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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과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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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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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밀담을 나누고 있는 박헌영과 여운형 (이자리에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다) 박헌영은 북한초대부수상을
역임하엿다. | |
박헌영 본관 영해(寧海),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생이다.
1919년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서 1921년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에 입당, 그해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년 1월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의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고, 4월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하여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그후 1925년 4월 18일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하였다. 이때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여 그
책임비서가 되었다.
1946년 12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을 조선공산당에 흡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였으며 초대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지지 등 공산주의 활동을 지휘하다가,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의 지명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48년 9월 남조선노동당 당수의 자격을 지닌 채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4월 남·북노동당이 합쳐 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인 김일성의 밑으로 지위가 전락하였다.
그후 군사위원회
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위에 있었으나 1953년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작업으로 8월 3일 체포되었다.
그
후 평안북도 철산(鐵山)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5일 반당·종파분자·간첩방조·정부 전복음모 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여운형 호 몽양(夢陽). 경기도 양평(楊平)에서 출생하였다.
우무학당(郵務學堂) 등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한 후 1907년 고향집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우고, 1908년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강릉에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국권이 피탈되고 학교가 폐쇄되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선교사 클라크를 따라
서간도(西間島)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견학하며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교를 중퇴,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난징[南京] 진링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상하이[上海]로 가 1918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발기하여
김규식(金奎植)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이
되었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자치운동(自治運動)으로 회유하고자 그 해 11월 그를 도쿄[東京]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張德秀)를 통역관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朝野) 인사들에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遠東)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호소하였다.
1929년 제령(制令)위반죄로 3년간
복역하고, 1933년 출옥,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하여 정간되자 사임한 후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安在鴻)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하였다.
12월 조선인민당을 창당,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하였으나 반대하여 탈퇴하였다.
또,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년 암살되었다.
체육인으로서의 그는 덴마크체조를
보급하였으며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제11대(1946∼1947) 회장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