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의학

[스크랩] 이 시대의 허준(삼각산자락의 정민성선생)

감효전(甘曉典) 2012. 1. 27. 21:10
                      전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서대문구 약사회 사무국장 역임
                   불교신문 논설위원 역임
                 월간 여성불교 편집국장 역임
               중앙불교 승가대학 교수 역임
             문교부 지정 맹아학교 고등부 한방 침술교재집역임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고문
         한국약사향약연구회 명예회장
       서울간호전문대학 외래교수
     국립보건원 예방의학 객원교수
   식약청 한약재 관능검사 자문위원
한겨레신문, KBS, MBC, 불교TV등에 기고, 출연하여 향약보급, 부흥운동에 노력하고 있다.


이 시대의 허준 <'한겨레 신문'에서>

 

종합병원을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짧고 무성의한 진찰을 받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리는 무료함에 질릴 터이다. 더구나 예사로 반말을 내뱉는 일부 권위주의적인 의사들의 행태에서 거부감을 씻어버리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쉽사리 병원을 찾을 만한 생활의 여유가 있다면 그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치료비를 못구해 평생 '질병의 감옥에서 신음하다가 삶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민성(57)씨, 그는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이러한 의료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하여 '우리시대 허준의 길'을 걷고 있다고 평가될 만큼 옹근 30년 동안 민중의약의 새길을 열어왔다. 60년대초 약사한방학회를 조직한 이래 '민족·민중건강운동'을 꾸준히 펼쳐오면서 <민족의약의 재발견>을 비롯해 <우리 의약의 역사>(90년), <생활건강의 지혜>(91년), <생활침뜸학>(92년)을 연달아 선보인 그는 한국약사향약연구회 명예회장겸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고문을 맡고 있다.

 

남산서 혹독한 고문

전남 영광의 삼각산 자락(도장리 장그메)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민족의식에 눈을 뜬 것은 10살도 채 안되었을 때였다고 한다. 군남국민학교 2학년 무렵 소년 정민성은 광주사범출신 교생선생들한테서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소식을 전해듣고 깊은 감명을 받으면서 민족애를 키워나갔다. 그가 뒷날 민족의약의 길을 걷는 데에는 아마도 그때의 감동적 '계시'가 결정적 요인으로 꿈틀거렸을 법하다.
전쟁의 포연이 자옥하던 50년부터 몇년간 '우연찮게' 약재를 썰고 약첩을 싸는 뒷바라지 일들을 하면서 우리 고유의 향약을 접하기도 했지만 대학에서 그가 선택한 학문은 철학이었다.
54년 조선대 예술과에 들어갔으나 사상가들과 그들의 세계관에 목말랐던 그는 이듬해 전남대 철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정당활동에 뛰어들었다. 50년대 극우반공체제에서 진보정당의 깃발을 처음 올렸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을 '위협'했던 진보당에 입당한 것이다.
"입당 전에 조봉암 선생님을 단독으로 만났습니다. 그 분은 한날 한시간 동안 진지하게 들어주었어요. 그때의 소탈한 모습이 생생합니다. 전후 남한 현대사에서 그분처럼 민중에 뿌리를 둔 탁월한 정치인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보당 참여는 처음부터 험난한 시련을 예고하고 있었다. 진보당 전남도당(위원장 윤길중)상임위원으로 결성식을 준비하던 그는 '모처'에 끌려가 실컷 두들겨 맞았다. 결성식 전날 간부 2명은 허벅지가 칼에 찔리는 백색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진보당이 탄압받는 가운데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고향에서 공민학교를 개설하여 농촌의 문맹퇴치와 농민계몽운동에 적극 나섰다.
고향에 묻혀 있던 그에게 4월혁명은 '복음'이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혁신정당운동도 부활했고 그 또한 사회대중당 발기인겸 전남도당 조직·선전위원일을 맡았다. 그러나 그 부활의 싹을 싹둑잘라버린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그는 현상금이 걸려 쫓기는 몸이 된다. 서울로 숨어들어 지게와 손수레를 끌며 어렵사리 곤궁한 삶을 이어갔으나 2년만에 결국 붙잡혀 남산의 '무역회사'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때 그의 머리에 떠오른 인물이 손문이었다고 한다.
"전쟁의 와중에서 읽었던 손문의 자서전 중에 의사로서 민중 속에 들어가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침 저도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가 진정으로 그들을 알고 싶을 때였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가난으로 병원 목가는 사람들이 당시에는 많았거든요. 그래서 약사들을 찾아다니며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정민성씨는 이때 조직한 대한약사한방학회를 통해 민족의약의 개념을 제시하고 한방강좌를 실시했다. 그 자신부터 무서울 정도의 집념으로 <동의보감> <향약집성방>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분량의 의서 탐구에 나섰다.


의학의 정수는 예방

민간요법에 대한 그의 확신은 어렸을 때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견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외조부가 한의사였던 탓도 있었지만 큰 병치레가 잦았던 그는 양약보다 민간요법으로 건강을 되찾게 되어 우리 고유의 전승 의약에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되었다. 산좋고 물 맑은 우리 산하에서 생명을 얻은 풀과 나무들은 언제나 구하기 쉬울 뿐더러 가난한 사람들도 손쉽게 활용할 수 있었다. 그만큼 향약에는 민중의 슬기가 가득 담겨 있는 셈이다.
"향약은 철저하게 민중의 편에서서 민중의 건강을 돌보며 민중의 병고를 덜어주자는 거룩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학의 정수는 예방이거든요. 명의는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섭생의 이치를 일깨워주려 민중 계몽에 몸 바치는 반면 용렬한 의원들은 환자를 찾아내서 돈벌이에 여념이 없지요. 거듭 말하지만 의도(醫道)는 삶의 길을 바로잡고 다스리고 구함이지 뜯어내고 발라대고 땜질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는 한의사라는 언어규정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가 흔히 의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서양의사'로 호칭을 바꿔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한방으로 이원화되어 '반쪽의사'만을 두고 있는 현실은 의학 발전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민중 건강을 위해서라도 일원화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의술의 전문화와 대중화를 서로 모순되는 개념으로 보는 일반적인 시각도 큰 잘못이라고 그는 말한다. 지난해 연변의 민족의약연구소 초청으로 중국에 갔을 때 정민성씨는 환자의 병을 놓고 의사와 환자가 활발하게 토론을 벌이는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가 저서 <우리 의약의 역사>에서 꼼꼼히 밝히고 있듯이 특권계층화된 의사와 관료주의적 보건행정이 빚어낸 우울한 의료현실은 서양의학의 도입과 향약을 억압한 일본제국주의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민족의약의 길 또한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70년대초 '시국사건'과 관련해 주변사람들에게 검거 선풍이 일자 그는 정릉에 있는 한암자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전화위복이었을까. 그 일이 인연이 되어 77년 <불교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중앙부교승가대학에서 강의하는 한편 월간 <여성불교> 초대 편집국장을 맡게 된다. 이때 그는 불교혁신운동을 본격적으로 해볼까 하고 진지하게 일을 추진했지만 결국 두터운 '벽'을 실감한 채 짧은 시절 몸담았던 불교계를 떠난다
.

생활 보건운동 전개

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그는 지금의 약사향약연구회의 모체가 된 '한국 약사 침·구·약 개발연구회'를 조직하여 오늘까지 꾸준히 생활건강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그의 오랜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맺어가는 것일까.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가 자주적으로 출범하는가 하면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전통의 약에 대한 연구조직이 나날이 확산되고 있다. 경인지역 7개 대학교 약대생들을 중심으로 '향두레'모임이 발족했고 비슷한 조직이 광주와 대구에도 싹트고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제기되는 민중의 건강문제를 깊이있게 다뤄 구체적인 생활보건운동을 펼칠 구상을 하고 있다. 외로웠던 정민성씨의 민중의약의 길이 한결 힘차게 열릴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민중의약의 한길을 걸으면서도 척박했던 50년대 진보당에 참여했던 그의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애정과 기대는 남다르다.
"민중운동가들이 그동안 지나치게 자신들 내부의 노선투쟁만 해왔습니다. 실제로 민중의 삶에 이익을 주는 행동은 전혀 못해오지 않았습니까. 구체적으로 민중생활에 도움이 될 전망을 제시하지 못할 때 어떤 훌륭한 정치이념도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는 진보정당의 내일을 비관하지 않는다. 요즈음 흔히 '재야의 위기'를 들먹이지만 그에게는 다만 더 멀리 도약하기 위한 움츠림의 시간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어쨌든 정민성씨는 민족의약운동을 민중건강운동으로 한단계 높여 질적 비약을 이루려는 구상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의 꿈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인적 산업재해를 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생활정서와 일치될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한 부문으로 충분히 터잡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임에도 다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 반인간적 현실이 엄존하는 한 '우리 시대 허준의 길'은 활짝 열려 있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움직임은 멈추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순을 앞둔 오늘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뛰어간다는 그의 젊은 웃음이 믿음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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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성 명예회장은 각자 건강의 운전수는 본인이니 스스로 자기 몸을 알고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5일 서울역에 내려 홍제동에 있는 연구회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인근 식당에서 목사님,수녀님 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기자는 '불교신문'논설위원,중앙불교승가대 교수 등을 지낸 그의 이력을 떠올리며 오전에 범종교인들의 모임이 있었으려니 생각했다.

식사가 끝난 뒤 다시 사무실에 온 수녀님은 "내가 많이 아팠는데,선생님 덕분에 거의 다 나았다. 오늘도 건강 상담을 하러 왔다"고 했다. 목사님은 오전에 상담했다고 전했다.

교육부지정 맹아학교 고등부 한방·침술교재 집필위원과 심사위원을 지냈고 우리 전통 향약 보급과 부흥운동에 전력하는 정민성(72) 한국약사향약연구회 명예회장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 건강의 운전수는 자기 자신

"죽음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처럼 건강도 대신해 줄 수가 없어. 각자 건강의 운전수는 본인이지,의사는 조수에 지나지 않아." 상담을 하던 그가 갑자기 수녀님을 나무란다. 수녀님이 평소에 뜸을 놓으라던 부위에 놓지 않았던 것.

그는 양생,온천,한증,식이,부항,침뜸,약물 등 전통 '향약학'으로 일상의 건강을 스스로 돌볼 수 있다고 말한다.

6·25 시절 한의원에서 피란살이를 하면서 침과 약을 배웠던 그는 때마침 앓았던 '요도염'을 민간요법으로 스스로 고쳤다. 이후 조봉암 선생의 '진보당'등에 참여했던 대가로 '5·16'시절 도피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건강을 돌보기 위해 '향약구급방''향약집성방''동의보감' 등 고전을 읽으면서 전통의학인 향약을 재발견하게 됐다.

"우리 땅에서 난 약재로 질병을 퇴치하고 건강을 보호했던 전통'향약학'은 일제 강점기 때 중국 후한에서 옮겨온 것으로 매도되면서 한방(漢方)으로 변질됐고,전통의학은 민간요법으로 전락됐다"는 게 그의 설명.

그러나 향약학에는 일상적 건강보호와 질병 예방 및 치료에 관한 수단과 방법들이 수없이 많다는 그는 '약사회'의 심부름꾼으로 있던 1960년대 처음으로 약사들에게 향약교육을 시작했다. 현재엔 연구회와 강원도 인제에 마련한 '향약회관'을 오가며 건강 강의를 하는 한편 무료 봉사 도 한다. 지난달부턴 불교TV의 '선재스님 요리' 프로그램에 재료 설명자로도 출연 중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건강의 '손님'으로 착각하고 의사를 찾아가지만 자기 몸은 자기가 스스로 알고 예쁘다고 아껴주고 관리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 30년 된 마사지와 서예,통변의 습관들

그렇다면 형형한 눈빛과 맑은 피부가 우선 눈에 들어오는 70대의 건강비결은 뭘까?

"병원 안 가고,주사 안 맞고,종합검진 한번 안 받고,하루 여섯시간을 서서 강의하고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와도 끄덕없다"는 그는 몇가지 습관을 수십년째 지속하고 있었다.

오후 9시 취침,오전 3시 기상 습관을 지닌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날 땐 호흡과 손발운동 등 준비운동을 한 후에 일어난다고 했다. 갑자기 일어나면 혈압이 급상승한다는 사실을 고려한 습관이다.

또 세수를 하고 난 후엔 손으로 얼굴과 목을 마사지해 물을 말린단다. 한 부위를 55번씩 마사지해 전체를 말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7~8분. "한의원 시절 목을 마사지하면 면역기능이 왕성해져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드름도 많던 터라 이를 얼굴까지 적용시켰다. 55번은 '주역'에서 착안한 숫자 우주의 숫자인 1에서 10까지를 모두 더한 수"라는 게 그의 설명. 마사지 덕분인지 방송 땐 '피부미인'이라는 말을 듣곤 한단다.

세수를 마친 후 그는 집 마당의 자갈밭을 맨발로 30분 걸어 기혈순환을 돕고,그 후 30분은 서예를 한다. 40년째 지속된 습관으로 서예는 정신집중은 물론 손가락운동에 좋다는 게 그의 말. 이 외에도 주 2회 경락 마사지 목욕을 한다.

이와 더불어 '소식'과 '통변'을 강조했다. 그는 최근엔 나이를 고려해 '두 끼니'만 먹는다고 했다. 간식은 절대 사절. 그러나 끼니수는 사람의 직업에 따라 달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창 일할 나이의 육체노동자에게 '두 끼니'는 무리라는 것. 단,위의 80% 정도만 채우는 소식원칙은 지켜야 한다. 채식이나 육식을 가리지 말고 말이다.

또 그는 "하루 한 번이 아니라 먹을 때마다 바로 화장실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먹은 것이 배설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쌓여 있던 것이 나가는 것으로 몸에 쌓아둔 노폐물은 독소가 될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

"어렵게 들리겠지만 습관 들이기 나름"이라는 그는 "식사도 운동도 노동도 조금 부족한 듯이 하는 것이 몸도 마음도 건강한 길"이라고 덧붙였다.

# 급할 땐 손끝을 따고 오과차를 마셔라

향약의 예방의학적 기능을 강조하는 한편 현대의학과의 조화도 중요하다는 그는 위급상황의 대처법과 일상적 감기 예방법을 귀띔해 줬다.

체하거나 기절했을 때는 열손가락 끝을 1~2㎜ 찔러 피가 나게 하라는 것. 손끝은 뇌수나 눈과 직접 연결돼 있어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그는 또 발바닥 중앙의 '용천'이나 코밑 한가운데인 '인중'을 따 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일러줬다.

또 겨울철 감기예방엔 '대방약합편'에 등장하는 '오과차'가 제격이란다. 오과차란 다섯가지 과일을 우려낸 차로 노인들의 기부족이나 감기기침,가래에 좋다.

정욕제이며 항암제인 호두 10알,심장질환과 기침에 좋은 은행 15알,조혈제인 대추 7알과 소화제이자 정력제인 밤(껍질째) 7알,그리고 공자도 식후엔 꼭 세쪽씩 먹었다는 생강 한덩이를 적당량의 물을 넣고 우려내 '꿀'을 타서 먹으라는 설명. 듣고 보니 가정에서 만들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

그는 "무엇이든지 이루는 사람이 그것이 무엇이든지 끈기와 인내로 이룬다. 하기 싫을 때도 물론 있겠지만 내 몸과 마음을 위해서 이 정도 봉사하는 것은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자세로 심신의 건강을 돌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출처 : 靈光
글쓴이 : 연흥사불갑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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