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1948년 2.7구국항쟁 당시의 우리나라 정치 상황
제주도 4.3의 정치적 배경
제 1절 5.10선거 결정전까지의 일반적 정치상황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이 발표되자 여운형,안재홍 등은 1944년 이미 조직되어 있었던 항일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을 모태로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수립하고 신속하게 전국적인 통치조직을 건설해 나갔다.
이 결과 8월말까지 건준은 전국 각지에 145개의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초기의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건준의 이러한 활동에 대하여 국내 우익은 건준을 용공시하여 참여하지 않았고 또한 임정봉대론을 명분으로 하여
미군의 진주시까지 사태를 관망함으로 건준의 초기 정국의 주도권은 강화되어 나갔는데
이러한 상황은 미군의 진주가 알려지고 또 미군의 진주함으로써 반전되어 가기 시작한다.
미군의 진주가 알려지자 건준은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사실상의 정부라고 할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이를 기정사실로하여 미군을 맞으려는 노력을 명백히 하였다.
좌익계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국내 우익은 미군의 진주가 알려지자 비로소 조직결성에 착수하여
힘을 규합해 나갔고, 9월 8일 미군의 진주와 때를 맞추어 ‘인공타도’라는 팜플렛을 제작하여
서울시내에 살포함으로써 인공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으며마침내 9월 16일에는 한민당을 창당하였다.
미군의 한반도 진주는 9월 8일 하지의 제 24군단의 인천 상륙을 시발로하여 시작되었다.
미군은 진주 이전부터 9월 2일 “민중에 대한 포고 및 제 명령은 현존하는 제 관청을 통하여 공포된다.”는
하지의 포고문을 살포하여 일제의 식민통치 기구의 존속을 당연시하였고 이러한 입장은 9월 9일 발포된
맥아더의 포고 제 1호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특히 미군정장관 아놀드는 “현재의 경찰조직은 그것이 한국인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한국이 ‘점령국’이 아니라 ‘해방국’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미군 진주 당시의 모습을 통해서도 투시되고 있는 바 미군은 인천 상륙 당일에
미군 환영대회에 나갔던 조선인들을 학살한 일본군의 행위는 묵인했고 서울 진주시에도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적의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미군의 당시의 서울 진주 모습을 한 목격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미군이 9월 9일 서울에 들어왔을 때 그 모습을 보기 위하여 서울시청 앞까지 나갔는데
한국인을 보는 미군의 눈은 멸시와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이러한 미군의 모습을 보고 끓어 오르는 모욕감을 참으며 생각하였다.
‘이러한 미군의 자세는 전쟁 중에 적국에 상륙한 군대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한국 민중은 미군을 적으로 보고 있지 않은데 왜 그들은 우리들을 마치 적을 보는 것처럼 하는가!
금방이라도 우리들에게 달려들어 총검으로 찌를듯한 자세가 해방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결국 미군은 해방자로서 (한국을)점령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를 합법적 통치기구로 온존시키려고 시도함으로써
해방된 한민족의 감정과 의사를 무시하려 했으며 동시에 9월 20일 “군정청은 남한에 있어서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하여 인공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어느 것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결과 인공과 적대관계에 있고
부일요소가 있다고 지탄받던 한민당과 미군정과의 제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우연히 이루어졌던 것일까?
어느 연구가의 평가와 같이 미군은 한국의 점령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이기적인 목적도 가지지 않았으며
정책도 갖지 못했었고 그 결과 우연히 그리고 별 고려없이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출현하였던 것일까?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의 대외정책, 특히 대아시아정책에 관한 한 연구는 이것을 부인한다.
즉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의 아시아 점령정책은 기존의 반식민지 해방운동체의 셩격에 대한 정보분석에
기초하여 보수적 민족주의 세력이 우세한 곳에서는 반식민주의 입장을 취했고 독립에 찬성했으나
좌익이 우세한 곳에서는 ‘신탁통치’나 혹은 식민주의의 ‘해방된’계속 유지를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대한 미군정의 정보는 일본의 패퇴와 더불어 이미 조직되어 있던 지하정부구조 (인민위원회, 즉 건준)가
손쉽게 권력을 인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었고 또한 일본인 및 한국인 지주에 의한 강탈적인
토지소유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미국무차관 그류는 전쟁의 종결로 한국의 소농계층은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기대할 것이며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기 쉬울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결국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은 일제 식민통치기구를 온존시키는 방향으로의
식민주의의 ‘해방된’ 계속 유지에 일차적으로 두어질 수 밖에 없었으나 이것은 한민족의 격렬한 저항을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의 토착 좌파를 분쇄하여 한국에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 나갔고 동시에 카이로선언 이래
미국의 일관된 대한반도 문제해결 방식이었던 신탁통치안을 제기하게 된다.
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 모인 미국, 영구, 소련의 삼국 외상은 이후 한국의 정치상황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다음과 같은 요지의 한국에 관한 결정서에 합의한다.
1) 한국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한다.
2) 한국민주임시정부의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 점령군 사령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이 위원회는 그 제안 작성에 있어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3) 한국민주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작성된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한으로
4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 영, 소, 중 정부가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한국민주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4) 한국에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미.소 점령군 사령부 대표로 구성되는 회의를
2주 안에 개최한다.
한국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이 알려지자 한국의 정국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김구 중심의 임정 세력은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즉각적인 반발을 보이면서 전투적인 반탁시위를 주도해 나갔다.
임정세력은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를 구성하고 반탁시위를 주도하고
경찰기구를 포함한 미군정기구들을 임정이 접수하겠다는 격렬한 내용의 임정 포고문을 발표함으로써
미군정과 임정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상태가 전개되었다.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의 반탁운동은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반탁운동을 이미지 쇄신의 기회로 삼고 김구와 제유하였으나 김구가 ‘반탁’의 민족주의적 계기에
역점을 둔데 대하여 이승만은 미.소 냉전의 전망을 선취하여 어디까지나 반공을 기본으로 해서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것으로 이승만의 이러한 입장은 좌익계가 반탁 의사를 급작스럽게 철회함으로써 강화되었다.
좌익계는 처음 반탁의사를 명백히 했으나 46년 1월 3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지지를 위한 시민대회’를 개최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총체적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들은 신탁통치는 한국의 즉시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나 4국의 보호하에 들어감으로써
식민지화의 위험이 제거된다고 강조하면서 소련 점령당국이 공포한 이른바 ‘후견제’의 논리로
민중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좌익계의 이러한 방향전환은 결국 반탁과 반공, 반소가 동일시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즉 미군정은 반탁운동에 나타난 민중의 지지에 착안하여 그 반공 이데올로기의 유효성을 충분히 이용하면서
우파의 반탁운동을 묵인했고 결과적으로 김구 중심의 전투적인 반탁세력의 에네르기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반공노선에 흡수되어 좌익계를 공격하는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좌.우익 세력이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개편되면서
첨예하게 대립되어 가고 있을 때 개최된 미.소 공동위원회의 예비회담 (1946.3.20 ~ 5.8)와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1947.5.21 ~ 8.12)도 결국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할 한국의 정당 및
사회단체의 자격문제 및 문제의 접근방식의 차이로 결렬되고 만다.
이 문제에 대한 소련의 일관된 입장은 반탁세력을 한국민주임시정부의 수립에서 배제시키고
한국민주임시정부의 수립을 최우선시하여 경제와 행정의 통일을 뒤로 미루는 정치 우선적인
접근방식이었음에 반하여, 미국의 일관된 입장은 소수파(결국 좌익세력)에 의한 한국지배를 방지하고
한국민주임시정부의 수립에 앞서 경제와 행정의 통합을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달성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놀라은 것이 못된다.
볼이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은 소련에게 우호적인 정부의 수립을 기어코 봉쇄하려고 하였고
소련 역시 미국에게 우호적인 정부의 수립을 철저히 저지하려 한데서 결렬된 것”이었다.
더구나 남.북한의 분리발전 및 국제정치상의 냉전의 시작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장래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에 전술상의 변화를 야기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인 46년 5월 24일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은 미국무장관에게
“소련은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에서 통일전선정책과 다를 뿐인 정책을
한국에서 강행할 위도임이 너무나 뚜렷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정책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 분명히 한반도 전역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촉진시키고 용이하게 만드는 결과가 될 것이다.”라고 보고했으며 5월 25일 미국무장관은
이에 랭던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지 않으면 미국인은 남한에
단독정부의 수립을 추진해야한다.”는 하지의 정치고문 굳펠로우의 주장에 대한 논평을 요구함으로써
신탁통치안을 재고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술상의 변화는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한다는 미군정의 대한반도 정책의 전략상의
원칙을 확인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결국 좌익계에 대한 철저한 공격으로 연결되었다.
미군정은 반탁운동의 분위기에 편승한 반공노선의 확산에 힘입어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를 전후한 시기에
우익강화와 좌익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미군정은 국제적 위임사항이 아니었으며
상부의 어떠한 동의도 없이 또 군의 창설이 소련을 자극하리라는 경고에도 불고하고 38선 방어와
소요 진압을 위한 건군사업을 계획.추진하여 마침내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여
일본군의 배경을 가진 장교들을 주축으로 운영해 나갔다.
이와같은 우익강화작업과 함께 미군정은 좌익계의 약화를 시도해 나갔다.
미군정은 46년 2월 23일 정당의 비밀활동을 규제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정당등록법’을 발표하여
좌익계 정당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했으며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부터는
좌익에 대한 공격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특히 미군정은 46년 5월 조선정판사사건을 계기로 하여 건물들을 철저히 수색함과 동시에
9월초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등의 조선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고
또한 9월 7일 ‘조선인민보’, ‘중앙신문’과 ‘해방일보’ 및 여타 좌익계 신문들을
‘선동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폐간하였다.
47년에 접어들자 미군정의 좌익계에 대한 공격은 더욱 가열되기 시작하여 경찰에 의한
직접공격 뿐만 아니라 경찰의 지원을 받는 우익테러집단의 좌익계에 대한 테러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미군정의 전면적인 공격에 대응하여 좌익계는 46년 7월 소위 “정당방위의 역공세”를 주장하는 신전술을
채택하여 반격을 준비하였고, 이러한 때에 발생한 ‘9월총파업’과 이에서 발전한
‘10월인민항쟁’을 통하여 그들의 힘을 과시했다.
9월 24일 서울을 비롯한 전 철도종업원 4만명의 총파업으로부터 시작된 이 일련의 좌익계의 투쟁은
남한 전역의 73개 시군에 파급되어, 연인원 110만명이 참가하여 최고 1,000명이 사망하였고
16,000여명이 부상, 12,000여명이 체포되었던 해방후 가장 대규모의 대중투쟁이었다.
이 일련의 대중투쟁은 미군정에 가해진 최초의 충격으로서 그 과정을 통하여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미군정의 실정이 부각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우익 특히 경찰세력의 강화를 촉진하여 인민위원회와
그 관련 단체의 몰락을 야기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특히 이 사건의 진압과정에서는 경찰의 야만성이
부각되고 있었는데 미군정 문서는 “봉기가 진행되는 동안 수많은 만행이 경찰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기록하여 경찰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1946년 말에는 미군정과 좌익계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적대적으로 되었다.
좌익계는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여 조직을 정비한 다음 47년을 맞이하고 이후
‘국대안반대투쟁’, ‘3.1시위사건’, ‘3.22파업’, ‘7.27대회’등을 통하여 미군정에 저항해 감으로써
미군정과 좌익계는 이제 더 이상 화해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46년과 47년에 걸치 좌익계의 대미군정 투쟁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들이 준비가 없는 무모한 도발로
세력의 약화를 자초했으나, 여전히 전면적인 무장투쟁의 준비는 미처 안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주장도 “권력을 인민위원회로 돌리라”는 정치적 요구가 투쟁목표 핵심으로
“미제 축축”의 주장은 전면에 부각되지 않고 있었다.
제 2절 5.10선거 결정전까지의 제주도 정치상황
일제의 항복이 발표되자 제주도민은 패전군임을 망각한듯한 일본군에 의해 여전히 자행되고 있었던 위
압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극복하면서 제주도의 건준 및 인민위원회의 결성에 착수하였다.
45년 9월 10일 도민은 자주적으로 조직되고 있던 청년대, 보안대 및 관공서, 기업체, 학교 등의
‘...관리위원회’, ‘...복구위원회’ 등을 모태로 오대진을 위원장으로 한 제주도 건준을 결성하여
미군정의 탐사팀으로 제주도에 파견된 미군정 사법부요원 에모리 우달 및 당시 도사(대리) 치오타와
일본군 제 58군 사령관 가쓰키를 만나 다음의 3개항을 요구하였다.
1)치안유지와 건국사업을 위한 정치활동에 절대로 간섭과 방해를 말 것
2)일본군과 경관을 즉시 무장 해제할 것
3)행정을 건준이 도.읍.면의 결성과 함께 양도할 것
이러한 도민의 요구에 대하여 미군정은 일본군의 항복만 받고 본토로 귀환함으로써 도민의 요구를 묵살했고
일본군 또한 “미군의 도 군정장관이 부임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도민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도민을 위협, 공갈하여 건준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도민은 9월 15일에는 제주읍 인민위원회를, 그리고 9월 22일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여 “조국의 자주 통일 독립과 민족의 완전 해방을 위하여 투쟁할 것과
일제의 잔재세력과 국제 파시스트 주구를 청산하여 민족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본 정책노선을 채택하여 도민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동시에 인민위원회는 산하단체의 조직에 착수하여 9월 하순에 청년, 부녀자, 교육자, 노동자,
문화인의 전도적 통일기구로 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를 조직하고 여기에 이어 부녀자동맹, 교육자동맹,
노동조합, 소비조합, 제주문화협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이 해 12월 9일에는 조선공산당 제주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당시 일본군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도내의 자치행정기구로서
제주도의 유일한 정당. 즉 유일한 ‘정부’였으며 또한 출발초부터 전라남도에 속박됨이 없이 독립적으로 기능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도민의 적극적 지지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인민위원회는 학습회, 강연회, 웅변회, 체육대회, 연예대회 등 계몽활동을 통해서 도민 속에 파고 들었고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통제하고 있었으며, 제주도내에 유일한 신문인 ‘제주민보’를 간행하였다.
이 결과 제주도는 1945년 ~ 1946년 사이에 인민위원회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다.
미군의 제주도 진주는 9월 28일에 이루어졌다.
라우렐 대령이 이끄는 미군 1개 연대 병력은 10대의 군용기와 2척의 LST함정편에 분승하여
제주비행장과 산지부두를 통하여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일본군과 민간인의
본국 귀환작업에 착수하였다. 동시에 미군은 도착 다음날부터 제주도 미군정청을 설치하여
군정관에 스타우드 소령을 임영하고 제주도 통치기구를 확립해 나갔다.
미군정청은 김누희를 도사대리로 임명하여 제주도청을 재조직하였고 감찰청(청장 김대봉) 및
제주경찰서 (서장 강동효)와 22개의 경찰서를 발족시켰으며 제주지방법원 (법원장 최원순)과
제주지방검찰청 (검찰청장 박종훈)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군정은 한때나마 일본 경찰을 미군정의 경찰로 온존시키려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였고
또한 각 통치기구의 우두머리들은 모두 친일생각으로 비난받고 있었던 자였다고 한다.
결국 미군은 친일분자를 축으로 권력기구를 지탱하는 기반을 구축하고 그 통치기구를 확립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의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구들은 당시의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능가하지도 못하였고 그것을 제어하기에도 역부족이었으며 따라서 미군정은 일본군 및 민간인을
본국으로 귀환시키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
미군정이 제주도에 대한 본격적인 점령정책은 11월 10일 미군 제 6사단 20연대가 제주도에 도착함으로써 개시되었다.
그 후 곧바로 제 59군정 중대가 도착했지만 인원이 부족하여 통치업무를 수행하지 못하였고
이에 제주도의 우익은 “경찰과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탄압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고 불평했다.
미군정의 이러한 한계는 제주도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미군정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이유 외에
당시 제주도에서의 힘의 관계를 평가한 결과일 것이다. 미군정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강했고 숫적으로 우세했으며 온건한 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도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수행했고, 따라서 미군정은 그것을 지지하여 제주도를
통치할 방도 외에는 뚜렷한 대안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제주도에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차츰 좌익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우익의 우세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제주도 점령정책을
전환시켜 나갔으며, 이때 발생한 ‘한라단사건’은 미군정의 그러한 시도의 관철을 평가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원래 한라단은 제주도 건준 산하의 보안대의 횡포를 견제하고 친일파 타도,반공사상 계몽활동을 목적으로
김태륜, 김기오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우익단체였다.
사건의 시발은 한라단이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습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에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한라단을 비롯한 일체의 테러리즘을 배격한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도 군정청까지 시위를 감행하여 미군정에 항의하였다.
이날 밤 한라단원들은 재차 인민위원회를 습격하였으나 오히려 보안대의 반격을 받고
10명의 한라단원이 포위되어 집단구타를 당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미군과 경찰은 인민위원회를 습격하여 보안대원 154명을 체포하고
그들이 소지하였던 무기를 압수하였으며, 시내 일원에 통행금지를 실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1,000여명의 도민이 다음날 “미군의 간섭 절대반대”, “피검자 즉시 석방”,
“테러단 즉시 해산”, “민주단체에 대한 탄압 반대”등을 요구하며 관덕정에서 항의시위를 벌이자
미군정은 무력으로 이를 해산하고 전날 체포된 154명에 대한 재판을 개시하여 전원에게
각자 50엔 이상의 벌금형을 언도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미군정은 좌익계에 대하여 공공연한 공격을 시작하여 애월, 한림, 옹포, 금악, 고산, 대정,
중문, 안덕, 서귀, 조천 등지의 인민위원회와 산하단체의 간부들에 대한 자의적인 구금 등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탄압은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1946년에도 여전히 인민위원회는 제주도를 지배하고 있었고 이에 미군정은 우익 강화책을 펼쳐 나가게 된다.
46년 7월 이후 미군정은 우익단체인 대한독립촉성회, 한국독립당, 비상국민회 등의 제주도지부의 조직을
적극 지원하였고 또한 광복청년회 (후에 대동청년단으로 개편)의 결성을 독려함으로써 우익단체들을 강화해 나간다.
한편 46년 본토에서의 ‘10월항쟁’이후 미군정은 본토에서 경찰과 100여명을 증파하여
경찰조직을 정비, 강화하였고, 그해 11월 16일에는 모슬포의 대촌에서 국방경비대 제 9연대(연대장 장창국)를
창설하였으며 해안경비대를 제주 근해에 배치하여 제주도의 좌익계를 압박하였다.
한편 47년 3.1절 시위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여기에 대응하여 전북에서 100명, 전남에서 200명을
차출하여 제주도에 파견하고, 약 800명의 서북청년단원과 민족청년단원을 파견하여
좌익계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을 개시해 나간다.
미군정의 공공연한 공격에 직면한 제주도 좌익계는 46년부터 이에 대항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미군정의 통치에 대항하는 제주도 좌익계의 저항의 특징은 사실상 제주도 통치경험에서
표출된 자신감, 그리고 정통성의 보유 등으로 인하여 그러한 통치질서를 부인하려는 미군정에 대한
직접적 공격, 즉 반미구호의 공공연한 제기에서 찾아진다.
이 점은 당시 전국적 상황에서 보면 인민위원회의 세력이 위축되고 있었던 관계로 그들 투쟁의 핵심구호가
“권력을 인민위원회로 돌리라”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뚜렷이 부각된다.
46년 1월 버스회사 종업원들이 경제적 요구를 내건 투쟁을 시발로 하여 제주도의 좌익계는
2월 23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여 조직을 정비,강화해 나갔고
5월 중순 제주시내 중.고등학교 약 1,000여명의 군정청앞 시위 및 하반기의 제주농업중학교와
오현중학교의 동맹휴학을 조직함으로써 미군정에 대하여 그들의 힘을 과시하였는데
당시 이들 학생들의 요구의 핵심은 ‘미제’의 배격과 ‘반공적이며 파쇼적인 미제의 식민지교육’의
반대에 두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제주도의 좌익계와 미군정과의 관계는 그렇게 악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제주도의 좌익계와 미군정의 관계는 그렇게 악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제주도의 좌익계와 미군정의 관계는 제주도 우익이 도민의 독립주의적 심리를 이용한
도제 승격운동이 성공되고 난 후 (1946.8.1)에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47년 3.1절 시위사건이 발생함으로써 더 이상 회복될 수 없게 되었다.
1947년 2월 하순 좌익폭동의 정보가 새어 나오자 제주도 미군정은 직장 단위의 기념식 외에는
일체의 3.1절 경축집회를 금한다고 발표하고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미군정의 이러한 경계태세에도 불구하고 약 2,000명의 학생과 군중은 오현중학교 교정에 모여
3.1절 기념식을 갖고 “미군은 남조선에서 당장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민대회장이었던 북국민학교로 행진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군중의 수는 점점 증가해
약 3,000명의 군중이 북국민학교에서 3.1절 기념식을 개최한 후 가두시위에 돌입하였다.
시위대가 관덕정 앞에 이르렀을 때 미군정 경찰은 갑작스런 발포를 하여 민간인 4명을 치사케 하고
수명에게 상해를 가한 후 군중을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동시에 제주시 경찰서장은 목포의 국립경찰에 100여명의 증원경찰을 요청하여 그날 오후
증원경찰이 파견되어 옴으로써 제주도 경찰력을 보강하고 다음날부터 민전 간부를 비롯한
활동가들에 대한 대규모의 검거에 들어감으로써 제주도의 상황은 긴장되기 시작했다.
제 3절 남로당의 5.10선거 반대투쟁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9월 17일 한국문제를 제 3차 유엔 총회의 의제로 제출했는데
이는 미국의 카이로선언 이래 계속 추구해 왔던 대한반도정책인 4대국 신탁통치안의
전면적인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이처럼 한국문제를 유엔 총회에 회부한 이유에는 소련과의 불화라는 결정적 요인 이외에
미국의 국내사정이 있었다. 미국의 합참본부는 안보적 관점에서
“미국은 한국에 현재의 군대와 기지를 유지함에 있어서 거의 전략적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여
주둔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있었고 국무성과 의회는 한국에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군사정부를 유지함에
필요한 재정적인 지원을 거절하였으며, 게다가 미.소공위원회의 실패 이후 한국인의 반감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었다.
한국문제를 고려할 때 특히 미국을 가장 괴롭힌 것은 북한의 발전으로서 북한 정권은 거짓이든 참이든 간에
한국인 지도자들이 자기 조국의 통치에 있어서 명목적인 권위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때에 한국문제를 유엔 총회에 회부한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유엔을 통한 통일된
민주적 한국정부 수립을 전적으로 기대하고 있었는지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서
결국 47년 여름과 가을,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고려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다는 명분을 세우면서
한국문제로부터 빠져 나오려는 일종의 ‘탈한정책’에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독자적 발전에 충격을 받고 있었던 미국은 그들의 ‘기계적 다수’가 확보되어 있는
유엔을 통하여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으면서 남한에 북한에 대항할 만한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려 했고
이는 미국의 세계전략하에서 한반도 반쪽만이라도 그 구도에 짜맞추려는 것을 의미했다.
유엔을 통한 한국의 통일정부의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예측은 유엔의 한국문제 토의과정에서 하나의 현실로 나타났다.
미국과 소련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의 합병성 문제에서 처음부터 대립하였고 한국문제가 총회에서
유엔 정치위원회로 회부된 이후로는 한반도 점령군의 철수문제와 한국 대표의 참석문제를 놓고
또 다시 열띤 논쟁을 전개하였다.
미국은 선 정부수립, 후 점령군 철수와 유엔에 참석할 한국 대표의 선출을 위한 유엔 임시위원단의 설치를
요구했으나 소련은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이 모스크바협정에 위반된다고 지적하고 동시에 그 불법성을
지적했으며 선 점령군철수, 후 정부수립과 남북한 대표의 동시초청을 우선적으로 내세웠다.
결국 미국의 기계적 다수가 확보되어 있는 유엔은 47년 11월 14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측 제안을 가결시켰고 당연히 소련은 이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히 선언하였다.
한국문제는 한국인 자신에 관한 문제이고, 한국의 자유와 독립에 관한 문제로써 한국인 대표의
참가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므로
1)본 문제 고려에 참가할 한국인 대표들을 초청할 것.
2)한국인 대표의 참석을 용이하게 하고 또 이 대표들이 한국인에 의해 정당히 선출되었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즉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를 창설하여 한국 전토를 여행, 감시,
협의할 권리를 갖고 한국에 주재하게 할 것.
3)UNTCOK은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의 대표로 구성할 것.
4)1948년 3월 31일 이전에 한국에서 UNTCOK의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보통선거 원칙과
비밀투표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할 것
5)선거 후 가급적 빨리 국회를 소집하고 정부를 수립할 것.
6)한국정부가 수립되는 대로 동정부는 UNTCOK과 협의하여
ㄱ.국방군을 조직할 것
ㄴ.남북한의 군정 당국으로부터 정부 기능을 이양받을 것
ㄷ.가급적 빨리, 가능하면 90일 이내에 양 점령군이 완전 철퇴하도록 양 점령국과 협정을 할 것(이하 줄임)
UNTCOK은 1948년 1월 12일 서울에서 제 1차 회의를 개최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소련측의 비협조로 북한에서 그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UNTCOK는 치열한 논쟁을 거쳐 유엔 소충회에 자문을 구할 것을 결의하였고 유엔 소총회는
이에 대하여 2월 26일, “한국문제에 관한 1947년 11월 14일의 유엔 총회의 결의와 그 이후의
사태 진전에 비추어 소총회의 견해는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의 지역에서 결의
제 2호에 규정된 사항을 실행하는 것이 UNTCOK의 임무라고 간주한다”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왔다.
유엔 소총회의 이러한 회신에 따라 UNTCOK는 치열한 논쟁 끝에 “1948년 2월 26일 채택한 결의에서
소총회가 표명한 견해에 따라. 선거실시를 감시하며, 동선거는 늦어도 1948년 5월 10일 이전에
실시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결의를 채택하였는데 이는 결국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되고 그것이 결국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한 단정수립을 의미한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지자 남한의 정국은 단독선거의 실시라는 쟁점을 놓고 다시 가열되기 시작한다.
UNTCOK보고서는 이 문제를 둘러싼 주요 정치 세력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명료히 요약하고 있다.
1948년 1월 초 위원단의 서울 도착 이후 주요 제 정당의 대위원단 태도는 각양각색이었다.
수개 좌익정당과 극좌정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은 각종각색의 어조로 위원단을 환영, 지지한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위원단이 38이북 선거감시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이 2월 초까지는 이미 명백히 되고
특히 이에 관한 유엔 소총회의 결정이 발표되자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 소속 정당의 대부분은
위원단의 감시하에 조선의 일부지역에서만 행하게 되는 선거는 이를 반대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좌익주요 정당 및 사회 제단체는 위원난의 도착 당초부터 조선문제는 조선인 자신에게 맡기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단체의 위원단에 대한 비난의 한가지 특징은 위원단은 미 ‘제국주의’의 충복의 역할을 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이승만과 한민당, 그리고 북한 피난민을 대표하는 조선민족당은 단독선거를 강력히 지지하였는데
이것은 이승만의 46년 6월 23일 소위 ‘정읍발언’을 통하여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추진한 인물이고
또한 한민당과 미군정과의 유착관계를 고려할 때 당연한 것이었다.
반면 김구는 처음부터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거부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었다.
즉 그는 48년 1월 UNTCOK과의 협의를 마치고 난 다음 “미.소 양군의 철퇴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서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다.
양군이 철퇴한 다음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선거준비를 한 후 총선거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당일 UNTCOK에 제출한 의견서를 통해서도 점령군의 즉시 철퇴와
‘남북 한인 지도자회의’의 소집을 통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김구의 이러한 일관된 주장에 비하여 김규식은 처음 약간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즉 그는 48년 1월 27일 UNTCOK과의 협의를 마치고 난 다음 “유엔이 이것(단정)을 주장한다면
한국의 북반을 영원히 타국의 위성국화 내지 연방화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북한까지 합칠 고려가 있어 2/3이상의 인구를 가진 남한에 중앙정부로서 유엔에서 승인하고
통합 방도가 있게 된다면 재론할 문제이다”라고 함으로써 오해의 소지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김규식도 김구와 함께, 단정세력의 격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의 길로 나서는데 이는 결국 현실정치에서는 정치적 몰락의 길로 향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남로당의 좌익계는 처음부터 UNTCOK의 목표가 남한에서의 단선 단정수립이라고 규정하고
47년 12월 중순부터 단선 단정 반대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좌익계의 이 당시의 투쟁은 UNTCOK의 불법성을 지적하면서 한국통일 방안으로서
소련안의 채택을 요구하는 정도의 온건한 것이었고, 비록 UNTCOK의 입경 후부터 조금씩 강화되기
시작하였으나 단선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전략 및 역량문제에 비추어 비관적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박헌영의 총파업에 대한 5개의 지령을 밮표함으로써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박헌영은 이 지령을 통하여 투쟁의 계속을 지시하였고 이러한 박헌영의 지령은 투쟁역량이
현저하게 감소하였으며, UNTCOK과의 협조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던 당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되어 결국 좌익계는 ‘2.7구국투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1948년 2월 7일 전평 산하의 각 노동조합이 주도한 총파업에서 시작된 ‘2.7구국투쟁’은 경인 일대를 위시하여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국적인 규모로 파급되었다.
그 결과 각 지역에서는 단선에 반대하는 폭동과 파업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합법적 방법과 비합법적 방법을 병용하고 또 노동문제와 정치적 요구를 내포시킨 것으로
공산주의 세력의 토대가 유약하다는 것과 그들에 대한 추종이 적다는 것을 충분히 표시하였다는
하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남로당의 조직역량과 동원역량을 과시하는 계기로 되어
국내외에 걸쳐 단독 정부 수립에 상당한 충격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동시에
5.10선거의 직접적인 방해투쟁의 서곡을 이루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투쟁의 목표는 제한되어 있었고 특히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좌익계에 의한 5.10선거 반대투쟁은 ‘2.7구국투쟁’을 계기로 록 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속되어 갔다.
한때 잠잠했던 좌익계의 공격은 2월말의 2차 총파업을 계기로 재연되었고
5.10선거가 다가옴에 따라 다시 가열되었다.
좌익세력은 당시 개최되었던 남북협상을 이용한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정치투쟁과 함께
비합법적이고 격렬한 폭력투쟁을 추진하였고 이를 위하여 ‘남조선단선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로 하여금 5.10선거 반대를 위한 모든 투쟁을 총지휘케하여 파업과 동맹휴학,
생산기관 파괴, 관공서 습격 등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좌익계의 5.10선거 반대투쟁은 두 단계로 구분되었다.
즉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선거를 거부하고, 선거가 제대로 시행되면 무효화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것으로
그 결과 선거를 전후하여 경찰관서의 습격, 방화, 경찰관.선거 관리위원 및 우익 인사의 암살,
통신망과 철도의 파괴 등이 감행되었다
제 4절 제주도 4.3폭동의 발발
경찰은 3.1절 시위사건 이후의 검거과정에서 약2,500명의 청년들을 구금하고 이중 3명을 고문 치사케 하였으며
후에 이 시체를 강에 던져 버리려고 시도함으로써 도민들을 격앙케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주도의 민전은 “싸우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는 구호아래 각 직장에
‘3.1공동투쟁위원회’ 및 시민 사이에 ‘3.1사건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직장에서의 파업과 학교에서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고 3월 10일에는 ‘제주도총파업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지시하였다.
이 결과 제주도에서는 미군정청 직원과 전도의 관공서 직원 및 대정, 중문, 조천 등의 경찰관을 포함하여
연인원 40,852명이 참가한 “한국에서 처음보는 관공리의 총파업”이 개시되어 3월 18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결과로 전도의 질서가 완전히 마비되고 일체의 행정기능이 상실되자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 13일 조병옥 및 본토 경찰과 우익청년단을 파견하여
파업의 분쇄에 착수함으로써 이후의 제주도에서는 미군정 및 우익계와 좌익계의 폭력이
서로 교차하면서 팽팽하게 긴장되어갔다.
3월 13일 곤봉과 돌로 무장한 1,000여명의 군중이 중문형무소로 몰려가 투옥자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감행하였고 경찰은 이에 발포하여 4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무력으로 해산시켰으며
6월 6일 구좌면 종달리에 민주애국청년회를 기습하였던 3명의 경찰이 오히려 체포되어 구타당하고
철사로 묶이자 다음날 경찰은 100여명의 무장경관을 파견하여 종달리 주민 70여 명을 체포하여 보복을 가하였다.
8월 13일 약 200명의 군중들이 함덕지서를 공격하여 경찰관 2명을 체호하여 구타하자 경찰이 발포하여
여자 1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무력으로 해산시켰으며,같은 날 조천면 북촌리를 공격하던 경찰 2명이
군중에게 체포되어 구타당하였다.
한편 좌익계는 극우파인 제주도지사 유해진의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는 선전공세도 동시에 진행해 나갔으며
그들의 이러한 선전 공세는 “미군 축출”, “경찰 공격”. 그리고 “우익 저주”를 요구하는 전단의 살포를 통하여
더욱 가열되어 갔다. 이에 대하여 미군정은 8.15를 기하여 다시 좌익계에 대한 체포를 대대적으로
개시하여 3.1절 시위사건 이래 각지에서 발생하였던 제 사건의 관련자를 예비검속하고
좌익이라 의심되는 자는 모두 검거, 투옥하는 공격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검거열풍을 피하기 위하여 수십명의 좌익 지도자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할 것을 비롯하여
점차 많은 수의 도민이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한다.
좌.우익계의 폭력이 교차되며 난무하는 가운데 제주도의 좌익계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하여
조직을 정비, 강화해 나갔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3.1절 시위사건 이후 제주도민 사이에 만연되고 있던
미군정 및 우익세력에 대한 반감의 열기를 조직하여 47년 가을부터 당원충원을 시작하였고
이 결과 48년 초가되면 60,000명의 당원과 전체 도민중 80%의 도민의 지지를 확보했다고 추정되었다.
이와 함께 남로당 제주도당은 지도부의 조직개편에 착수하였는데 이 당시 조직개편은 군사적인 경험이 더 많고
교육 수준이 더 높으며, 보다 젊고 급진적인 리더쉽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남로당 제주도당은 군사부를 새로이 설치하고 1948년 2월경부터 무장투쟁조직으로서의
‘자위대’를 편성하기 시작하여 각 구.면.리 단위까지 그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에 따라 ‘자위대’는 한라산을 비롯한 여러 산악과 밀림, 고지, 암굴과 방공호 등을 근거지로
확보하고 훈련에 돌입하였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도민에 침투된 그들의 전 조직을 효과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자위대의 훈련 및 본격투쟁에 소요되는 식량과 무기의 조달을 최대한으로 뒷받침하였는데
여기에는 부녀자와 학생, 아동까지 가담하여 통신, 연락, 의료와 구호지원의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제주도 좌익계의 이와 같은 조직정비, 개편 등의 이유로 인하여 한때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제주도의 정국은 1948년초 UNTCOK의 입국과 활동 시기를 전후하여 다시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48년 1월 1일 표선면 가시리와 인접 부락을 습격하여 좌익계 주민들을 체포,
투옥한 것을 시발로 하여 동 3일과 4일에 걸쳐서는 중문면, 대정면,
제주시 일대 지역의 좌익계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였다.
1월 22일 경찰은 조천에서 개최되고 있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회합을 습격하여
습격 당일에 106명을 포함하여 동 26일까지 총 221명을 체포하였고 동시에
등사기 및 다수의 문서를 압수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압수된 문서에서 좌익계에 의해 계획되고 있던 2월 중순과 3월 5일 사이에
폭동의 음모가 발견되자 경찰은 1월 23일부터 조천면 신촌리 및 그 인접 부락민들을 체포하였고
동시에 전도에 걸쳐서 좌익계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를 재개하는 한편 도민이 은닉하고 있던
일제시대의 무기류의 자진반납을 종용하였다.
이렇게 경찰이 공격을재개학 또한 전국에서 ‘2.7구국투쟁’이 폭발함에 따라
제주도의 좌익계는 즉각적인 반격에 돌입하였다.
2월 5일 서귀포에서 경찰과 충돌한 좌익계는 동일 한경면 고산지서를 습격하고 피검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강력한 시위를 단행하였으며, 구좌면 일대에서도 세화, 김녕지서까지 시위를 단행하였다.
2월 7일 좌익계는 안덕면 서광리의 동향을 감시하던 경찰관 1명을 생포하여 생매장하였고
이에 경찰은 동지역 주민 1명을 체포하여 고문 치사케 함으로써 즉각적으로 보복하였다.
좌익계의 공격은 2월 9일부터 11일 사이에 특히 치열하였다.
이 기간동안 제주도에서는 야음을 틈탄 17차례의 폭동과 시위가 발생하였는데 칼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소련 국가를 부르는 군중들에 의한 경찰서 습격, 전단 살포 및 시위 등의 과정을 통하여
2명의 경찰관이 심하게 구타당하였고 약 290명의 군중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한편 ‘자위대’를 통하여 무장을 강화해나가고 있던 좌익계는 2월 13일 한경면 저지지서
소속의 경찰관 수십명이 한림읍 금악리를 습격하자 일제의 38식 보병총, 수류탄, 일본도 등을
사용하여 경찰과 교전하여 격퇴하였고, 동 중순경 안덕지서 소속의 경찰관 및 우익청년단이
안덕면 사계리를 습격하자 자갈, 곤봉 등으로 반격하여 지서장을 생포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48년 초에 제주도 좌익계에 대한 경찰의 공격으로 재개된 이러한 격렬한 공방은
3월에 접어 들면서 다시 완화되었다.
즉 이 시기에는 3월 초순에 발생한 도민에 의한 함덕지서 습격사건과 경찰 및 우익청년단에 의한
한림, 애월 지구의 ‘자위대’모임 기습사건을 끝으로 별다른 충돌이 발생하지 않고
잠시 동안의 냉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주도의 좌익계가 4.3폭동을 감행하기 위하여 그동안 발생하였던 쌍방간의 공방을 분석하고
자체의 역량을 재충전하기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하였음에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 짧은 기간 동안의 냉전도 결국 3월말경 개최된 김달삼, 조몽구 및 국방경비대 제 9연대 문상길 등의
회합에서 무장폭동이 결정됨으로써 종결되고 마침내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 한라산을 비롯한
각지의 산악 위에서 무장투쟁을 알리는 봉화가 불타오름으로써 승자도 패자도 없고
오직 피해자만 남은 기나긴 싸움의 서곡이 시작되었다.
<진행과정>
1948년 4월 3일
1948년 4월 3일 자정, 마침내 무장항쟁의 신호탄인 봉화가 각 오름에서 붉게 타올랐다.
제주 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5백여 명과 그 동조자 1천여 명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중
10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숙사 및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하였다.
초기 공세에 성공을 거둔 무장세력은 곧 도민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개편을
단행하여 각 면에서 투철한 사상성 및 전투 경험을 소유한 자를 30명씩 선발하여 연대와 소대로
구분 편성된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유격대의 기습 공격에 놀란 미군정은 이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하여 4월 5일 제주도 비상경비사령 부를 설치한 후
통행증제를 실시하고 월 10일에는 부산 주둔의 국방경비대 제5연대 제2대대를 제9연대에 배속하여
경비대의 병력을 증강시켰으며 또한 유격대와의 연고가 짙어서 진압작전을 효율적으로 치르기에
부적당한 제주 출신의 경찰 대신 타도로부터 차출한 1,700여 명의 경찰을 파견하였다.
특히 미군정은 국방 경비대가 폭동 발생의 초기부터 도민의 불만을 정당한 것으로 보고
적극적인 진압작전을 추진하지 않는 것에 강력한 불만을 표시하는 한편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사람을 보내 '초토화작전' 을 계속 요구하였다.
4.28 평화협상과 5.1 오라리 방화사건
미국은 김익렬의 거부로 초토화 작전이 시행의 불가능해지자 유격대와의 협상을 명령했다.
이리 하여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하여 72시간 내 전투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그 다음날 미 군정장관 딘(W. Dean)의 내도 후에 즉각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다.
딘은 평화협상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5월 I일 오전 12시 경 제주읍 외곽 오라리가 서북청년단 및 대동청년단 소속 청년 30여명에 의해 기습되어
12채의 민가가 불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마을에서 1.5km가량 떨어진 민오름 주변에 있던 유격대원 20여 명이 총과 죽창을 들고 내려와
이 청년들을 추적하자, 이 청년들의 보고를 받은 경찰이 즉각 출동하여 유격대가 이미 사라진 마을을 향해
총을 난사하며 진입하였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유격대와 경찰에 의해 경찰관 가족 I인과 마을 주민 1인이 각각 희생되었고
경찰은 오후 4시 30분까지 마을에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심문하다가 김익렬 등의 국방경비대 가 출현하자
황급히 마을에서 철수하였다.
이후의 사건 진상규명 과정에서 미군정과 경찰은 오라리방화사건이 우익청년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국방경비대의 진상보고를 묵살하고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몰아 붙이는 조작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동아일보} 등의 언론을 통하여 조작된 보도를 하도록 하는 한편, 사건 당시 오라리 상공을
정찰하면서 찍은 필름을 편집하여 {제주도의 5월 1일 (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 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유격대의 만행을 증언하는 홍보물로 이용했다.
5월 3일에는 미 고문관 드루스 대위의 지휘 하에 귀순자를 호송해 오던 제9연대 7명과 미군 사병 2명에게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하여 귀순자 중 일부가 죽고 나머지는 다시 산으로 도망하는 사건 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처음 이를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발뺌하였지만, 미군에 의해 체포된 괴한 중 1인이
제주경찰서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다시 이것을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을 위해서
경찰과 미군정, 그리고 경비대와의 이간을 시킬 목적으로 자행된 유격대의 경찰 가장기습사건이라 고 주장했다.
미군정은 이에 4.28평화협상과 이후 조작된 사건의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뒤집어 웠다.
미군정은 김익렬을 용공으로 몰아 해임하고 강경파인 박진경을 기용하여 대규모 초토화 작전을 준비해 나갔다.
5.10선거 거부 투쟁
이에 대응하여 '인민유격대'는 5.10선거가 다가오자 그것을 파탄시키기 위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 공세로 관련인사와 경찰, 우익청년단체 관련 인사들이 살해되었고 각종 시설이 습격당하여 파괴되었다.
이와 함께 도민들도 5. 10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선거 관련 공무원들이 근무지를 이탈하거나 선거 사무를 보지 않았다.
도민들은 경찰 및 극우청년단체의 회유 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향보단에 가입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선거날이 되자 더욱 강화 된 협박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입산해 버림으로써 적극적인 선거 거부를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제주도에서의 5.10선거는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의 선거가 무효화되고
남제주군 선거구만의 선거가 간신히 치러졌다.
도민들은 그들의 항쟁목표의 하나로서 5.10단선 을 완벽하게 파탄시킨 것이다.
박진경의 초토화작전
이에 미국은 즉각 제주도의 해안선을 봉쇄하고 박진경에게 초토화작전을 명령한다.
초토화작전을 명령받은 박진경은 5월 12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2개 마을에서 218명의 도민들을 체포한데 이어
5월중에만 무려 3,126명의 '포로'를 붙잡는 전과를 올린다. 6월 중순이 되면 '포로' 의 숫자는 6천 명으로 불어난다.
한라산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소하는 박진경의 강력한 투망식․토끼몰이식 공격 은 도민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의 광폭함은 국방경비대에 대한 이전의 도민의 호 의적인 반응을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국방경비대는 " ,,,,미군 철모에 미군복, 미군화에 미군 총, 비가 오면 그 위에 미군 우장을 쓴다.
멀리서 보면 키가 작은 미군부대가 전진하고 있는" 모습으로 "동족의 섬멸에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박진경과 국방경비대의 이와 같은 강력한 토벌에 대응하여 유격대는 5월말 그 편제를 '인민해방 군'으로 바꾸었고, 도민들 또한 생존의 극한 상황에서 국방경비대의 동향을 적극적으로 탐지,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6월 18일 토벌 방식에 불만을 품은 문상길 등이 박진경을 살해하자 미군정은 최경록을 그 후임에 임명하여
박진경 암살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한편, 도민들에 대한 수색작업을 계속하였다.
이어 7월15일에는 송요찬을 새로운 연대장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약 한달 동안 새로이 부대정비를
하게 한 다음 유격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때 8월 초순, 김달삼, 강규찬 등 유격대 주요 지휘관 6명이 해주의 남조선인민 대표자의
참석을 명분으로 제주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또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등의 정
치일정 등으로 인하여 유격대는 장기항전 준비에 돌입함으로써 경비대의 대유격대 진압작전
또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학살, 삼광(三光),삼진 (三盡)작전
그러나 부대를 정비한 송요찬이 9월초부터 대유격대 진압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무차별적인 초토화작전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송요찬과 그의 뒤를 이은 김상겸에 의해 강력한 토끼 몰이식 수색작전과 모두 불사르고
모두 죽이고, 모두 약탈하는, 그리하여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이른바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이라는 전율할 대량학살작전이 전개되면서 유격대는 축소되어 갔고
유격대 세력의 몇 배에 달하는 숫자의 '폭도사살' 전과가 기록되어 갔다.
특히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국군 14연대의 여․순 봉기를 진압한 10월 하순 이후에는 유격대와의 연결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소개작전과 소개민심사, 이를 명분으로 한 대량 학살이 연일 이어졌다.
1949년이 되자 정부와 미국의 주한 시군사고문단은 여․순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함병선의
제2연대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으로 대토벌을 더욱 강화하였다.
해군에서는 18척의 함정을 동원하여 해안선을 완전 봉쇄하고 37밀리 포로 함포사격을 가하였고,
공군에서는 L-4, L-5형 연락기를 이용하여 수류탄과 폭탄 투하작전을 개시하였다.
또한 동시에 육군은 대전차포, 박격포, 0.5인치 기관총, 로케트포, M1 소총 등의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여
집단 학살과 무차별 방화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의 결과로
해안에서 4km 이상 떨어진 한라산에 오르는 부락은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학살을 피한 도민들은 삶을 찾아 다시 산으로, 해안의 안전지대로 도피해야 하는 운명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산민들
그러나 이들의 삶 또한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입산한 도민들은 여전히 토벌대의 추적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에 다시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라는
새로운 적과 직면하였던 것이다.
해안부락의 안전지대로 피신한 도민들 또한 형편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산 사람과 협력한 마을 사람'으로, 또는 '공산당 물이 들었다'고 많은 의심과 감시의
눈초리를 겪어야 했으며 끝내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소개된 마을을 유격대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대대적인
축성 작업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민보단원이 되어 이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의심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지속되는 대학살과 항쟁의 종식
제2연대의 육․해․공군 연합작전에도 불구하고 유격대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정부와 미국은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지휘관:유재흥 대령, 참모장:함병선 중령)를 설치하고
김용주 대령의 독립 유격대대를 투입하여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한다.
유재흥은 한편으로 3월 25일 기한의 사면계획을 발표하는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무장진압의 2단계 작전을 구사하였다.
이 결과 사면기간 동안 강경한 토벌작전에 대한 공포와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죽음같은 삶을
벗어나려는 하산민의 두려움과 의구심 에 찬 투항이 늘어나고 이들에 대한 회유, 고문, 협박 등을 통하여
유격대의 규모와 주둔 위치, 무장력 등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다.
선무공작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 여전히 강경한 무장진압을 전개하던 유재흥 부대는 사면기간이 끝나자
즉각 대대적인 최후공격을 단행하였다.
이 결과로 3윌 12일부터 4월 12일간의 한달 동안 유재흥 부대는 2,345명의 '유격대'를 살해 혹은 부상시켰고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하였으며, 동시에 3,600여 명의 유격대 동조자를 생포하였다.
이러한 전과는 당시 미군 비밀 문서가 과장 집계 한 무장유격대의 숫자가 250여명,
그리고 그 동조자의 숫자가 1,000~1,500명에 불과하였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유격대 색출을 빙자하여
도민에게 가해진 철저한 대토벌, 대학살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즉 유재흥 부대는 '선무'라는 탈의 뒷면에 도민 대학살이라는 본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유격대 세력은 거의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1949년 4월 9일 이승만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폭동이 종식되었음을 대내 외에 과시했다.
같은 해 5월 10일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에 대한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5월 15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대부분의 군경이 17일, 18일에 걸쳐 육지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항쟁과 그것에 따른 피의 보복, 대살륙이 일단락 되었다.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
그러나 학살은 이에 멈춘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도내 도처에서
소위 '전향자' 에 대한 대검거 및 처형을 재개하였던 것이다.
이 와중에서 경찰은 대정, 한경, 한림, 애월, 안덕, 중문, 서귀 등지에서 이전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양민들을 예비검속이란 명목 하에 소집하여 모슬포 송악산 부근 섯알오름에 위치한
식민지 시대의 탄약고로 끌고 간 다음, 이들을 학살했다.
사망자 192명, 도민들은 뒷날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수습하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의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를 조성하여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고 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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