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약산김원봉장군장군의 처 박차정여사의 묘

감효전(甘曉典) 2012. 1. 31. 01:05

 

약산김원봉장군장군의 처 박차정여사의 묘|
 

 

 1월 8일에 밀양에 있는 독립투사 박차정여사의 묘를 찾아갔습니다.

 버스타고 기차타고 자전거타고, 현지인의 겔로퍼를 타고  걸어올라가 찾아뵈었습니다. 현지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데 스스로의 맘에 감히 이래도 되는가 싶더라구요.

아래는 네이버백과사전에 '박차정'으로 검색한 결과입니다.

부산 동래() 출신으로, 15세 때부터 조선소년동맹()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25년 일신여학교()에 입학해 조선청년동맹과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槿)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조사연구부장·상무위원·선전부장·출판부장 등을 맡아 여성 항일운동에 이바지하는 한편, 그해 12월 근우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전국적 반일학생운동으로 확대시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듬해 1월 부산방직 파업사건을 주도하다 다시 체포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해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에는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임명되어 사관생도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뒤 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을 거쳐, 1936년 7월 이성실()과 함께 남경조선부인회()를 조직해 부녀자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대동단결을 주도하였고, 다음해 11월에는 의열단 한중민족연합전선의 대() 일본 라디오 선전방송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8년 의열단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에 글을 투고해 무장궐기를 촉구하고, 그해 10월부터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맡아 항일 투쟁에 주력하였다. 이듬해 2월 장쑤성쿤룬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4년 5월 사망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덧붙이면

중국에 있는 박차정여사의 유골과 서거할 때 피뭍은 적삼을 남편인 김원봉장군께서 광복이 되자 김원봉장군의 고향인 경남 밀양의 사진의 위치에 직접 묻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