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약산 김원봉 장군

감효전(甘曉典) 2012. 1. 31. 01:09

일제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이론적으로 논거한 사람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사의 변혁을 가져온 주체세력은 일제와 피흘리며 싸운 무장투쟁론의 실천가들이였다. 임진왜란의 의병부터 구한말의병, 안중근의사의 총탄으로 부터 시작된 우리 독립운동사의 주류는 무력항쟁의 역사이다. 무력항쟁은 역사에 대한 관념적 구성을 거부한다. 오로지 실천만을 강조하며 나 존재에 대한 모든 아집을 벗어 버려야한다. 대의를 위하여 소아를 희생하는 대아적인 인간이 아니면 진정한 무력항쟁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

 

20세기 우리독립운동사에서 무력항쟁의 우수한 기수들은 무수히 많이 나왔다. 그러나 가장조직적으로 가장 지구력있게 가장 열렬하게 그리고 타협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람을 뽑으라면 바로 밀양사람 '약산 김원봉'것이다. 그의 행적은 독립운동사상 가장 폭넓고 준비된 행보였다. 그 용맹한 조선의용대의  뿌리는 약산김원봉장군이 주도한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조선의용대 본부에서 시작된다.

 

 

 

 

약산 김원봉 그는 누구인가...그는 동학의 마지막 보루 '해월 최시형'선생이 단성사 뒷켠에서 처형되던 그해 1898년 8월에 밀양에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난 그곳 바로 건너편에서 3년후에 십자령전투의 영웅 석정 윤세주가 태어난다. 두 사람은 앞뒷집으로 형동생하며 같이 자라났다.이 두사람은 같이 서당에 다녔고 같이 밀양공립 보통학교에 다녔고 경술국치후 일천황생일날 같이 변소에 일장기를 쑤셔박고 같이 구타를 당하고 같이 자퇴한다. 그리고 같이 사립동화학교를 다녔고 같이 신흥무관학교를 다녔고 같이 의혈단을 창단했고 같이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를 만들었고 같이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단했고 같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이 두사람의 일생이야 말로 20세기 무장투쟁의 가장 기나긴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약산을 테러리스트라 잘못 오인하고 있다. 약산은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효율적인 전쟁수행의방편으로 테러를 선택한것이다. 그러나 그테러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한 공격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테러리즘이라는 말보다 의혈투쟁이라 해야 옳을것이다. 그리고 이 의혈투쟁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던지는 사람을 의사라 하는것이다. 나철 의사의 오적 암살단, 친일외교관 스티븐스을 저격암살한 장인환,전명운의사  이완용을 저격한 이재명의사 이등박문을 저격암살한 안중근의사 등 이 모든의사들의 개별적 화약이 있었지만 이러한 의혈투쟁을 조직적인 투쟁으로 만든사람은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후일 김구의 의혈투쟁도 김원봉의 의혈단 활약상에서 자극을 받은것이다.

 

김원봉과 김구는 오랜세월의 라이벌이였다. 물론 김구는 김원봉보다 한세대가 위다. 22살이나 차이가 진다.
김구를 19세기형 인간이라 하면 김원봉은 20세기형 인간이였다.김구는 김원봉을 아들처럼 생각하며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사람의 무게는 장개석 정권에서는 막상막하였다. 그리고 항상 김원봉은 김구를 앞질러 갔다.
소수의 의혈투쟁도 앞섰고 정규군 무력투쟁도 앞서갔다. 광복군의 창설도 조선의용군의 활약상에 자극을 받아 창설된 것이다.
김구와 김원봉을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하는 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위주로 기술되고 있고 그걸 듣고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말도안돼는 억측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 주류때문에 다른 애국지사들까지 폄하되는건 옮치 않은 생각이다.
모두가 다 똑같은 마음 똑같은 생각 똑같은 목적으로 그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약산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를 다녔을 그 시절부터 장개석과 인연을 이어갔다. 그는 폭넓은 신구의 교류를 하는 뛰어난 인텔리였다.
한학의 소양이 깊고 중국어를 탁월하게 잘했다. 그리고 문장력이 뛰어났다. 김구는 우직하고 김원봉은 날카로운 사람이였다.
김구는 덕의가 있었고 약산은 이지적이였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은 '자기생애에서 만난 가장 존경스러운 인물이다.약산은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홀로 행동하였다. 거의 말이 없고 웃는법이 없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에 열중 하였다.톨스토이의 글은 모조리 읽었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나 아가씨들은 멀리서 그를 동경하였다.'그는 로맨틱했고 빼어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친구들한테는 지극히 점잔코 친절했지만 매우 가혹할때도 있었다.
약산은 "혈관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은 의열투쟁을 할 수 없다. 그러치 못한다면 희생의 순간에 자기를 잊어 버릴 수 없다"라고 했다.

 

 

 

 

 

약산은 표충사를 떠나 중국으로 망명 천진에 덕화학당에 입학하였다가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곤 다시 서간도로 올라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게 된다. 약산은 신흥무관학교에서 정규독립군을 길러 일제와 싸우는것은 지극히 불가능하고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학교교육을 받고 앉아있을것이 아니라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 하려면 시급하게 급격하고 직접적인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주변에 학생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 열혈지사를 규합하여 적의 군주이하 고관과 적의 기관등에 폭탄을 던저 싸우자는 방안을 제시한다. 뜻을 같이 하는 8명의 학우들과 길림으로 가 그곳에서 '의혈단'을 창단한다. 후일 약산은 북경에 가서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났다. 단재는 약산보다 18살이 위다. 약산은 단재가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난 역사학자로서는 잘알고 있었지만,역시 구시대에 속한 사람일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약산 김원봉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동지의 활약상은 익히 들어 잘알고 있소. 참으로장한 일이오!" 만나는 순간 단재야 말로 이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젊은피가 끓는 열렬하고도 극진적이며 과감한 인간이라는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단재를 비롯해 후일 성균관대학을  세운  심산 김창숙과 같은 당대 석학들이 의혈단 고문으로 모셔져 약산을 지원하였다. 바로 단재는 의혈단을 위하여 6400자에 이르는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한다.

 

 

의열단과 김원봉 단장을 다룬 기사

 

 

의열단원들

 

 

도올 김용옥은 "내 평생 고금의 수많은 문장을 접하여 보았으되 이 단재의 조선혁명선언만큼 나의 젊은피를 끓게 만드는 정의로운 글이 없었다. 만고의 명문장이다"라고 확언하였다.

 

"푸른 날이 쓸데없으니, 칼아! 나는 너를 위하여 우노라!"단재 신채호의 개탄이다.
단재는 서슬이 퍼런 칼날처럼 살았다. 이승만을 미국의 위임통치를 청하는 매국노라 하여 이완용, 송병준보더 더한 역적이라 규탄했다.  그리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한 모든 대한민국임시정부요원들을 쓰레기같은 놈들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그는 아나키스트 국제활동을 하다 대만에서 잡힌다. 결국 10년형을 받고 도마 안중근이 순직한 여순감옥에서 살다가 보석도 거부하고 죽었다. 감옥에 있을때 그의 조선사 글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자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당시 조선일보가 소하연호를 ?는데 그것은 일본 역사를 인정하는것이라 비판하였다. 정말 일촌의 타협이 없는 칼날같은 인생이였다. 단재의 이러한 사상은 약산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주었다.

 

투쟁을 위해 가장중요한건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는 단체를 하나로 규합하는것이였다. 각고의 노력끝에 그는 9개당을 규합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단하게 된다.
당시 세계사적 대사건인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는 중국인들로 하여금 조선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만들게 되었다. 조선인들은 감히 중국인들은 생각도 못하는 일들을 장쾌하게 행하는 해결사요 은인으로 여겨 조선인들 후원하게 된다. 즉 독립운동 자금이 유입되는것이다. 이 시대의 변화를 약산을 재빠르게 파악하여 국민당 장개석을 포섭하여 지원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당시 김구는 윤봉길의 배후로 지목되어 피신하는데 급급하였다. 약산은 이와같이 발이 빨랐다. 윤봉길과 같은 정의롭고 정예로운 투사를 길러내는 조선인 군관학교를 만들어서 인재를 양성해 내기만 한다면 중국의 항일투쟁은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논리로 그들을 설득한 것이다. 장개석은 역사깊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도 중요하지만 의열투쟁의 혁혁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젊은약산을 지원하는것도 현명한 시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자금루트를 다원화한 것이다. 약산은 장개석의 후원을 받아 남경근교 사찰을 빌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운다. 그 학교의 1기생속에 안동퇴계이황의 혈손인  그 유명한 '시인 이육사'가 배출된다.  약산은 의혈단원으로서 사람을 모집하였고 그 투사들은 소수정예부대였다. 제 1기에 26명  제 2기에 54명  제 3기에는 36명을 배출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군사학교라기 보다는 무장의열투쟁을 할 수 있는 정신무장을 시키는 곳이였다.
군사학, 경제학, 각국의혁명사, 의혈단역사, 현대사중심의 한국사등 이론교육이 중심이였다.  아침 6시기상하여 저녁 9시까지 교육을 받았다.

그 머나먼 이국땅 외진 사찰에서 우리 조선의 젊은이들은 어떠한 이상과 로맨스를 꿈꾸었을까?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음이 구죽죽한 어촌(漁村)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달아 매었다.

남들은 기뻣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하는 쩡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를 벗어나면 태풍과 싸워가고 전설에 읽어 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 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도 비쳐주도 않았다.'

                                                                                             노정기(路程記) - 이육사(李陸史) 지음

 

광복이후 그는 1948년 8월 자진 월북을 한다. 김구선생의 남북협상제의에도 불구하고 남한단독으로 제헌국교를 성립하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였다. 해방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를 철저히 소외 시켰고, 결국 탈퇴를 한 약산은 임시정부와 이승만, 미군정에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했으나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지시로 총독부의 악질 경찰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돼 옷갖 수모와 고문을 당한다.

 

"내 일찌기 일본 왜놈들과 싸울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손에 수갑을 차다니"하며 통곡했다.

 

그 만큼 대한민국의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은 유명무실 매국노들의 천지였다. 결국 반쪽자리 정부로 미국의 간섭을 지금까지도 받는 아직도 독립과 통일을 하지 못하는 말도 안돼는 나라가 되지 않았던가. 그런 이유로 약산 김원봉장군은 현재의 지식인들로 부터도 빨갱이로 인식되는 과오를 범하게된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가는 빨간곳에서도 하얀곳에서도 그 자리를 찾을 수 없다. 약산을 북한에서도 결국 장개석의 스파이로 몰려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옥중에서 스스로 자결하는 비운의 죽음을 맞는다. 그래서 약산의 무덤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그의 고향 밀양에는 그의 부인인 박차정여사의 무덤만 있다. 두 분은 중국대륙에서 의혈단 동지로 만나 열렬한 투쟁속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우고 결혼하게 된다.부인또한 여성 독립운동단체 근우회 선전부장으로 조선여자의용대를 조직한다. 광서성 곤륜관 전투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고 후유증과 지병으로 1944 년  광복한해전 먼저 세상을 등지게 된다. 광복후 약산은 부인의 유골을 들고 자신의 고향인 밀양으로 와서 무덤을 만든다. 이 얼마나 로맨티스트인가.

 

약산의 의혈단 창단이야 말로 향후 모든 우리나라 무장투쟁의 모범이 되었고 바로 원류가 된것이다.
후대에 광복군의 결성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모든 무장투쟁론이 이 의혈단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다.
약산은 이념에 대한 일관된 헌신보다는, 항상 현실적인 투쟁을 먼저 생각했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 시켜야 한다.

 

출처 : ⓨou&ⓘ
글쓴이 : LaDolceVit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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