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무의식 - 내 안에 전체가 있다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스위스의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했다면, 융은 이 정신분석학적 개념인 무의식을 더욱 발전시켜 집단무의식이라는 심리학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프로이트와 더불어 현대 심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주요한 공헌을 한 그는 만년에는 연금술과 동양적 신비주의로 기울었다.
흔히 피라미드라고 하면 이집트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특히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가장 규모도 크고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는 사실 고대 문명의 발원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또 멕시코에서부터 하와이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물론 모양은 약간씩 다르지만, 돌들을 층층이 쌓아올린 기본 구조는 모두 비슷하며, 심지어 우주의 형상을 축소했다는 의미나 지배자의 무덤으로 쓰였다는 용도도 대개 같다. 고구려 광개토왕 또는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는 중국 지안의 장군총도 사각 피라미드 형태로 지어져 있다. 지금처럼 매체가 발달한 것도 아닌 고대에 어떻게 세계 각지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비슷한 의도를 지닌 비슷한 모양의 건축물을 만들게 되었을까?
비슷한 것은 피라미드만이 아니다. 세계 어느 민족이나 신화가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공교롭게도 이 신화들은 기본 구조가 일치하는 것이 많을뿐더러 등장 인물들도 비슷한 경우가 꽤 많다. 알에서 태어난 주몽이 나중에 자라서 고구려를 건국하게 되는 우리나라의 설화나 늑대가 키운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창건하게 되는 로마 건국 신화가 비슷하고,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등등 거의 모든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도 그렇다. 심지어 중국의 강시와 서양의 좀비, 아일랜드의 레프러컨과 우리나라의 도깨비 같은 민간의 미신도 서로 캐릭터와 발상이 비슷하다.
이처럼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여러 민족들이 공통적인 요소를 많이 품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지리적 환경이 비슷한 탓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전적으로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같은 사람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융이 보기에 그런 현상들은 단지 환경의 문제도 아니며, 우연이 아니라 오히려 필연에 가깝다.
사본이 있는 것은 원본이 있기 때문
앞서 보았듯이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계기 중 하나는 꿈이었다. 환자들이 꾸는 꿈은 평소의 ‘의식적인’ 상태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을뿐더러 환자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있던 측면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 전까지 심리학자나 정신분석 의사들은 꿈이라는 현상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아니면 꿈도 의식의 연장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꿈이 무의식의 발현이며 나름대로 엄정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의식이 빙산의 일각이라면 무의식은 빙산 자체라고 말한다.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가 ‘꿈의 해석’일 정도로 프로이트는 꿈을 중시했다.
이 점에서는 프로이트에게서 한 수 배운 융도 마찬가지다. 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환자들의 꿈 이야기에서 공통된 이미지들이 무수하게 튀어나오는 것에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각기 살아온 배경과 처한 환경이 다른 환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꿈에는 영혼, 귀신 들림, 악마, 대지, 야만인, 성자 등등의 이미지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거이었다. 심지어 환자들이 말하는 그 이미지들의 형상조차 서로 상당히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꿈에 나타나는 환자들의 환상이나 상징은 고대의 설화나 신화에서 보이는 것들과도 놀랍도록 비슷했다.
이렇듯 공간적으로나(환자들의 문화적 · 개인적 차이) 시간적으로나(수백, 수천 년에 달하는 고대 신화와의 시간적 차이)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이미지가 반복된다는 것ㅇ느 무슨 뜻일까?
일단 각각의 개별적인 경우들이 서로 공통적인 측면을 상당수 포함 하고 있다면, 그 배후에 뭔가 근본적인 요소가 있음을 연상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 근본적인 요소가 일종의 원본과 같은 역할을 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이미지의 사본들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융은 그 복사본들의 원본을 원형(archetype)이라고 부른다.
다분히 플라톤이 말한 사물의 본질, 즉 이데아를 연상시키는데, 융이 말하는 원형은 그것과 다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사물이나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본질이지만, 원형은 인간 각 개인의 심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심리 안에 내재해 있는 역사적이고 집합적인 기억의 본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원형은 인간 심리의 본성을 규정하는 초인격적 인간 심리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인간 개인으로서는 이 원형을 거부할 수도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다.
융은 인간의 원형이 다른 동물의 본능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슴이 태어나자마자 걷는 것처럼, 상어가 알집을 벗어나자마자 사냥을 시작하는 것처럼 동물들은 처음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본능을 지니고 태어난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나서 처음 맞는 1년 동안은 제 발로 일어서기는커녕 몸조차 추스르지 못하는 절대 약자로 살아간다. 더구나 인간 사회에서 생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기 위해서는 태어난 뒤에도 몇 년이 걸리며, 배움을 마치고 성인 사회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또 10년 이상이 더 걸린다. 모두 합치면 인간은 태어나서 20년 동안이나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어른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에게 동물의 본능에 해당하는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인간에게는 생물학적 본능보다 오히려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본능’이 큰 작용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원형이다. 동물이 조상에게서 본능을 물려받듯이 인간은 조상에게서 원형을 물려받는 셈이다.
누구나 스스로 원해서 태어나지는 않았듯이 누구나 이 원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인간 개인은 원형이 규정하는 범위 내에서만 사고하고 행동한다. 또한 원형은 대단히 보편적이다. 앞서 각 민족들이 신화가 놀라우리만치 유사했다는 점을 이야기 했는데, 그 이유는 공통적인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원형은 인간 개인이 처한 문화나 시대와는 무관하게 심리의 본성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요컨대 원형은 인간을 인간이도록 해 주는 기본 구조, 즉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듯 원형이 인간 개인을 통제하고 있다고 해서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만 볼 필요는 없다. 원형 구조는 역동적인 구성을 취하며 심리 에너지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원형을 가장 커다란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사실 인간이 지닌 모든 힘과 에너지는 이 원형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원형과 자아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원형에서 더욱 큰 에너지를 얻어낼 수 있다.
개별 무의식에서 집단무의식으로
어떤 개인도 원형을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나거나 할 수 없다고 말했으니, 원형은 당연히 무의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개인적 무의식과는 다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이 유아기에 경험했던 내용이 의식에 의해 억압되어 형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융의 원형은 어떤 개인의 경험보다 앞서 존재하는 초인격적 본질이다.
모든 개체의 안에 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개체를 넘어서는 무의식, 그래서 융은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집단무의식은 원형이라는 충실한 기억의 ‘소자’로 만들어지는 무의식이다. 옛날에 살았던 조상들이 경험한 집단적인 기억이나 이미지들이 원형으로 보존되어 집단무의식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것이 각 개인에게 투과됨으로써 개인의 무의식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융은 이 과정을 건축에 비유하고 있다.
“집단무의식의 구조 안에는 인간 심리의 원형적 건축 자재들이 저장되어 있으며, 인류 전체에 관한 집합적 기억이 축척되어 있다. 각 기 다른 문화와 시대에 있었던 상징물, 이미지, 신화, 신 등이 놀랍도록 비슷할 분더러 환자의 꿈에 나타난 이미지들과도 비슷하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해준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조상들까지 포함하여 우리들 모두는 원형이라는 벽돌로 지어진 집단무의식이라는 집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집 바깥에는 야생의 세계이므로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살아갈 수 없다. 타잔이나 모글리처럼 야생과 동화되어 산다면 어떨까 싶지만, 그들도 결국 ‘원형의 조종에 따라’ 인간 사회 속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집단무의식이라고 하면 혹시 부두교 같은 신비 종교에서 보는 집단 최면을 연상하거나, 아니면 더 속되게 봐서 팀 스피리트 같은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집단무의식에서의 ‘집단’이란 일상적인 어느 집단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오랜 역사를 지닌 인류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며, 일시적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개별 인간과 인류 전체가 생존하는 한 영구히 지속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개별 무의식은 꿈이나 농담, 실언 등에서 그 징후를 드러낸다. 집단무의식이 집단 최면과 같은 게 아니라면 그것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까? 물론 집단무의식도 꿈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집단무의식이 발현하는 계기는 꿈만이 아니다. 꿈은 개별 무의식과 연관되는 통로일 뿐이므로 꿈만 말한다면 굳이 ‘집단’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집단무의식은 신화와 종교 같은 개별 인간의 생산은 물론이고 그밖에 이을 수 있는 모든 인간 경험의 영역에 예외없이 침투해 있다. 심지어 엄밀하고 객관적으로 보이는 과학조차 집단무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융은 계시, 기도, 신 따위의 종교적 현상들이 과학적 진리와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 경험은 집단무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경험을 지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집단무의식이므로 과학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집단무의식은 인간의 예술, 신화, 종교에 기록된 모든 이미지들의 원천이며 마르지 않는 저수지다. 바로 여기에서 시인의 시가 흘러 나오고 과학자의 통찰력이 솟아 나온다. 또한 집단무의식에서 흘러 나오는 꿈은, 그 꿈을 꾸는 사람은 물론 그가 속한 전체 사회에 대해서도 함축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쯤 되면 어딘지 신비주의의 냄새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삶도 학문도 신비 속에서
무의식을 의식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넘지 못할 장벽이 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레비스트로스의 구조 등 무의식과 연관된 것을 언어로 말하려는 시도에는 모두 어느 정도의 한계가 설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보겠지만 레비스트로스 같은 사람은 근대 철학의 주체인 ‘나’를 중심에서 끌어내리는 작업을 통해 그 한계를 다소나마 극복하고자 한다.
하지만 융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주체와 무의식을 연관시키는 게 바로 융의 특징이기도 하다). 무의식적인 원형도 역시 자아라는 주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좌표 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즉 융은 무의식적 원형이 의식에 도입되기 위한 계기가 바로 자아라고 생각한다. 결국 원형과 집단무의식은 실 끊어진 연기처럼 의식과 무관한게 아니다. 그것들은 바로 자아라는 튼튼한 연결고리를 통해 의식과 소통하고 있다.
하지만 자아라는 의식의 개념이 어떻게 원형과 같은 무의식적 요소들을 인식할까? 물론 자아의 개념을 에고에만 국한시킨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융은 자아를 단순히 의식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는다. 융이 말하는 자아는 에고라는 의식적 주체와 더불어 자율적 콤플렉스라는 무의식적 주체를 포함하고 있는 이중적인 존재다. 이렇게 자아를 한 쌍의 대립물로서 설정하면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해명할 때 늘 맞닥뜨리게 되는 주체의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융은 이 대립물의 개념을 연금술에서 찾아낸다.
융은 중세에 크게 유행했던 연금술을 연구하면서 영혼의 의미를 발전시킨다. 물론 연금술의 화학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연금술에서 금속에 변화하는 과정은 무의식의 자기 실현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연금술사들은 스스로의 영혼을 변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연금술은 금을 만드는게 아니라 실은 무의식적으로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변화시킨다는 것은 곧 무엇을 무엇으로 바꾼다는 뜻이므로 적어도 두 개의 항이 필요해진다. 이것이 바로 융이 말하는 대립물의 쌍이다.
대립은 궁극적으로 해소되어야 하지만 쉽게 해소된다면 대립의 긴장관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융은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이미지, 감정, 관점이 있을 때, 중요한 것은 대립관계의 어느 한 쪽도 무의식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하면서 자아가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곧 대립물의 진정한 통일이다.
융은 이렇게 주체의 분열과 통합을 주장함으로써 일단 주체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설명은 극복이라기보다 문제의 회피에 가까워 보인다. 연금술을 도입한 것도 그렇지만, 대립관계의 설정 자체에서 작위적인 측면이 강하므로 아무래도 그의 주장은 외줄타기처럼 불안할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쪽으로도 빠지지 않으면서, 즉 균형을 잡으면서 대립물을 통일한다는 게 대체 가능할까?
사실 융의 집단무의식 개념은 너무나 총체적인 의미를 띠고 있으므로 한마디로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헤겔의 절대정신이 그렇듯이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설명하는 방식은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런 설명 방식을 주장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숲을 설명하는 방식과 나무를 설명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항변하겠지만.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는 자칫하면 신비주의로 흐를 소지가 다분하다. 융이 만년에 연금술이나 동양 종교의 신비주의적 측면에 몰두했던 지적 편력은 그 점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융의 심리학이 다른 학자들로부터 과학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너무 ‘문학적’ 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과학의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인 측면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융은 그런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융은 자신의 방법론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환자의 꿈뿐만 아니라 자신의 꿈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게 그렇다. 그는 자서전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삶은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삶 속의 사건으로 표현된다.” 이처럼 의식과 무의식을 무상하게 넘나들 수 있다면, 가히 해탈의 경지라고나 할까? 실제로 융은 학문만이 아니라 삶마저도 신비스런 꿈처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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