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일성(金日成)
한자 |
金日成 | |
본명 |
김성주 | |
출생일 |
1912년 4월 15일 |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대동군 만경대 | |
사망일 |
1994년 7월 8일 |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묘향산 | |
거주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 |
정당 |
조선공산당, 북조선로동당 조선로동당 | |
학력 |
만주 지린 성 길림육문중학교 수료 | |
배우자 |
처(妻) |
김정숙, 김성애 |
첩(妾) |
제갈(諸葛)씨 | |
자녀 |
자 |
김정일(김정숙), 김만일(김정숙), 김평일(김성애), 김영일(김성애), 김현(제갈) |
딸 |
김경숙(김정숙), 김경희(김성애), 김경진(김성애) | |
부모 |
부(父) |
김형직(金亨稷) |
모(母) |
강반석(康盤石) |
본명는 김성주은 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군인이다. 만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조선혁명군, 반일인민유격대(그 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 등을 조직했다고 선전된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북조선로동당의 지도자로 활동하였고, 남북로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9월부터 1972년 12월까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을 지냈고 1972년 이후에는 헌법(이른바 사회주의 헌법)을 바꾸고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1972년 12월 15일부터 1990년까지 1대 국가주석직을 지냈으며. 1990년 5월 24일 국가주석에 재선되어 1994년 7월 8일까지 2대 국가주석직을 지냈다. 미군정과 이승만정부의 학정으로 남한(대한민국)에서 전쟁동조세력이 발호할 거라는 판단착오와 군사력의 우월성을 기반으로 한국 전쟁을 일으켰으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하였다. 한국 전쟁의 책임자 중의 한사람이었으나 휴전 후에는 박헌영 등 남로당과 국내파 계열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정적을 숙청하였으며 1958년에는 무력으로 최고인민회의를 점령, 김두봉, 김원봉 등 중국 계열 모두 숙청하고 권력기반을 강화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을 발발하게 한 장본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최근까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1972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고 1990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재선되었으나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김정일에게 넘겼다. 1994년 절대권력의 상징이었던 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모든 권력을 승계하였다. 그는 1998년에 개정된 사회주의헌법에서 정한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원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 또는 金聖柱)였으나, 항일 무장 투쟁을 하면서 김일성으로 개명하였다. 노동력 총동원(천리마 운동)으로 한국 전쟁 이후 피폐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휴전 직후 그는 주체이념을 기조로 한 주체사상을 발표하였는데, 1980년대 대한민국의 일부 운동권에서는 그의 주체사상 노선을 받아들인 그룹도 있었다. 한편 한국 전쟁의 전쟁 범죄,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한 비판을 받아왔으며, 독립운동 여부에 대해서는 과장하는 측과 과장하지 않는 수준에서 인정하는 측과 불인정하는 측이 양립하고 있다. 기독교 가계 출신인 그는 원래 기독교 신자였으나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무신론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 국가주석이 되기 이전의 생애
(1) 생애 초기
① 출생과 가계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에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하리 칠곡(외가가 있었던 곳으로, 오늘날 평양 만경대)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년 7월 10일~1926년)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9], 1892년~1932년)의 삼형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일성의 전주 김씨 12대조 김계상이 전라북도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증조부 김응우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종군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응우가 제너럴 셔먼 호 격퇴의 지휘관이라 주장한다. 김형직은 할아버지 이래로 지주 리평택(李平澤) 집안의 묘지기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북한 김정일 독재 정권에 의하면 김형직의 동생이자 그의 숙부였던 김형권이 독립 운동을 했다는 근거가 전혀 없는 거짓 주장을 펼치고 있다. 어머니 강반석은 기독교 장로교 신도였고,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교육자이자 칠골교회의 장로였다. 김일성의 외가는 큰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항일 민족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강돈욱은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 김형직 또는 할아버지 김보현이 기둥이 되라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성주(成柱, 또는 聖柱)라 지었다고 한다. 그의 생가는 만경대라는 이름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② 어린 시절과 소학교
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현(撫松縣)으로 이사했다. 1919년 일곱 살이었던 김일성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창바이현 바다오거우에서 팔도구 소학교를 다녔다. 1919년 7세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온 그는 어린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 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한 김형직의 결심에 따라 혼자 평양으로 돌아와 1923년 초부터 1925년 초까지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용산면) 하리(下里) 칠골에 있는 외가에서 머물면서 창덕소학교에 다녔다. 창덕학교는 1907년 하리 장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세운 5년제 학교인데,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도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한때 창덕학교의 교감과 교장을 맡기도 했다. 아버지 김형직의 “혁명을 하자면 자기 나라를 알아야 한다”라는 권고로부터 1923년 3월 중국 바다오거우로부터 만경대까지 배움의 천리길을 걸어 통학하며 외가집이 있는 칠골 창덕학교에서 공부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 김형직의 권고로 중국말을 배우고 중국인소학교에서 중어공부를 하여 중어의 자유로운 구사가 가능했다.
그러나 아버지 김형직이 1926년 그의 나이 14세 때에 사망하게 되면서 그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2) 청년기와 항일운동 시기
① 중학교 재학 중
북한 측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열세 살 때(1925년)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다시 만주로 건너가 푸쑹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지린 성 지린으로 가서 중국인 학교인 지린성 유원 중학교(육문중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였고,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 1926년 10월 17일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했고 그 뒤 그 책임자로 선거되었다. 중학교 재학 중 그는 성적이 우수하였다.
그러나 1927년 단체 조직 의심을 받다가 유원중학교에 재학하던 중인 1929년 반일활동으로 중국 군벌 당국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북측은 김형직이 독립운동 후 고문 후유증에 걸렸다고 했으나, 아편장사를 하다가 아편에 중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② 공산주의 단체 조직 활동
유원 중학교 재학 중 김일성은 1927년 8월 28일 만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조직했다. 1929년 가을 반일(反日)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중국 군벌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수개월간 감옥살이를 했고 수감중 그는 유원중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1929년 지린 제5 중학교 학생으로서 처음으로 조선혁명군 사건으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지린 감옥에서 복역하고 1930년 5월 초에 출옥했다. 당시 그는 이종락의 부하로 활약했으나 북한에서는 이를 부인한다. 감옥에서 나와 국민부 산하의 청년 조직에 가입, 국민부에서 일할 무렵(1929년에서 1931년 사이) 이름을 김일성으로 개명한다. 이어 조선공산청년회에도 가담하는데, 조선총독부 관헌이 작성한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의 주요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뒤 화성의숙에 편입학한다. 화성의숙은 반일민족주의단체가 중국 화뎬에 세운 2년제 군사정치학교라 한다. 1930년 화성의숙을 졸업하고 만주의 무장 군벌에 참여한다.
③ 항일 무장 투쟁
1930년 6월 30일 지린 성 창춘에서 카룬 회의를 개최하였다. 김일성은 1930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진행된 카룬 회의에 참석하였고 7월 3일 창춘현 카룬에서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를 조직하였고 7월 6일에는 이퉁현 구위수로 가 항일무장투쟁준비를 위한 정치 및 반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인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과 만주의 각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개별적 혹은 연합으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자 그도 1932년 4월 25일 상비적인 혁명무력인 반일인민유격대(그 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를 창건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지도하였다. 그가 속해 있던 동만(東滿:당시 간도지방)의 항일유격대가 확대·발전하여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조선인민혁명군)으로 재편성되자 1934년 가을에 김일성은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으로 배속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이름이 바뀌자 그는 계속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배속되어 활동했다.
④ 동북항일연군 지휘관
1936년 3월 항일독립운동 단체들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일환으로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통합, 재조직되면서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6년 7월 다시 동북항일연군이 편제가 개편되자 그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배속, 제1로군 6사 사장이 되었다. 1936년 5월 항일 독립운동단체들의 통일전선을 위해 조국광복회를 결성하자 그도 광복회 결성에 가담하였다. 그는 보천보 전투에 참여하였고, 이 전투는 무장독립세력이 거의 사라졌다고 민중들이 생각할 때 일어난 사건으로 상당히 통쾌한 사건이였다. 그의 무장 투쟁은 1937년부터 1940년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작은 규모의 보천보 전투가 최고 성과로 여겨지며, 이 전투에서 일본인 7명 사망, 7명 중상의 피해를 입혔다는 설이 존재한다. . 보통 약 100명 정도를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했다고 한다. 그런 유격전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퍼지게 되었고, 그의 항일투쟁은 때때로 조선의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전투라고 하기에는 해프닝에 불과 했던 보천보 전투 외에도 북한측에서는 그외에도 많은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대표적으로 소나무 가지를 타고 강을 건너가 일본 함대를 전멸시킨 사건을 들고 있다. 또한 가뭄등으로 인해 굶주리는 만주의 민중들을 위해 위통을 벗고 모래밭을 몇바퀴 뒹굴렀더니 모래들이 전부 쌀이 되었다는 것도 현재 북한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업적 중 하나이다. 1938년 12월 일제의 가혹한 토벌이 계속되는 가운데 부대편제의 개편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단 군단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1939년말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항일빨치산에 대한 대토벌전으로 항일연군은 계속 패퇴하면서 그의 조직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군 토벌대가 항일연군 중 김일성부대를 주요 목표로 정하고 집요하게 추격해오자, 그는 무리를 이끌고 북만주를 거쳐 국경을 넘어 1940년 초 소비에트 연방으로 피신했다.
⑤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의 가혹한 토벌이 계속되는 중에도 김일성 부대는 1940년 3월 25일 허룽현 훙치허에 있던 마에다 부대를 습격하였다. 이 습격에서 일본인 백여 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했으며, 탄약과 양곡을 노획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다지 조명 받지 못하는 사건이다. 또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붕괴를 초래한 원인으로 교조주의를 혹독히 비판하고 하나의 통일된 운동으로 조직적인 투쟁을 할 것을 제시했다. 1940년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로 떠나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 후 소련군 대위로 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배속되어 5년 동안 복무하며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45년 8월초 독일이 패배하고 일본제국의 패망이 임박하자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단장 : 최용건)을 결성하고 조국의 해방과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비하였다. 이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자였다. 뒤에 소련군 소좌로 승진했다. 조선공작단 대원 가운데 일부는 1945년 8월 8일 소련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석했으며, 나머지 조선인들은 9월 18일 원산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 8월 26일부터 김일성은 비밀리에 정치활동을 시작,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3) 광복 이후
① 광복과 귀국 (1945년 ~ 1946년)
1945년 9월 19일, 김일성 등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 사흘 뒤인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때 김일성은 소련군 육군대위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이후 평양에서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벌였으며 곧 소련군 육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당시 소련 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 스티코프 사령관과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장 조만식의 소개로 ‘김일성 장군’으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되면서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보천보 전투가 신화화되고 긴니치 세이의 활동을 신화나 전설로 전해들은 시민들은 고령의 노 장군을 생각하고 모였지만, 젊은 청년이 김일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군중들은 가짜라며 실망해서 되돌아가거나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의 그의 호칭은 ‘사령관 동지’였다. 1945년 10월 8일과 10월 9일에 김일성은 38도선 개성에서 박헌영과 회담하여 조선공산당 북한 분국 설치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38도선 이북에도 당본부를 설치한다는 그의 주장에 박헌영은 당의 중앙은 한 곳이어야 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영은 그의 주장을 끝내 동의해주지 않았고 분국 형식으로 당을 조직하게 됐다.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한 분국 중앙조직위원회를 조직하고 당창건 목적을 발표하였다.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초대 책임비서에는 김용범이 선출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소련의 홍보 지원 등에 힘입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내에서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45년 11월 5일 서울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 조직되자 축사를 보냈고, 11월 6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명예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3차 확대집행위에서 김일성은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2월 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대 책임비서에 취임했다.
②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시절 (1946년 ~ 1948년)
김일성은 해방 후의 한국에서 정치 기반이 전혀 없었으나 소련 군정의 도움을 받아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어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켜 북한에서 사실상의 단독 정부로 기능케 했다.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김두봉, 서기장에는 강양욱이 각각 선출되었다. 2월 8일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로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당을 장악한 동시에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행정부를 장악하게 된다. 공산당내의 주도권을 장악한 김일성은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진영으로 반씩 구성하여 출범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에 가담하였다. 이후 처음에는 민족주의진영의 인사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진영의 인사가 동등한 합작전략을 사용하였으나, 그러나 후에 점차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진영 인사들의 가입으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수를 늘려 결국 그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장악하고 이후 북조선내 다른 지역의 인민정치위원회들 역시 장악하였다. 초기에는 3·1 만세 운동을 부르주아들만의 투쟁으로 보았으나 3·1 만세 운동을 인민봉기로 재평가하기도 했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는 김일성 주관하에 「3. 1 인민봉기 27돌 경축대회」가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를 파탄시키려는 암살자들에 의하여 주석단 가까이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재빨리 단상에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김정숙은 행사가 끝난후 경위대자동총소대원들에게 경호의 허술함을 지적하였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3월부터 슬그머니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되었다. 1946년 3월 김일성은 북조선로동당 당수에 취임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서울의 조선공산당에 보고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이때부터 남조선로동당과 당대 당의 관계로 대하게 되었다. 1946년 6월 14일 김일성은 민주주의민족전선 북조선지부 산하 정당, 사회단체 열성자대회를 소집하고 조선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입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③ 북한에 대한 소련의 수탈과 김일성의 협조
1945년 일본의 항복 뒤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하였는데, 소련의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던 김일성은 소련군의 비행에 대해 방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실제로, 소련군은 북한여성에 대한 유린, 상인들에 대한 수탈을 수차례 자행했으며, 이는 북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양호단과 같은 자위 단체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소련군은 일본과 치른 전쟁에 대한 배상의 일환으로, 북한의 수력 발전소 시설, 공장시설, 그리고 북한 쌀 농사의 1/4 를 공출하는 등 심각한 경제 수탈을 저질렀으며, 이에 대한 결과로 북한에서 수만명의 탈북자가 남한으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소련군의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④ 남북협상 주도
1948년 1월 김구,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제의해왔고, 김일성은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박헌영이 남북협상을 유도했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1948년 2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으로 발전시켰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과 동시에 그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고 ‘김일성 장군’으로 불렸다. 1948년 2월 국기를 태극기에서 인공기로 교체하는 교체식에 참석하였다. 4월 김구, 김규식은 수행원들을 동반하고 3.8선을 넘어 평양에 방문하였다. 최고지도자연석회의를 주관하고 김두봉과 함께 김구, 김규식과 4김회담을 하였다. 5월 김구와 김규식은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갔다. 1949년에 독립 운동가 김구, 김규식 등을 만나, 평양직할시 쑥섬(강나도)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열었고 4김회담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김구, 김규식 등의 주장과 북한의 단독 독재 정권을 세우자는 김일성의 주장이 서로 달라서 결국 회의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김일성이 김구, 김규식에게 남한에서 먼저 정부를 수립하더라도 정부수립은 하지 않겠음을 다짐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48년 2월 이미 인민군을 창건하여 사실상 정부수립 의사를 굳힌 뒤였다. 이후 1948년 9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김구, 김규식에게 2차 남북협상과 최고지도자회의를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박헌영, 홍명희 등과 별도로 2차 최고지도자회의를 개최했다.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① 인민공화국 내각 총리 시절
Ⓐ 공화국 정부 수립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 총리에 선출 되었다. 국가강령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강령’을 발표한다. 이 강령의 내용은 남녀평등과 선거권 실시, 무상교육제도(북한에서는 11년 무상교육제를 뜻한다.) 실시와 무상의료제도 실시, 친일파·지주 청산과 토지개혁 실시, 자원의 공동 생산과 공동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1949년 3월 박헌영과 소련을 방문, 소련 최고인민회의를 참관하고 돌아왔다. 1949년 남북 조선로동당을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을 결성하여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공식적인 공화국 수립이 선포되기 이전에, 북한에 이미 노동당을 통한 사실상의 일당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고, 조선 철도경비대 등의 창건을 통해 군사적인 기반도 마련한 상태였다. 이는 이 시기까지 혼란에 휩싸였던 남한의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여러 정치적 세력과 정당의 공존을 수용하였던 남한과는 달리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기반으로한 북반부 단독정부 수립이 사실상 남한의 정부 수립 훨씬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9년 6월 30일 북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들의 합동전원회의를 소집하고, 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선거되었다. 그해 다섯째 아이를 임신중이던 부인 김정숙이 사망했다. 그가 임신 중일 때 김일성은 김성애와 불륜관계에 있었고, 김정숙이 출산할 때는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김일성의 정열적인 여성편력으로 김정숙의 개인적 고민이 발생하였다. 특히 북한 주둔 소련군 노마니코부 사령부 타자수로 있던 15년 연하인 김성애에 대한 김일성의 이성적 접근은 김일성 조강지처의 지위마저 위협할 정도였다. 김정숙의 사망 원인은 병사로 알려졌지만, 각혈, 자궁외 임신, 암살설 등 사망의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있지 않다.
Ⓑ 공화국 정부 수립시 친일파 등용 논란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파를 강력하게 숙청하였음을 공언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2000년대 친일파 청산 논란이 벌어지면서, 남한의 반공우익 세력들은 그가 북한 내각 수립에 기용한 친일인사들을 거론하기도 했다. 북한 독재 정권에서 기용한 친일인사로는 그의 동생 김영주가 일본군에서 헌병으로 복무하였고, 장헌근 사법부장은 일제 중추원 참의, 강량욱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은 일제하 도의원, 남로당 2인자 리승엽은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국은 문화선정성 부부상은 일제의 밀정, 김정제 민족보위성 부상은 일제 강점기 관료,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의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경력 등을 친일인사로 지적하였다.
Ⓒ 한국전쟁 직전
1949년 대한민국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김일성은 대한민국 남침 계획을 세운다. 1949년 9월 24일 북조선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지시문이 김일성에게 전달되었다.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중국혁명이 성공한 다음에는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조선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을 상대로 끈질기게 남침을 허락해달라고 48회나 요구했고 스탈린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했다. 스탈린은 48번씩이나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김일성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남침을 허락하고 만다. 이 때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통제관으로 옹립한 것을 후회했다. 1950년 3월에는 박헌영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허가이 조선노동당 책임비서와 함께 물자 원조와 무기 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으며,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했다. 6.25전쟁 발발에서 김일성의 주동적인 책임은 고르바초프의 방한을 계기로 공개된 소련의 외교문서를 통해 증명되었으며, 국제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년 동안의 한국전쟁 시기 교전 일방인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이끌었다.
Ⓓ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공하면서 한국전쟁(6.25)이 발발했다. 한국 전쟁 3일만에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6월말에 김일성은 서울에 나타났고 일부 좌익 공산주의 시민이 그를 맞이하였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최측근이자 남로당원인 리승엽을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가 곧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서울시장직을 겸하게 했다. 조선인민군은 전쟁 1개월 만에 대한민국의 경기도, 강원도와 충청북도를 점령한 뒤, 대구근처 낙동강 인근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며 인민군의 허리를 자르는 효과를 나타냈다. 그이후 인민군의 패주와 탈영이 계속되었다. 일부 남한지역에 남게 된 인민군 패잔병과 공산주의에 경도된 일부시민들은 빨치산을 조직한다. 그들을 남부군이라고 칭하기도 하며 지리산 지역에서 계속적으로 대한민국과 연합군의 전선후방을 교란하고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1950년 9월, 조선 인민군이 패주하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각각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조선인민군총정치국장의 명의로 인민군에게 현지사수를 명령하였으나, 인민군의 패주는 계속되었다. 인민군의 사기가 저하되면서 인민군의 패주와 탈영은 계속되었다. 1950년 11월 강건이 전쟁 중 전사하자 김일성은 박헌영 등과 직접 강건의 장례식을 주관하고 시신을 운구하였다. 한국 전쟁 중에도 전쟁에서 후퇴할 때 전쟁의 운용을 놓고 박헌영과 갈등하였다. 10월 8일 전쟁에서 후퇴할 때 ‘산으로 들어가 유격작전을 하자.’는 김일성의 주장에 박헌영은 철수론을 주장하며 반대하며 다투는 모습이 중국 대사가 모란봉의 지하 집무실에 방문했을 때에도 목격되었다. 또한 11월 7일 10월혁명기념일에 만포진의 소련대사관에서 열린 연회에서는 둘은 언쟁을 했는데,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야, 이자식아. 만약에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다. 너 무슨 정세판단을 그렇게 했는가?’라고 하면서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벽에 던져 병을 박살냈다고 전한다.
Ⓔ 한국전쟁시 김일성의 남침결정과 소련의 지원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와, 흐루쇼프 전 소련 서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스탈린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고, 1950년이 되어서야 남침을 허가하게 되었다. 소련은 직접적인 대규모의 군사 지원은 보류하기로 하였고, 그 대신 공군 조종사와 교관 등 비교적 간접적인 지원을 하게 되었다. 결정적인 군사 지원은 중공의 모택동이 하게 되었고, 이 약조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1949년 3월부터 스탈린에게 남침을 위한 직, 간접적인 지원을 요청하였고, 또 이를 승인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미국이 UN 군으로서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고, 그래서 김일성의 계획을 반대하였지만, 내전을 끝낸 중공의 모택동은 북한의 남침을 적극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소련의 승인과, 중공의 대규모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남침에서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판단, 6월 25일 새벽 대한민국을 침공했지만, 미군과 UN군의 참전으로 적화통일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1950년 10월 12일에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덕천을 거쳐, 임시수도인 강계까지 가는 일이 생겼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12월 6일에 평양을 수복했다.
② 전전 정적 숙청 작업
한국 전쟁의 실패로 김일성은 궁지에 몰렸으며, 전쟁에 실패한 책임을 부총리인 박헌영에게 전가시켰다. 이후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패전책임을 정적들에게 돌림으로써 북조선내에서 자신의 확고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이전인 1945년부터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평양시 고려호텔에 감금한 뒤 1950년 10월 처형하였고 1952년 연안파인 무정, 1953년 같은 소련파의 라이벌이던 허가이를 제거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의 경우 북조선 당국에서는 미국의 폭격에 의한 폭사라고 주장한다. 1951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인 허헌이 대동강에서 익사했는데, 그의 사망도 김일성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③ 전후 복구 시기와 전후 정적 숙청 작업
1953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김일성은 공화국 최초의 조선인민군 원수가 되어 칭호는 ‘김일성 장군’에서 ‘김일성 원수’로 불리게 되었고, 1953년 7월 28일 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일급을 수여받았다. 그때부터 박헌영의 남로당파, 김두봉의 연안파, 허가이의 소련파를 숙청하여 권력 체제를 구축하였다. 1958년 3월에 열린 전국청년공산주의건설자대회에 참관, 청년들은 당의 령도밑에 자기 손으로 밝은 새 시대, 새로운 공산주의시대를 개척해야 한다고 하며 모든 청년들이 자기의 열정과 지혜와 능력을 공산주의건설에 바칠것을 주장하였다. 1958년 11월 약산 김원봉을 차례로 숙청, 살해하였다. 1953년부터는 박헌영의 구 남조선로동당 계열에게 한국 전쟁 패전 누명과 미국 간첩들과 교신했다는 누명을 씌워 임화·이강국 등을 살해하고 남로당계를 체포, 심문, 고문하였으며 1955년 3월 박헌영을 체포, 반당종파행위 등의 누명을 씌워 외무상과 부총리 등 공직에서 해임시킨 뒤 수감, 1955년에서 1956년사이에 처형하였다. 박헌영과 남로당 계열의 숙청의 발판을 마련한 조선로동당제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북조선 내 모든 정치세력이 공식적으로 김일성을 수령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종석은 ‘결국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비상상황 속에서 1인권력집중이 가속화되면서 당내에서 김일성에 대한 수령 호칭이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권력기반이 강화된 것은 아니었으며, 소련과 중국은 김일성을 견제, 감시했다. 중국의 모택동의 지원을 받는 친중파와 그외 친소파 그룹, 스탈린 사후 스탈린에 비판적이었던 소련의 김일성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하면서 김일성과 다른 정파 사이에 긴장감과 견제가 지속되었다. 한편 전후 김일성을 향한 ‘경애하는 수령’이라는 호칭은 더욱 일반화되어 조선인민군이나 조선로동당을 넘어서 다른 정당, 종교단체에 이르기까기 북조선내 전사회적으로 통용되었다. 이와 함께 김일성의 혁명활동에 대한 강연회가 개최되는 등 그에 대한 개인숭배 현상도 계속되었다.
④ 주체사상 확립
3년 한국 전쟁 휴전 이후 연안파는 전쟁 책임론을 주장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김일성은 남로당계열을 숙청한 뒤 연안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 1955년 이후 연안파에 대한 숙청은 서서히 진행되어 1956년 주영하, 내무성 부상 이필규, 문화선전부 부상 정률 등이 처형되었다. 한편 중국계였던 최창익은 김일성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이를 8월 종파사건이라 한다.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할 무렵인 8월 30일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 8월 전원회의에서 연안파 최창익과 소련파 박창옥 등이 김일성의 독재화를 주장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귀국후 김일성은 1957년 최창익을 반당종파행위로 숙청하였고 김일성의 권력집중화와 일당독재를 비판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두봉은 1964년 숙청당했다. 1958년 당시 중국을 방문, 송경령과 오찬중인 김일성1958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송경령 등과 면담하였다. 1960년대 초반부터 주체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정착시키며 중국·소련에 대한 자주노선을 선언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대규모의 산업 시설과 교통 시설, 그리고 복지 시설이 모두 파괴되자 산업 시설들을 복원하기 위해 전후복구사업인 천리마운동을 1957년에 처음으로 실시했으며, 항운교통의 중심인 남포항을 현대적인 시설들을 갖추고, 소련의 원조를 통해 통제경제를 받아들였다. 그는 제2세계 간 외교에서 크게 벗어나서 제1세계와 제3세계 국가 간의 폭넓은 외교활동을 실시하였으며, 국민들의 계몽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실시, 평양직할시를 공식적인 수도로 지정할 것(실제 지정은 1972년이다. →평양직할시 연혁)을 결정하였다.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4기 14차전위원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선출되었다.
⑤ 천리마 운동
1960년 이후 연안파 일부와 국내파 일부를 제외한 정적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김일성은 휴전 이후의 황폐화된 기간산업과 경제 성장을 고심했다. 자본주의(資本主義)의 모순을 지적, 비판하며 자본주의체제는 비인간성과 자체모순에 의해 자멸하고 결국 사회주의(社會主義)로 전환된다는 신념 하에, 인류 역사는 물질과 계급에 의해 진행된다는 이념을 자신의 신념을 확립, 강력한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하고 인민들을 교육하였다. 김일성은 전후복구 뒤 경제살리기의 목적으로 천리마 운동을 실시하였다. 본래 1956년의 김일성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작된 것으로 김일성의 권력강화에 반대하는 소련파, 연안파 등의 반발과 비판으로 1957년부터 시작될 예정인 경제5개년계획을 앞두고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파를 숙청한 뒤 자본·물자·기술 등이 부족한 정국에서 내부 역량과 인민의 자발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했다고 판단, 이를 위한 집단적 증산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12월 전원회의 직후 김일성은 강선제강소를 방문하여 생산력 증대를 위해 인민에게 직접 자력갱생의지를 호소하면서,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는 구호를 선포하여 주민들의 생산 증대의욕을 촉구하면서 확산되었다.
⑥ 4·19 전후대응과 통일론
1960년 북한의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 4월 21일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 「그를 교체해야 한다. 그러나 충분한 권위와 특색을 지닌 인물이 없다. 또 다시 부통령이자 민주당 최고위원인 가톨릭신자 장면도 적합하지 않다. 그나마 권위를 누리고 있었던 조봉암 진보당 당수은 평화적 조국통일이라는 당 강령을 성급하게 공표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명령으로 체포돼 지난해 처형되고 말았다. 부르조아 민주당 최고위원인 조병옥은 1960년 3월 15일 대선후보였으나 선거를 며칠 앞두고 급사했다. 현재로서는 남조선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이다. 그러나 그는 친일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은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다.」 한편 그는 국제부장 박용국을 시켜 남한내 주한미군만 철수되면 평화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며 설득을 하게 하기도 했다. 1960년 여름 연방제통일론을 발표하였으나 장면 내각에 의해 거부당하고 장면내각은 외무부를 통해 반박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1963년 비밀리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에게 밀사 황태성을 보냈으나 황태성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살해되었고, 68년 두 번째 밀사로 부총리 박성철을 내려보냈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는 두 번째 밀사에 대한 응답으로 1971년부터 이산가족 명부확인과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되었으며, 박정희는 이후락을 평양에 파견하여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공작원을 대한민국으로 남파시켰다. 1·21 사태 당시 조선인민군 일부는 휴전선 근방에서 검거되었지만 일부는 서울까지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긴장한 박정희는 남한 국군복무 기간을 6개월 연장시켰고, 향토 예비군을 강화하였다. 1968년 여름의 수해 당시 김일성은 수해구호물자를 남한으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김일성은 한국 전쟁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68년 11월 과학원 개발팀과의 담화 통일 실패 요인을 미국군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 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빨리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2) 국가주석 추대 이후
(1) 국가주석 취임 1기
① 헌법개정과 주석 취임 (1970년 ~ 1972년)
Ⓐ 주석 취임 초기
스탈린 사후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이 단절되거나 소련 내부의 스탈린식 독제체재에 대한 비판 그리고 중국에서의 문화혁명과 그 후의 평화 외교 정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의 지원도 어렵게 되자 김일성은 1인 전제체제를 강화하고 내부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이른바 자주, 자립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1970년 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재선출되었다. 1971년 8월 6일 캄보디아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환영하는 평양 대규모 집회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전(全)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들과 만날 용의가 있다.”라고 천명하였다.
1972년 5월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발표하였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 성명을 통해 남북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1972년 헌법 개정으로 국가 권력 구조를 국가주석 중심 체제로 바꾼 다음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박정희 정권 붕괴 이후에도 껄끄러운 관계 가운데 대한민국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구호물자와 쌀을 지원하기도 했다. 1984년 수해 당시에는 쌀 5만 석(약 7800t),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t의 대규모 수해 구호물자를 대한민국에 지원하였고, 전두환은 이를 수용하였다. 5·18 광주 학살로 인한 감정의 골이 깊게 패였음에도 전두환이 수해 물자를 통크게 받아들이자 김일성은 의외의 반응이라며 놀라워 했다고 한다.
Ⓑ 대한민국과의 통일 교섭
닉슨독트린이후 찾아온 미·소 간의 데탕트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1972년 5월 이후락은 평양의 김일성 집무실에서 한 시간 남짓 비밀회담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21 사건과 관련,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다. 그때 나도 몰랐다. 우리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짓이다. 보위부 참모장, 정찰국장 다 철직(撤織)시켰다고 주장했다. 또 6·25 얘기가 나오자 “과거는 과거고…. 다시는 남침 않겠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 국가주석 취임 직후 평화통일론을 다시 선언하고, 남한의 대통령 박정희에게 박성철 등을 사절로 파송하였다. 그의 평화통일 제안을 전면 거부하던 이승만, 장면, 윤보선 등과는 달리 박정희가 협상 제안을 일부 수용함에 따라 매년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 회담 및 이산가족 상봉을 허용하였다. 7.4 남북공동성명의 발표에 일부 지식인들은 환영하였으며, 이후 남한측에서 제의한 주기적인 이산가족 상봉을 승인하기도 했다. 1972년 여름 부산과 강원도 영월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특별히 구호물자로 쌀 3만석과 약간의 옷감을 보내왔고, 박정희 정권은 이를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남한 내부의 민주화 요구, 미국의 인권 문제 제기와 미군철수론, 영국과 프랑스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 박정희의 핵개발에 대한 외교적 마찰 등의 문제에 시달리면서 남북교섭은 별 진전을 못보고 흐지부지 되었다.
② 권력기반 강화 (1972년 ~ 1980년)
72년 12월 15일에 채택된 새로운 사회주의헌법에 따라 그는 국가수반인 공화국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장(겸임)에 취임하였다. 이후 사회주의 헌법에 의거해 북조선의 체제에 비판적이던 납북인사들과 지식인들을 숙청하면서 비판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김일성은 국가주석 취임 직후 평화통일론을 주창하고 남한의 대통령 박정희에게 박성철 등을 사절로 파송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군비를 증강하였다. 남한의 박정희정권 역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려던 카터 정부가 등장하자 군비를 증강하고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였다. 대한민국과의 꾸준한 남북고위급 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였으나 1974년 4월 그는 대남공작 담당요원들과의 담화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우리는 조국을 통일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두 번 놓쳤습니다. 그 한번은 6.25이고 또 한 번은 4.19입니다. 6.25때에는 박헌영의 허위보고 때문에 기회를 놓치게 됐고, 4.19 당시에는 연락부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해서 놓쳐버렸습니다. 그때 내가 함경도 지방에서 현지지도 하던 도중에 4.19가 터졌다는 보고를 받고 평양으로 달려올 정도로 연락부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심각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4.19는 남조선 혁명정세가 무르익은 징조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4.19와 같은 좋은 기회가 다가오면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동무들도 이런 각오를 가지고 언제든지 기회가 오면 즉각 대처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춰야 하겠습니다.」이후 표면적으로는 매년 남북대화를 진행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남한의 대통령 박정희가 피살되자 김일성은 조문단 파견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남한에서의 권력이양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1212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집권하자 김일성은 남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어났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남한의 신군부는 이를 남침책동으로 규정했다. 당시 미국은 12.12 사태 직후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50% 정도로 판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도 했다. 1980년 10월에 있은 당 제6차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총비서로 또다시 재선되었다.
③ 권력안정과 후계체제 구축 (1980년 ~ 1988년)
1980년 5월 동유럽 순방을 떠났으며, 5월 26일 치우셰스크의 초청을 받아 루마니아를 공식 방문했다. 1980년 이후 남북평화통일에 대한 방안 모색을 내각과 인민위원회에 지시했고, 1980년 10월 공식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에 남북통일 방안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제안했다. 대한민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집권 초기 정권 안정을 위해 1982년 북한과 ‘잠정협정’을 맺고 비정치적, 비군사적 교류부터 점진적으로 하자는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제의했다. 1984년 9월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도 1천300억원이 넘는 수재가 발생하자 북한은 9월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7천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지원을 제안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년전 미얀마에서 북한이 저지른 아웅산묘소 폭파 암살 시도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제안을 전격 수용했다. 북측의 식량지원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본회담을 가진 데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실현시켰고 남북간 최초의 경제회담도 시작했다.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은 김일성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김일성 역시 같은해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 전두환은 허담밀사에게 “김일성 주석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경청해보니 내용 하나 하나가 내 생각과 거의 동일합니다. 김 주석께서는 공개적으로 말씀이 계셨지만 40년 전에는 민족해방 투쟁으로, 그리고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애써오신 충정이 넘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남북한 최고책임자들의 회담이 이와 같은 분위기라고 할 것 같으면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는 것도 나의 의견입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그는 후계자로 김영주, 김평일을 내정했으나 이들이 김정일(金正日)과의 후계구도 경쟁에서 패하자 김정일을 후계자로 승인했다. 이후 김정일에게 정치 경험을 쌓게 한 후 서서히 당권과 군권을 넘기게 되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부자 간의 다소 갈등 있었다. 1987년 6월 6월 항쟁이 발생하자 그는 ‘온 민족이 남조선인민들의 통일애국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하도록 지시하였다. 6월 항쟁으로 대한민국에서 군사정권이 붕괴되고 1988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올림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참석 여부 논란이 있었으나 그는 이를 일축했다.
④ 남한 인사들과의 교섭 (1988년 ~ 1990년)
1988년 8월 대한민국의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경원이 비밀리에 북조선을 방문, 2박 3일간 국가주석 김일성 및 부총리 허담 등과 회담하고 남하하였다. 홀로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면담한 서경원은 대한민국 안기부로부터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박철언을 비밀리에 북조선으로 파견하였다. 박철언은 그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1988년 11월 방북 당시 김일성을 면담하지 못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는 책에서 ‘사전에 남북 핫라인을 통해 비밀스러운 방북 사실을 북측에 알렸는데, 미국의 도청 가능성을 우려해 ‘대북 밀사’란 직접적인 말을 쓰지 못해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지방출장을 갔었고, 면담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8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을 제의하며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사회단체 대표, 추기경 김수환, 민중·노동운동가 백기완, 목사 문익환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3월 25일 목사 문익환이 방북, 그와 두 차례 회담을 하고 4월 10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월 21일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임수경이 일본 도쿄를 거쳐서 방북, 그와 면담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노태우 정권에서는 반발하여 이를 이적행위로 규정했고, 방북하였거나 협상에 참가한 문익환, 임수경 등을 체포, 구속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2) 주석 취임 2기
① 국가주석 재선 (1990년 ~ 1994년)
김일성은 1990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재선출되었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에도 재추대되었다. 동시에 의회의장격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수위(首位)에 추대되었다. 1992년 4월 13일 인민군 대원수 칭호를 받았다. 한편 북조선의 정치인 및 소련, 중국의 정치인들로부터 회고록 집필 제의가 들어왔다. 김일성은 처음에 사양했으나 마음을 바꿔 당에 회고록 발간을 추진한다. 회고록 편집과 외교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여, 1992년에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어 나온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2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공산주의국가들은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부에서는 탈북자들의 급증과 동시에 김일성 체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대한민국 내에서 김일성을 동경, 김일성 체제를 대안으로 삼던 주체사상파 역시 몰락을 거듭하면서 김일성은 ‘우리식 공산주의’를 주창하여 공산권 국가 붕괴의 파급효과와 공화국 내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② 개혁 개방 정책
동유럽의 민주화와 소련의 붕괴는 북에도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 초부터 김일성은 무역시장을 활성화하려 하였다. 같은 사회주의국가였으나 중국과의 무역조차 밀무역이 성행하였고 이를 인식한 김일성은 중국과의 교역을 대폭 확대시켜켰으며,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통상, 교역을 시도하였다. 1992년무렵부터는 미국과 일본의 영화와 음악이 북조선에 소개되기도 했다. 만성적 식량부족과 에너지난에 시달리는 북측으로서는 개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체제유지를 목표로 한 개혁없는 개방의 성과는 미미했고 1990년대 중후반 북한은 아사자가 속출하는 최악의 식량난에 봉착하게 된다. 1992년 개방 의사를 공식 표명하고 미국, 유럽 등과 적극적인 외교협상을 추진한다. 나진,선봉에 무역지구를 열어 일본, 미국과의 무역을 허용하였고, 신의주를 통해 중국 및 몽골, 중앙아시아와의 무역을 공식 허용하였다. 이들 국경 지대는 1950년대부터 이미 공공연히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993년에는 북조선 사회주의 헌법의 국가주석의 국방위원장 겸임조항 삭제를 지시하고, 국방위원장직을 김정일에게 이양하였다. 1993년 4월에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의 10대강령을 제시하였다. 이후 김일성은 남한의 지도자 김영삼과 회동을 약속하였다. 한편 1990년대 초반 그는 노벨 평화상의 예비 후보로도 한때 언급되기도 했다. 한편 김일성이 개방 정책에 호의적인 표현을 보인 것은 구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독일 통일로 동독의 붕괴 등에 대한 자극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92년 이후의 개방, 개혁과 일부 미국산 제품에 대한 수입을 허용하면서도 이는 일부 무역이나 경제정책상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며 못박아 두고,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하여 사상적인 단결을 꾀하도록 당과 기관에 지시하였다 한다.
③ 말년
1994년 초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기도 했고, 심근경색 및 목뒤의 물혹이 심해져서 입원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영삼과의 회담은 1994년 초로 예정하였으나 김일성의 병세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1994년 6월 평양에서 전 미국 대통령 카터의 방문을 받고, 핵문제와 관련한 조미협상을 진행하였다. 1994년 7월초 묘향산으로 휴양을 다녀왔다. 미국의 전 대통령 카터를 면담할 때 남북정상회담을 제안, 회담 준비가 진행되던 가운데 7월 8일 새벽 2시에 평양 집무실에서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 북조선 지도부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은 유훈 통치라는 이름으로 지금 북조선 정치체제 및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공식 사망 장소는 평양 주석집무실이지만, 묘향산 향산초대소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제기된 배경에는 김일성이 요양을 하려 향산초대소에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의 아들 김정일이 향산초대소를 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의 상황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김정일에 의한 암살 내지는 사망 방관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아직도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이야기와 함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대남정책문제로 아들인 김정일과 갈등이 빚어서 그 스트레스로 사망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오전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16시간 이상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타고난 체력과 정신력으로 장시간 정무를 강행하였으나, 70대 이후 부터는 체력의 한계를 불러와 감기와 당뇨와 목 뒤의 물혹, 피부병 등의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고, 만년에는 간혹 졸도하기도 했다. 북조선의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등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김 주석이 “심장혈관과 동 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 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북조선의 아나운서들은 김주석의 서거 당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일성 동지께서 뜻하지 않게 서거하신 것은 우리 당과 혁명의 최대의 손실이며 온민족의 가장 큰 슬픔"이라 표현하였다.
(3) 사후
1994년 7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애도기간이 있었고, 7월 19일 국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김일성 사망 다음날인 9일 방송을 통해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김일성동상에 호상(護喪)을 선다는 소식이 보도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각 도, 시, 군들에서 간부들과 대학생들, 보위부와 안전부까지 동원되어 김일성동상 호상사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북조선 정부 당국은 처음에 ‘10일장’을 결정했으나, 김정일이 “인민들이 수령님과 헤어지기 아쉬워한다”면서 3일을 연장해 결국 7월 20일에야 장례가 치러졌다. 각급 조직별로, 가족별로 생화를 준비해 김일성 동상을 찾아 애도를 표했으며, 동상이 없는 시골 에서는 김일성연구실에 있는 초상 앞에서라도 애도를 표시했다. 1994년 7월 20일 김정일은 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된 김일성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평양 시내를 한바퀴 돌고 다시 의사당에 안치하도록 조치했다. 이날 아침 평양시민들은 김일성의 영구차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었다. 영구차가 지날 때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은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수령님, 수령님’하면서 통곡했다. 지방 주민들도 조직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TV시청을 통한 장례식에 참여하였다. 김일성이 사망하자 세습권력체제를 공고히 구축한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하였고, 권력승계 과정에서 김일성 주변의 일부 정치세력들은 당내 영향력을 잃고, 황장엽 등 일부인사는 국외나 남한으로 도피하였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황장엽을 비롯한 북한의 일부 고관대작들이 김일성 수령님은 인정해도 김정일따윈 인정 못한다.는 논리로 김정일에게 정면도전을 했다. 결과적으로 황장엽은 진압당했으며 김정일은 북한의 국가수반이 되는 데에 성공했다. 이에 김정일이 반대세력을 숙청하려 했으나 황장엽은 이미 미국으로 도망쳤다. 그 이후 김정일의 부하 장령 중 한 사람이 천안함 침몰 사건을 빌미로 황장엽 암살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① 남한에서의 추도 논란
1994년 7월 8일 대한민국의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한국일보, 세계일보 등의 언론은 일제히 김일성의 사망 기사를 헤드라인 톱뉴스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에서 총학생회 사무실 옆에 김일성의 빈소를 마련하는 행위를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7월 15일 새벽 대한민국 정부는 경찰을 파견하여 전남대 총학생회와 학교를 수색 4장의 추모 유인물과 전단지들을 압수하고, 총학 건물내 총학생회 사무실 옆에 설치된 김일성의 빈소를 철거하였다
(4) 추모 행사
김일성이 사망한 뒤 평양에서는 대규모 추모 행사가 벌어진다. 이 추모 행사는 5년과 10년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북조선은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1997년에 평양 모란봉구역에 대형 추모탑을 세워놓고, 지방 도시에 1개씩 세웠다. 그리고 김일성이 태어난 날을 ‘태양절’이라고 부르도록 했으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강령을 통하여 “김일성 주석이 탄생한 1912년 4월 15일부터 ‘주체연호’를 사용한다.”라고 했다. 1997년부터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이른바 ‘수령 우상화 정책’을 펼쳐 김일성이 생전에 살았던 금수산의사당을 확장하여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부르도록 하고, 김일성 주석의 생일을 맞이하여 4월의 봄 예술축전대회를 개최하고, 김일성의 동상을 지방에 세웠다. 김일성이 생전에 말하기를 “만약 내가 죽는다면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히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하였으나, 그의 유언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김일성의 주검은 방부 처리가 되어 금수산기념궁전에 있는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다.
3) 성격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그가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 때 동북인민혁명군이 부르던 것을 1993년에 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와 “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외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 <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은 국제친선전람관에 내부에 전시했다. 그리고 김정일의 50돌의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한문으로 지어졌고, 량강도 삼지연군에 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또한 그는 서예 활동에 대해서 적극 참여하였는데, 북조선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으며,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려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조선의 종합대학중의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등이 있다. 특히 김일성은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비밀리에 들여와 읽었다고 한다. 1989년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석영이 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했을 때, 김일성은 황석영이 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었다. 김일성 주석이 좋아했던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다.
4) 주석 재임기간 중
(1) 경제 정책
(2) 외교 관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루마니아와 짐바브웨 등의 일부 유럽과 아프리카 국가들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김일성은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등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이렇게 맺어진 의형제들 중에 큰형이 되었다.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은 차우셰스쿠와 무가베는 각자의 나라에서 김일성과 똑같은 방식을 적용해서 개인숭배사상을 국민들에게 고취시켰는데 루마니아의 경우 이 때문에 고위 장성들마저 시위대에 가담할 정도로 차우셰스쿠에게 철저하게 돌아섰으며 짐바브웨의 경우 전무후무한 살인적인 경지를 넘어 지옥적인 경지에 도달하는 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한국전쟁 이후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는 미국의 지도자들과도 회담을 하였고, 1992년부터는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5) 상훈
1953년 7월 2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화국 영웅’ 칭호 수여
1953년 7월 2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제1급
‘공화국 영웅’ 칭호 3번 수상, ‘공화국 3중 영웅’
2006년 러시아 ‘국제자선기금 세계의 예술의 보호자들’ 금별 훈장
6) 주요 저서
<김일성 선집>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 김일성주석 회고록>
<진보적민주주의에 대하여>
<김일성 전집 1~12>
7) 기타
(1) 배움의 천리길
북조선에서는 그의 ‘배움의 천리길’을 기념하는데, 이는 그가 1921년 만주 바다오거우에서 칠골로 유학한 일이라는 설과 1925년 칠골에서 만주로 건너간 일이라는 설이 있다. 생전에 70여개 국가와 국제기구들로부터 180여개의 최고훈장과 메달, 30여개도시의 명예시민칭호, 20여개의 이름있는 다른 나라 대학으로부터 명예교수, 명예박사칭호, 169개 나라 당 및 국가, 정부수반들과 진보인사들로부터 16만 5,920 여점의 선물을 받았다.
(2) 종교
김일성은 초기에 부모와 목사 집안이었던 외가의 영향으로 개신교 장로교 예배당에 다녔다. 그의 양친이 장로교 신자였고 외조부 강돈욱과 외삼촌 강진석, 외삼종조부 강량욱은 모두 장로교 목사였다. 유년기에 장로교 신자 생활을 했다는 의견이 있으나 청년기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후 김일성이 신앙활동을 했다거나 신앙적이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3) 신체적 특징
김일성의 목 뒤에는 야구공과 동일한 크기의 혹이 나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과의사들은 김일성의 혹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였다.
*김일성상 |
*김일성훈장 |
*김일성청년영예상 |
*김일성소년영예상 |
*김일성여성영예상 |
*조국통일상 |
8) 평가와 비판
(1) 긍정적 평가
① 경제 성장과 산업시설 육성
김일성은 북조선의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화와 공업화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정책들을 입안했다. 1956년에 남포시에 있는 제철공장 방문한 뒤 천리마운동을 실시하였다. 천리마운동 기간에는 공업 현대화가 진행되고 남포항과 평양역 같은 산업교통시설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지방 여러 곳에 발전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조선 경제에서 공업의 비율이 70퍼센트를 차지했을 만큼 놀라운 공업 발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은 1990년대 중국과 나란한 발전된 공업국가에서 생활수준이 낙후된 농업 국가가 되었다.
② 항일 독립 운동 공적
그는 또한 항일운동에도 이바지했다. 1937년에 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비롯해서, 일제 강점기 동안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은 가운데, 그가 일으킨 보천보 전투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반공 체제 하에서는 보통 김일성은 독립운동가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1985년, 1986년경 이후 대한민국의 일부 역사학계 및 학생운동권 계열 등에서는 김일성이 북조선에서 독재를 한 것과, 한국 전쟁의 주요 가담자라는 것과는 별개로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은 인정해야 된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좌파 성향 한홍구 교수는 ‘이젠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어떻게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무엇인지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고 평하였다. ‘가짜 김일성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책에 <만주국군>이란 것이 있다. 이 책에는 1937년 11월 김일성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책을 조금 더 넘겨보면 죽은 줄 알았던 김일성이 다시 나타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전에 목을 벤 사람은 김씨 성을 가진 유격대 지도자일 뿐, 김일성은 건재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은 너무나 허점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 일일이 반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홍구에 의하면 문제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가짜이라는 것이다. 한홍구는 김일성 가짜 설에 대해 ‘해방 뒤 이북에 돌아온 김일성이 유명한 김일성이 아니라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은 1945년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이 34살로 너무나 젊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당시 평양공설운동장에 모인 군중이 김일성이 백발을 휘날리는 노장군이라고 생각했을 수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세계는 아니었다.’라고 반박하였다. 조선 인민군 부총참모장을 지냈던 이상조는 항일투쟁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일본군이 김일성을 없애기 위해 존재했을 정도로 인물은 북한의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상조는 중공군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김일성을 찾지못했다고 한다. 또한 김일성이 10만회 이상 전투를 했다는 것은 매일 수십차례 싸웠다는 얘긴데 이는 논리상 모순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 부정적 평가
그는 박헌영과 더불어 한국 전쟁의 최고 주범이다. 또한 김일성은 인권을 말살하는 스탈린주의를 엄격하게 고수했고,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에 기초해 제시된 주체사상을 통치이데올로기화 하면서 독재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켰다. 이렇게 변질된 주체사상은 북조선 인민들의 사상과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정적탄압과 독재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한국 전쟁 이후 권력 강화 및 집권을 위해 연안파, 국내파, 대륙파(중국파)를 비롯한 다수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을 대량숙청하는 등 정치탄압을 가한 것도 비판이 되고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 공업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농산물의 값이 폭등하고, 무차별식으로 계단식 논밭을 무리하게 개간해서 식량생산의 자급률을 떨어트리는 등 농업의 낙후화를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① 김일성 진위 논쟁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의 역사관이 첨예하게 대립되는데, 이는 북조선 측으로서는 그의 이력에 대한 신화화가 주체사상의 수령론의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운동가들 중에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람이 여럿이며, 결코 김성주가 최초가 아니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미 군정은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성주가 1929∼1930년 만주와 조선 국경에서 활동하던 실제 김일성의 유격부대에 합류했으며, 실제 김일성이 55∼60세에 숨지자 명령 때문인지 자발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유명한 전사(戰士.김일성)’로 가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 다른 주장은 오영진(吳泳鎭)의 《하나의 증언》, 이명영(李明英)의 《진위 김일성 열전》, 허동찬의 《김일성 평전》, 임은의 《북조선왕조성립비사》 등에 나타나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해방직후 집회현장에 나타난 김성주가 너무 젊어서 평양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하며, 김일성 가짜설의 주요 근거로 내세운다. 또한 숙청당한 박금철의 증언과 남로당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북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유포한 사람들은 친일파나 일제의 고등계 형사 출신, 또는 한민당과 같은 우익단체의 간부들이다. 이들은 분단상황에서 이북의 김일성이 식민지 시기의 말기에 민족적 항일영웅으로 존경을 받은 김일성이라면 지극히 곤란한 위치에 처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한홍구에 의하면 특히 가짜 김일성 설의 고전적 문헌인 이북의 <김일성 위조사>나 오영진의 <하나의 증언>이 한국전쟁 시기에 제작, 배포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홍구는 ‘가짜 김일성 설’의 유포에 기여한 사람이 박정희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가짜 김일성 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에 이미 널리 퍼졌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전파되었다. 이승만의 경우 반민특위를 물리적으로 와해시키고 수많은 친일파를 등용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승만 본인을 친일파로 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어 한홍구는 “그러나 5·16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하고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이름을 갖고 관동군 중위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은 박정희로서는 분단상황에서 이북과의 정통성 경쟁이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항일 활동으로 소련으로부터 적기(赤旗) 훈장을 받은 일 등을 근거로 부정한다. 그만한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처우를 받았다고 근거로 보며, 소련 정부가 아직 새파란 나이의 젊은 김성주에게 훈장을 줄 정도면 그것은 소련도 인정할 만큼 그의 활동이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3차 조선공산당 대표였던 김철수(金綴洙)는 김일성이 가짜였다면 독촉(獨促) 회의 당시 내각 구성을 숙의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어린 김일성을 군사위원장으로 천거할 수 있었겠느냐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반문했다.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는 보천보의 김일성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며, 그러나 독립운동 위치는 북한에서 조작한것이라고 말했다.
② 미화 논란
문인들은 김일성 찬양에 앞장섰다. 김일성은 46년 위대한 우리나라의 태양으로 예찬되었으며, 김일성을 우리 민족의 양심이고 의지이며 우리 민족의 신념이며 희망으로서, 우리 민족의 샛별로 묘사한 조기천의 약3천여 행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은 47년 북조선 예술축전에서 1등상을 받고 각 학교의 교과교재로 채택, 사용되었다. 신형기는 김일성의 과거의 영웅적 풍모를 알리는 일화와 기사, 그리고 문학작품들은 특별한 기획이나 지도의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③ 김일성 항일운동 미화 논란
김일성의 항일운동 경력에 대해서는 이견의 소지가 있다. 북조선의 공식 기록에는 김일성은 비교적 혁혁한 성과를 올린 항일 운동가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자의 능력이나 생애를 과대 평가하는 북조선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상 김일성의 항일 운동이 조작되고 과장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짜 김일성설이다. 하지만 가짜 김일성설을 지지하지 않는 측에서도, 김일성의 항일 운동이 과장되고 조작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항일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과 일본의 전쟁을 소련군에 참여하여 활동한 것이므로 항일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우익 성향의 문서나 관변문헌과 북조선 문헌들의 김일성 활동 서술은 대조적으로, 이는 북조선의 문헌들이 그의 활동을 사실 이상으로 미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라는 평도 있다.
④ 3.1 운동 기록 논란
유관순 등을 3.1 만세 운동의 주요 인물로 평가하는 대한민국이나 세계 다른 국가들의 역사관과는 달리, 북한은 3·1운동이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을 선두로 평양에서부터 전개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주역을 김일성의 증조부인 김응우가 격퇴했다는 주장도 있다. 북한은 1970년대 후반까지 3·1운동을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수십만의 서울 시민이 반일투쟁을 시작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기술해왔다. 그러나 1980년부터는 평양 장대제에 있던 숭덕여학교에서 수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북한 선전매체는 “이 날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울린 종소리를 신호로 김형직이 몸소 육성한 애국적인 청년학생과 인민을 선두로 10여만 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북한의 소학교와 중학교에서는 1917년 김형직이 결성한 ‘조선국민회’가 3·1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유관순 열사의 항일운동도 김형직이 지도한 결과라고 해석하고 있다. 심지어 3·1운동 당시 김일성이 7살의 어린 나이에 만경대에서부터 평양성까지 시위대열에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북한 정권이 김일성뿐 아니라 항일 역사와 전혀 관계 없는 김일성의 아버지, 할아버지 등도 항일 투사의 전형으로 묘사하며 이들에 대한 가계 우상화물을 북한 곳곳에 설치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김형직을 '반일민족해방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전환시킨 선구자'로 칭송하며 김형직사범대학, 김형직인민병원 등의 칭호를 붙였으며 양강도 북쪽에는 ‘김형직군(郡)’, 그의 숙부 이름을 딴 ‘김형권군’(郡)까지 설치됐다.
⑤ 보천보 전투 논란
북조선에서는 ‘보천보 전투’를 지난 50여 년 동안 김일성의 항일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중요한 선전 자료로 이용해 왔다. 북조선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서강(西崗)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제시하고 행동에 옮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하였다. 거리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환영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이 교시했다는 연설문도 싣고 있다. 김일성 및 북한연구가들에 따르면,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 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은 90여명을 인솔하여 보천보를 습격했다.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등 뒤로 피하던 어느 경찰관의 딸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김일성은 총기고에서 경기관총 1자루, 소총 6자루, 권총 2자루,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다. 이어 농사 시험장, 삼림보호구,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보천보 전투는 전과로 치면 미미한 전투였다. 적의 무기를 탈취한 것이 전과라면 전과지만 2명의 민간인도 희생됐다. 북조선 교과서가 보천보 전투의 구체적인 전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보천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 1군 2사, 4사와 2군 6사(김일성 부대)의 연합 부대의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부대 단독 작전인 것처럼 조작되어 왔다. 김일성 부대는 보천보 전투 이후 1938년 말부터 일제 토벌대에 추격당해 장백현으로 이동했다. 1938년 12월~1939년 3월 사이 100일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몽강현으로부터 압록강 연안 북부 국경일대를 향해 이동하게 된다. 북조선은 당시 김일성 부대가 일제 군경의 포위와 극심한 식량난,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등 헤아릴 수 없는 지독한 난관을 물리치고 행군을 벌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뉴라이트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있었던 ‘고난의 행군’은 북조선당국의 명백한 경제실정으로 인한 대아사 사태와 식량난을 호도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주민들로 하여금 현재의 경제난으로 인한 '고난의 행군'을 당연시 하도록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⑥ 남북협상과 기만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라는 이름으로 남한의 중도파 및 일부 우파 정치인을 상대로 남북협상을 제안하였으나 이는 남한의 중도파 및 일부 우파 정치인을 끌어들여 정통성을 내세우려는 그의 책략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1948년 4월의 남북협상 이전에 48년 2월 북조선의 인민위원회를 설립하고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인민위원회 구성은 사실상의 정부 수립이었으며, 정부 수립 전단계에까지 갔음에도 남북협상을 빙자하여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의 남한 정치가들을 농락하였다는 것이다. 남북협상 중 그는 김구, 김규식에게 남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한다고 해도 정부수립을 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자 김일성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다. 이를 놓고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이 그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이다.
⑦ 정적 대숙청
⑧ 인권 탄압
⑨ 경제정책 실패
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6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두 배 이상 경제력을 유지해왔으나, 이는 소련의 무상 지원 13억 루블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막대한 지원 덕분이었다.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이 어려워진 1970년대 이후로는 다시는 대한민국 경제력을 능가해보지 못했다. 김일성은 1950년대 후반에 관료주의 폐단 문제가 제기되었을때도 이를 해소하지 못했고 정치,사상교육과 동원의존도를 더욱 높이는 정책만 추진했다. 국제환경의 변화도 경제건설의 집중도를 떨어뜨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김일성은 1950년대 중반의 중,소 분쟁 이후 1960년대 들어 대한민국에서 한일국교가 수립되자 '미국 제국주의, 소련 수정주의, 중국 교조주의, 일본 군국주의에 포위되었다.'고 인식하면서 '자립경제노선'을 더욱 강조했다. 여기에 줄곧 국민총생산 20~30%에 이르는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며 ‘4대 군사노선’을 강조했다. 1970년대,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명기한 '사회주의헌법'을 발표한다. 주체사상이 사상변화를 추동할 여지를 극도로 좁히게 만들어 민주화운동과 시민의식을 크게 저하시키는 역할을 했고, 이어 생산력 저하 문제를 극도로 심화시켰다. 이 시기 김일성은 ‘사상사업’을 강조해 국유화 중심으로 운영하였고, 시장,개인영농이나 상공업의 자율성을 전면 부정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김일성이 사망할 무렵 최악에 이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외국의 무상 식량지원 없이는 버틸 수 없게 만든 ‘외세 의존적 지도자’로 비판받았다.
(3) 좌우명
인민을 하늘처럼 위한다는 이민위천(以民爲天)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집권하에서 개인 우상화 및 인권유린과 민중탄압이 자행되어왔다.
9) 의혹
(1) 여성 편력
김일성의 공식 아내는 김정숙과 김성애이다. 그 밖에 김정숙을 만나기 전 한성희(1914년생)과 사실혼 관계였고, 그 밖에 여러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 주석궁의 안마사 출신 제갈씨 여성에게서 1971년에 서자 김현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김현은 뒤에 김정일에 의해 처형당하고 말았다. 아내 김정숙이 임신 중일 때 김성애와 불륜관계에 있었고, 김정숙이 출산할 때는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김일성의 정열적인 여성편력으로 김정숙의 개인적 고민이 발생하였다. 특히 북조선 주둔 소련군 로마니코프 사령부의 타이피스트로 있던 15년 연하인 김성애에 대한 김일성의 이성적 접근은 김일성의 조강지처의 지위마저 위협할 정도였다. 김정숙은 홀로 다섯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망하는데, 공식 사인은 하혈과 과로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김일성의 외도에 병이 심해져 죽었다는 설과, 임신 중 풍을 맞고 죽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김성애의 존재는 김정숙 사후 15여 년이 지나서야 공개되었다. ‘조선중앙연감’에 실린 북한 여맹 대회기록을 보면 북조선민주여성동맹 1차, 2차 대회는 명시가 되어 있지 않다. 3차 대회부터 조금 언급이 있기 시작한 것이 4차 대회에 이르러서는 대회 보고문까지 실릴 정도로 여성문제가 뚜렷하게 부각이 된다. 소녀의 치마를 들쳐올리거나 치마 속을 바라보는 행동을 반복하기도 하였다. 로리콘(로리타 콤플렉스) 기질이 있었다고도 한다.
(2) 여운형 정치자금 지원 의혹
남로당원이며 박헌영의 비서를 지낸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1946년 무렵부터 여운형은 김일성의 정치자금을 받아서 썼다. 또한 여운형은 비밀서신을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꾸준히 보냈다. 김일성은 교묘히 여운형을 지원했는데, 1946년 11월 공산당 내의 대회파, 인민당 내의 여운형파 남조선신민당 내의 백남운파는 김일성의 후원을 얻어 사회노동당을 결성했다. 이는 남로당에 흡수되었다. 남로당이 주도한 10월 항쟁은 (남로당의) 미 군정과 김일성에 대한 데모였다. 여운형은 10월 사태가 한창일 때 박헌영의 남로당과는 별개의 사회노동당을 결성했다. 그런데 미 군정이 남로당과 타협할 기색을 보이자, 당을 결성한지 11일만에 해체하였다. 여운형은 1946년 11월 11일 남로당에 서로 합당하자는 서한을 보낸다. 그러나 서한을 남로당에 발송하기 이틀 전, 평양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 형식의 보고서를 올렸다. 그 편지의 사본은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할 때, 그의 가방 안에서 나왔다. 그가 ‘46년 11월 9일에 여운형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고서 형식으로 보냈던’ 편지의 사본 중 일부는 미군정을 통해 미국이 입수했고, 일부는 남로당 측에서도 입수했다. 당시 서울에 있던 미군정 정치고문 조제프 제이콥스는 이 내용을 1947년 7월 31일자로 워싱턴의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조제프 제이콥스는 그 내용에 ‘여씨의 가방에서 발견 된 편지는 1946년 11월 10일자의 것이며, 여씨 자신의 친필로 된 것’이라며, ‘(여운형이) 김일성과 김두봉 등과도 통신하고 있었다.’고 미국 국무부에 보고했다.
여운형은 그의 자녀들을 김일성에게 맡기고 김일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서 썼다.
그러나 여운형이 좌익에서 몰락해 가자 김일성에게는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 여운형은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김일성이 싫다’는 발언을 했는데, 박갑동에 의하면 여운형의 ‘이 발언이 김일성의 귀에 들어가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누군가의 손에 죽게 되었다.’고 한다.
(3) 해방 당시 정치공작 의혹
여운형은 그의 정치 자금을 지원받는 동시에 그는 비밀리에 3.8선을 넘어서 북한에 다녀왔으며, 이후 비밀리에 김일성, 김두봉과도 꾸준히 서신 연락을 주고 받았다. 남로당은 남로당 대로 여운형의 주변에 프락치를 심어 여운형을 감시하기도 했다. 여운형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사망했을 때, 조그마한 손가방을 하나 갖고 있었다. 그 속에 여운형이 1946년 11월 12일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이 들어 있었다. 여운형이 암살된 후 그의 가방에서 나온 편지 사본에 의하면, 여운형은 평양을 세 번 정도 방문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여운형은 이 편지에서 김일성, 김두봉의 지도를 바란다는 의견을 적어 놓았다. 「나는 합당 준비위원회 밑에서 사회노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이 무조건 합당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지금 나는 남로당 측과 교섭 중입니다. ...(이하 중략)... 나는 북조선의 동지 귀하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나를 도와 주시도록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편지의 내용을 보면, 「김일성 동지, 김두봉 동지 귀하! 민주주의 수립을 위한 투쟁에 얼마나 바쁘십니까. 나는 이제 병상에서 일어나 최근 정세가 아주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시 귀하들에게 이곳의 현황을 간단히 알리려 합니다. 3개 좌익 정당의 합당문제는 희망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남조선 로동당은 반(半) 지하에 들어간 상태로 조직되고 있습니다. 옛 공산당원들이 그들의 프락치들과 결속하여 남로당을 조직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그들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공산당의 프락치 조직은 강화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민당의 결성 초기부터 조직부분의 활동은 항상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하 중략)... 반면 사회노동당은 공산당에 반대하는 그룹에 의해 조직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남로당과 사로당의 합당 준비를 허가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내가 취할 제1단계 조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일 정당을 결성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기 때문에 그들이 사회노동당의 중앙 본부를 설치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합당 준비위원회 밑에서 사회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이 무조건 합당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이하 중략)... 나는 북조선의 동지 귀하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나를 도와주시도록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운형은 이렇게 김일성의 도움을 청했다. 여운형은 공산당과 직접 관계없는 미 군정청과의 관계도 일일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고하고, 그들의 양해를 구했다. 또한 여운형은 한 편지에서 김일성에게 ‘남조선 로동당이 바른 길을 걷도록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박헌영과 남로당은 여운형의 주변에 프락치를 심어 그가 북조선의 김일성, 김두봉과 연락하는 것을 포착하기도 했다. 남로당원이었던 박갑동은 여운형이 그를 남북 모두의 지도자로 봤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남로당 측의 시각에 의하면 여운형은 원래 북조선의 김일성과 김두봉의 지원을 받아 당을 분열시켜서 사로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수파로 전락하여서 김일성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봤다. 여운형은 김일성에게 공산당 뿐만 아니라, 미 군정 관련 사항도 일일이 보고했을 정도였고 남로당은 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공산당에서는 이러한 여운형의 움직임을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박갑동은 1945년 9월부터 해방일보의 정치부 기자로 근무했는데, 이때 여러 정치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어 많은 정보를 모았는데, 이 중에는 여운형이 미 군정사령관 존 하지 중장에게 불려가서 “왜 가족(아이들)을 김일성에게 다 갖다 맡겼는가”하는 힐문을 당했다는 소문도 접하였다. 여운형의 큰딸 여난구는 일본에서 온 송성철(宋性撤)과 연애결혼을 하여 그녀만 빼놓고 둘째 딸 여연구 이하 아들딸들을 모두 평양으로 데리고 가서 김일성의 양자, 양녀로 맡겼다는 것이다. 박갑동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여운형의 답은 ‘자기 아들딸들의 공부에 대하여 미국은 아무 관심도 표시해 주지 않았는데, 김일성만이 모스크바 유학을 시켜주겠다고 하여 보냈다’는 것이었다. 여운형의 답변에 대해 박갑동은 ‘나는 만주 마적 출신의 김일성에게 자기 자식들을 ‘인질’로 보낸 여운형에게 실망하였다. 이때부터 여운형의 정치노선은 김일성의 앞잡이가 될 것으로 느끼고, 그의 언동을 주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1946년 여름, 여운형이 평양에 갔다 오더니 자기의 인민당과 백남운의 신민당과 같이 3당을 합당하자고 공산당의 박헌영에게 제의하였다. 이것은 스탈린과 북조선 김일성의 지령이었다.
그러나 3당 합당 대신, 각 당내에서 분파싸움이 시작되어 공산당 내에서는 전당 세포회의를 열어 다수결로 김일성파를 축출했다. 인민당과 남조선 신민당에서도 중앙위원회를 열어 다수결로 여운형과 그의 지지파를 출당시키고, 남조선신민당에서도 백남운과 그의 지지파를 제명, 출당시켰다. 1946년 11월 23일, 3당 합당대회를 겨우 열어 24일에 남조선 신민당의 새 위원장으로 선출된 허헌을 위원장으로 선출하여 남조선로동당을 결성하게 되었다. 11월 24일 회의에 대회의 이름으로 여운형을 특별초청하였다. 공산당 측 입장으로는 ‘이는 남한에서 대중적 인기가 많은 여운형을 김일성 편으로 쫓지 말고 다시 남ㅎ나 쪽으로 돌려 세우려는 배려에서 였다.’고 한다. 여운형은 거절하지 못하고 오후에 출석하여 인사말을 했다.
그러나 그가 남로당 결성 당일에 배신자로서 할 수 없이 끌려나온 격이 되었다. 공산당은 이후 여운형을 김일성과 내통, 연락한 정보를 빼냈고, 그를 배신자로 취급하고 있었다. 회의 장소에서는 그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박갑동은 ‘그가 무슨 변명을 하는지 기자석에서 그의 얼굴을 주시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다른 공산당원 역시 그의 발언을 예의주시하였다.「여러분은 많은 분은 이미 큰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여러분과 한 배를 같이 타지 못하고 강가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을 모아 뒷배를 타고 따라가겠습니다.」 그가 연설을 끝내자 회장은 터질틋한 박수와 환호 소리로 울렸다. 박갑동은 당시 그의 언변에 탄복했다 한다. 여운형이 무사히 퇴장하고 대회가 끝날 무렵, 폭탄이 날아들어와 터져서 박갑동의 옆에 앉아 있던 기자가 부상당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그날 그가 약속한 바대로 따라오지 않고 백남운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했다. 그러나 근로인민당의 보이지 않는 핵심은 일제 강점기 때 변절한 좌익들로서 남로당 안에서는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평양의 김일성에 줄을 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는 대중은 없었다. 근로인민당이 해체된 후에 여운형은 정치적으로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 여운형과 떨어진 공산주의자들은 김일성이 직접 파견한 성시백의 선으로 몰려갔다. 김일성은 몰수한 옛 조선은행권을 남한의 성시백 조직에 홍수와 같이 제공하였다. 성시백은 김일성이 보내준 공작금으로 서울에서 두 개의 일간신문을 발행했다. 교묘한 위장으로 중앙일보와 우리신문이 당당히 합법신문으로 발행되고 있었는데, 중앙일보는 이우적이, 우리신문은 고석준이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83] 이우적과 고석준은 모두 김일성계열의 공산당원이었다.
(4) 여운형 암살 사주 의혹
해방 당시 김일성은 위장 전향자를 백의사에 들여보내 여운형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주장도 있다. 남로당의 '마지막 지하총책'이었다고 주장하는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여운형과 김일성은 공산당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공동의 적인 박헌영을 타도할 목적으로 손을 잡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여운형의 역량이 박헌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이에 실망한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자금지원을 중단했다 한다. 이에 여운형이 김일성을 비난하자 모의내용이 탄로날 것을 우려한 김일성이 여운형을 제거했다 한다. 박갑동에 의하면 신문 보도와는 달리, 미국의 자료에 의하면 여운형의 암살자는 김일성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또한 여운형이 좌익에서 몰락해 가자 김일성에게는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 여운형은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김일성이 싫다’는 발언을 했는데, 박갑동에 의하면 ‘이 말이 김일성의 귀에 들어간 것’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박갑동에 의하면, ‘이러한 근거자료들은 미국측의 자료에 있으며, 미국측 자료에 여운형의 진짜 암살자는 김일성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말한 “미국 자료”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며, 어떤 연구자도 이 자료를 찾아내지 못했다. 국사편찬위원회로 활동하고 있는 정병준 교수는 “어떤 자료에도 미군정이 여운형 암살에 조직적으로 개입했었다는 정후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반박했다. 동아일보 사장인 김학준 역시 “여운형과 김일성의 관계에 미뤄, 김일성이 여운형을 암살했다는 박갑동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박갑동에 의하면 김일성은 월남한 반공청년으로 위장한 한지근을 남파시켜 자연스럽게 우익청년조직인 백의사에 접근토록 하여 여운형을 암살하였다는 것이다. 체포된 한지근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때 남하한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한지근(이필형)은 개성형무소에서 복역 중 행방불명되었다. 소문으로 ‘한지근이 일본에 살아있다.’는 증언이 있어 예전에 한겨레신문 기자가 취재한 적이 있는데, 알고보니 고하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였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최근 2007년에 이정식교수는 ‘당의 주도권을 놓고 여운형과 다투던 남로당의 박헌영계열이 암살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여운형이 암살당한뒤 2개월 뒤, 존 하지 사령관은 서울을 방문한 미국 육군차관 드레이퍼에게 보호하기를 6월 말까지 북한 공산당은 여운형을 ‘미군정과 연탁한 배반자’라고 맹공격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그를 추도하겠다는 등 야단을 부렸다고 한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좌파에 의한 테러를 지적하기도 했고, 여운형의 둘째딸 여연구는 부친을 암살한 것이 종파분자들이라고 증언하였다. 여기서 종파분자는 박헌영 계열을 가리킨다. 이정식 교수는 이를 근거로 남로당 계열 등 박헌영계열이 암살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10) 약력
1919년 팔도구 소학교에 입학
1923년 3월 외척이 교사로 있는 칠골의 창덕소학교로 전학
1925년 만주 푸쑹 소학교로 전학, 졸업, 길림성 유원중학교로 진학
1926년 10월 17일 공산주의 소년단체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의 조직에 가담
1926년 아버지 김형직 사망. 이때 어머니 강반석은 중국인 부유층 남성 진환장의 첩으로 개가했다는 설이 있다.
1929년 유원중학교 3학년 재학 중, 불순사상 혐의로 중국 군벌에 체포
1929년 가을, 수감 중 유원중학교에서 퇴학당함, 화성의숙에 입학
1930년 5월초 출옥
1930년 6월 30일 카룬회의를 주관하고 공산주의청년과 마적단원들을 모아 조선혁명군을 조직
1931년 화성의숙 졸업,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
1932년 4월 25일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 그 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
1934년 3월 반일유격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예하 독립사단(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되자 중국군으로 활동
1934년 가을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으로 배속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 정치위원에 임명
1936년 3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회 위원
1936년 7월 동북항일연군이 편제개편 이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배속, 제1로군 6사단장이 되다.
1936년 5월 항일 통합조직 조국광복회 결성에 참여
1936년 함경남도에서 보천보 전투를 지휘, 일본군과 경찰관서를 습격
1940년 3월 25일 허룽현 훙치허에 있던 마에다 부대를 습격. 일본인 백여 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했으며, 탄약과 양곡을 전리품으로 획득하였다.
1940년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로 떠나 소련군에 입대,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소련 인민군 육군 소위)
소련군 대위로 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배속되어 5년간 복무, 군사교육과 훈련 이수
1945년 8월초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 결성에 참여
1945년 8월말 소련군 소좌로 진급, 귀국
1945년 9월 22일 평양에 도착
1945년 10월 소련군 소좌에서 예편
1945년 10월 8일~10월 9일 김일성은 38도선 개성에서 박헌영과 회담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38도선 이북에도 당본부를 설치한다는 그의 주장에 박헌영은 거절하고 분국 형식으로 당을 조직하게 됐다.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조직위원회를 조직
1945년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조직, 조공 북조선분국 집행위원에 선출(당수는 김용범)
1945년 11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장악, 12월 김용범을 몰아내고 책임비서가 되다.
1945년 12월 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대 책임비서로 선출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년 2월 15일 민족주의민주전선 북조선지부 위원장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 3·1절 27돐 기념회를 주관하다가 백의사 단원이 던진 폭탄을 피해 단상에서 뛰어 내림. 이때 그를 감싼 소련군 중위 노비첸코는 오른 팔을 잃었다.
1946년 3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개명하고 당수에 취임. 3월말 북조선공산당을 다시 북조선로동당으로 당명을 바꿈
1946년 6월 14일 민주주의민족전선 북조선지부 산하정당 소집, 임시정부 수립 계획을 논의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건, 최고인민회의 조직, 대의원의 한사람에 선출됨
1948년 3월 김구의 남북협상 제안에 수용
1948년 4월 평양직할시에서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주관
1948년 9월 황해남도 해주군에서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주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초대 총리에 선출
1949년 6월 30일 통합 조선로동당 위원장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3일만에 서울 입성
1950년 7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
1953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공화국 최초의 조선인민군 원수로 추대
1953년 박헌영을 실각, 남로당 출신들을 처형함
1956년 7월 19일 박헌영을 처형함
1958년 3월 무력으로 최고인민회의 장악,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을 강제 해임, 실각시킴
1958년 11월 김원봉을 숙청, 처형함
1960년 3월 마산에서의 시위를 보고 이승만의 퇴진을 예견함
1970년 조선로동당 제5차 전당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재선출
1972년 남북고위급회담을 박정희에게 제안, 사절단 교환후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1972년 5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 발표
1972년 10월 국가 주석 취임, 동시에 국방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선출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다시 재선
198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을 제의,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사회단체 대표, 추기경 김수환, 민중·노동운동가 백기완, 목사 문익환 등을 평양으로 초청
1989년 3월 25일 목사 문익환이 방북, 그와 두 차례 회담을 하고 4월 10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89년 6월 21일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림수경 일본 도쿄를 거쳐서 방북, 면담
1990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재선출되고, 국방위원회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에도 재추대되었다.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수위(首位)에 추대
1992년 4월 13일 조선인민군 대원수로 진급
1993년 2월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에게 방북을 제의
1994년 7월초 묘향산으로 휴양을 다녀왔다.
1994년 7월 8일 서거
11 가족사항
관계 |
성명 |
|
증조부 |
김응우(金膺禹) |
1845년 4월 8일 ~ 1930년 2월 10일 |
증조모 |
이씨(李氏) |
|
조부 |
김보현(金輔鉉) |
1871년 음력 8월 19일 ~ 1955년 양력 9월 2일 |
조모 |
리보익(李寶益) |
1876년 5월 31일 ~ 1959년 10월 18일 |
숙부 |
김형록(金亨禄) |
|
김형권(金亨權) |
1905년 11월 4일 ~ 1936년 1월 12일 | |
고모 |
김구일녀(金九日女) |
|
김형실(金亨實) |
||
김형복(金亨福) |
||
부 |
김형직(金亨稷) |
1894년 양력 7월 10일 ~ 1926년 양력 6월 5일 |
모 |
강반석(康盤石) |
1892년 음력 4월 11일 ~ 1932년 양력 7월 31일 |
제 |
김철주(金哲柱) |
1916년 6월 12일 ~ 1935년 6월 14일 |
김영주(金英柱) |
1920년 ~ | |
일본제국 육군관동군의 통역관 | ||
처 |
김정숙(金正淑) |
1917년 12월 24일 ~ 1949년 9월 22일 |
항일유격대원·공산주의 운동가 | ||
장남 |
김정일(金正日) |
1942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 |
국방위원장 | ||
손자 |
김정남 |
|
손자며느리 |
? |
|
증손 |
김이순 |
|
김한솔 |
1995년 ~ | |
손자 |
김정철 |
|
김정은 |
||
손녀 |
김혜경(金惠敬) |
1968년 ~ |
김설송(金雪松) |
||
김춘송(金春松) |
||
김여정 |
||
김슈라 |
본명 : 김만일 | |
어려서 사망 | ||
장녀 |
김경희 |
1946년 2월 6일 ~ |
당 중앙위원, 경공업부장 역임 | ||
사위 |
장성택(張聖澤) |
1946년 5월 30일 ~ |
정치인·국방위원 | ||
외손녀 |
장금송 |
1977년 ~ 2006년 |
처 |
김성애(金聖愛) |
1928년 ~ |
차녀 |
김경숙 |
1951년 ~ |
삼남 |
김평일(金平日) |
1954년 ~ |
자부 |
김순금 |
|
손자 |
김은송 |
|
손자 |
김인강 |
|
사남 |
김영일 |
1955년 ~ |
삼녀 |
김경진 |
|
사위 |
김광섭 |
주 오스트리아 북한대사 역임 |
후처 |
제갈씨 |
주석궁의 안마사 |
오남 |
김현 |
1971년 ~ 2001년 |
김정일에 의해 처형당함 | ||
후처 |
김송죽 |
|
사녀 |
이름불명 |
|
사촌 형제 |
김창주(金昌柱) |
정무원 총리 역임 |
고종 사촌 |
김정숙 |
정무원 총리 허담의 처 |
김신숙 |
최고인민회의 위원 양형섭의 처 | |
외조부 |
강돈욱(康敦煜) |
1871년 ~ 1943년 |
목사 | ||
외숙부 |
강진숙(康晋錫) |
목사 |
외삼종조부 |
김량욱(康良煜) |
1904년 12월 7일 ~ 1983년 1월 9일 |
기타 |
김용순 |
김정숙의 남동생 |
김달현 |
외조카 사위 | |
강성산 |
인척 | |
이한영 |
||
처남 |
김기준 |
김정숙의 형제 |
김기송 |
||
처제 |
김영숙 |
김정숙의 여동생 |
12) 일화
김일성 장례에 당시 전체 인민들이 총동원해 매일 생화를 들고 동상을 찾으려니 북한에 꽃이란 꽃은 전부 절판되는 진풍경을 보이기도 했다.. 김일성 사망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김일성, 김정일 생일날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다. 이 시기를 이용해 한시적으로 꽃장사에 나서는 주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평소 북한 돈 5원밖에 하지 않던 생화 한송이는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50원까지 뛰어 올랐다. 그것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러자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여지기도 했다. 2003년의 KBS 사장후보 인사청문회 당시 94년 김일성 사망 당시 한겨레 신문의 기자 정연주가 쓴 기사에 김일성 서거 라는 부분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정씨의 기사 3꼭지에서 '서거'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이는 모두 북한 당국자들의 발언을 인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정씨는 2000년 7월24일자 <한겨레> 연재물 '정연주의 워싱턴 11년 비망록'에서 “서거 2개월을 맞아 김일성 주석의 동상이 있는 만수대 주변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는 표현을 썼다. 정연주는 청문회에서 “94년 기사에는 ‘김일성 사망’이라고 썼다. 2000년 기사에는 그야말로 우연히 ‘서거’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 같은데, 이런 것을 하나하나 물고늘어지는 것은 냉전식 사고 아니냐?”고 반문했다. 대한민국 안기부 조사 과정에서 88년 그를 만나고 돌아간 서경원은 그의 손금을 그려온 것을 공개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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