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에 「주한미군」철수운동의 시초에서 바로 마주 선 맥아더 동상철거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이에 「한국대학신문기자연맹」의 홈페이지 인 「유뉴스(Unews)」의 맥아더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으로 쓴 글입니다. 그 후 5년이 지난 지금도 맥아더의 동상은 철거되지 않았고 여전히 제도교육에서는 맥아더를 나라의 은인으로 교육하고 있고 이를 훌륭한 장군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숭미 사대주의가 판치고 있는 지금 내가 쓴 이 글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보아, 블로그에 올려두어서 맥아더가 우리민족에게 어떤 자인지를 알리고자 합니다.]
미군주둔 60년, 우리는 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말머리에
주한 미군이 우리나라의 38도선이남 땅에 들어온 지 올해로 꼭 60년이 된다. 국제적으로 인정된 미군의 주둔 명분은 일제 침략군에게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미군은 우리나라의 이남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들은 그러한 명분을 집어던지고 진주군으로서가 아니라 점령군으로서 들어왔다. 바로 맥아더는 그 점령군을 지휘하는 미국 태평양군의 총사령관이고, 주둔군의 명분을 집어던지고 점령군으로 모습을 바꾸어 조선인민에게 점령군 포고령을 반포한 그 장본인이다.
지금 우리는 일제식민지해방 60년이 지나도록 일제 식민지시대에서 자기 민족을 배신하고 동포들에게 고난을 들씌운 반역자들을 아직까지도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돌아보면서, 우리사회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는 일을 전 민족적으로 벌이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해방된 조국에서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의 치 떨리는 죄상을 되돌아보고 그들과 그들 후손들의 현주소를 알아보곤 사람들은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기막힌 일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 대부분이 일제 주구에서 미제의 충실한 주구로 변절하여 계속 일제 식민지시대의 친일주구로서 가졌던 기득권을 고스라니 이어받고 이승만 예속정권의 창건에서부터 역대 예속정권의 핵심적 세력으로 역할을 다했다는 사실이다.
미제는 식민지민중을 직접 통치하는 전전의 식민지통치방식을 바꾸어 식민지 점령지역에서 친미세력을 중심으로 해서 구성한 주민들로 예속정권을 만들어 정치ㆍ군사ㆍ외교ㆍ경제ㆍ문화ㆍ교육 등 각 분야에서 각종 조약과 원조 그리고 고문 등으로 얽어놓고 그들의 식민지통치정책을 구현해나가는 새로운 식민지통치방식을 취했다. 우리는 이것을 신식민지정책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미제는 우리 땅에서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마치고 38선 이북에 주둔한 소련군과 공동위원회를 열어 남과 북을 통일한 단일 정권인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워서 철군한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짓밟고, 이남 땅에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이러한 신식민지예속정권을 만들었으며, 그 핵심세력이 바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숭미 사대주의자들인데 그것은 바로 일제 식민지시대의 친일파ㆍ민족반역자와 친일 지주들이었다. 이들을 이어온 자들이 바로 지금의 반통일세력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예속정권의 정통성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과거청산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온 사회가 이에 대해 주목하고 그 귀추를 주시하고 있다. 또 「우리민족끼리」라는 민족적 이념으로 6.15공동선언을 이행하여 낮은 단계의 연방과 연합을 합친 통일을 위하여 매진하고 있는 6.15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분단 60년을 맞이하여 민족의 자주평화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일이 바로 우리들 앞에 나서고 있다. 그래서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온 민족이 올해를 「주한미군」철수의 원년으로 해서 힘차게 투쟁을 벌이고 있다.
주한미군철수운동에서 우리들 앞에 가장 먼저 나서는 일로 「주한미군」이 점령군의 모습으로 들어오게 한 최고사령관이고, 6.25전쟁을 일으킨 자들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자들 중의 하나이며, 조국의 이북 땅으로 쳐들어가 몰죽음을 당해 쫓겨나오자 이북 땅에 핵폭탄을 사용해 핵 완충지대를 만들려고 했던 핵전쟁광으로 아직도 인천 월미도 공원에 있는 그 맥아더의 동상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이리하여 이에 대한 철거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 수구반동 반통일세력들이 이 운동에 맞서 나오고 있다.
그들은 미제와 미제에 빌붙은 친일교육자가 변절해서 팔자를 고친 친미교육자와 숭미 사대 미디어에 의해 60년을 교화ㆍ세뇌된 친미ㆍ숭미사상이 골수에까지 젖어 아직도 깨나지 못하고 있는 동포들이다. 미제의 이른바 ‘네오콘’ 등 온갖 국제적 모략이 그들 뒤를 받치고 있고 지원을 하고 있다. 어찌 쉽게 민족자주적 입장으로 돌아오겠는가. 우리들은 이들에게도 동포애를 가지고 교양선전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고 이들의 생각을 바로 세우는 것도 민족자주성을 구현하는 투쟁이다.
6.15시대를 맞아 주한미군철수운동이 한창일 때 강정구 교수가 「주한미군」의 부당성과 이를 해설하기 위해 6.25전쟁의 본질을 해설하는 논문을 썼다 해서 당국은 이를 국가보안법으로 걸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은 시퍼렇게 눈을 부릅뜨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숨을 들이쉬고 있다.
강정구 교수의 논문은 학술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를 걸고 국가보안법으로 조사를 한다고 하니 당국은 시대의 흐름을 아직도 모르는가. 지금은 6.15시대, 남과 북이 서로 내왕하고 통일을 위해 서로 의논하고 이해를 함께 하려고 모대기고 있는 시대이다. 강정구 교수의 논문은 우리민족끼리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주한미군」문제를 다루고 이를 위하여 6.25전쟁의 본질에 대한 자기의 학문적 견해를 내었고 이어서 맥아더 동상철거문제를 언급했을 뿐이다.
당국자들은 이제 시대의 흐름을 인식하고 시대의 지진아에서 벗어나 국가보안법을 당장 폐지해야 할 것이다. 민족은 자주통일을 향해 나가는데 이를 가로 막고 국가보안법을 휘두르는 것은 바로 반민족적인 행위로 될 수밖에 없다. 당국은 하루속히 이 반민족적인 탄압을 걷어치우고 자주통일의 길에 함께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글은 「주한미군」철수운동의 시초에서 바로 마주 선 맥아더 동상철거문제에 즈음해서 맥아더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가 과연 우리민족의 은인인가, 침략자의 원흉인가 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 맥아더의 아버지와 미서전쟁(米西戰爭)
맥아더는 미국 아칸소 주(州)의 리틀록에서 출생했다. 미국-스페인전쟁(미서전쟁-美西戰爭)에서 무공을 세운 고급장교인 아서 맥아더의 아들로서 1903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 후 육군에 근무하여 1930년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군에서는 극동통으로 알려져 있고, 1936년 필리핀군의 고문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일단 퇴역했다.
대일관계가 긴박하게 되자 1941년 7월에 현역에 복귀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하다가 태평양전쟁을 맞았다.
1942년 초 일본군의 공격으로 마닐라를 빼앗기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 연합군 남서태평양방면사령관으로서 대일작전을 지휘했다.
그 해 가을부터 뉴기니작전을 비롯하여 반격작전을 전개하였는데, 1945년 7월에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했고 이어 8월에 일본을 항복시켜 일본점령군최고사령관 및 대평양지역주둔 미군최고사령관으로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군(UN군)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고 전세를 역전시켜 인민군을 후퇴 시켰다고 하는데 1950년 10월에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공세를 맞아 패퇴했다.
맥아더는 이북을 점령하여 군정을 펴고 이북마저 식민지로 하려고 30만의 대병력을 투입하였으나 이들 병력을 몽땅 잃어버리고 마침내 그러한 꿈을 깨도록 만들었다.
이에 분한 나머지 그는 만주폭격과 조ㆍ중 국경 봉쇄를 주장했으며 대만의 국부군을 전쟁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창했다.
맥아더는 그가 패퇴한 분을 보복하려는 셈인지 조ㆍ중 국경 이남에 핵폭탄을 투하하여 핵 완충지대를 만들어 우리나라를 영원히 핵 참화 속에 두려고 했던 천인공노할 전쟁광의 원흉이다.
이와 같이 6.25전쟁을 핵전쟁으로 비화시키려는 기도는 국제여론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이를 둘러싸고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끝내 1951년 4월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이상이 아주 짧게 추린 맥아더의 약력이다.
여기에서 맥아더 부자의 집안은 바로 미국 독점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전변되어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미제의 침략전쟁과 그 세계패권주의와 더불어 그 생을 다한 자들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먼저 그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가 공훈을 세웠다고 하는 미서전쟁에 대해서 알아보자.
미국은 1850년대에 노예문제로부터 일어난 위기와 남북전쟁, 그 전후의 재건 그리고 대서부로의 개척과 사회개혁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1890년대에 들어서자 산업자본이 고도로 성장하여 독점자본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선발 유럽 제국주의에 비해 늦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해외 자본진출과 이를 위한 식민지쟁탈의 경쟁에 들어서는 제국주의로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1850년대부터 카리브 바다에 있는 쿠바에 설탕산업을 진출시키고 있던 미국 산업자본주의는 제국주의적 독점자본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당시 쿠바의 지배자인 스페인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벌어져 그것이 날이 갈수록 첨예화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쿠바에 4,000만 내지 5,000만 달러에 이르는 자본을 설탕과 담배공장, 제당공장, 망간과 철광의 광업 등에 투자하고 있었고 미국과 쿠바의 무역은 연간 1억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미국은 쿠바의 내전이 이러한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크게 손실을 가져오게 되자 쿠바에 자본을 투자했거나 쿠바와의 무역에 종사했던 미국인들은 전쟁의 종식을 강력히 요구했고, 쿠바내전에서의 스페인 지배자들의 야만적인 행위는 미국인들의 인도주의적, 종교적 감정을 크게 자극하기도 했다. 특히 강제수용소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가해진 고통과 죽음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컸다.
이상과 같이 미국 독점자본의 이해관계와 야만적이고 잔학한 스페인 지배자들에 대한 도덕적 감정 등이 작용하여 미국의 쿠바에 대한 제국주의적 진출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쿠바내전에 대한 미국의 군사간섭의 기회가 점차 무르익어갔다.
처음은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1895년 6월 중립선언과 1897년 클리블랜드를 승계한 맥킨리 대통령의 불개입선언으로 개입을 주저해왔지만 신문 등 여론으로 스페인 지배자들의 야만성과 잔학성을 과장해서 선전하고 전쟁개입을 선동했다.
1898년 1월, 수도 아바나에서 쿠바의 혁명세력은 완전한 독립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수락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미국 정부는 쿠바 내의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불안상태가 계속된다면 강력한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결의를 보이기 위하여 전함 메인호(Maine) 한 척을 아바나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여 사태가 위기로 치달았다.
게다가 미국주재 스페인 공사가 쿠바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가 쿠바의 한 혁명가의 손에 들어갔다. 그 편지에는 맥킨리 미국대통령을 모욕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이 내용이 1898년 2월 9일자 신문에 보도되어 미ㆍ서 양국 간에 나쁜 감정과 불신을 크게 조장시켜 놓았다.
이런 스페인공사의 편지사건이 있은 지 불과 6일 만에 2월 15일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메인호가 폭발, 침몰하면서 266명의 미 해군수병이 살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메인호의 비극은 미국의 호전가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들의 신문들은 미국이 명예를 지키려면 쿠바사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즈벨트 같은 제국주의자들은 메인호의 침몰은 명백히 스페인의 음모라고 하면서 스페인을 맹렬히 규탄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의회는 만장일치로 전쟁준비를 위하여 5,000만 달러를 배정했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메인호 폭침은 전쟁 도발자들에 의한 모략이라고 하는 말도 있다. 마치 훗날 베트남 통킹 만의 미 구축함의 피습으로 하노이폭격을 시작해서 베트남전쟁에 미군이 개입하는 계기를 만든 것처럼 미국이나 일본이 잘 쓰는 모략과 똑같은 것이라고 할까.
1895년에 일어난 쿠바의 반란에 즈음해서는 미국이 처음부터 그 반란의 와중(渦中)에 휩쓸려들었다. 이미 많은 의용병이 쿠바인민을 돕기 위해 쿠바로 떠났고, 또한 뉴욕에 본거지를 둔 쿠바인의 혁명단체가 발매한 공채도 잘 팔렸다. 해외진출에 반대한 미국인들조차 쿠바의 해방 자체에는 찬성했고, 쿠바에 재산을 둔 미국인은 물론 그 보호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미국 사이에는 직접 전쟁을 유발할만한 중요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호전가들은 여론을 일으켜 스페인의 쿠바인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그것이 학대라든지, 압정이라는 식으로 실제보다 확대해서 신문에 보도되어 미국인으로 하여금 스페인에 악감정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의회가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불간섭 방침을 견지하였으나, 매킨리는 1896년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에 공약으로 쿠바의 독립을 내세웠다.
마침내 1896년 4월 11일 대통령은 대 스페인 개전요청교서를 의회에 보내고, 20일 의회가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양국은 정식으로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미국군은 마닐라 만과 산티아고 등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쟁은 불과 수개월 만에 끝났다.
전쟁결과 12월 10일에는 파리조약이 체결되어 쿠바는 독립하기로 하고,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은 미국의 영토로 되었다.
이 전쟁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가 고급장교로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던 것이다. 아서 맥아더는 이 공훈으로 장군별 준장을 달았고 필리핀으로 전근했다. 필리핀 점령군사령부에 근무하다가 1900년에는 소장으로 승진되어 필리핀 제8군사령관 및 군정장관에 임명되었다. 1906년 육군 중장이 되었고, 1909년에 퇴역했다.
이 장군의 아들인 더글러스 맥아더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군인다운 풍모를 갖추며 자랐고, 미군의 엘리트 장교 양성기관인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에서 미 육군 장교로서의 세계패권사상을 닦으며 졸업했다.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는 입학지원 자격과 지명권을 미국의 상원ㆍ하원 의원들이 대부분 행사하는 미국군인의 엘리트양성을 위한 학교로서 미국의 세계패권주의의 첨병을 양성하는 선민교육기관이다.
이 학교의 교육으로 선민의식이 충만한 청년이 만들어졌으며, 그들은 출세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오직 별을 얻기 위하여 굴종하고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는 우월감으로 대하는 지배욕으로 가득 찬 특수한 풍모를 가진 인간으로 양성된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아버지시대부터 인연이 맺어진 필리핀에서 대장으로 승진했고, 1936년 필리핀군의 고문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퇴역했다. 퇴역 후 식민지지배자의 자리에서 향락을 누리다가 대일관계가 긴박해지자 1941년 7월 현역에 복귀하여 미국 극동군사령관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인 태평양전쟁을 맞았다.
이처럼 맥아더의 부자 2대는 미서전쟁과 뗄 수 없는 인연을 기진 인물로서 식민지통치, 그것도 미국식 식민지통치와 식민지 침략전쟁 속에서 식민지 지배방식과 식민지민중의 해방투쟁을 학살 탄압하는 골수의 식민지 군사지배자였다. 그들 부자를 세계패권주의자가 볼 때는 가장 우수한 지배자의 자질과 능력을 가진 자로 보였고, 식민지민중이 볼 때는 가장 잔악한 전쟁광신자요 학살의 원흉으로 보이는 인생을 산 자들이다.
미국은 쿠바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켰으나 독립시키지 않고, 존 R 브룩(John R Brooke)을 쿠바총독으로 임명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3년 동안 총독군정을 실시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공중보건시설을 세우면서 쿠바가 미국에 종속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후에 미국은 1901년에 공화제헌법을 만들어주었지만, 이와 동시에 미국의 내정간섭과 군사기지의 설치를 인정하는 「플래트수정조항」을 덧붙이고 1903년부터 99년간 관타나모 만 등을 조차 받아 미 해군기지를 설치했다.
미국의 총독군정정치가 종결되고 1902년 5월에 팔마를 수반으로 하는 공화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미국이 내정간섭권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비옥한 땅, 사탕산업, 교통수단, 관광시설 들 쿠바의 중추적 경제는 모두 미 독점자본에게 장악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수뢰, 부패, 실정, 무책임의 상징으로 인정되고 있는 고메스에 이어 가르시아, 사야스, 마차도, 바티스타로 그 부패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친미예속 부패정권의 표본으로 되고 있으며, 미제는 이 쿠바의 예속정권에 의한 식민지통치의 경험을 살려 제2차세계대전 전후의 신식민지통치방식을 정립했다고 볼 수 있다.
2.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고도 영웅이 된 더글러스 맥아더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을 맞은 아들 더글러스 맥아더는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2월 8일 진주만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의 초기에서 선제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필리핀 주둔 미 공군사령관이 타이완의 일본군 비행장의 공격하려고 했는데, 맥아더는 이 요청을 받고 판단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108대나 되는 일본 해군의 육상공격기의 공격을 받게 되어, 처음부터 맥아더는 전쟁의 선제주도권을 빼앗기는 용장(庸將)으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폭격을 맞은 미군의 클라크비행장은 못 쓰게 되었고 미군의 비행기는 일본군의 일격으로 30분 만에 98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를 잃어버렸다. 그 이튿날 9일은 악천후로 일본군의 비행기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10일에는 캬비테 군항에 일본군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공격을 가해왔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이미 남쪽으로 도망가서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초계정과 어뢰정, 유조선 등이 격침되었고, 정박 중이던 잠수함 1척이 격침되었다.
10일 항공기지 확보를 위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용장이 되어버린 맥아더는 이 상륙이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수비군의 파견을 요청했지만 그 요청을 거절했고, 전력이 급격히 줄어든 항공기들만으로 상륙저지에 나서게 했다.
그러나 사령관의 우둔한 지휘로 만신창이가 된 미군이지만 상륙저지에 나선 항공기는 해안으로 돌진해오는 일본군 주정을 공격하고, 일본군 전투기가 마구 설쳐대는 하늘에 올라가 일본군의 수송함대를 공격하여 소해정 1척을 격침하고 순양함을 대파하는 등 미군은 강렬하게 저항했다.
일본군은 원군을 못 받은 1개중대에 불과한 수비대를 공격해서 내쫓은 다음 오후 2시경에 아바리 비행장을 비롯해 그 남쪽의 무르뉴간 비행장과 쓰게가라오 비행장 점령하고 이들 비행장에 일본군 육군 5비행집단이 일제히 날아와 11일부터는 이곳을 거점으로 해서 미 항공병력을 격멸하는 작전에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이미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군의 주력부대 상륙은 12월 22일 야간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두 곳에서 상륙하여 마닐라를 협공하는 태세를 취했다. 일본군은 마닐라 북방 200km 지점인 링가옌 만에 상륙을 했고, 24일에 마닐라 동남쪽 110km 지점의 라몬 만에 상륙을 했다.
초전에 주도권을 상실한 맥아더는 연속 패전을 겪어야 했고 이 국면을 타개할 전술을 내오지 않고 도망할 궁리만 하고선 23일에는 벌서 각 부대에게 이미 만들어놓은 퇴각계획대로 바탄반도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바탄반도는 남지나해와 마닐라 만 사이에 길게 나온 길이 48km의 반도로서, 협곡, 바위, 정글로 이루어진 산악지대였다. 이곳에 수비군을 집결시키면 마닐라는 일본군에게 내어주더라도 정작 중요한 마닐라 만은 연합군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이다.
마닐라 만의 입구에 있는 코레히도르 섬에는 강력한 요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섬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은 꼭 바탄반도를 거쳐야 한다. 이를 맥아더는 ‘적은 병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병마개는 우리에게 있거든’ 하고 적절하게 비유했다.
과연 이 전술이 들어맞아 일본군은 바탄반도 점령을 위해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 많은 수의 병력이 무사히 바탄반도에 들어와야 한다고 보고 맥아더는 바탄반도로 후퇴하라고 재촉했다.
27일에는 마닐라가 무방비도시로 선언되었고, 1월 1일에는 남부 루손군의 마지막 부대가 안전지대로 빠져나와 바탄반도로 들어왔다.
1월 2일에 일본군은 무방비 상태의 마닐라를 점령했고, 1월 6일까지는 미군과 필리핀군이 모두 바탄 반도로 후퇴했다. 남아있던 B-17은 모두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하였고, 아시아 함대는 자바로 들어갔다.
바탄반도 안에는 미군과 필리핀 군대를 합해서 총 85,000의 병력을 집결시켰는데 병력 수로 보아서는 일본군보다 약 10배나 우세했다. 너무 많은 병력이 좁은 곳에 집결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일본군은 적은 병력으로 포위하기 쉽고, 모두 적의 공격을 피해 후퇴한 상황이라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열성적으로 저항한 자들은 현지인 필리핀군뿐이었다.
1월 10일부터 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에 대항해서 필리핀군 부대는 자기 땅을 지키려는 일념을 가지고 싸웠으나 미군은 전투를 서로 미루기만 하고 꽁무니를 뺄 뿐이었다. 26일까지 필리핀군은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을 이겨냈다. 그 후 보급이 떨어진 상태이지만 그들은 영웅적으로 방어진을 펴고 2개월이 넘도록 버티었다. 그러나 맥아더와 미군은 10배도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일본군과 싸워 상황을 타개할 생각은 않고 코레히도르 섬을 포기하고 이미 바탄반도를 오래전에 탈출하고 말았다.
일본군이 병력을 자바공격을 위하여 빼고 6,000의 부대로 공격하는 데에도 맥아더는 85,000이나 되는 병력을 좁은 곳으로 후퇴시켜 놓았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병력이 적은 병력에게 역으로 포위되는 꼴이 되었다. 맥아더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말했던 병의 마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에게 주고 만 격이 되고 말았다. 그는 많은 병력을 남겨두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지휘관이 없는 병력은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도망을 못 간 미군은 허둥대다가 일본군의 포로로 되었고, 그 14,000의 포로는 「죽음의 행군」이라고 일컫는 일본군의 학대행군으로 반수 이상은 행군 중에 쓰러져 죽었다. 그 많은 부하를 이 꼴로 만든 장군을 과연 누가 명장이라 할 수 있겠는가.
머리에 엘리트의식으로 가득한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맥아더는 오직 출세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래서 세 불리하면 출세를 위하여 내빼고 식민지민중을 탄압하고 지배자로서 위엄만 부리는, 행세만 하는 장군일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줄행랑을 친 맥아더는 1942년 3월 남서태평양전역 연합군사령관직을 맡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복귀했다.
그는 뉴기니에서 공격개시를 명령하여 1943년 1월 파푸아진군을 시켰고 미 태평양군은 영웅적 전투로 일본군을 몰아냈다. 미군은 1943~44년의 일련의 전투로 중남부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장악하고 필리핀으로 진군했다.
맥아더에 의해서 필리핀에 투입된 미군은 이 우매한 장군에 의해 발이 묶여 1945년의 7개월을 루손 섬의 진흙바닥에서 뒹굴도록 만들었다. 그가 인식하는 태평양전쟁은 그가 쫓겨난 필리핀이 미 식민지로 복귀하는 일 뿐이었고 거기에서 지배자로 되는 것으로만 보았을까.
그는 1944년 12월 육군 원수로 승진되고, 4개월 후 태평양지역의 미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서야 잠을 깼는지 비로소 사이판으로, 이오시마로, 오키나와로 올라오게 되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조선의 북부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북부 조선인민의 전민항쟁으로 조선해방의 최후결전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북위 38도선과는 수천 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루손 섬에서 그리고 오키나와 섬에서 진구렁에서 죽탕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게 무조건항복을 했다.
이로써 우리 조선은 일제식민지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 조선에 있는 일제의 모든 통치기관과 군대는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었고 북위 38도선 이남은 미군에게, 이북은 소련군에게 항복하고 무장해제하도록 얄타회담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전후 미국은 단연 다른 제국주의 열강을 제치고 최강의 제국주의로 되었다. 아직 일천하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동맹은 자기나라의 전후복구문제 이외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소련이 원자폭탄을 가지고 있는 막대한 국력을 가진 미국의 주장에 대해 어찌 맞설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전후처리의 당면적인 문제는 미국의 의도대로 되는 수밖에 없었다.
38선문제도 그 무렵 우리나라에서 아직 수 천리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군대를 가진 나라가 바로 가까이 있는 나라에 대해 38선으로 경계를 삼아 주둔한다는 것은 분명히 도무지 이치에 당치 않는 처사이다. 미국은 당시 국력으로 이 비합리를 관철시키려고 했고 소련은 일본에 투하한 미국의 원자폭탄에 얼어 있었는지 그 비합리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수락하기만 했다.
이처럼 조선의 38선 분단은 미국의 억지주장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지금까지 60년 넘는 분단의 시초로 된 것이다.
3. 미군의 남조선강점과 맥아더
미제와 숭미 사대주의자 그리고 미제의 식민지통치의 교육정책을 충실히 받아들인 대부분의 이남 사람들은 조선의 8.15 일제 식민지해방을 연합군의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특히 이남은 미군의 점령을 미군의 승리에 의한 당연한 이치로 알고 그 자체를 해방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승의 영광 위에 빛나는 장군이 맥아더이고, 그래서 맥아더는 영웅이고 우리 이남사람에게는 일본을 내쫓은 해방의 은인으로 비치는 것이다.
이는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을 비롯해서 이남 땅의 역대정권에 의해 교육, 문화, 언론 등으로 조성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된 환상이다. 사람들이 이 환상에서 깨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환상 속에서 우리들 민중이 깨나기 위해서 맥아더를 이야기해야 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이 되기 전에 이미 우리나라의 북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결전과 전민항쟁으로 우리민족의 손으로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하고 식민지통치로부터 우리민족 스스로 해방되었고 각 지방에서 주권기관이 자연스레 터전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남은 사정이 좀 달랐다.
당시 조선총독인 아베 노부유끼는 이제 패망 후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받기 위해 시정권을 조선인의 대표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를 위하여 부하인 정무총감 엔도를 시켜 처음은 송진우에게 교섭을 했지만 송진우는 친일신문인 동아일보 사장을 했던 자인지라 자신이 나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절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엔도는 조선사람들에게 당시 이남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던 독립혁명투사인 여운형을 만나 시정권 이양을 교섭했다.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전원석방과 치안과 시정을 조선인에게 맡기고 간섭하지 말 것 그리고 가을추수까지 3개월의 식량배급의 확보, 이 3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이의 수락을 조건으로 이양받기로 했다.
여운형은 이미 일제의 최후의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일제와 최후결전을 위한 준비로 지하비밀단체인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있었고 그 조직망은 전국적으로 망라되어 있었다.
여운형은 이 단체의 조직과 각 지방의 일제에게 절개를 팔지 않은 애국인사들로 하여금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조직하여 일제통치기관을 접수하고 치안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확보하고 시정을 원활히 했으며 인민들의 후생을 담당했고, 당시 해방된 조국으로 물밀듯 들어오는 귀환동포의 원호를 원활히 했다.
그러는 한편 식민지해방 이후 일어나는 문제를 권위 있게 처결하기 위하여 나라의 주권기관을 건설해야 했다. 이를 위하여 각급 지방인민대표자를 선출하고 그 대표자회는 각급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 대표자를 보내어 1945년 9월 6일 서울 경기여고 강당에 회집하여 중앙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정강정책을 채택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 이틀 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들어왔다.
미군은 그 전날 7일에 전국 방방곡곡 조선사람이 있을 만 한 곳에 비행기를 띄워 전단을 뿌렸다.
거기에는 미군이 일제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하는 단순한 주둔군이 아니라 조선의 이남 땅을 점령하고 군정을 펴는 점령군임을 밝히고 있다. 그 포고문은 미합중국 태평양군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사람들은 정말로 어처구니없었으나 소련도 어쩌지 못하는 원자폭탄을 가진 미군인지라 이에 항의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더구나 그 포고문에는 일제 통치의 원상대로 일제관리가 그냥 복무하고 조선사람들은 거기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래도 조선사람들은 원수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일본의 적인 미국은 우리 편으로 생각했는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다는 말을 듣고 미군주둔을 환영하려고 인천부두에 몰려갔는데 부두의 경비를 서고 있는 자들은 일본군이었다. 이 일본군은 질서를 잡는다면서 조선사람들에게 실탄을 쏘아 여러 사람의 사상자를 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일제로부터 조선이 해방되는 사실을 말한 어떤 문건에서도 미군이 조선에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진주한다고 했지 점령하여 군정을 편다는 말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 북조선에 주둔한 소련군은 주둔군사령부라고 했지 점령군이라는 말도 군정청이라는 말도 없었다.
참으로 나라에 힘이 없으면 이런 꼴을 당해도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맥아더는 그의 부하인 하지를 점령군사령관으로 했고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정식 이름을 달고 점령군으로서 군정을 폈다.
이와 같이 맥아더는 논리적 사고를 전혀 무시한, 그래서 바로 폭력의 논리, 따라서 깡패의 논리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지배욕과 미제의 패권주의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폭력의 무법자임을 스스로 나타내었다.
4. 6.25전쟁과 맥아더
6.25전쟁을 두고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가지고 사람들의 사상을 재단한다. 그 재단방식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승만 정권과 그 전통을 이어받은 역대 군사정권 그리고 민간정권이라 하는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이 선 이후 줄곧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2분법논리, 미군정이 들어와서 시작된 OX문제식 해답으로 하는 사상검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6.25전쟁을 남침이라고 하면 영락없이 국가보안법에 걸린다. 남침도 되고 북침도 된다고 하면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해서 취직도 안 되고 그래서 먹고 살기가 말이 아니다.
이렇게 길들여져 왔으므로 설사 그것이 틀리더라도 그릇되게 주입되면 그것이 바른 것으로 인식되어 머릿속에 콱 박히게 된다.
사실 6.25전쟁은 그 시작의 시점을 잡는 데 따라 북침도 되고 남침도 되는 것 같다. 당시 그처럼 38도선 상에서 일상다반사로 충돌이 있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발생된 그 시대의 상황을 분석해서 누가 전쟁을 도발했는가, 전쟁에서 이익을 보는 쪽이 누구이며 손해를 보는 쪽이 누구인가를 분석해서 어느 쪽이 어떻다는 정도의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맥아더의 6.25전쟁에서 역할을 알기만 하면 되므로 전쟁이 발생된 그 시대의 상황을 분석해보기로 하고 결론은 내리지 않기로 한다.
당초 미국은 남조선에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주둔한 미군을 점령군으로 탈바꿈하여 들어온 이상, 철수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더구나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철수한다는 의사는 조금만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1947년 3월에 트루만이 의회에서 발표한 독트린을 보아서 명백히 알 수 있다. 미국의 대 소련 포위망 구축을 내용으로 하는 그 독트린에서 조선반도의 역할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미ㆍ소공동위원회 사업을 파탄 냈으며, 전후문제를 취급하지 않는다는 국제연합의 헌장을 짓밟고 전후처리문제의 하나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조선 문제를 국제연합에 가지고 가서 남조선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그들의 예속정권으로서 이승만 정권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를 반대하고 분단을 받아들지 않는 모든 세력들이 협상을 벌여 전 조선적인 대표자를 선출하여 비록 북조선에만 그 권위가 통하지만 명분상으로는 전 조선적인 정권으로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조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북조선의 공화국은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하자고 호소했다.
이승만 정권은 남조선의 통일세력을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살인적으로 탄압하여 다스렸고 남조선 인민들은 줄기차게 자주통일을 위해 투쟁해왔다.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투쟁했으나 일부 세력은 무너졌지만 다른 일부세력은 2년 후 5.30총선거에 크게 진출하여 다음 2년 후에 있을 대통령선거에 이승만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바로 미제의 대조선반도정책의 실패로 귀결되고 미제는 조선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제는 전후복구에 의해 일시적으로 상승되던 경제가 하강을 맞고 있어서 경제회복의 기회를 만들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를 위해 지구 상 어디든 분쟁이 조성되어 군수산업의 경기를 되찾아서 경제회복을 도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조선반도에서의 분쟁이다.
조선반도의 전쟁은 당시 38도선 상에서 항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충돌을 그 규모를 키우면 되는 것이다.
2년 후 권좌에서 쫓겨나게 될 이승만은 전쟁을 일으키는데 혈안이 되어 도쿄에 있는 극동군사령부로 날아가서 맥아더를 만났고, 워싱턴의 당시 트루만 대통령의 고문이고 나중에 국무성 장관으로 된 존 포스트 덜레스, 이들 3자의 연락이 빈번해지더니 덜레스가 1950년 6월 19일 남조선을 방문하고 국회에 연설하며 38선을 시찰하는 등 돌아가다가 1주일 만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6.25전쟁은 이승만과 맥아더 그리고 덜레스 3사람의 작품으로 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맥아더는 호전가의 기질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맥아더는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있는 미군을 즉시 동원하여 우리민족 내부문제에 무력으로 간섭하여 전쟁을 확대시켰다. 그는 스스로 조선에 날아와 공황상태로 허물어가는 국군을 그의 휘하군대로 받쳐 주고 이승만 정권의 명맥을 이어주었다. 이승만에게는 정말로 은인이었지만 북진통일을 부르짖는 분단의 원흉을 살려줌으로써 우리민족의 통일을 적극적으로 방해한 자주통일의 방해자로 되었다.
5. 비전투 민간인을 300만 명을 학살한 맥아더
맥아더는 6.25전쟁에서 우리민족에게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재난을 들씌웠다. 전쟁에서 전투원끼리의 살상도 교전 이외의 살상은 전쟁범죄에 들어간다. 맥아더는 6.25전쟁에서 피난하는 민간인을 폭격과 기총소사로 마구 학살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도시와 촌락, 농사 등 생업활동을 하고 있는 민간인을 아무런 경고도 없이 마구 죽이게 했다. 그의 지휘 하의 전투원은 도시를 점령하거나 촌락을 지나치다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사격을 가하고 주민을 끌어내다가 마구 죽이는 인간백정이었다.
그의 군정 하에서 조국의 분단을 반대하고 군정의 폭압을 반대하여 궐기한 제주도의 4.3항쟁에 대해서 그가 지휘하는 남조선의 군정경찰, 국방경비대, 그리고 국군으로 하여금 제주도를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들었고, 당시 30만 제주도민에서 5만의 주민을 학살했다. 이것은 6.25전쟁 전의 일이다.
전쟁 중 지리산 등 조국의 산악에서 미제와 이승만 예속정권의 학살탄압을 반대하여 싸우는 유격대 토벌(이승만 군경은 이를 일제가 말하듯이 공비토벌이라 했다. 하기야 이승만 군경의 지휘자들은 대부분이 일제에 빌붙어서 동족을 탄압 학살하던 민족반역자들이었다.)에서 일제가 말하는 삼광정책(殺光, 奪光, 燒光의 三光으로 살아있는 것은 모조리 없앤다는 토벌방식, 일제가 중국의 동북지역을 위시하여 조ㆍ중 민간인의 학살초토화정책)과 중국의 장개석군이 말하는 건벽청야(建壁淸野) 그리고 미군이 장기로 하는 초토화 작전으로 수십만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미군이 38선을 넘어 벌인 민간인 학살은 미제의 군인이 얼마나 야수적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 실례로 황해도 신천대학살은 대표적이다.
미군이 신천으로 쳐들어가 점령한 52일 동안, 신천군에서 남녀노소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해 신천군 전체 인구 14만 2,786명 가운데 3만 5,383명을 살해했다. 특히 신천군 궁흥면 만궁리에서는 주민의 87%, 온천면 운봉리에서는 66%, 신천면 양장리에서는 남자 전원을 학살했다.
미군의 이런 학살은 복조선 도처에서 일어났다.
미군은 이북에 또 무차별 공중폭격으로 엄청난 수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당시 인구 30만의 평양에 43만 발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이북 땅 전역에 1평방킬로미터당 18개의 폭탄을 퍼부었다. 1950년 6.25전쟁 이후 1953년 4월말까지 미군은 26만발의 중대형 폭탄, 2억 발의 탄환, 약 40만 발의 로켓탄, 약 150만 발의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다. 이것은 태평양전쟁 중에 미국이 사용한 폭탄 총량보다 더 많은 양이다. 이런 초토화 작전과 융단폭격으로 조선반도는 폐허로 변했고, 특히 이북은 완전히 '원시상태'로 되돌아갔다.
예컨대 당시 이북의 주요 산업지대였던 원산은 종전 후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말짱한 건물은 한 채도 없었고 공장들도 땅에 파묻혀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이북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이북만이 아니었다. 이남도 이북 인민군의 점령지였을 때 미군의 폭격은 이북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6.25전쟁으로 하여금 우리민족은 약 100-150만의 전투원과 약 300-400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살상당하고 모든 산업과 전국토의 대부분이 파괴당했다. 이런 파괴를 지휘한 미제와 그 작전을 지휘한 당시 유엔군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전쟁수행방식이 얼마나 야수적이었고 범죄적이었는지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맥아더는 일제의 전쟁범죄자를 감싸 안았다. 그 중에서도 백번을 죽여도 조ㆍ중인민의 한이 풀릴 수 없는 중국 동북 하르빈에 있던 일본군 세균무기제조와 실험부대인 일본 천황의 직속 제731부대의 부대장인 이시이를 보호하고 미군의 세균전을 위해 그들의 경험을 축적하여 6.25전쟁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세균무기는 실제 맥아더가 총사령관에서 추방된 이후에 실전에 사용되었지만 그 실험과 준비는 맥아더의 지휘 하에서 시작된 것이다.
벌레만도 못한 반인륜적인 살인의사 이시이가 미군의 보호아래 1951년 겨울, 극비리에 직접 조선반도의 세균작전현장을 다녀갔다. 이 인간쓰레기가 돌아간 뒤 이북과 중국의 동북지역에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인데도 파리ㆍ모기가 산채로 발견되었다. 그 이후부터 주민들은 콜레라에 감염되고 페스트에 걸려 수 십 명씩 죽기도 했다.
미군의 이 세균전은 오키나와 기지에 있는 B29폭격기에 무수한 파리, 벼룩, 거미, 빈대, 모기, 이, 귀뚜라미 등의 해충이 가득 찬 세균무기를 실었는데, 거기에는 콜레라, 페스트, 장티푸스, 재귀열병 등 가장 지독한 전염병균이 무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세균무기를 사용한 세균전은 평안남도 안주군 발남리에서 실시되었는데 페스트환자가 발생했고 36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각지에서 숫한 인명을 살상했다.
미국은 이북의 후방에 대해서 화학전도 강행하여 숫한 민간인을 살상했다.
1951년 5월 6일 B29 3기는 남포시 근교의 삼화리, 후포리, 축돈리, 용정리, 용수리 일대에 가스탄을 투하하여 379명을 살상했다. 1951년 8월 1일에는 황해도의 연성리와 원철리에, 1952년 1월 9일에는 원산북방의 학성리에도 가스탄을 투하했다.
맥아더는 패퇴하는 전국을 만회하기 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했다.
언제나 미군이 하는 것처럼 엄청난 화력을 써서 초토화 작전으로 제압하고 상륙을 감행했다. 맥아더는 300여척의 함선과 약 1,000여대의 비행기, 5만 여명의 방대한 무력을 동원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6시에 개시하여 2시간 만에 월미도를 점령했다고 하는데 이와 달리 말하는 쪽도 있다. 월미도를 수비하고 있던 인민군이 3일간을 버티었기 때문에 경인지역의 인민군 주력이 후퇴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작전지휘관은 패퇴를 해도 대개 작전상 후퇴라고 강변한다. 물론 전쟁을 하다보면 작전상 후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 후퇴가 작전상 후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패퇴라고 할 수 있는가는 그 후퇴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확보했는가, 못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쟁 초기 맥아더가 지휘한 미군의 낙동강으로의 후퇴는 패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초기의 국군은 공황상태로 무너지고 이를 밀어주기 위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전선에 보내고 딘 소장이 지휘하던 미 제24사단도 전선으로 투입했으나 대전작전에서 전멸되고 말았다. 이로 인한 미군의 후퇴는 작전상 후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인민군이 작전상 후퇴를 했는데 이 후퇴는 대부분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후퇴했고, 미군의 이북 전진에 대한 반격을 위해 부대를 재배치하기 위하여 후퇴한 것이며, 이 결과 인민군의 겨울공세 때 이북에 들어온 미군과 국방군 30만 명을 포위 섬멸한 작전의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후퇴가 그야말로 작전상 후퇴라고 할 수 있는 승리의 후퇴라고 할 수 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후, 이북으로 확대될 육상전이 제3차 세계전쟁을 불러올 위험을 우려하고 있는 세계평화애호인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침을 감행하여 38선을 넘어 진격했다. 그의 휘하에 있는 미군은 이북에 들어가 살인, 강간, 방화, 파괴 등 온갖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그들의 52일간의 이북점령으로 이북 땅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이북 동포들은 이 침략군에 반대하고 인민군의 작전을 도와 미군을 몰아냈다.
인민군의 후퇴는 새로운 거대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후퇴했는데, 그것은 전진해 들어온 미군의 그 후방을 차단하는 거대한 포위망으로 전변시켜 다가온 이북 겨울의 혹한을 자연적 무기로 하여 미군과 국방군을 섬멸시켜버렸다. 맥아더는 수많은 병력을 잃고 후퇴했다. 맥아더의 이 후퇴는 완전무결한 패퇴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를 1.4후퇴라고 부른다.
6.25전쟁에서 맥아더의 용병은 미제가 자랑하는 명장의 용병은 아니다. 그의 용병은 이 전쟁에서 두 번이나 패퇴한 패장(敗將)의 용병이었고, 물량에만 의지해서 사람과 물건을 가리지 않고 마구 파괴하는 폭장(暴將)의 용병이었으며 옥수수파이프나 입에 물고 겉멋만 부리고 속은 텅 빈 용열한 용장(庸將)의 거드름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용장이 생각해 내는 일이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마구 많이 죽이는 일이다.
그는 이북에 쳐들어가 그가 보기에는 이북 전체가 곧 그의 손아귀에 들듯 했다. 그런 생각이 남가일몽처럼 다 망했던 것이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인민군의 주력이 고스라니 남아 그대로 나타났고, 게다가 그가 보기에는 소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손에 폭탄만 쥐고 있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중국인민지원군이 나타나,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 그리고 넘쳐나는 물량을 갖춘 이때까지 한 번도 패퇴한 적이 없는 천하무적의 미합중국의 군사를 쥐새끼 몰 듯 포위망에 몰아넣더니 마구 쳐 죽이고 무장해제를 시켜버리는 꼴을 보고 용장(庸將)으로서의 심술이 발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원자폭탄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6. 우리에게 핵 참화를 불러오려 한 맥아더
조ㆍ중국경의 산악지대까지 후퇴하여 태세를 고쳐 세운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함께 이북의 험준한 산악지대까지 깊숙이 들어온 미국군을 포위 격파 패주시키고 12월 5일 평양을 탈환하고 51년 1월 5일에는 서울을 재점령했으며 3월 14일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경장부대였고 그 대부분은 중국 동북지방에 살고 있는 이른바 남에서 말하는 ‘조선족’의 청년들이어서 인민군과 바로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권의 형제 같은 동포여서 하나의 군대로 작전을 할 수 있을뿐더러 혼합해서 전투대열을 조직할 수도 있었다.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드럼과 피리를 불면서 산을 내려와 미군에게 반격을 가했고 이북의 엄혹한 동장군이 또한 무기로 되어 미군은 소탕당하여 패주하고 말았다.
압록강까지 다다랐던 미군과 국방군은 그만 쫓겨 내려와 11월 25일부터 28일까지의 청천강전투(평양 서북 100킬로미터 정도)에서 미군은 섬멸을 당했다. 이 청천강의 전투로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루어놓은 전공은 그만 삭치고 말았다.
11월 28일 맥아더는 통합참모본부에 지급전보를 치고
"총병력 20만의 적군이 국련군과 대치하고 있다. 결과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고 있다."
는 비명이었다.
이 연락을 받고 트루만은
"소련과 드디어 핵 대결의 때는 왔다."
고 11월 30일 기자에게 말했다.
"핵무기도 포함해선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포함한다. 핵무기의 사용은 늘 검토하고 있다."
라고 대답했다.
맥아더와 트루만은 핵전쟁에 대해서 항상 죽이 맞아 있었다.
그래서 맥아더가 조ㆍ중 국경에 30개에서 50개의 원폭을 투하해서 코발트방사능오염지대를 만들어 만주로부터 물자와 병력이 북조선에 유입하는 것을 막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통합참모본부는 원폭사용반대를 표명했다. 그것은 국내외의 여론의 우려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세계에는 반전의 목소리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캐나다도 영국도 한목소리로 원자폭탄의 투하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확대시킬 수 있다면서 핵무기사용을 강력히 반대했다. 캐나다의 외상 피어슨은 속히 화평교섭에 들 것을 주장했다. 영국의회에서는 노동당소속 하원의원 100명이 애틀리 수상에게 서한을 보내어 핵무기 사용을 반대하고 미 정부에 항의할 것을 요청했다.
영국수상은 12월 4일 워싱턴에 도착하여 8일까지 연나흘 동안 트루만과 회담하고 트루만으로부터 영국정부의 사전 동의 없이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언질을 받으려고 매달렸다.
그들은 중국과 전면전쟁이 되고 마침내 소련과의 핵전쟁, 제3차 세계전쟁으로 발전되어 유럽 전체가 핵전쟁에 휘말려들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핵무기사용에 강력히 반대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원자력위원회와 통합참모본부는
"조선반도에서는 이제 원폭투하에 적절한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다."
는 이유로 핵무기사용을 반대했다. 당시 동부의 명문 컬럼비아대학교 총장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도 핵무기사용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자는 대통령에 당선 되더니, 12월 하순 태평양을 항행하는 순양함 헬레나에서 각료회의를 열고 조기정전을 위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한다고 표명했다. 그 석상 통합참모의장 아더 라드포드(Arthur Radford)제독은 핵무기에 의한 대량보복을 주장했다. 이와 같이 미국의 지배자들은 늘 핵무기사용을 생각해왔고 그 후로도 늘 핵 공갈로 일관해왔다.
결국 트루만은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하고 핵무기 사용을 걷어치우고 말았다.
이 이후부터 미국 내의 여론은 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종결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국가목표로 되었다.
끝으로
이상 우리가 알아본 맥아더는 별 볼일 없는 장군이다. 미국이나 숭미 친미 공미의 미국숭배자들이 외대는 것처럼 용장(勇將)도 아니고 지장(智將)도 아니며 덕장(德將)이나 인장(仁將)은 더구나 아니다. 그가 지휘하고 치러낸 전쟁이나 전투를 보면 위에서 해설한 바와 같이 패장(敗將)이고 용장(庸將)이고 폭장(暴將)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이런 자를 미제와 미제를 숭모하는 자들이 그처럼 맥아더를 숭배하고 그를 은인으로까지 해서 받드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8.15해방으로 민족의 배신자로서 배족의 죄업을 영원히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이 맥아더의 포고문으로 그들이 저지른 배족의 업(業)에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고, 분단의 원흉 이승만이 일으킨 전쟁으로 멸망의 문턱으로까지 들어선 그들의 생명을 지켜준 그야말로 은인이기 때문이다.
과연 친일 배족세력과 그들의 자손으로 보아서는 생명의 은인이고 구원의 하느님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배신한 동포들에게까지 은인이라고 우기는 것은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흰 것은 검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들이 배신한 동포들에게까지 그렇게 인식되도록 하는 길은 올바른 교육으로는 불가능할 것이고 고급한 심리적 사술에 의한 세뇌로밖에는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 제국주의의 세계 제패라는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미국이 자랑하는 미디어의 기능에 의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맥아더가 겪어온 전쟁의 지휘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장수는 용감하고 정의롭고 지혜롭고 인덕이 갖춘 사람이라는 점은 어디에고 찾아 볼 수 없다.
필리핀전투에서 85,000이나 되는 자기 병력을 그 좁은 바탄반도로 몰아넣어 보급로를 스스로 차단당하여 장졸들에게 고난을 들씌우다가 10분의 1도 안되는 6,000 남짓한 적의 공격을 받자 도망 가버리는 장수, 인천상륙작전을 하고서 적이 보이지 않자 적이 없다고 판단하고 잘 나간다고 적의 포위망인 줄 모르고 들어갔다가 몽땅 당하고 마는 장수, 적 지역의 인민을 마구 살상하도록 만드는 장수, 자기 윗사람에게 버릇없는 짓을 예사로 해버리는 예절 없는 장수를 어찌 명장이라 할 수 있겠는가.
미제의 미디어는 이런 장수까지도 명장까지는 아닐지라도 인기 있는 정군으로 만드는 재주는 과연 돈을 줄만큼 가치(?) 있다고 보겠다.
이제 우리는 「주한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어야 하는 투쟁을 전개할 때가 왔다. 이 운동에서 제일 먼저 전개해야 할 일이 「주한미군」이 우리를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자주성을 짓밟고 우리민족의 살길을 여는 통일의 방해꾼임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친미 숭미 공미의 반통일세력은 「주한미군」을 지지하고 그들을 은인으로까지 받들고 있다. 그 전형으로 맥아더를 들고 있다. 그들은 맥아더를 은인으로, 명장으로 그리고 덕장으로까지 모시고 이를 인민들에게 더욱 깊이 인식시키려고 발광을 하고 있다.
결코 맥아더는 명장일 수 없다. 민족의 배신자에게는 은인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민족에게는 전쟁의 참화를 들씌우고 핵 참화까지 들씌우려고까지 한 민족의 원수이고 세계평화의 파괴자일 뿐이다.
이런 용장(庸將), 패장(敗將) 그리고 학살의 폭장(暴將)의 동상을 세워두고 우리민족의 자존심을 지킬 수 없다.
Unews에 게재 2005. 9. 12.
시건방진 맥아더의 모습
백두청년
'역사 > 현대사 재조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민족주의는 파시즘인가....... (0) | 2012.02.18 |
---|---|
[스크랩] 굴곡된 우리 현대사의 시작 (0) | 2012.02.18 |
[스크랩] 한승조, "일본의 식민지배는 축복" (0) | 2012.02.16 |
[스크랩] 독립 열사 욕보이는 독립운동 기념사업회 (0) | 2012.02.16 |
[스크랩] “친일파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0) | 2012.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