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1946년 해방정국 당시 터진 유혈 충돌 사태였다.
대구는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 시기까지만해도 공산주의,사회주의 성향이 아주 강한 지역이었다. 때문에 '조선의 모스크바' 라 불리었던 곳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기 경상도 지역, 특히 경북출신 독립운동가들이 눈에 띄게 많은데, 이는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의 비중이 상당히 컸기 때문이다.
해방정국, 미군정기 시기 남한 민중들은 굶주렸던 시기였다. 미군정의 쌀 배급정책 실패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특히 경북/대구 지역이 매우 심각했는데, 이무렵 대구/경북 지역에는 콜레라가 창궐했었다. 대구/경북 일대에 2천 여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미군정은 치료를 위한 조치들은 제대로 하지도 않고 오히려 '전염을 막는다.'는 목적으로 대구 자체를 봉쇄해버렸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시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쌀이 부족했다. 돈이 있다해도 쌀을 구할 수 없어 콜레라를 치료하는 의사들조차도 콩나물과 쌀로 죽을 끓여 먹을 지경이었다. 여기에 과거 일제치하 시기 친일 경찰세력들은 민중들을 아주 못살게 굴었고, 이에 대한 민중들은 불만이 날로갈수록 쌓여갔다. 이러한 상황속에 대구/경북 지역의 민심은 매우 흉흉했었다.
그런데, 이 무렵 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사건은 미군정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다.)이 터지면서 공산당에 대한 불법화, 공산당 주요간부들을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고, 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항하겠다면서 '신전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해서 더욱 급진적 성향을 보인다. 그리고 공산당은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1946년 9월에 철도노동자,운송업노동자들이 주도해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으니.. 이것이 '9월 총파업'이다. 9월 총파업은 부산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었다.
이에 미군정은 국립경찰과 반공청년단체를 투입하여 파업에 진압하였으나, 여기서 의외의 사태를 맞게 되는데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자 즉흥적인 폭동으로 발전되어 버린다.
10월 1일 저녁, 대구시청앞에서 시위 중이던 대팔연탄 노동자 황말용과 철도노동자 김종태 라는 두 노동자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날 아침, 노동자 2명이 경찰에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군중들은 시내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굶주린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합세했다. 수만여명의 군중에 포위된 대구 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게 했다.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은 질서 있게 경찰권을 인수하려 했는데, 바로 이때 거리 한쪽에서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 투석을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경찰관들도 자위권을 발동해서 순식간에 17명의 시위대를 사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분노한 군중들은 폭도로 변했다. 군중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향을 살피던 정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거나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다. 처음에 평화시위로 시작하다가 폭동으로 돌변하자 일부 젊은 공산당원들은 시위의 선봉에 섰으나 고참 당원들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다.
총성과 화염이 뒤덮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시민들은 민중봉기 고유의 미덕을 보여주었다. 부잣집과 친일파들의 가옥을 털어 생필품이나 식량등을 약탈했지만 각자 갖고 달아난 것이 아닌 길바닥에 쌓아놓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일반 상점이나 은행 같은 곳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경찰관을 집단 폭행하거나 죽인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일제 때부터 조선인들을 괴롭혀온 친일경찰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미군정은 10월 1일 군중이 모일 때부터 탱크와 장갑차를 시내로 진입시켜 무력진압을 준비하고 있었다. 폭동이 일어나자 미군 탱크와 장갑차는 그대로 시민들을 밀어붙여 거리를 봉쇄했다. 또 대구시민들에게 동정적이던 지역 출신 경찰들을 철수시키고 충청도 경찰관이나 전라도 경찰관들을 투입시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해 많은 군중들이 상상당했다. 비조직적으로 터져 일어났던 시위는 아내 가라앉았다.
이렇게 대구에서의 폭동은 쉽게 진압 되었다. 그러나 무장시위는 경상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후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의 형 박상희 역시 이 사건에 적극 참여했었다. 일일이 헤아릴 필요도 없이 거의 모든 중소도시가 폭동에 휩싸이더니 10월 중순에는 경기도와 강원도까지 번져나갔다. 민중들의 원한을 사온 경찰관서와 우익 청년단 건물들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친일경찰관이나 한민당 간부, 우익청년단원들은 걸리는 대로 집단 구타를 당했다.
경찰 역시 무자비한 보복을 가했다. 영천에서는 체포한 시위대를 생매장 시켜버리는 사건이 일어났고 '경로당 같은 곳에 모이라'고 해놓고 수류탄을 던져 집단으로 폭사시키는 사건도 벌어졌다.
무장 폭동은 11월 중순까지 남한의 거의 모든 주요도시들을 흔들어 놓았다.
이 사건이 터졌을때 당시 정치권내에서도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10월 인민항쟁'으로 부르며 '동학농민운동, 3.1 운동과 함께 조선의 3대 위대한 인민항쟁!'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우익세력, 특히 지주와 친일자본세력으로 결집된 한민당은 '이 사건은 박헌영 일파의 모략선동에 기인한 것'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좌익세력 역시 비난이 쏟아졌다. 이영이나 정백등 반 박헌영 세력 공산주의자들은 '이번 싸움이 박헌영의 공산당이 벌인 모험주의'라며 격렬히 비난했다.
김규식하고 여운형등 좌우합작세력에서는 '미군정의 정책이 옳지 못한 데 인민항쟁의 주요 원인이라면서 군정청에 강하게 규탄했지만, 반대로 폭력으로 혼란을 일으킨 원흉은 조선공산당'이라면서 양비론을 내세웠다.
오늘날, 보수세력 일각에서는 '대구무장폭동'이라 규정짓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직접 지휘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사건에는 조선공산당이 어느정도 개입한건 맞는말이다.(9월 총파업만 해당.) 그러나 이무렵 박헌영은 군정청의 체포령을 피해 영구차를 타고 비밀리에 북조선으로 월북했었다. 당시 공산당 고참 간부들은 사태를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었고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 사건이 진짜로 터진 가장 본질적인 원인은 일제강점기의 지배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미군정과 군정청의 식량정책 실패, 가혹한 수매, 미군정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좌익 사냥,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권력 복귀등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게 된 대한 민중들의 분노에 있었던것에 1차적인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