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영생과 약산 김원봉 장군
1950.7.24. 리승만, 미군정이 바로 이곳에서 비밀의열단원이자 약산 김원봉 장군에게 거금의 독립자금을 대고
독립운동 했었던 할아버지와 1,681명(200명은 할아버지를 따르던 분들)을 빨갱이로 몰아 야밤에 두 눈 가리고
두 손 두 발 꽁꽁 묶고 알몸으로 두 발에 돌덩거리달아 산 채로 바다에 밀어넣고 기관총 난사를 했고 거기다
확인사살하며 웃었다는 마산 구산면 괭이바다이다.
1948.8.22. 이 날 할아버지가 체포되신 것으로 확인한 바 약산 김원봉 장군의 형제들 6명이
참변 당했다는 8월중순이 바로 8.22일 것이다.
나도 자료로 이 글을 본 적 있으며 그 살아남은 막내 여동생의 증언글도
본 적이 있다. 어릴적부터 하도 약산 김원봉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고 이 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여러 자료를 훑다보니 내가 들어왔던 것과 모두 일치하여 너무 놀랐다.
어른들 말씀으로 애국자들이 세월을 잘못 만나 거꾸로 역적이 되어 아까운
큰 인물들이 참변을 당하고 집안이 망가가 되고 재산은 흩어지게 되어
만고의 큰 슬픔이다라고 장탄식을 하셨다.
몽양 여운형 선생과 조만식 선생, 김 구 주석과 교류가 많으셨다하며 그 분들은 연하의
할아버지에게 <감 선생>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해방되고 당시 독립투사들이 월북을 하고 사회주의쪽으로 눈을 많이 돌린 것은 이념보다는 친일파때문이기도 했다.
김원봉 장군이 친일악질경찰 노덕술에게 해방후 경찰에 끌려가 따귀를 여러차례나 맞는 등 심한 모독을 당하고
독립군들을 다 죽이고 가족마저 몰살하자 월북, 그 때문에 형제들이 도륙 당했다.
어릴 때 어른들 말씀으로 약산 김원봉 장군 집이나 우리 집이나 모두 똑같이 낭가가 되었다고 들었다.
비밀의열단원이자 독립자금을 대던 할아버지는 당시 중학생인 큰 딸을 데리고 백두산 천지에 올랐으며
약산 김원봉 장군,독립군들과 함께 그곳에 태극기를 꼽았다. 큰고모는 독립군들에게 아버지의 편지 심부름을 한 죄로
빨갱이로 몰려 보도연맹명단에 올랐다가 학살을 당할 뻔했으나 아버지의 편지 심부름만을 했을 뿐이니
딸아이는 거기서 빼라고 할아버지가 이야기하여 구사일생으로 살렸다.
그러나 먼 훗날 새 날, 새 세상이 오면 너희 할아버지는 다시 재조명되고 알아줄 때가 있게 될 것이다고 하셨다
새 날 새 시대가 열리는 하늘을 볼 때,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뿌옇게 동이 트기 바로 직전.여명의 그 시퍼런 아침 말이다.
약산 김원봉 장군.
<가면권력> 69~70쪽. 한성훈.
마산 구산면 괭이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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