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경남 <오늘의 경남> 생방송에 나왔습니다. 주파수는 98.9/91.1 MHz이고
===>>https://t.co/G7xwJFMlf5
여기에 들어가시면 다시듣기 가능합니다.
6월25일 라디오 생방송.
조부 감영생 관련 방송은 맨앞부분 아나운서 멘트와 뒤에서 13분가량이 제가 나옵니다. 들어봐 주십시오!!
<할아버지 소개, 업적>
조부 감영생은 김원봉과 함께 항일독립운동한 밀양비밀 의열단이셨고 그로 인해 이승만으로부터 빨갱이로 몰여 마산 괭이바다에 돌덩거리달려 1950.7.24 증조부 기일 밤 서른 일곱살에 생수장되셨습니다.
조부는 1914년 밀양 출생. 밀양유림 만석군 종갓집 외아들로 조선후기 구한말 대학자이신 주산서당 금주 허채 선생의 수제자였으며 신동으로 일곱살 때 향교백일장에서 장원. 6개국어 능통,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학 전체수석 입학하신 분이십니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의열단 비밀단원으로 여운형, 김구 선생등과 교류가 있었고 국내뿐 아니라 일본 만주등지에서 약산 김원봉 장군과 함께 활동했고 막대한 독립자금을 항일단체와 약산에게 대어준 인물이며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밀양의열단 활동당시 이야기>
조부는 국내뿐 아니라 일본 동경 만주등지에서 독립운동하신 분으로 비밀의열단 활동시 가명을 열개도 넘게 쓰셨다고 하며 양손잡이 특사수로 항상 쌍권총을 차고 다니셨고 키가 182에다가 힘이 장사셨고 지붕과 지붕을 키보다 높은 담장을 훨훨 날아다니셨다고 합니다.
표충사를 약산과 함께 여러번 가셨다고 하며 알려진 약산의 사진중에는 조부가 직접 찍은 게 많습니다.
의열단이 비밀리에 저희집 사랑방에 모였고 김원봉 장군은 저희집 사랑방에 여러번 주무시고 가셨다고 합니다.
저희집 바로 옆집에 증조모 8촌남동생이 지금도 살아계신데 저희집 집사처럼 누구보다도 저희집 역사를 가장 세세히 잘 아시는 분으로 의열단 연락원(병)이었고 <조부 감영생이 밀양의열단이고 밀양에서 김원봉 다음 인물이 바로 감영생이라>고 여러차례 증언하셨습니다.
조부가 1946년 일본서 귀국하시자마자 쫒기는 몸이 되셨고 밀양경찰서 끌려가 모진 고문, 의열단 계보를 불면 풀어주겠다고 회유, 안 그러면 자식들까지 죽인다고 협박했으나 끝까지 거부, 정치범으로 마산형무소에 수감 2년후 증조부 기일밤 마산 괭이바다서 생수장 당하셨습니다.
<이승만 정권 당시
괭이바다에 수장됐는데
당시 상황이 어땠었나?
수장 당시 상황.>
방이 좁아 이감한다고 불러낸 다음 육군헌병대로 인계해 밤에 괭이바다로 끌고가서 주먹만한 돌덩이를 바지 속에 꽉 집어넣게 한 후
괭이바다 가운데에 미군함을 띄워놓고 사람들을 그 배로 데려가서 두 손발 꽁꽁 묶고 두 눈 가리고 10명씩 손을 뒤로 줄로 엮어 뱃전에 일렬로 세운 후 뒤에서 발로 차서 생수장시키고 순시선으로 돌면서 위에서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빨갱이로 몰리신건데정부에서 어떤 이유로 잡아가신건가요?>
答: 해방후 미군정, 이승만의 폭정에 항거. 전국에서 220만명이 들고 일어나 총파업투쟁, 1948년 2.7항쟁에 주축으로 참여, 밀양경찰서로 체포, ‘미군정 포고령 위반죄’라는 죄목으로 5년 구형, 2년간 마산형무소에서 정치범으로 수감중, 1950.6.25 발발, 동년 7월 24일 증조부 기일밤 돌덩거리달려 마산 괭이바다에 생수장 당했고
기막힌 그 사실을 62년만에 알게 되었고 국가소송중입니다.
<아직까지도 괭이바다에 수장된 분들을 찾지 못했는데 가족들의 심정>
이승만은 조부와 의열단이 저희집에 숨었다고 불을 지르고 기관총 난사를 수 천발 했다고 합니다. 조모는 아이들 죽일까봐 피신가고 혼자 있던 증조모를 대한청년단 수 십명이 와서 "빨갱이 감영생이 어디 있어! 내놔라" 모른다고 하자 동네어귀 당산나무 아래까지 머리채 끌고가 몽둥이질 두개골 함몰시켰고요.
큰고모와 아버지가 수 년간 의열단 편지심부름을 했는데 그 일로 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라가 학살을 당하실 뻔 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13살로 너무 어려서 이름을 바로 빼줬고 큰고모는 당시 고등학생이라 올라갔는데 조부가 마산형무소서 난리가 나서 달포만에 이름을 겨우 뺐다고 합니다.
증조할머니는 삼십년이 넘도록 살강 위에 밥을 해 놓고 우리 똑똑한 자식이 절대 죽었을 리 없다. 살아있다. 올 때까지 살아있어야 한다. 노망들어 못 알아보면 안 된다고 하시다 가슴의 한을 풀지도 못하고 외아들을 기다리시다가 94살에 돌아가셨습니다.
조모는 그 일로 평생 홧병으로 고생하시다 눈도 못감고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연좌제로 꿈을 접어야했고
평생 경찰의 감찰 미행 도청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지난 13일,창원유족회에서 괭이바다에 나가 추모행사를 진행했는데
당시 상황이 어땠나?>
보통 200~250명이 오는데 올해는 150명 정도 왔습니다. 유족분들과 여러 방송 언론사 기자들이 왔는데 요번에는 비가 많이 올거라는 예보와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인지 늘 오시던 다른 지역 유족회분들과 사회인권단체 활동가분들이 다른 해보다 덜 오셨고 행사를 조금 짧게 짧게 했습니다.
위령제때 유교식으로만 했고 천주교식 추모미사나 불교식 염불은 생략했고 경과보고 추모사도 간단하게 숙연한 분위기속에 원만하게 잘 했습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피해자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부에게 바라는 점>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주고 지켜줘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 국가는 무고한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잔혹하게 학살해 죽였습니다.
그것은 학살당하신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집 식구들 전체를 다 학살해 죽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70년간 빨갱이 가족이라는 멍에와 연좌제로 유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국가가 죽였으니 국가가 책임을 다 져야하고 공개적으로 국가사죄가 있어야 하며 명예회복과 응분의 국가배상이 있어야 합니다.
조부와 2,300분이 학살된 괭이바다에 추모공원과 위령탑을 세워주길 바라고 남겨진 유가족들에게 지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길 바랍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오밤중에 바다로 끌고가 돌덩거리달아 바다에 생수장해 죽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전국적으로 130만명을 200여곳에서 4차례에 걸쳐 학살해 죽였고 2,300명의 정치범을 돌덩거리달아 생수장해 죽였는데 지금 현재 그런 일이 있었다 생각해보십시오.
국가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이 일은 세계사에 없었던 최악의 악랄한, 정치보복 살인행위였습니다.
과연 우리가 히틀러와 일본을 욕할 자격이나 있습니까? 적어도 그 사람들은 자국민을 그런 식으로 학살해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꼭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해방후 시국이 극도로 혼란한 틈을 타 전국토지등기령을 내렸는데 나라에서 제대로 고지도 안하고 당시 제때 등기를 못했다고 저희집 땅을 다 뺏아갔고 현싯가 2조이상입니다.
생전에 아버지가 그 땅을 찾으려했는데 공소시효 1년이 넘어갔다며 찾지 못했습니다.
밀양 상남면 구배기 종남산일대 30만평, 창원 39사단포함 나라에 빼앗긴 땅이 수 십만평이라고 했습니다.
해방직후 조부나 증조부 명의로 된 땅, 나라로 바로 넘어간 저희집 땅을 다 도로 찾고싶습니다.
나라가 뺏어간 저희집 땅을 다 도로 돌려주길 바랍니다!
===>>https://t.co/G7xwJFMlf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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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5일 라디오 생방송.
조부 감영생 관련 방송은 맨앞부분 아나운서 멘트와 뒤에서 13분가량이 제가 나옵니다. 들어봐 주십시오!!
<할아버지 소개, 업적>
조부 감영생은 김원봉과 함께 항일독립운동한 밀양비밀 의열단이셨고 그로 인해 이승만으로부터 빨갱이로 몰여 마산 괭이바다에 돌덩거리달려 1950.7.24 증조부 기일 밤 서른 일곱살에 생수장되셨습니다.
조부는 1914년 밀양 출생. 밀양유림 만석군 종갓집 외아들로 조선후기 구한말 대학자이신 주산서당 금주 허채 선생의 수제자였으며 신동으로 일곱살 때 향교백일장에서 장원. 6개국어 능통,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학 전체수석 입학하신 분이십니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의열단 비밀단원으로 여운형, 김구 선생등과 교류가 있었고 국내뿐 아니라 일본 만주등지에서 약산 김원봉 장군과 함께 활동했고 막대한 독립자금을 항일단체와 약산에게 대어준 인물이며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밀양의열단 활동당시 이야기>
조부는 국내뿐 아니라 일본 동경 만주등지에서 독립운동하신 분으로 비밀의열단 활동시 가명을 열개도 넘게 쓰셨다고 하며 양손잡이 특사수로 항상 쌍권총을 차고 다니셨고 키가 182에다가 힘이 장사셨고 지붕과 지붕을 키보다 높은 담장을 훨훨 날아다니셨다고 합니다.
표충사를 약산과 함께 여러번 가셨다고 하며 알려진 약산의 사진중에는 조부가 직접 찍은 게 많습니다.
의열단이 비밀리에 저희집 사랑방에 모였고 김원봉 장군은 저희집 사랑방에 여러번 주무시고 가셨다고 합니다.
저희집 바로 옆집에 증조모 8촌남동생이 지금도 살아계신데 저희집 집사처럼 누구보다도 저희집 역사를 가장 세세히 잘 아시는 분으로 의열단 연락원(병)이었고 <조부 감영생이 밀양의열단이고 밀양에서 김원봉 다음 인물이 바로 감영생이라>고 여러차례 증언하셨습니다.
조부가 1946년 일본서 귀국하시자마자 쫒기는 몸이 되셨고 밀양경찰서 끌려가 모진 고문, 의열단 계보를 불면 풀어주겠다고 회유, 안 그러면 자식들까지 죽인다고 협박했으나 끝까지 거부, 정치범으로 마산형무소에 수감 2년후 증조부 기일밤 마산 괭이바다서 생수장 당하셨습니다.
<이승만 정권 당시
괭이바다에 수장됐는데
당시 상황이 어땠었나?
수장 당시 상황.>
방이 좁아 이감한다고 불러낸 다음 육군헌병대로 인계해 밤에 괭이바다로 끌고가서 주먹만한 돌덩이를 바지 속에 꽉 집어넣게 한 후
괭이바다 가운데에 미군함을 띄워놓고 사람들을 그 배로 데려가서 두 손발 꽁꽁 묶고 두 눈 가리고 10명씩 손을 뒤로 줄로 엮어 뱃전에 일렬로 세운 후 뒤에서 발로 차서 생수장시키고 순시선으로 돌면서 위에서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빨갱이로 몰리신건데정부에서 어떤 이유로 잡아가신건가요?>
答: 해방후 미군정, 이승만의 폭정에 항거. 전국에서 220만명이 들고 일어나 총파업투쟁, 1948년 2.7항쟁에 주축으로 참여, 밀양경찰서로 체포, ‘미군정 포고령 위반죄’라는 죄목으로 5년 구형, 2년간 마산형무소에서 정치범으로 수감중, 1950.6.25 발발, 동년 7월 24일 증조부 기일밤 돌덩거리달려 마산 괭이바다에 생수장 당했고
기막힌 그 사실을 62년만에 알게 되었고 국가소송중입니다.
<아직까지도 괭이바다에 수장된 분들을 찾지 못했는데 가족들의 심정>
이승만은 조부와 의열단이 저희집에 숨었다고 불을 지르고 기관총 난사를 수 천발 했다고 합니다. 조모는 아이들 죽일까봐 피신가고 혼자 있던 증조모를 대한청년단 수 십명이 와서 "빨갱이 감영생이 어디 있어! 내놔라" 모른다고 하자 동네어귀 당산나무 아래까지 머리채 끌고가 몽둥이질 두개골 함몰시켰고요.
큰고모와 아버지가 수 년간 의열단 편지심부름을 했는데 그 일로 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라가 학살을 당하실 뻔 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13살로 너무 어려서 이름을 바로 빼줬고 큰고모는 당시 고등학생이라 올라갔는데 조부가 마산형무소서 난리가 나서 달포만에 이름을 겨우 뺐다고 합니다.
증조할머니는 삼십년이 넘도록 살강 위에 밥을 해 놓고 우리 똑똑한 자식이 절대 죽었을 리 없다. 살아있다. 올 때까지 살아있어야 한다. 노망들어 못 알아보면 안 된다고 하시다 가슴의 한을 풀지도 못하고 외아들을 기다리시다가 94살에 돌아가셨습니다.
조모는 그 일로 평생 홧병으로 고생하시다 눈도 못감고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연좌제로 꿈을 접어야했고
평생 경찰의 감찰 미행 도청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지난 13일,창원유족회에서 괭이바다에 나가 추모행사를 진행했는데
당시 상황이 어땠나?>
보통 200~250명이 오는데 올해는 150명 정도 왔습니다. 유족분들과 여러 방송 언론사 기자들이 왔는데 요번에는 비가 많이 올거라는 예보와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인지 늘 오시던 다른 지역 유족회분들과 사회인권단체 활동가분들이 다른 해보다 덜 오셨고 행사를 조금 짧게 짧게 했습니다.
위령제때 유교식으로만 했고 천주교식 추모미사나 불교식 염불은 생략했고 경과보고 추모사도 간단하게 숙연한 분위기속에 원만하게 잘 했습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피해자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부에게 바라는 점>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주고 지켜줘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 국가는 무고한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잔혹하게 학살해 죽였습니다.
그것은 학살당하신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집 식구들 전체를 다 학살해 죽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70년간 빨갱이 가족이라는 멍에와 연좌제로 유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국가가 죽였으니 국가가 책임을 다 져야하고 공개적으로 국가사죄가 있어야 하며 명예회복과 응분의 국가배상이 있어야 합니다.
조부와 2,300분이 학살된 괭이바다에 추모공원과 위령탑을 세워주길 바라고 남겨진 유가족들에게 지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길 바랍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오밤중에 바다로 끌고가 돌덩거리달아 바다에 생수장해 죽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전국적으로 130만명을 200여곳에서 4차례에 걸쳐 학살해 죽였고 2,300명의 정치범을 돌덩거리달아 생수장해 죽였는데 지금 현재 그런 일이 있었다 생각해보십시오.
국가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이 일은 세계사에 없었던 최악의 악랄한, 정치보복 살인행위였습니다.
과연 우리가 히틀러와 일본을 욕할 자격이나 있습니까? 적어도 그 사람들은 자국민을 그런 식으로 학살해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꼭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해방후 시국이 극도로 혼란한 틈을 타 전국토지등기령을 내렸는데 나라에서 제대로 고지도 안하고 당시 제때 등기를 못했다고 저희집 땅을 다 뺏아갔고 현싯가 2조이상입니다.
생전에 아버지가 그 땅을 찾으려했는데 공소시효 1년이 넘어갔다며 찾지 못했습니다.
밀양 상남면 구배기 종남산일대 30만평, 창원 39사단포함 나라에 빼앗긴 땅이 수 십만평이라고 했습니다.
해방직후 조부나 증조부 명의로 된 땅, 나라로 바로 넘어간 저희집 땅을 다 도로 찾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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