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숙자 칼럼 4>
파리의 연인, 나혜석
나혜석은 개화기 대표적인 여성인물이다. 그녀는 화가로, 그리고 소설가로 이름을 날렸다. 1918년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 여류소설가로 등장했으며, 1921년에는 한국 여류화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나혜석은 수원의 부유한 관료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전공했다. 도쿄 유학에서 돌아온 뒤 서울에서 처음으로 열었던 전시회는 사람들에게 유화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계기가 됐다.
초창기에 만든 목판화 ‘이른 아침’은 민중의 삶을 표현한 대표적 케이스다. 1922년부터 1932년까지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를 빼고는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할 만큼 재능이 뛰어난 화가였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 등을 담은 여러 논술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소설 <경희>는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나혜석은 도쿄 유학에서 돌아온 후, 정신여고에서 미술교사로서 교원생활을 했다. 또 화가로서 생활하면서 문필활동 등을 열심히 했다. 여성에게 보수적이던 당시, 여성 해방을 위한 사회활동을 했다.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다.
그녀는 1920년 4월 10일 정동교회에서 김우영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결혼식 청첩을 신문에 연일 광고함으로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1921년 장녀를 출산한 후, 서울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풍경화 중심의 작품 70여 점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1927년 나혜석은 한국 여성화가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야수파 계열의 미술연구소에 다니며 자신의 회화 예술에 커다란 전환점을 시도한다. 여기서 그녀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독립운동에 가담을 했던 것도 최린을 만났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후 최린과의 짧은 연애가 발각나면서, 35세의 나이에 이혼했다. 이후 ‘삼천리’ 지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고,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로써 그녀는 조선의 도덕과 인습에서 비롯된 남녀불평등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여자가 되었다.
나혜석의 정조관은 당시로선 좀 특별했다. 정조는 취미와 같은 것이어서 도덕이나 제도로 강제할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당시 여성 교육의 상징이었던 ‘현모양처’ 관에 대해서도 교육가들이 상업적으로 내세우는 주장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다. 여성에게 온화하고 부드럽기를 가르치는 것도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결혼을 하더라도 각자 배우자 이외 다른 사람을 만나 사교를 하는 것이 쉽사리 권태에 빠지지 않는 길이라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그녀가 부르짖은 주장들은 당시의 사회에서 용납되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의 냉소와 비난을 사게 되었다. 그녀가 이혼녀의 신분이라는 것도 그녀의 입지를 불리하게 만들었다. 이와 함께 그녀의 사회활동과 작품활동도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나혜석은 1944년 이후 몇 년 동안은 행려병자로 떠돌았다. ‘여성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었던 그녀는 1948년 12월, 서울 시립병원에서 53세의 나이로 홀로 눈을 감았다.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였다. 선각자는 진정 외로울 수밖에 없는가. 동시대의 신여성들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존재였던 그녀의 인생을 보면서 묻게 되는 질문이다.
< 완주신문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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