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문화기획 - 잊혀져가는 우리 사찰음식을 찾아서>는 자연 재료들로 빚어내는 사찰음식을 통해 우리 전통 음식 문화의 원형을 되짚어보고자 마련했다. 이를 위해 깊은 산골 암자 등을 찾아 아직도 오롯하게 지켜지고 있는 절집의 숨은 맛을 발굴하고, 사찰음식 전문가 스님들의 자문을 받아 복원, 소개함으로써 우리 사찰 공양의 문화적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이 기획은 격월로 실린다. _편집자
고구마 뺏대기 고구마 뺏대기. 말랐다 말랐다 고구마 뺏대기. 경상도 남녘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기억이 새로워질 고무줄놀이용 노래다. 노랫말 속에 나오는 뺏대기라는 말은 당연히 남녘 경상도에서만 통용되는 절간고구마의 지방말로 전라도에서는 빼깽이라고 부른다. 생고구마를 모양대로 얇게 썰어서 햇볕에 말리면 형태가 삐뚤빼뚤 비틀어져 버리는데 그 모양새를 빗대어 일컫게 된 이름씨다.
고구마는 미래 지향적 참살이 음식
지금이야 고구마의 탁월한 영양소와 효능이 널리 알려져 미래 지향적 참살이 음식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조선 영조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고구마는 오랫동안 우리 조상들이 주식 대용으로 먹어온 구황 먹을거리였다. 특히 쌀농사를 천수답에 의존하던 시절, 물이 귀한 산간지방과 도서지방에서는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는 게 그야말로 다반사였다.
고구마를 주식으로 하자면 장기 보존을 해야 하는데 수분이 70퍼센트가 넘는 고구마를 장기 보존하자니 얇게 썰어서 말리는 방법, 즉 뺏대기(절간고구마)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고, 이 뺏대기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죽 아니면 범벅이었는데 다른 구황 먹을거리들과는 달리 뺏대기죽은 달고 구수한 맛이 있어 봄철 보릿고개를 넘기는 데 매우 요긴한 양식으로 쓰였다. 그나마 뺏대기가 많이 들어가는 범벅은 한 철에 한두 번 특별식으로 먹었고, 뺏대기 한 줌에 울콩 한 줌, 좁쌀 한 줌을 곁들이고는 물을 한솥 그득하게 부어 끓이는 멀건 죽도 초근목피로 며칠을 견딘 다음에나 먹을 수 있던 귀한 음식이었다.
사찰 옛 음식을 찾아다니던 중에 남해 섬지방의 작은 암자들에서 이 고구마 뺏대기죽과 범벅을 추천받은 적이 있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상 취재를 나서려니 절집들마다 공양간 사정이 여의치가 않다. 고구마의 생산량도 많거니와 맛이 좋기로도 소문난 경상도 남해 욕지도의 절집과 전라도 해남 인근 절집들을 찾아보았으나 줄을 잇고 있는 참배객들의 기도 바라지로 도저히 짬을 낼 수 없단다. 고구마 뺏대기죽을 제대로 끓이려면 뺏대기 익히는 데만 두세 시간이 족히 들기 때문이다. 몇 년째 토종 사찰음식을 찾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한 삼사십 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오신채와 동물성 식재료를 안 쓰는 것 외엔 승속의 음식이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인데 그나마 시절 변화에 흔들림이 없는 절집에서 옛 먹을거리와 옛 조리방식을 고수해오다 보니 우리 토종 음식이 모두 사찰식 음식으로 변하여 남겨진 감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제 절집 공양간도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젊은 수행자들의 입맛도 이유가 될 것이지만 기도객들의 바라지할 일이 늘어나면서 공양간 살림을 속인들이 맡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세간의 습에 익숙한 젊은 공양주들이 사찰의 전통 음식을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천천히 온전하게 만들어야 되는 조리 과정 자체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온갖 식재료가 넘쳐나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잊혀가는 사찰음식이 늘고 있고, 뺏대기죽과 같이 시간이 많이 드는 음식은 잊혀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묻혀버리고 있는 사정이다.
고구마를 장기 보존하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지혜로운 조리법
명품 고구마 생산지로 소문난 욕지도의 경우, 고구마가‘좋은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는 시대 추세에 맞춰 뺏대기죽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다시금 집집마다 뺏대기죽을 끓이고 있는 데 비해 오히려 절집에서는 재 지낼 음식 만드느라 뺏대기죽 끓일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데 드디어 고성 문수암의 공양주가 시연을 허락해 주었다. 절 공양간 살림을 맡은 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 시댁에서 뺏대기죽을 많이 끓여보았다며 일단 시간은 만들어보겠으니 뺏대기를 직접 구해 오라고 했다. 지금 사정에 절집에서 뺏대기를 만들어놓았을 리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뺏대기 노래를 흥얼거리며 고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고성장에 들러 뺏대기를 찾아보니 마침 한 난장지기 어르신이 올 햇 뺏대기가 얼추 말라가고 있다며 집으로 안내한다. 예전 이맘때면 온 동네 지붕과 산 밑 언덕배기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뺏대기를 말리던 것에 비하면 조촐하기 짝이 없는 양이지만 모처럼 마당에 널려 있는 뺏대기를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먹을거리가 흔한 시절이라 껍데기까지 깨끗하게 깎아 말린 것을 보니 격세지감도 크다. 뺏대기 한 덕석을 떨이로 사들고 문수암으로 올랐다. 고맙게도 뺏대기 구한 집에서 지척에 문수암이 있었고, 난장지기 어르신도 문수암의 신도라고 했다. 하는 일이 꽤 까다로워 의욕을 잃다가도 이런 묘한 인연을 만나면 다시금 힘이 난다. 제 할 일이니 이리 맞아 돌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림 같은 다도해의 운치 어린 풍경이 훤히 조망되는 지혜의 문수암에 다다르니 이건 또 무슨 조홧속인지 후원 마당에 뺏대기가 한 덕석 말라가고 있는 중이다. 공양주 보살이 올겨울 신도들에게 뺏대기죽을 맛보여드리려고 일부러 만들어놓았다는 설명이다. 그러구러 뺏대기죽은 순조로이 만들어졌다. 후원 뒷마당에 내걸린 무쇠가마솥에 그득히 뺏대기를 안치고 장작불로 두세 시간 은근하게 고는 옛날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뺏대기와 울콩을 두 시간을 넘게 고아 좁쌀 한 줌을 넣고 다시 죽을 끓이는 과정은 온전하게 재현되었다. 혹시나 싶어 설탕을 넣지 않고 맛을 보니 단맛은 예전 뺏대기에 비해 좀 떨어지지만 구수한 맛은 오히려 나은 것 같다.
어렵사리 재현해본 뺏대기죽이 문수암에서만이라도 그 맥을 유지해나가기를 빈다. 미국 나사에서 우주 음식으로까지 선정한 미래 지향적 먹을거리인 고구마를 장기 보존하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지혜로운 조리법을 이대로 묻어놓을 수는 없으니까.
이경애_북촌생활사박물관 관장
문수암 경상남도 고성군 상리면 무선리 산 13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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