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사/시

[스크랩] 시인 윤동주

감효전(甘曉典) 2012. 2. 7. 18:59

일요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  윤동주님의 시를 읽으며,

지난밤 잠을 설쳐 약간 띵 해진 머리를 정리해 봄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봄니다.

윤동주님의 시보다.

 

그보다 못잖은 느낌을 가슴으로 받으며 읽어본 시들과

시를쓴 주인공들이

 

철저하게도 제국주의 천황을 칭송했던 댓가로 개인의 영달을 누리며

우리민족의 젊은 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데 앞장섰던 시인으로 명성을 남긴 작자들

 

그들이 지은 시와 노래가사들중 

우리가 배우지 못했던 당시 전쟁의 승리를 위한 노래 가사들 외에도

우리가 배웠던 싯귀들이 전해주는 느낌을 다시 거부해 보고싶은 생각으로

 

그리고

한점 부끄럼 없이 살다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외롭게 떠나가신

윤동주님의 젊은 생애를 생각해 보며.

여러분들과 느낌을 함께 하고 싶은 생각에 시와 자료를 올려 봄니다..

 

친일 행적이 뚜렸했던 시인의 작품이 

아무리 좋은 내용 이라해도 시 자체에 대한 편견 이라 해도 좋습니다.

 

문학 그 모든것은 정의로움과 정신적 풍요함을 위한 것이어야  하기에......

 

 

윤동주님의 詩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 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별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과 별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내 이름자를 써 보고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

 

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귀뜨라미와 나와

귀뜨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아무에게도 아르켜주지 말고
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뜰귀뜰
귀뜰귀뜰

귀뜨라미와 나와
달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서시(序詩)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눈오는 지도

                             - 윤동주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우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 둘 말이 있는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옥을 눈이 자꼬 나려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어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돌아와 보는 밤

                         - 윤동주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어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든 길이
그대로 비 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로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옵니다.
      


십자가(十字架)

                     -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참회록(懺悔錄)

                       -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안타깝게 순절한 저항 시인이다. 그가 옥사하고 3년뒤에 나온 유고시집(遺稿時集)은 그가 연희전문 졸업을 기년하기 위하여 뜻깊게 남긴 자필시고(自筆時稿) 3부 중에서 1부를 유일하게 보관하던 친구 정병욱과 아우 윤일주에 의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로 출간 되었다.

동주는 대부분의 작품마다 작품의 연대를 적어놓고 있는데 '자화상'이 1939년 9월로, ' 별헤는 밤'이 1941년 11월 20일로 되어 있다.이로 보아 자필 시고 3부를 만들무폅에는 '별헤는 밤'이 가장 마지막 쓴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주는 그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의 제목에서 시사하듯이 하늘과 별과 바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다.그에게 있어서 하늘과 별은 주로 그리움과 꿈의 대상으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리움과 꿈은 자신의 삶에 대한 외로움이며 슬픔이기도 하다.


그의 시세계는 그리움과 슬품으로 점철된세계였고 그러한 세계에 대한 지향은 하늘과 바람과 별로 투영되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은 동주에게 있어서는 현실의 고로움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표상이었다.

윤동주는 해방은 눈앞에 두고 일제의 어두운 옥중에서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저항 시인이다.. 그의 괴운 삶과 시편들은 오히려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다 간 윤동주, 그는 암흑기에 산 우리 민족을 가장 투철하고 아름답게 빛낸 별의 시인이었다.



-作品解說 시인 권달웅


윤동주 연혁


1917년 (1세)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이 파평인 부친 윤영석과, 독립운동가,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누이 김용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다.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촌은 외삼촌 김약연 선생이 일찍이 이 지방에 이주해 들어와 개척한 지역으로 교육과 종교, 독립운동이 다른 어느곳보다 활발했던 곳이다. 1910년에는 조부 윤하현이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에는 장로직을 맡게 되는데, 윤동주는 태어나자 유아 세례를 받는다. 윤동주는 본명이며 어릴 때 불리던 이름은 해환이다. 뒤에 [카톨릭 소년]지에 동요를 발표할 때 '윤동주(동주)' 또는 '윤동주(동주)'라는 필명을 쓴 젓이 있다. 윤동주의 형제로는 누이 윤혜원, 동생 윤일주(성균관대 교수), 윤광주가 있다.


1925년 (9세) :4월 4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에 있는 명동 소학교에 입학. 명동 소학교는 외삼촌 김약연이 설립한 규암서숙을 명동 소학교와 명동 중학교를 발전시킨 것으로, 윤동주가 재학할 당시는 중학교는 폐교된 상태였다. 당시의 급우로는 함께 옥사한 고종 사촌 송몽규, 문익환, 외사촌 길정우 등이 있다.


1927년 (11세) : 12월, 동생 一柱 태어남.

1929년 (13세) :송몽규 등의 급우와 함께 벽보 비슷한 '세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 이 무렵 썼던 동요, 동시 등의 작품을 발표.


1931년 (15세) :3월 25일, 명동 소학교를 졸업. 송몽규, 김정우와 명동에서 30리 남쪽에 있는 중국인 도시 대랍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


1932년 (16세) :4월,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계 은진중학교에 입학. 재학중 급우들과 함께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 선수로도 활약.


1934년 (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 한 대', '내일은 없다' 세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날 이후 모든 자작품에 시를 쓴 날자 명기.


1935년 (19세) ;은진중학교에서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 숭실중학 시절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의 시를 씀.


1936년 (20세) :숭실중학교 폐교,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 간도 연길지방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지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 발표.


1935년 (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


1941년 (25세) :연희전문 문과에서 발행한 [문우]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을 발표. 12월 27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 19편으로 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미간. 이 무렵 윤동주의 집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못이기고, 또한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함.


1942년 (26세)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 가을(10월 1일)에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편입.
1943년 (27세) :7월, 첫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교토대학에 재학중인 송몽규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키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됨(7월 14일).
1944년 (28세) :2월 22일 기소되고, 3월 31일, 일제 당국의 재판 결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형(3년 구형)언도받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
1945년 (29세) :"2월 16일, 윤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라는 전보가 윤동주의 옥사 사실을 알려옴.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일춘이 일본으로 건너감. 송몽규도 윤동주가 죽은 뒤 23일 만인 3월 10일 옥사. 3월 초, 용정 동산에 안장.
1947년 2월 16정지용, 안병욱, 이양하, 김삼불, 정병욱 등 30여명이 모여 소공동 플로워 회관에서 윤동주 2주기 추도 모임을 갖다.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
1955년 2월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간행.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학생회 및 문단, 친지 등이 모금한 돈으로 연희전문 시절에 지내던 기숙사 앞에 시비 건립.


출처 : 유유자적 낙산도령
글쓴이 : 낙산도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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