제주의와 상치되는 일종의 반동사상’이라고 민족주의를 폄하하고, 세계화를 주장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온 세계가 개방되고 있는 시대에 무슨 민족주의를 찾느냐’면서 핀잔만 하려고 듭니다.
이들의 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민족자주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민족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민족의 개념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 먼저 민족주의가 노동계급의 국제주의와 상치된다고 하는 자들이 생각하는 그 ‘민족주의’에 대해서 우선 알아봅시다.
그것은 민족자주를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민족주의를 확실히 알도록 해줄 수 있기 때문이고, 더구나 파시즘이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는 것을 밝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민족에 대한 정복전쟁은 전근대시대에도 있었지만, 근대에 이르러서는 강대 열강국의 민족주의가 떠올라 세계적 판도에서 약소민족에 대한 식민지적 강점과 약탈을 합리화시키고 이어 국민들을 침략과 약탈 전쟁으로 내몰았습니다. 특히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타민족, 타국가들을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강대국들의 침략과 약탈 정책을 논리적으로 합리화시켜 유럽 자본주의나라들이 인종적 민족우월주의, 광신적 배타주의, 유럽 중심의 팽창주의를 퍼뜨리고,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침략과 전쟁의 길로 나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먼저 영국인들의 민족우월주의였는데, 이는 고대 히브리인의 선민(選民)사상을 계승하여 영국인 자신들이 현세의 이스라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앵글로색슨족들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선택된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조가 해적이었다는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면서 타민족을 약탈하는 것을 우월민족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간주했습니다.
이 사상은, 제국주의 이행시기로 이어져 노골적인 식민지강탈과 끊임없는 침략전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대양주 등 전 세계에 이르는 곳마다 방대한 식민지를 강탈하고 그것을 합리화시켰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내셔널리즘, 우리말로 바꾸면 민족주의, 국가주의인 것입니다.
프랑스도 배타적 애국주의, 광신적 배외주의, 국수주의적 민족이기주의를 내걸고 식민지강탈을 위한 해외침략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프랑스 민족주의는 알제리, 튀니지, 적도아프리카 나라들인 세네갈, 서부 수단, 기니, 베냉, 콩고 등 광대한 지역을 강점했고, 마다가스카르를 유혈전쟁으로 강점했으며,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독일도 자본주의발전의 후진성을 극복하자마자 대국주의적 팽창주의의 길에 들어서서 범게르만주의를 표방했습니다. 범게르만주의는 게르만민족의 범민족적 통일을 제창하면서 독일에 의한 유럽제패, 나아가 세계제패를 지향하는 침략적인 민족주의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독일을 강대한 식민지제국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영국, 프랑스, 벨기에, 푸르투갈과 그들의 식민지, 그리고 발트해 연안지방, 폴란드, 우크라이나도 모두 독일민족의 영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도 ‘아메리카인을 위한 아메리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범아메리카주의 즉 먼로주의를 내놓았습니다. ‘미국을 위한 아메리카’를 실현하기 위해 남북 아메리카지역 전체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합리화했습니다. 그것은 범태평양주의로까지 확대되어 태평양제국으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범민족주의적 팽창열은 아시아까지 확산되었습니다. 극동에서 대두한 일본군국주의는 범아시아주의로 나타나 유럽 강대국의 민족주의와 똑같은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이른바 명치유신 이후 자본가, 지주, 군벌세력에 의해 주도된 일본의 민족주의는 천황제도를 국체의 근간으로 하는 ‘야마토민족의 우월성’을 합리화하고, 한편으로는 부국강병정책과 철혈정책으로 이루어진 독일민족주의의 침략적 행동원리를 본떠 군국주의적 해외침략의 길에 나섰습니다. 그것은 「대동아공영권」 또는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라는 범아시아주의적 침략주의로 전환되어 아프리카 동해안으로부터 서태평양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일본의 지배아래에 넣으려는 아시아제패주의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이와 같이 타민족에 대한 지배와 간섭을 자행하는 제국주의자들, 지배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그들의 그릇된 민족배타주의적 행위를 합리화하는 민족주의는 확실히 자본주의 사상의 산물입니다.
그들의 이론적 기초는 이른바 헤겔의 ‘철학적 민족주의’에 두고 있습니다. 헤겔의 이론은 과거에는 고대그리스인이 ‘철학적 민족’이었다면 자기 시대에 와서는 독일인이 ‘철학적 민족’으로 되었다고 주장하며, 유럽중심주의와 게르만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해 동방나라들을 서방나라들에, 다른 나라와 민족들을 독일에 예속시키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틀러식의 민족배타주의는 이미 헤겔에서 그 연원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배타주의적 민족관이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를 그릇되게 하고 민족주의를 파시즘으로 보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오도된 민족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논리로 최근 유럽과 미국의 지도자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는 ‘세계화사상’이라는 반민족적 사상도 있습니다. 현대의 제국주의는 그들의 제국주의적 수탈을 위장하기 위하여 ‘세계화사상’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세계화사상’은 미제국주의를 우두머리로 하는 초국적 독점자본이 IMF체제와 WTO체제로 세계의 경제패권을 움켜쥐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세계민중수탈구조를 합리화해주는 사상입니다.
개발도상국을 WTO체제에 묶어놓고 개발도상국의 민중을 수탈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구성하는 것이 소위 그들이 말하는 ‘세계화’라는 것이고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것이 ‘개방’이라는 것입니다.
세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족이 있습니다. 그 각각의 민족들은 독자적인 주체로서 존재하면서 자기의 생활을 영위해나가려고 합니다.
민족이란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공고한 사회적 집단이며 사람들의 운명공동체입니다. 인류사회의 첫 단계인 원시사회에서 씨족 또는 종족을 단위로 해서 살아오던 사람들이 자연에 대한 자주성을 구현해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민족을 형성하고 민족을 단위로 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생긴 관념이 아니고 그 전부터 역사적으로 형성된 실재인 것입니다.
사회적 집단에는 민족과 함께 계급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은 역사와 더불어 영원한 것이지만 계급은 역사의 일정단계에서 발생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가변적인 사회적 집단인 것입니다. 노동계급도 자본주의사회라는 특수한 시대에서 존재하는 계급이고 이것은 자본주의사회가 완전히 청산되어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가 없어진다면 착취당하는 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민족은 가장 공고한 사회적 집단이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외적인 침해작용이 없는 한 영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자기 의지로 민족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는 없고 임의로 민족을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 품에서 태어나고 그 품에서 생활하고 그 품에서 생을 마치게 되는 인간 삶의 보금자리가 다름 아닌 민족입니다.
핏줄과 언어와 같은 징표들은 민족의 존재를 규정짓는 본질적인 징표들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민족에 대한 이해는 그릇되게 또는 부정확하게 논의된 것이 많습니다. 고노비와 균테르, 로젠베르그는 민족을 인종적 혈연의 공동체로 보았고, 라젤은 민족을 단순히 자연공동체라고 했습니다. 또 굼플로비츠, 헤이즈, 카우츠키는 문화, 언어의 공동체로, 만조니와 같은 학자는 민족을 토지, 조상, 풍속, 언어, 종교의 공통성과 사회적 의식을 같이하는 자연적 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레닌은 ‘민족은 하나의 정신’이라고 하면서 정신적 공통성을 강조했고, 랜네르나 바우웰은 ‘문화적 공통성’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견해들은 민족을 형성케 하는 가장 공고하고 본질적인 징표들을 지적하지 못한 한계성을 가진 것들입니다.
민족에 대한 이해에서 기본적으로 바른 견해를 제시했다고 하는 스탈린의 정의는, “언어・지역・경제생활의 공통성이라는 기초 위에서, 그리고 문화의 공통성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성격의 공통성 위에서 발생한 역사적으로 형성된 공고한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했으나 이것도 완전한 해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민족을 이루는 가장 본질적인 징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핏줄과 언어의 공통성입니다. 민족은 핏줄과 언어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공고한 사회적 집단이고 운명공동체입니다. 같은 핏줄과 언어를 가지고 공고한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운명을 같이하면서부터 민족은 독자적인 주체로서 존재하고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이 사람들의 공고한 사회적 집단으로서, 운명공동체로서 독자적인 주체를 형성하고 존재하고 발전해나갈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민족이 고유한 성질인 자주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의미에서의 민족주의는 민족의 본성에 바탕한 민족자주에 관한 문제 또는 자주적 민족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민족자주론 또는 자주적 민족주의가 민족의 자주적인 본성, 민족의 자주권을 옹호하는 사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주적 민족주의는 민족의 생명을 자주성으로 보고 온 민족이 힘을 합쳐 민족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려는 관점과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민족자주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민족주의는, 수많이 늘어놓은 민족이기주의와 민족우월주의 등 자국 중심의 민족주의인 파시즘적 침략주의가 아니라, 이와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민족중시, 민족옹호의 사상이고 이념인 것입니다. 또한 남의 나라에 빌붙고 섬기며 남의 나라가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사대주의와 교조주의, 민족허무주의를 반대하고 민족의 주체성, 자립성을 옹호하는 이론입니다.
민족자주에 바탕을 두는 민족주의야말로 민족을 짓밟고 민족적인 것을 상실케 하는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민족을 자기 본연의 지위에 올려 세울 수 있게 하는 정당하고 현실적인 사상이고 뜻인 것입니다.
백두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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