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
부모님과 함께 오랜만에 어떤 영화를 볼까 하다 『암살』을 선택했다.
전두환 암살 작전을 가정한 『26년』이나 히틀러 암살을 소재로 한 『작전명 발키리』 같이 역사적 결론이 뻔한 영화를 지켜볼 때의 곤혹감(결코 해소되지 않을 간절함)을 또다시 맛볼 것 같아 『암살』 관람을 여태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 누가 "이 영화 해피엔딩"이라고 귀띔해줘서 다소 안심을 하고 마침 부모님도 보고 싶어 하시길래(사실 『베테랑』을 더 보고 싶어 하셨지만 『암살』이 막 내릴 때가 다 돼 후자를 우선 골랐다) 오늘 극장을 찾았는데, 애초 예상대로 기분이 영 착잡하다.
목표했던 타깃들을 처단하는 데 성공하고 여주인공은 살아남았으나 이 영화의 결말을 어찌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현실을 다시금 뼈아프게 되새길 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왜곡과 망각의 역사가 씁쓸하게 다가오는 대목은 김원봉의 후일담에 관한 것이다.
독립운동사의 거목이자 해방 공간에서 좌우합작을 위해 노심초사했던 김원봉은 왜 끝내 월북을 선택하고 남한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는가.
새누리당 김을동 최고위원의 아버지라는 김두한이 이승만 일파의 사주를 받아 김원봉 테러 등 독립운동세력의 몰락에 깊숙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김좌진 장군이 정녕 김두한의 친부였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해방 정국에서 김두한이 이끌던 극우 정치 깡패들이 이승만과 자유당의 극악무도한 독재 및 인권 탄압에 처절하게 저항하던 시민, 학생, 노동자,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한 민족주의자 그룹, 이른바 좌익 등을 상대로 얼마나 잔혹한 테러들을 백주에 무시로 벌였는지 김두한 본인의 육성으로 확인해보는 것도 '암살, 그 이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김두한을 조폭 시대 이전의 낭만적인 협객 정도로 인식하는 것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무지의 소산인가.
김을동 의원에 관한 뉴스들을 접할 때마다 그 허상이 후광효과까지 낳고 있는 현실에 늘 마음이 언짢아진다.
동아일보사에서 2002년 출간했던 『풍운아 김두한의 육성 증언, '조선 제일의 협객 김두한이오'』에서 발췌했다.
김두한이 옛 동아방송 인기 프로그램이던 「노변야화」에 1969년 10월부터 출연해 방송한 내용 56회분을 녹취·정리한 증언록이다.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 사장을 지낸 권오기 전 통일부총리가 당시 '노변야화' 진행자였다.
오래전 경악 속에 읽었던 이 책을 『암살』을 계기로 망각에서 건져올렸다.
여운형, 김규식, 김원봉, 박헌영 등에 대한 암살 기도의 이 생생하고 섬뜩한 기록을 읽어보면 친일파의 득세 과정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장택상 수도청장과 만난 다음날 부하들 가운데 체격 좋은 놈으로 1백 명을 골랐지요. 곡괭이 자루 있잖아요? 박달나무와 참나무로 만든 곡괭이 자루를 차에 실어서 삼청동 옆 들판 창고에 갖다 두었어요. 그리고는 밤 2시에 1백 명의 대원을 데리고 학통 훈련소로 쳐들어갔지요. 자는 놈들을 습격했는데 곡괭이 자루에 몇 놈이 맞아서 삼청동 부근이 피바다로 얼룩져 버린 사건이 발생했죠.
-교문을 딱 막아 놓고 학생들을 혼냈어요. 한 번 맞으면 다시 공산당 안 한다는 거예요. 서울대학 병원의 병실이 맞은 학생들로 꽉꽉 들어차는 겁니다. 그때 김두한 부대가 들어온다고 하면 죽는 줄 알았거든요. 모두가 달달달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경찰서에서 공산당을 잡아 가지고 고문하다가 안 되고 골치 아프면 김두한 부대로 넘겨요. 나한테 넘어오면 죽으니까. 그래서 마음이 약한 공산당은 김두한한테 인계한다 그러면 거기서 다 부는 거예요. 우리 대한민청 반공청년들이 "어? 이 새끼가 안 불어?"그러면 벌벌 떨거든요.
-우익 진영 학생 중에 제일 열렬하고 투지 있고 나와 성격이 맞는 사람이 바로 이철승 동지였어요. 이철승 동지가 이제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전체를 통틀어서 전학년위원장을 맡고 반탁위원회의 최고 학생대표를 맡아 일을 많이 했죠. 결국 이철승 동지가 우익 학생 조직을 꽉 쥐고 반탁투쟁하면서 그 조직으로 공산당 학생 조직을 부순 겁니다. 의용을 원하면 우리측 동지들이 학생복으로 갈아입습니다. 빵떡모자 쓰고 학생같이 하면서 들어가요. 유도, 권투, 박치기를 하는 내 동생 몇 백 명이 학생복을 입는데 단추가 안 맞아요. 체격이 커서 겉에만 걸치고 들어가는 겁니다.
-서울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국대안 반대 아시죠? 연희전문이 가장 강성이었고 서울대에서는 상과가 주도를 했지요. 그래서 대낮에 일제 이쓰즈와 도요타 30대에 나눠 타고 가서 서울대학교를 포위했습니다. 상과대학에서 수업하는 학생들을 뺑 둘러쌌어요. 그리곤 1학년서부터 4학년까지 그냥 족쳤어요. 전부 엎드리게 하고는 트럭에 싣고서 정릉으로 갔지요. 정릉의 유명한 요리집 청수장에서 5백 미터만 더 올라가면 으스스 한 산골입니다. 청수장 못 미쳐 좌측으로 들어가면 골목처럼 으슥하고 솔밭이 우거진 곳이 있어요. 그리로 학생들을 끌고 가서 완전히 절단낸 일이 있습니다. 그다음엔 연희대학 학생들을 수색으로 끌고 가 절단 냈거든요. 그게 같은 날이었어요.
역시 그것도 한민당 총무 장덕수 선생이 나를 직접 불러 가지고 지시한 거죠. 이 두 학교가 가장 강성이니까 지금 막지 못하면 싹들이 다시 커진다고 했죠. 그래서 서울대학교와 연희전문의 뿌리가 빠진 겁니다. 그 후 학생 운동은 일체 맥을 못 추었어요. 워낙 처참하게 했기 때문에. 지독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하필이면 정릉 골짜기에 사는데, 요새 아주 꿈자리가 뒤숭숭해요. 그때 당장은 죽지 않았어도 몇 개월 후에 한 서너 명 죽었거든요. 두개골이 파열돼서…. 그냥, 지독했어요. 그러면서 학생 운동은 그게 마지막 종말입니다. 두 개 조직이 완전히 깨졌으니까요.
-거의 매일 공산당들을 때려잡는 백색테러리스트로 활동했습니다. 그때 우리 사무실 지하에는 음침한 특수작업실이 있었어요. 거미줄 투성이에다가 아주 낡아서 귀신이라도 나올 정도로 음산했어요. 공산당들을 이곳으로 납치해서 고문하곤 했습니다.
예술가 동맹 중에서는 작가들이 가장 문제였지요. 지하실로 예술가 동맹 책임자들을 불렀어요. 배우들을 비롯해 작가, 가수 등 한 60여 명이 왔죠. "앞으로 공산당 영화나 연극, 노래가 내 눈에 띄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윽박질렀죠. 그런 다음 지하실로 데리고 가 전깃불을 켰지요. "여기 양촛물하고 빙초산하고 청강수가 있다. 너희를 잡아다 여기다 처넣고 발로 밟으면 니들 뱃속으로 잘 들어갈 거다." 이렇게 겁을 주었어요. 예술가라는 게 무대 위에서는 강하지만 공갈 협박 받으면 한없이 약한 게 가냘픈 계집애보다 더 약하거든. 부들부들 떨더군요.
-그 후 사무실에 있는데 정보가 들어오는 거예요. 중앙극장에서 연극을 한다는 거예요. '님'이라는 혁명극인데 주연이 심형일이라고 해요. 이거 아무래도 처치해야겠다 싶어서 부하들 6명을 배치했다가 연극이 끝나고 심형일이가 종각쪽으로 가길래 쫓아갔습니다. 심형일 부인이 종각 부근에서 황룡다방을 운영했거든요. 마누라와 마누라 친구를 데리고 어디를 갑디다. 자동차로 슬금슬금 뒤쫓다가 광교다리에서 잽싸게 세 방을 쐈어요. "으악"하고 비명소리가 나고 여자들도 "어머나"하고 털썩 주저 앉아요. 그래서 종각 쪽으로 도망갔는데 한 동지가 뛰어오는 겁니다. 심형일이가 그 자리에서 죽지를 않아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겁니다.
다시 죽여야겠더라구요. 중부경찰서 부근에 백병원 있잖아요. 28호실 구석방에 있다는 거예요. 그때는 세 명이 갔어요. 권총 가지고 문 탁 노크하고 열었단 말이에요. 들어가니까 마침 아무도 없고 한 사람이 누워 있어요. 턱을 주먹으로 탁 쳤거든요. 그냥 쏴 버리려고 그랬는데 말이죠. 그 어머니가 갑자기 들어와서 그냥 날 붙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여기에는 김두한이가 약하단 말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고 아버지 없이 자랐는데 모르고 그랬다고, 아들을 살려 달라고 그러는데…. 참, 나도 어머니가 없이 세상을 자랐는데 불쌍한 생각이 들더라구요. "너 들어라, 앞으로 한번만 더 나오면 죽인다. 너희 동료들, 그 연극에 관련된 놈들 다 죽일 거니까 조심해라." 이렇게만 하고 그냥 병원에서 나온 일이 있습니다. 심형일이는 그냥 병원에서 도망갔죠. 퇴원하면 죽인다고 그러니까.
-신불출이는 만담가예요. 그 친구가 일정 때 만담이 문제가 돼서 종로경찰서에 붙잡혀 간 적이 있는데 창씨개명을 강요받자 '애하라, 노하라'로 바꾼 적이 있어요. 아주 일본을 빈정거리는 이름이죠. 종로경찰서 유치장에도 같이 있었고 일정 때 술도 같이 마시고 얘기도 자주 해서 아주 친했지요. 신불출이 일정 때 연극을 할 때도 사회주의에 심취해 있었지만 해방 후에는 본격적으로 좌익 운동을 했지요.
이거 그냥 놔두었다간 안 되겠거든. 그래서 고 동지를 불렀어요. 이 키가 조그만 독종은 사람을 죽이라고 해야 좋아해요. 그래서 내가 독일제 브라우닝을 주고 신불출의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낙원동에 있는 지금의 여관 자리가 바로 신불출의 집이에요. 11시 40분쯤 되니까 신불출이 들어와요. 우리 둘이 마스크 쓰고 쓱 지나가면서 고 동지가 옆에서 총을 두 방 쐈어요. 총알이 신불출의 왼쪽 팔을 뚫고, 하나는 옆구리 스치고 나갔단 말이에요. 다시 갈기려는데 사람들이 뛰어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죽이질 못했지요. 나중에 신불출이 월북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기 있으면 죽을 테니까 도망간 가죠. 그 후로 예술 하던 공산당은 거의 없어져 버렸죠.
-이승만 박사의 민족위원회에 반탁투쟁위원회가 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본부장이고 제가 경비부장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익 진영의 정당 사회단체가 공산당에게 테러 받는 것을 대비해 보호하고 경비하는 거죠. 이승만 박사가 김포에서 서울로 들어올 대 좌익이 테러할까 봐서 2만여 명을 동원해서 김포공항부터 이 박사 집인 이화장까지 지켜지요. 경비를 서고 있는데 전보가 들어오는 거예요. 지금 데모를 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그냥 자동차를 집어 타고, 데모하는 곳을 둘러쌌죠.
한 1천여 명이. 늙은이와 어린애만 빼고 대한적십자사 본부 옆의 한 절간으로 싹 잡아왔어요. 내가 수습하려고 나중에 올라가 보니 거기 정진용이란 친구도 끌려왔더군요. 왜 제 밑에 거지로 있다가 나중에 공산당으로 전향한 친구 말입니다. 대한민청과 비슷한 조직으로 공산당에는 '조선민주청년총연맹'이라는 게 있어요. 조선민청은 말하자면 공산당의 전위부대 격이죠. 정진용은 조선민청의 부대장이 됐어요. 거기 잡혀온 28명이 다 조선민청의 주력 부대원들입니다. 옷을 홀딱 벗겨서 심문한 뒤에 껌껌한 밤에 다 죽여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장택상 씨가 아주 곤란해졌지요. 원래는 방공호에 파묻으려고 했는데 CIC가 알아가지고 다른 곳에 묻어버렸어요.
-신당동 부자촌에 있는 홍내식 집에서 김규식 박사하고 여운형이 좌우 합작 회의를 한다는 정보가 들어 왔어요. 그래서 상하이라고 하는 동지하고 나하고 김 동지, 고 동지, 전 동지하고 같이 갔어요. 신당동 들어가는 입구에서 11시쯤 되었을 때,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이 타던 미국 포드차가 쓱 오더라구요. 커브를 돌려고 하길래 둘러싸면서 권총을 들이댔죠. 자동차를 옆으로 돌려서 산비탈 위 솔밭 있는 데에 갖다 대고 "여 선생, 나오시오." 한 뒤에 여 선생을 끌고 산으로 올라갔어요.
"만일 좌우 합작을 다시 하신다 그러면 아까 내가 문 열었을 대처럼 그냥 쏴 버릴 겁니다. 사실은 선생을 오늘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소. 그러나 내가 선생을 존경하는 만큼 선생을 아끼는 마음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선생은 좌우 합작을 이제부터 탈퇴해보시오." 이랬지요. "됩니까? 안 됩니까?" "내 안 하겠소." "가십시오. 남자로 약속하지 않으면 이다음에는 내가 정식으로 쏩니다." "알았소."
-내가 김규식 선생 집에 명함을 대고, 대한민청 아무개다 이러고 정문을 들어갔어요. 바깥에서 쑥 들어가 소리 낼 거 없다, 목 대라 그랬죠. 막상 목에 대고 찌르려고 하니까 김규식 선생이 "두한이 참게. 두한아, 참아."하면서 그 노인이 벌벌 떨어요. "선생님이 애국을 하는 데는 혼란이 점점 일어난다 이겁니다. 좌우 합작 때문에. 공산당이 좌우 합작에 전부 뛰어들어가는 바람에 갈등하신다고 성명서를 쓰십시오."
"내가 쓰지. 그러면 나라를 위해서 되는 건가." "그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종이하고 붓하고 먹을 가져 오게." "바깥에 신문사 사람들이 8명이 와있습니다. 선생님이 불러서 친히 한 장씩 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몇 마디 쭉 말하길 "나는 좌우 합작을 탈퇴한다. 내가 나라를 위해서 하는 줄 알았더니 혼란만 일어나므로 나는 좌우 합작에서 탈퇴한다."
-그때 김규식 박사가 그만둔 다음에 대한임시정부에서 누구를 내놓았냐면 김원봉을 내놓았단 말이에요. 김원봉. 대한임시정부 군사부장 있잖아요. 그다음에 김원봉이 좌우 합작 대표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회의를 했지요. 미리 처치하자. 김원봉이 어디 가 있는고 하니 친일파로 일본 중의원을 지낸 박춘금이라는 하는 놈의 집에, 거기에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30명이 들어간 거예요. 그 총을 들고 문을 부수면서 들어갔죠. 여자하고 애들, 하녀들을 건너방에다가 이부자리를 뒤집어 씌우고서 소리 내면 죽는다고 하고 안방에 들어가니까 없단 말이죠. 그래서 벽장 속에도 싹 다 뒤졌는데 없어요. 그래서 부인한테 이랬거든요.
"만약에 좌우 합작에 김규식 박사 대신 들어가면 죽인다. 그거 하나만 일러라. 그리고 일체 좌익에 가담하면 죽인다. 경고한다." 그리고 나와버렸죠. 그리고 김원봉은 좌우 합작을 안 했죠. 그 후에 이북으로 넘어갔어요. 죽인다고 그러는 바람에 이북으로 들고 튀었죠. 죽인다는데 도리가 있나요?
-이승만 박사는 가끔 만났죠. 민주의원 의장으로 있으니까…. 민주의원 산하에 반탁투쟁위원회라고 있지 않아요? 내가 그때 반탁투쟁위원회 동원부장이고 경비부장이었어요. 그런데 이 박사께서 비서실장이었던 동산(東山) 윤치영 선생을 보내서 "날 좀 도와달라고"해요. 그래서 이 박사께 들어갔어요. 들어가니까 김두한이 왔다고, 이 박사가 웃으면서 애 많이 썼다고 영어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때 이 박사가 영어 신문을 놓고 영어로 얘기하는데 동산 선생이 통역을 해주는 거예요.
이 박사께서 "중국이 새빨개졌어요. 트루먼과 미 국무성의 중국 정책이 실패하는데 여기서도 좌우 합작을 해서 여운형, 김규식 박사한테다가 정권을 주려고 움직이니 큰일났다"는 거예요. 공산당은 중대한 문제인데 미스터 김이 심각하게 생각해서 빨리 처리해 주기 바란다는 거예요. 이 박사가 "죽여라!" 그런 말은 안 하거든요. 대개 보면 미국식 사고방식은 그 사람이 있으면 이 일은 못 할 테니, 이상하게 장애가 되니, 우리가 건국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로 곤란하다는 식이에요.
그러면서 이 박사가 하는 말이 "며칠 전에 얘기를 들어 보니까 김규식 박사에 대해서는 미스터 김이 가서 어떻게 해서 좌우 합작에서 자진 탈퇴했다 하는데" 하는 거예요. 그뿐 아니라 김규식 박사 대신 대한임시정부 계통에서 김원봉이 나오려는 것을 내가 습격을 했잖아요. 신문에 굉장히 크게 났습니다. 김원봉은 의혈단 단장으로 무서운 사람이거든요. 의혈단 단장 김원봉 장군, 그때는 장군이거든요. 그는 대한임시정부의 군사부장으로 왔는데 그 유명한 김원봉 씨가 똥통 밑에 숨어 있다가 나왔다고 신문이 그때 굉장했어요. 그런데 김원봉 씨는 이북으로 튀어 버렸단 말이야. 여기 있으면 죽으니까. 장사 있나? 총질하면 가는 건데. 그러니까 이 박사가 대단히 애썼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장택상 씨가 잠자코만 있었으면 꽝, 해 버리는 건데 자꾸 죽이지 말라고 해서 혼만 냈습니다"고 했어요.
-그때 당시 백범 김구 선생 같은 분과 설렁탕 한 그릇 먹으면 우리 청년에게는 최대의 영광이거든요. 다 잡수시더니 날더러 하는 말이 "자네, 내가 들으니까 한천동의 김 박사 댁을 어떻게 했다는 소리가 들리고, 또 김원봉 집을 어떻게 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어떻게 된 건가?" 웃으시면서 이렇게 점잖게 물으세요. 그러니 참 곤란할 거 아니예요. 지시는 이 박사 쪽에서 몰래 받은 것인데.
하기는 김원봉은 좌우 합작에서는 백범 선생 계통이란 말이에요. 백범 선생이 좌우 합작을 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사실은 아시다시피 지금 중국이 새빨개진 거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어요. 나도 이 박사한테 들은 게 있으니까. "좌우 합작이 있다가는 도저히 우리나라 수립이 어려워서 본의는 아니지만 사실 죽일 수는 없고 죽이는 척만 한 겁니다. 용서하십시오. 본의는 아니지만 나라를 위해서…" 그랬더니 백범 선생은 "그러나 죽이면 안 되네. 우리가 어쨌든 독립이 됐으니까 될 수 있으면 화해를 하고 용서해 주고 서로 보호해야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돼" 이렇게 톡톡 두들겨 주세요.
그러면서 "김원봉 집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하고 물으세요. 또 곤란하다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김원봉이가 좌우 합작에 나온다니까 나오지 못하게 위협하기 위해서 그 정도로 했습니다"하고 대답했더니 백범 선생은 "자네가 그러는 바람에 김원봉이가 이북으로 갔단 말이야. 이북으로…. 그저께 저녁에 이북으로 떠났어. 개성을 떠나가지고 이북에 가서 방송에 나왔단 말이야. 아무튼 갈 사람은 갔지만 앞으로 내가 하나 부탁하는 것은 자네가 나이가 아직 젊으니까 아무리 애국이라고 밀고 나가더라도 엄한 사람이 다칠 때가 있어. 그러니 이다음에 우리 임정에 있는 사람에 대해 누가 혹시 지시하더라도 자네가 나한테 한 번 물어보고 그렇게 해주길 바라네."하고 부드럽게 말씀을 하세요.
-당시 서울에는 어떤 단체가 있었으냐 하면, 함경남북도하고 평안남북도하고 황해도 일부에서 공산당한테 재산과 생명을 빼앗기고 학살당한 이북 5도 동포가 모여서 만든 '백의사'라는 단체가 있었어요. 장개석 총통 밑에 있는 건 '남의사'인데 이 단체는 대립이라고 하는 육군 중장이 만들어 장개석 총통의 생명을 지킨 겁니다. 여기에서는 백의사라고 만들었는데 공산당 두목을 죽이려는 5도 단체의 청년들이 모였죠. 그 백의사가 사령부로 되어 있어요.
지하사령부인데 사령관이 누구냐면 염동진 씨라고 평양분인데, 장개석 총통 밑의 군통국에 있다가 육군 중장 계급장을 달고 평양에 들어왔지만 밀렸거든요. 항일 투쟁을 했으니 어떠랴 싶었는데 공산당 본부에 끌려가 척추뼈가 부러지고 장님이 됐어요. 중국이 항일 전쟁할 때 모택동이가 염동진은 장개석 편이라고 두들겨 팼단 말이야. 그래서 옛날에 항일 투쟁하던 동지들이 그분을 업고 38선을 넘어왔어요.
-그런데 이 박사와 뜻을 맞춘 염동진 씨가 나를 들어오라고 해요. 그래서 갔죠. 그랬더니 암만해도 여운형 씨를 패야 된다고 해요. 그러니 김 동지가 정보와 돈과 무기만 우리한테 제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죠."
그런데 "누가 할 겁니까?" 그랬더니 염동진 씨가 "저기 쟤다" 이래요. "쟤가 이북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학살당했소. 그래서 철천지 원한을 가지고 있지." "그쪽은 나이가 몇 살입니까?" 그랬더니 18살이라고 합니다. 저런 아이가 한다 이겁니다. 그럼 이름은 뭐냐고 하니까 한지근이라고 그래요. "한지근. 좋습니다. 그러면 거행합니까?" 못 하면 내가 하려고 생각했어요. "총을 어떻게 구입해서 줘야겠네." "총, 제가 드린 것은 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했더니 가지고 38선을 넘어갔다고, 이북공작으로 들어가서 탄환하고 총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그 총을 갖다 드리겠어요." 라고 말하고 총을 갖다 주었어요. 그리고 돈 백만 원 갖다 드리고. 이래 가지고서 혜화동에 있던 내시집 있잖아요. 동소문 바깥인데 지금의 삼선교 근방에서 저쪽 개천교로 올라가면 김연수 씨 별장 위에 내시집이 하나 있었어요. 거기에서 위해를 한다고 해서 목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1차, 2차, 3차로.
혜화동 로타리에서 지나가는 것을 3명이 망보다가 한지근이가 자동차 뒤를 턱 치고 올라가면서 뒤에서 그냥 갈겼죠. 여운형 씨 목과 뒤통수에 맞았죠. 그분은 거기서 숨졌죠. 그 후에도 백의사는 순전히 좌익 거물급만 죽이는 데 주력한 거죠. 염동진 씨는 나중에 6·25때 납치당했죠.
-염동진 씨는 박헌영을 잡아서 고문을 해 가지고 조직 내부를 알자고 했지만 나는 안 된다고 했어요. 나는 일정 때 그 사람들이 고문당하는 것을 여러 번 봤어요. 일본 경찰이 악착같이 고문해서 마지막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는데도 불지 않아요. 죽으면 죽었지 안 불어요. 그러니까 이건 데려올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암살해 버리는 것이 제일 빠르다고 했는데도 소용없어요. 이게 견해 차이란 말이죠.
아무튼 서울예식장 맞은편 자유당 자리에다가 박헌영이가 새 차를 갖다 놓은 거예요. 보니까 4명이 박헌영을 가운데 놓고 보호해요. 박헌영 일행이 쓱 지나가는 것을 뒤에서 둘러쌌어요. 꼼짝 못 하는 거야. "꿈쩍하면 박헌영이 죽어"라며 위협한 뒤 박헌영의 허리를 붙들고 뒤축을 잡아 가지고 끌고 나갔죠. 그때 백의사 사령부는 낙원동에 있었어요.
그런데 재수가 없어서 종로경찰서 앞을 지나게 됐어요. 거기가 미국 사람들이 군정 재판을 하는 곳이에요. 박헌영의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고 종로경찰서 앞으로 걸어가라고 하니까 박헌영이 대담하게 걸어가요. 그 앞에 가니까 박헌영이 무엇을 확 던져요. 보초 서던 놈이 영어로 뭐라고 소리 지르고 내가 막 휘두르니까 박헌영이 군정재판 대위실에 뛰어들어가서 "저놈들이 나를 암살한다"고 소리를 친 겁니다. 우리는 인사동 거리를 그냥 뛰었단 말입니다.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갈기면 되는 걸 놓쳤다 이겁니다. 결국 박헌영이는 변장해서 개성에서 송악산을 넘어 도망가 버렸어요.
-전기 회사로서 조선전업이 있고 남전이 있고 경전이 있었어요. 지금은 통합을 해서 한국전력회사가 됐지만. 그런데 여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단 말입니다. 우선 제1차로 동대문 바로 옆에 있는 경전을 포위해 버리고 명단을 가지고 조사해서 파업분자들을 집어냈어요. 그들을 전차 차고에 끌고 가서 묶어놓고 쇠파이프로 내리치는 거예요. 처참하죠. 아비규환이지…. 그때 얼마나 다쳤냐 하면 4백 몇 십 명쯤 될 거예요. 그 후 우리 진영의 노총과 대한민청과 결성식을 해버렸죠.
해방이 된 뒤 노동조합 중 가장 센 곳은 노량진에서부터 인천까지입니다. 노량진, 영등포, 소사, 오류동, 부평, 인천 등 공업지대입니다. 철 공장, 옷감 공장, 군수 공장 등이 전부 있거든요. 거기 밀고 들어가서 싸우는 겁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40만 명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거기를 들어갈 때는 대창을 전부 구워서 톱으로 썰고 대패로 깎아 가지고 숯을 벌겋게 피워서 그걸 콩기름에 집어넣었다가 꺼냅니다. 그게 칼보다 더 좋습니다. 총소리가 너무 나면 안 되니까.
지금 서울시 경찰국 자리가 금천대라고 하는데 금천대 술집 바로 옆에 신 씨라는 사람이 부랑자를 1만 명을 뽑은 거예요. 그 사람들을 싣고 가서 술을 한 잔씩 배급 주는 거예요. 독한 술을 한 컵 쭉 들이키면 얼큰하게 취한단 말이에요. 그리고선 트럭으로 정문을 들이받는 거야. 방직회사 복판으로 들어가면 돌멩이가 우박같이 쏟아져요. 그럴 때 수류탄이 필요한 거야. 수류탄을 뽑아서 두 방 터뜨리면 한 서너 명이 죽어 나자빠지거든요. 아무튼 인천까지 싸움하러 들어갔다 나왔다 밤에 습격했다 하는 데 3개월이 걸렸습니다. 3개월 후에 마지막으로 인천에 있는 조선기계제작소를 점령했어요.
-1947년 2월부터 10월까지 또 싸웠는데 제일 마지막으로 치열하게 싸움 붙은 것이 남조선 철도파업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3천2백명이 38구경식 권총을 들고 수류탄을 가져오고 딱 둘러싸면서 철도파업을 시작한 거예요. 장택상 씨와 조병옥 박사는 꼭 그럴 때만 날 써먹어요. "두한이, 이번에만 자네가 꼭 해줘야겠네." 도리가 없거든.
최후 결사대를 5천 명 뽑은 거예요. 2천명은 정문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3천명은 각 방향으로 쳐들어가는 거예요. 여러 동지들을 총망라한 거죠. (장택상 씨가 넘겨준 경찰전문학교 실습용 총 300여 정과 수류탄 3상자를 가지고) 새벽녘에 먼동이 트면서 총 3방 소리가 나는 것을 암호로 정문을 밀고 들어가기로 약속을 했어요.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왼손에는 총을 쥐고. 그다음에 술을 가져오라고 하니까 처음으로 미국 양주가 나오는 거예요. 그전에는 국산 양주를 먹었는데…. 경찰들이 음식점에 주문을 해가지고 한정식을 수송해 주었죠. 3시 반쯤 되니까 술을 일제히 먹었어요. 술을 먹지 않으면 못 들어가거든요. 총알이 비오듯 하니까.
와~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뛰어 들어간 거예요. 마이크로 방송을 했어요. "김두한 부대다. 김두한이란 말이야. 손들고 나오지 않으면 죽인다. 만일 항복하면 살려준다." 이렇게요. 김두한 부대라면 떨었거든요. 그래서 저쪽에서 항복을 하니까 내 동지들이 총을 들이대면서 손을 뒤로 묶고 포로 식으로 끌고 나갔어요. 무장하고 2층으로 올라가 또 소리쳤어요. 전부 끌고 나왔죠. 총기도 압수하고 용산 넓은 마당에 쭉 앉혀 놓고 뒤에다가 총을 하나씩 갖다댔어요.
"전평(전국노동자평의회) 책임자를 너희들이 지금이라도 내놓지 않으면 총을 쏜다. 20분의 여유를 준다. 20분 안에 터뜨린다" 했더니 할 수 없이 간부들도 손들고 나오는 거예요. 8명이 나왔는데 이 간부들을 경찰에 인계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나씩 끌고 나가서 뒤통수를 쏴서 죽여 버렸어요. 화가 났으니까요. 그걸 언제 넘겨요? 넘기면 콩밥 먹고 징역 살고 나오면 또 골치 아프니까. 쏴 가지고서 기차 윗자리에 쏙 집어놓고서는 시멘트 싣고 오라고 그랬어요. 그때는 내가 미련해서 그랬어요. 이렇게 해서 남조선에 대한 공산주의 최후의 혁명인 남조선 철도파업을 복구시킨 겁니다.
-지금 동아일보에서 방송하면서 좀 대단히 안 됐지만 신문사라는 게 골치 아픈 거거든요. 사실 신문 기자를 정면으로 때렸다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고 나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그때 명령할 때 신문 기자만은 전부 뒤통수를 치라고 그랬어요. 절대 누가 쳤는지 모르게.
당시 우익 신문으로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대동신문 3개이고 좌익 신문은 조선인민보, 노력인민, 중앙일보라고 있었습니다. 좌익 신문 만들던 곳은 말하자면 나무떼기 집이었어요. 일정 때 그건 단층이었어요. 그곳에 대낮에 뒤로 들어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지붕 위에서부터 밑으로 휘발유를 두루루 붓는 거예요. 그리고 불을 확 지르니까 밑에 인쇄 공장에 불이 확 붙을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골목길에 네 사람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살 사람은 살고 죽은 사람은 죽지만 할 수 없이 비밀로 했죠. 그런 식으로 해서 좌익 네 군데 신문사는 완전히 없어진 겁니다.
타임라인 사진 · 9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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