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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구 추억기행 .15] 기생이야기<5>-국창 이화중선

감효전(甘曉典) 2012. 7. 10. 06:05

[대구 추억기행 .15] 기생이야기<5>-국창 이화중선


“사람 팔자란 게 꼭 비누 같지. 스물댓까진 엄청 마딘디, 그 이후론 쏜살같아.” 일제 때 ‘우리 국악계의 이미자(李美子)’로 통했던 이화중선(李花中仙:1 899∼1943)이 동료 국악인들을 만나면 곧잘 독백조로 토로했던 넋두리다.

그 녀의 애창곡 ‘추월만정’(秋月滿庭:심청이가 용왕의 비가 된 뒤 눈먼 아버 지를 생각하며 진양조로 부르는 심청가 한 대목)은 임방울의 ‘쑥대머리’( 춘향전의 한 대목)와 함께 한국인들의 눈물샘을 가장 많이 자극했다.

 

대구 공연이 있을 때마다 대구공회당(현재 시민회관)과 만경관 앞에는 앞자리를 차지하려는 팬들이 아침부터 장사진을 쳤다. 경주 최부자 집안 출 신으로 동도국악원(경주의 신라국악원 전신)을 세운 최윤도 그녀의 소리를 듣기 위해 대구를 찾았다.

이화중선은 공연이 끝나도 제대로 쉴 틈이 없었 다. 대구풍류모임 ‘아악회’ 등 지역의 귀명창들이 마련한 자리를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소리를 하면 얼굴값만 하는 화초기생들은 감히 그녀 앞에 얼쩡거리지 못했다. 달성권번 소속의 기생들도 이화중선의 소리 를 최대한 가까이에서 듣기 위해 그녀가 머물고 있는 요리집 근처를 기웃 거리다 늦게 귀번해 행수기생한테 혼이 나기도 했다.

 

대구시 중구 종로에 있었던 1급 요리집 대동식도원에서 이화중선이 소리 하는 걸 들었다는 성만경옹(83·대구시 달서구 진천동)은 “얼굴은 박색(薄色 )인데 소리는 절색(絶色)이었어. 비록 추녀였지만 그 소리만은 절창이어서 못생긴 얼굴을 커버하고도 남았다”라면서 66년전 그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 렸다. 명창 박녹주와 달리 그녀의 탄생과 죽음 대목은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고향만 해도 부산 동래, 전남 보성 벌교, 전남 남원 등 설이 분분하지 만 부산 동래설이 가장 유력하다. 1999년 ‘영남음악사연구’란 논문집을 펴 낸 향토음악사 연구가 손태룡씨는 “이화중선은 다섯살때 동래에서 전남 보 성군 벌교면으로 이사갔고, 전남 남원군 수지면 호곡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 , 평범한 시골 아낙으로서의 삶을 보내던 중 명창 송만갑이 이끄는 협률사 공연에 반해 시집을 뛰쳐나와 소리꾼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이름도 화제 중의 화제였다.

 

“화중선이라, 꽃과 신선 중간에 누가 숨어 있느냐?” 대구 국악계 산증인으로 1958년 남산동 자택에서 중풍으로 세상을 떠난 박지홍(朴枝洪:1883∼1958)은 대구 공연을 내려온 그녀를 만나면 곧잘 이런 농담을 즐겼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야 물론 이화중선이죠”라면서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 이화중선은 특히 사회적 문제의식과 예술혼을 겸비한 몇 안되는 개화기 여성운동가였다.

 

1923년 3월 ‘기생 신성론’이란 필화사건을 일으켜 유림에 충격파를 던 진다. 월간지 ‘시사평론’에 게재된 “기생 생활도 신성하다면 신성합니다” 란 제하의 글은 지극히 풍자적이었다.

당시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사업( 요리집인지 국악원인지 분명치 않음)을 하고 있던 그녀는 “요즘 제각기 제 지체, 제 문벌을 자랑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저도 남부럽지 않은 양 반 출신올시다. 제 땀으로 살림살이하는 지금 제 살림은 얼마나 신성합니까 . 사람의 기름을 착취할대로 착취하는 양반보다….”

 

그녀는 1926년 현해탄에서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빠져죽은 한 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한테 상당히 집착한다. 그녀는 요리집 손님들이 윤심덕을 몹쓸 여자로 폄훼하면 즉각 “정사할 용기가 없다면 정사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 망자들에 대한 예가 아니겠소”라고 윤심덕을 두 둔할 정도였다.

가끔 아편을 즐겼고, 혈육을 남기지 않고 이승을 떴다는 측면에서 박녹 주의 삶과 비슷했다. 하지만 소리의 질감은 박녹주와 확연히 달랐다.

 

박녹 주는 동편제 판소리의 정통을 따랐지만 이화중선은 판소리를 대중적 차원으 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감미료 친 음식같은 그녀의 소리는 일 반인들한테는 듣기에 더없이 좋았다. 자연 레코드회사들이 그녀를 붙잡는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화중선은 당대 여류명창 중에서 가장 많은 20 5장의 유성음반을 남겼다(손태룡의 ‘영남음악사 연구’). 한때 달성권번 측에서 대구로 내려와 후학 지도를 권했지만 그녀는 “ 공연만 하면 되지. 지도는 무슨 지도”라며 전국순회공연에 청춘을 바쳤다.

 

그녀의 친동생 이중선(李中仙:1901∼32)도 명창이었다. 중선은 언니의 유명 세에 가려 명창임에도 대중적 인기를 별로 얻지 못했다. 언니가 ‘추월만정 ’ ‘사랑가’(‘춘향가’의 한 대목) 등으로 사람들의 얼을 빼앗을 때, 중 선은 흥타령과 육자배기 가락으로 서민들의 한을 달래주었다.

 

그녀는 1943년 정식 남편으로 알려진 임완원(林完元)이 이끄는 대동가극단 일원으로 일본 규슈로 갔다. 한인 위문공연하러 가는 그 길이 황천행인 줄 그녀는 까맣게 몰랐다. 배를 타고 가던 중 그녀는 바다에 빠졌고, 시신은 사가현 앞바다에서 인양 됐는데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최근 그녀의 일대기를 ‘이화중선’(2001· 신풍 펴냄)이란 장편소설로 엮은 소설가 최정주는 명창 임방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무신을 벗고 투신자살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화중선이 혹 시 심청이와 윤심덕에게 ‘추월만정’을 들려주기 위해 ‘저승공연’에 나선 건 아닌지.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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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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