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군이었고 인민군이었고 국군이었다” | |
[광복절 특별기획] | |
시베리아→북녘도착→49년 남으로 일부는 38선 넘어오다 피살 적잖아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의 향리에서 은퇴 생활을 하는 이재섭(83)씨는 1945년 8월1일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 된 새색시를 남겨두고 평양에서 입대했다. 전쟁 막바지라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북만주 하이라르의 20495 무라카미 대대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나니 병영 앞에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련군의 진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일본군 생활은 보충소까지 포함하더라도 2주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이 재앙의 씨가 돼 일제의 항복 때 해방의 기쁨을 맛보기는커녕 48년 12월 말까지 소련에서 억류 생활을 하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억류 기간 중 숨진 동포 가운데 이귀남이란 이름을 잊지 못한다. 황해도 해주 사람인데 결핵에 걸려 작업도 못 나가고 결국 다리수술까지 받았다. 혈액형이 같아 수혈을 해주고 나서 자신도 많이 앓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나온 시베리아 억류자 사명자 명부에 이귀남은 도고 기난이란 일본 이름으로 올라 있다. 사망일 48년 4월12일, 매장지 제4지부 부로샤트카역 부근 등이 기재돼 있다. 동토의 땅에 묻히지 않고 돌아온 생존자들에게도 고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귀국 경로와 일시는 일정하지 않다. 일본인들에 섞여서 일본 마이즈루로 간 사람도 있고 선박편으로 청진, 웅기로 오거나 육로로 두만강을 건너온 사례도 있다. 이재섭씨는 가장 많은 귀환자가 돌아온 48년 12월 소련 화물선편으로 흥남부두에 도착한 약 2천3백여명에 끼였다. 흥남인민위원회에서 환영행사를 벌이고 임시 숙박처를 마련해주었다. 적응교육을 거쳐 집이 만주인 사람 약 1천명, 북한인 사람 8백명이 먼저 가족을 찾아 떠났다.
북한 당국은 49년 2, 3월에 남쪽이 고향인 사람을 수십명씩 쪼개 내려보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원산에서 기차편으로 철원이나 연천까지 와 한탄강이나 산악지대를 넘은 것으로 보인다.
꿈에도 잊지 못했던 가족과의 재회를 그리며 38선을 넘다가 총격을 당해 숨진 사람들을 보았다거나 나중에 얘기를 들었다는 증언이 생존자들 사이에 끊임없이 돌고 있다. 접경지역에서 남북 교역을 한다며 이중스파이나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의 농간에 곤욕을 치렀다는 사례도 들린다. 아무리 남북에 정부가 따로 수립됐다고 해도 이들의 안전한 귀환을 위한 최소한의 접촉조차 없었다.
귀환자들은 고양이나 파주경찰서를 거쳐 인천 만석동에 있던 수용소로 옮겨졌다. 정보·사찰 기관 요원들이 합동으로 소련과 북한에서 한 행적과 언동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맥아더 사령부 정보요원들에게 넘겨져 신문을 받은 사람도 있다. 한 달 정도의 조사과정에서 특이한 용의점이 발견되지 않으면 가족들의 품에 인계됐다. 그래도 적성국가 소련에서 돌아왔다는 요시찰 딱지가 따라다녀 생활이 안정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44년 8월 징병 1기생으로 끌려가 홋카이도 북쪽 시코탄섬(현재 러시아령 쿠릴열도의 하나로 일본은 자국령이라고 주장)에서 해병대 격인 선박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소련군 포로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가혹하기 그지없었던 수용소 생활이 견딜 만했다고 그는 담담히 말했다.
48년 12월 북한에 돌아와 한동안 소련에서 왔다는 이유로 대접을 받고 탄광에서 일자리를 얻었지만 평온한 삶도 잠시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해 수색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야간에 도보로 이동해 낙동강 전선에서 격전지의 하나였던 다부동 지역에 배치됐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대공세에 밀려 인민군의 패주가 시작되자 낙오했다가 50년 9월 미군의 포로가 됐다.
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 때 거제수용소에서 풀려난 그가 오갈 데가 없어 문을 두드린 곳은 군대였다. 바로 신병훈련을 받고 화천 지역에서 2년간 사병으로 근무하다 제대를 했다. 일본군, 인민군, 국군에서 그는 줄곧 말단 사병이었다. 한국 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갈 때 그는 며칠간 분대장을 맡았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북한에 사는 친지들에게 누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삶에 아직도 분단과 냉전의 유령이 가시지 않고 있다. 김효순 기자 hyoskim@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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