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준비 저장文集/甘泳生 文集 ·65年만의 歸家

국가란 과연 우리들에게 있어 무엇인가.

감효전(甘曉典) 2016. 4. 23. 12:25

국가란 과연 우리들에게 있어 무엇인가.

 

 

유도선수이자 격투기선수 추성훈, 그는 조선인인가, 일본인인가, 그가 아키야마든 추성훈이든 아무 관계없다. 그가 그 어떤 결정을 했든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일 뿐이다.

 

재일 3세인 그가 일본에 귀화를 선택하게된 건 순전히 대한민국 탓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그였다면 바로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뺏긴 나라에 태어난 죄로 500만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36년간의 일정때 원통하게 죽임을 당한 바 있고 한국전쟁시 이념의 잣대로, 단지 자기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또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무려 130만명이라는 사람들이 이승만으로부터 학살당했고 게다가 은폐까지 철저히 당했다.

 

나는 늘 자랑스런 태극기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을 굳게 맹세를 하는데 그 태극기인 대한민국은 국민의 그 어떤 것도 지켜주지 못했다. 국민 스스로 제 살 길을, 행복한 길을 찾아야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할아버지 감영생을 봐도 그렇다.

 

할아버지 감영생은 유림의 고장 밀양에서 증조부 고조부와 마찬가지로 윗대조상 때부터 쭈욱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흠모해온 밀양의 최고 명문집안이자 밀양의 대표적 지식인 600명에 선정된 분중의 한 분이셨다.

 

만석군 재산털어 약산 김원봉 장군과 항일단체에다 독립자금대고 집안의 땅을 부치고 살던 소작인들에게 그 많은 땅문서를 자기네들 앞으로 다 돌려준 보기드문 인물이었으며 인품이 훌륭하여 존경의 대상이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백발백중 양손잡이 특사수 비밀독립의열단이었다,

 

해방후 최초 대규모 민주항쟁인 1948. 2.7항쟁에 동참했다가 밀양경찰서로 체포, 가담주동자 다 불면 풀어주겠다는 온갖 회유와 고문에도 입을 끝까지 열지않자 미군정 포고령 위반죄로 5년구형을 김원봉 장군의 친형제 4명이 집에서 총살당한 1948년 8월 22일 받았고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자랑스런 나의 조부 감영생, 그는 진정한 애국보수이자 민족주의자였다.

 

내 할아버지를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죽인 철천지 원수 이승만, 반민족 친일세력을 척살키는 커녕 반민특위를 해산시키고 오히려 그 악질세력을 기용하고 등에 업어 온갖 부패와 악행을 저지러다 성난 국민들로부터 끌려내려 쫒겨나 조국 땅에서도 죽지 못하고 이역 만리 하와이에서 인지불능인 치매로 지독하게 고통을 당하다 죽은 인물이다.

 

1950. 7. 24 (음.6.10) 월요일 밤.

그 날은 기막히게도 바로 외아들 하나밖에 없었던 증조부의 기일 밤이었다.

 

이승만으로부터 정치적 보복으로 빨갱이로 몰려 마산형무소에 수감중인 삼복더위에 딴 곳으로 이감한다고 불려나가 육군헌병대로 넘겨지는 것과 동시에 바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날 정치범 1,681명과 함께 마산 구산 괭이바다에 두 눈 두 손발 꽁꽁 묶이고 10명씩 굴비엮듯 서로 달아 묶고 다리에 돌덩거리달려 뱃전에 쭈욱 세워졌는데 그 악랄했던 놈들이 낄낄 웃으며 뒤에서 밀어 줄줄이 바다에 빠뜨려 생수장시켰으며 순시선으로 빙빙 돌며 확인 기관총난사까지 하였다.

 

할아버지는 외아들이었는데 붙잡혀가는 바람에 증조부 초상을 보지 못했으며 증조모 환갑도 옥중에서 봐야 했다.

 

게다가 아버지 기일날 밤 끌려나가 그 일을 당했을 때 뱃전에 돌덩거리 달고 초열흘 달을 바라보며 절박했을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싶은 것이, 그 심정이 어땠을까 싶은 것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다.

 

아, 아, 나라없는 나라에 태어난 원죄가 이렇게도 가혹하였더란 말인가. 이렇게도 참혹했었더란 말인가. 나의 조부 감영생은 죄가 없다. 죄가 없다. 아무런 죄가 없단 말이다. 국가란 과연 우리들에게 있어 무엇인가. 무엇인가,

 

 

효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