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준비 저장文集/甘泳生 文集 ·65年만의 歸家

감영생 (甘泳生)

감효전(甘曉典) 2015. 1. 12. 18:00

 

감영생 (甘泳生)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 Daum블로그 http://t.co/tCyvBMcLvC

 

 

친일파를 척살하지 않고 모두 그대로 옷만 갈아입히고 그대로 기용한 이승만은 전쟁이 터지자 자기만 살겠다고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서울을 접수한 인민군에 죽지않으려고 부역할 수 밖에 없었던 서울시민 1,000명을

부역죄로 총칼로 무참히 학살하였다.

 

그리고 좌익성향의 민간인을 보도연맹에 모두 다 자의타의로 가입케 하여 계도하고 선처해준다고 한 후

전쟁이 터지자 좌익성향의 이 사람들이 북과 동조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아무런 법적절차도 없이

보도연맹가입자 2~30만명 포함 전국 민간인 형무소 재소자중 형량 8개월 이상은 무조건 쏴 죽이라는

천인공노할 명령을 내린다.

 

그 해 7월 중순경부터 시작하여 4차례에 걸쳐 무려 130만명을 골과 바다로 끌고가 기관총으로 난사하고

오밤중 산 사람에게 다리에 돌덩거리 달고 두 눈 가리고 손발 꽁꽁 묶어 소 돼지 닭 살처분 하듯이 생수장 학살하였다.

민주국가가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러놓고도 이를 역사적으로 철저히 왜곡 은폐하였다.

 

당시 할아버지는 의열단 비밀단원으로 활동, 가명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전설적인 독립군인 밀양출신 독립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장군등에게 독립자금을 댔고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던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광복후에도 계속 나라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항쟁인 1948.2.7 총파업 구국항쟁시 동참하였다가

미군정 포고령위반으로 제자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던 중 밀양 경찰서에 체포, 2.7항쟁의 주동자와 핵심멤버를 다 불면

석방도 해 주고 밀양 경찰서장도 원하면 해 주고 원하는 거 다 들어주겠다고 회유하는 것을 끝까지 거절하자

그 해 8월22일 5년 구형을 받아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마산 구산면의 괭이바다에 생수장한 마산형무소 재소자수만해도 1,681명이며 그 중 1명이 바로 나의 할아버지 감영생.

 

두 눈 두 손발 꽁꽁 묶고 10명씩 굴비처럼 묶은 후 바다 한가운데로 끌고가 미군함 뱃전 끝에 길게 세운 후 뒤에서

발로 차 산 채 물에 빠뜨리고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향해 기관총 난사, 순시선 돌며 확인사살.학살 당한 날짜는

1950년 7월24일 음력 6월10일의 일이다.

 

똑같은 시기인 8월 중순, 동향인 약산 김원봉 장군집도 우리집과 똑같이 사촌1포함 형제들 4명이 친일파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무참히 학살당하는 변고가 있었고 이것을 안 약산은 악질 친일파를 피해 다급히 월북하게 되었다.

 

 

私のおじいさんは早稲田大学校で政治学を勉強されましたよ。独立運動をしましたし。

当時独立運動したその学校出身皆さんと共にイ・スンマン、米軍政によって海で虐殺されました。

私は幼い時から誇らしいおじいさんの後倍加されたかったです。今は髪を刈ってこのように生きます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