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구이야기 오늘은 高朋满座, 고붕만좌이란 성구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高朋满座, 고붕만좌—이 성구는 高 높을 고자, 朋 벗 붕자, 滿 찰 만자, 座 자리 좌자로 이루어졌습니다.
초당사걸 즉 당나라 초기 이름난 네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불리워지던 청년문학가 왈발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7살때 벌써 글을 지을수 있었고 14살때 벼슬길에 나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이 너무 일찍이 출세하게 된데다가 그만큼 자부심 또한 강해 여러번 곡경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옹주사공참군>으로 있던 그의 부친 역시 아들때문에 련루되어 교지라는 곳에 현관으로 좌천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왕발은 부친을 뵈옵기 위해 교지로 가던 길에 바다에 빠져죽게 되었으니 그때 나이가 겨우 26살이었다고 합니다.
왕발의 대표작으로 <등왕각서>를 들수 있는데 바로 그가 교지로 갈때 홍주를 지나면서 쓴것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등왕각>이란 리원영이라는 이가 일찍이 홍주도독으로 있을 때 지은 루각으로서 후에 그가 <등왕>으로 봉해짐으로 하여 그 루각을 <등왕각>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후 려백사라는 사람이 새로 홍주도독으로 부임되어 오더니 등왕각을 보수하고는 9월 9일 중양절을 계기로 큰 잔치를 베풀고 강남의 저명한 학자, 명인 백여명을 초청한적이 있습니다.
<강서통지>의 기록에 의하면 이날의 잔치에서 려백사는 등왕각의 비문으로 쓸 글을 모집하단다는 이유로 손님들에게 글을 올리라고 했는데 사실은 사위인 오자장의 글재주를 한번 자랑해보려는 심산이었습니다.
물론 오자장은 오래전에 벌써 이날에 쓸 글을 준비해놓고 있는터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있는 손님들은 아무도 글을 올리려 하지 않는데 방금 홍주에 이르러 아무것도 모르는 왕발은 조금도 주저없이 붓을 들어 일필휘지했습니다.
려백사는 이 눈치코치없는 젊은이의 소행에 잔뜩 밸이 꼬였으나 성낼수도 없고 하여 억지로 참고있는데 그가 쓴 글이 하도 명문이었기에 결국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좌중의 사람들도 왕발의 글에 대해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이른바 <등왕각서>란 바로 왕발이 이날 쓴 글이었는데 여기서 <고붕만좌>란 글귀가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붕이란 존귀한 벗들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고 만좌란 많이 모였다는 뜻으로 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高朋满座, 고붕만좌 이 성구는 훌륭한 손님들이 많이 모이다 또는 손님들이 많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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