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미상의 옛 중국화 <송산고사도(松山高士圖)>
陋巷生涯只一瓢 門堪羅雀轉寥寥
樹頭病葉知秋下 階面新苔挾雨驕
懶慢有如嵇叔夜 醒狂或似蓋寬饒
邇來三逕荒松菊 五斗令人尙折腰
(누항생애지일표 문감라작전요요
수두병엽지추하 계면신태협우교
나만유여혜숙야 성광혹사갑관요
이래삼경황송국 오두영인상절요)
허름한 뒷골목의 삶은 단지 표주박 하나뿐
사립문은 참새 그물 칠만큼 썰렁하기만 하네
나무 끝 시든 잎은 가을을 알아 떨어지고
섬돌 위 새로 돋은 이끼는 비 맞으면 으스대네
게으르고 굼뜨기는 마치 혜강(嵇康)과 같고
술 깨고도 미친 듯하기는 갑관요와 비슷하네
요즘 세 갈래 길 거칠어도 솔과 국화가 있는데
오두미는 아직도 사람들을 허리 꺾게 만드네
☞ 정총(鄭摠/麗末鮮初), <누항(陋巷)>
- 門堪羅雀: 한(漢)나라 때 하규(下邽))의 책공(翟公)이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 빈객이 문을 가득 메웠다. 그가 정위에서 물러나자 대문 밖에 참새를 잡는 그물을 쳐도 될 정도로 빈객의 발길이 뚝 끊겼다(門外可設雀羅).
- 嵇叔夜: 위진(魏晉)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 叔夜는 그의 자(字).
- 三逕荒松菊: 도연명(陶淵明)은 <歸去來辭>에서 "세 갈래 길 비록 거칠어졌어도,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있네"(三徑雖荒 松菊猶存)라고 읊은 바 있다.
- 醒狂或似蓋寬饒: 서한(西漢)시대 인물이었던 갑관요는 귀족인 허백(許伯)의 집 낙성식에 참석해 술을 마셨다. 주석에서 그는 "이 집이 객관과 같으니 주인이 갈리겠구나"라고 말했다. 옆의 손님이 민망해 하며 "차공(次孔, 갑관요의 자)은 술만 마시면 미친다"고 하니, 주인이 "차공은 깨어있으면서도 미쳤구만" 하였다.
갑관요는 선제(宣帝) 때 사예교위(司隸校尉)를 지냈다. 요즘으로 말하면 검찰총장이나 경찰청장쯤 되는 자리이다. 그는 성품이 고지식하고 강직한 인물로 꼽혔다.
그러나 그런 그의 성품이 패가망신을 자초했다. 당시 선제는 사대부들의 권한을 줄이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려 애썼다. 이런 가운데 제위의 승계문제가 조정의 공론으로 제기됐다.
갑관요는 ≪韓氏易傳≫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오제(五帝)는 천하를 관(官)으로 삼았고. 삼왕(三王)은 천하를 집(家)로 삼았습니다. 천하를 집으로 삼는 사람은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천하를 관으로 삼는 사람은 자리를 현철한 사람에게 물려줍니다"(五帝官天下 三王家天下 家以傳子 官以傳賢).
제위의 승계문제는 사대부에게 달려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황위의 선양(禪讓)을 주장하는 저의를 드러낸 것이라 무고(誣告)를 당해 자살을 강요받게 되었다[☞ ≪한서(漢書)≫ 卷77 <蓋寬饒傳>]
강직하고 올곧은 것은 사대부의 훌륭한 품성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시의와 상황에 맞지 않으면 화를 부르기도 한다. 갑관요는 승계문제에서 전범(典範)을 좇아 원칙을 강조했지만 역린(逆鱗)을 건드려 제 발등을 찍고 말았던 것이다.
- 五斗令人尙折腰: 도연명이 팽택(彭澤) 현령으로 있을 때 쌀 다섯 말(五斗米)의 녹봉 때문에 상급기관 감독관에게 어찌 허리를 꺾을 수 있겠느냐(我豈能爲五斗米折腰)며 사직하고 낙향(歸去來)했다.
※ 청대(淸代) 화가 고간(高簡)의 <松山高士圖>
※ 청대(淸代) 화가 전구(錢球)의 <松山高士圖>
※ 명대(明代) 화가 문팽(文彭)의 <松山高士圖> 수권(手卷)
※ 명대(明代) 화가 사계좌(査繼左)의 <松山高士圖>
※ 명대(明代) 화가 왕악(王諤)의 <松山高士圖>
※ 명대(明代) 화가 왕연릉(王延陵)의 <松山高士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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