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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두향

감효전(甘曉典) 2012. 12. 14. 09:17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


 

퇴계선생의 초상화나 글들은 매우 엄격하고 진지하고 학문에 몰두한 선비의 기풍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퇴계의 전혀 다른 면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한자락 있답니다. 바로  단양 신선봉 아래 '두향묘'에 전해 오는 퇴계와 두향과의 사랑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퇴계는 혼인을 두 번 했습니다. 21세 때 김해 허씨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세 아들을 낳은 후 결혼 6년 만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답니다. 이후 안동 권씨와 재혼했지만, 그녀 역시 퇴계가 46세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두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된 퇴계는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했습니다. 그 직후, 둘째 아들 채(寀)가 또 목숨을 잃었으니, 당시 48세였던 퇴계는 계속되는 가족의 죽음으로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었답니다.

 

인연은 상심의 극치에 스며드는 걸까요? 그래서 못 알아보고 놓치는 인연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아픈 시기에 두 사람은 만났습니다. 유학자 중 '화담 서경덕' 만큼이나 도가적 면모를 보였던 퇴계였으니, 그의 로맨스는 구전되는 전설의 느낌이 강합니다.

 

두향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단양고을 퇴기의 슬하에서 자랐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열세 살에 '기적(妓籍)'에 올려졌으며, 열여섯 살에 황초시란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석 달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기생 신세, 단양 관아에 묶인 몸이 됩니다. 용모가 빼어나고, 거문고를 잘 탔고, 시와 그림을 좋아했다는데, 글쎄요... 그 환경에, 그 나이에 그렇게 될 수 있었을지는 좀 의심스럽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는 '이쁘면' 무조건 떠받들어지는 것 아닐른지.^^

 

퇴계는 단양군수로 왔을 때 두향을 만났습니다. 기구한 16세 여자와 48세의 홀아비, 흠...

소설가 정비석이 쓴 명기열전(名妓列傳)에, 두 사람의 만남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가 소설적 상상이 덧붙은 채 애절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슬픔과 비탄에 젖은 채 묵묵히 시를 쓰고 글을 읽는 퇴계를 보며 두향은 속앓이를 했지요. 호감을 표하고자 여러 가지 선물을 전했으나 퇴계는 모두 거절. 그랬음에도 두향은 포기하지 않고 선생께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주위에 물어, 수십 편의 시를 읊을 만큼 매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전국을 수소문해서 희다 못해 푸른 빛이 나는 최상품의 백매화를 구해 퇴계에게 선물했고, 무심하던 퇴계도 "매화야 못 받을 것 없지" 하며 동헌 뜰 앞에 심고 즐겨 살폈습니다.

 

그후 퇴계는 두향의 재능을 어여삐 여겨 자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정은 점점 깊어지고, 마침내 사랑을 나누게 됐지요. 매화를 통해 맺어진 두 사람의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두향과 퇴계는 경치가 빼어난 강선대를 즐겨 유람했습니다. 총명한 두향은 퇴계와의 교분을 통해 그 정신이 더욱 깊어졌고, 고매한 영혼의 소유자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열 달도 안되어 끝나고 맙니다. 퇴계의 넷째 형인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형제가 같은 도에서 근무하는 것을 피하는 제도 때문에 퇴계는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두향으로서는 청천벽력. 짧은 사랑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겠지요.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말없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구나... 뭐 이런 무책임한! 

하지만 두향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답니다. 시 한 수를 썼지요.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을 들고 슬피 울 때
어느덧 술 다 하고 님 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그날 밤의 이별은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습니다. 퇴계가 제 고향의 위인이긴 하지만, 남자로서는 비루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질서를 거스리진 못하더라도, 까짓 체면쯤은 얼마든지 구길 수 있는 것 아녔을까요? 관기를 취하는 것이 선비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을 일이라 해도, 그 정도는 극복했어야 되는 것 아녔는지...

 

단양을 떠날 때 퇴계의 짐 속엔 두향이 준 수석 두 개와 매화 화분 한 개가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퇴계는 평생 동안 그 매화를 가까이 두고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했다고 전해집니다. 1570년 퇴계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도 자신의 죽음보다 매화의 목마름을 염려할 정도였답니다. 그럼 뭐하냐구요. ㅡ.ㅜ

 

퇴계가 단양을 떠나자 두향은 퇴적계(退籍屆)를 냈습니다. 신임 사또에게 이황을 사모하는 몸으로 기생을 계속할 수 없다며 기적에서 이름을 없애달라고 간청해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사또가 변학도는 절대 아녔겠지요.

 

그 뒤 두향은 퇴계와 자주 갔던 강선대가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에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며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퇴계의 죽음 소식을 들은 두향은 도산서원까지 달려가 멀리서 절을 했답니다. 그리고 단양으로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퇴계와 시문을 논했던 강선대 위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어쩌면 두향이 아닌 퇴계의 명망 덕이었겠지만, 그녀의 유언은 주위의 도움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강선대 가까이 그녀의 무덤엔 단양 기생들의 걸음이 끊이지 않았다합니다.

 

 

 

 

퇴계와 두향의 추억이 깃든 강선대는 충주댐을 만들 때 수몰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두향묘'는 그녀를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1984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장됐습니다.

조선 후기 문장가인 이광려가 두향묘의 정경을 이렇게 읊었답니다.

 

외로운 무덤 길가에 누웠는데
물가 모래밭에 붉은 꽃 그림자 어리어 있으라.
두향의 이름 잊혀 질 때라야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

 

단양군 단성면에서는 1979년부터 매년 '두향제'를 열고 있다는군요. 이번 주에는 토요일 저녁에 미리 미사참례를 하고 그 곳을 찾아보려 합니다. 가능하면 두향의 묘도 찾아서 술 한잔 칠 생각입니다. 퇴계를 비난하는 제 술을 그녀가 그녀가 받아줄지 좀 걱정이지만...

 



 

출처 : Ear of silents
글쓴이 : 스테파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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