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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의 차 문화

감효전(甘曉典) 2012. 6. 3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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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차는 한민족 특유 행다절차를 완성한 ‘고품격’
고려청자의 기술과 솜씨도 고려차 정신 고양하는 데 일조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서 실체 엿볼 수 있어 ‘진귀’
  • 고려의 차 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문헌은 드물다. 그러나 다행히도 송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1091∼1153)이 돌아가서 자세히 남긴 사행록(使行錄)인 고려도경(高麗圖經)은 빈자리를 메워 주고 있다. 물론 중국인의 시각에서 본 고려의 차문화이지만 이를 잘 해석하면 고려 차문화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진귀한 기록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 ‘권 제32’ 원문.
    고려도경의 원명은 송 휘종의 연호인 선화(宣和·1119∼1125년)를 넣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서긍은 1123년 송나라 휘종 황제의 명을 받고 고려 예종의 조의를 표하기 위해 정사 노윤적(允迪)·묵경(墨卿)과 함께 사신으로 파견된다. 서긍 일행은 예성강 하구 벽란도를 통해 배를 타고 입국하여 개경의 사신 숙소인 순천관에서 몇 개월 머물다가 중국에 돌아갔다.

    서긍은 다음해 1124년 8월 6일 이 책을 완성하고 황제에게 보고한다. 짧은 기간(약 한 달간)의 경험과 1년 만에 쓴 기록치고는 매우 섬세하고 관찰력과 정보력이 출중한 방대한 분량이다. 본래 이 책은 글과 그림이 함께 있어 도경(圖經)이라 한 것인데 현재 글만 전한다. 1126년 정강의 변을 거치며 완전판은 소실되었고, 1167년 서긍의 조카인 서천이 다시 간행했다.

    고려도경은 전 40권으로 고려시대의 정치·사회·문화·경제·군사·예술·기술·복식·풍속 등등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예종의 조위를 위한 사신단이 도적(圖籍·지도 그림 등)의 수집 제작을 위해 고려로 간다는 목적을 기술하고 있는 이 책은 중국과 다른 풍속 등 300여 조를 수집하여 책 40권으로 만들었다. 특히 참고서적으로 계림지(鷄林志) 등을 참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고려도경에 차와 관련한 기록은 집중적으로 있지 않고 산발적으로 나와 있다. 중국에서 용봉단차(龍鳳團茶)를 가져와 왕실이나 귀족들이 즐겨 마시는 것을 비롯하여 중국 사신에게 관사나 향림정에서 차를 접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예컨대 사신으로 송나라에 조회 갔던 진공사(進貢使)인 자량(資諒)이 중국에서 계향(桂香), 술과 함께 용봉단차와 명단(茗團)을 가지고 돌아와 왕과 신하가 함께 연영전각(延英殿閣·사신을 접대하고 조서를 받는 전각)에서 즐기는 내용이 있다.

    한편 차의 나라인 중국에서 온 사신들은 자신들의 대국적인 위세를 과시하고 국가 간의 예와 품위를 갖추는 의미에서 차가 곁들여지는 ‘관회’(館會)를 베풀었다. 중국의 정사와 부사는 고려의 관반관(館伴官)을 그들의 숙소인 낙빈정(樂賓亭)에 초대하여 여러 진귀한 물건들을 내놓는다. 여기에 진기한 차(奇茗)를 내놓는다. 술이 한창일 때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집어서 선물하는 것이 관례이다.

    진귀한 물건 중에는 값비싼 노리개인 보완(寶玩), 이름난 옛 그릇(古器), 글씨 본(法書), 이름 있는 화가들의 명화(名畵), 보기 드문 이향(異香) 등이 포함된다.

    고려도경 ‘권 제32(乾道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토산차(고려차)는 맛이 쓰고 떫어서 입에 넣을 수 없다. 오직 귀한 것은 중국의 납차(蠟茶·중국 建州에서 생산되는 蠟面茶)와 아울러 용봉사단(龍鳳賜團·북송 황제가 내린 용봉차로 硏膏茶)이다. 하사해 준 것 외에도 상인들도 중국에서 수입하여 판매하는 까닭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매우 좋아하여 더욱 다구를 다루었다. 금화오잔(金花烏盞·금색 꽃무늬가 새겨진 검은 잔), 비색소구(翡色小?·비취색의 작은 찻그릇), 은로탕정(銀爐湯鼎·은으로 만든 화로와 차탕을 끓이는 세발 솥) 등을 사용하였는데 모두 중국 것을 교묘히 모방한 것이다.

    무릇 연회가 베풀어지면 뜰 가운데서 차를 끓여서 은하(銀荷·은으로 만든 연꽃 모양의 뚜껑)로 덮고 서서히 나아가 진행자(候贊者·궁중의식 등에서 진행을 맡아 호령을 붙이는 사람)들이 ‘차를 다 돌렸소, 이제 드세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직 식은 차를 마시지 않은 적이 없다. 관중(館中·영빈관으로 順天館을 말한다)에서는 홍조(紅俎·홍색 탁자)에 다구를 진열하고 홍색 비단보자기로 덮었다.

    하루에 세 번 차를 대접하는데 탕으로 계속된다. 고려인은 탕(湯)을 약(藥)으로 삼는다. 매번 사신이 다 마시고 미소를 띠는가를 본다. 혹자는 다 마시지 못하면 오만하다고 여겨 원망스러운 표정을 보이기 때문에 늘 억지로 마시도록 노력한다.”

    위의 글은 궁중 접빈다례의 경우이다. 고려시대의 접빈다례가 차문화연구가인 신운학씨(고려차도종가 대표)에 의해 최근 일본 교토의 건인사와 상국사 등 몇몇 대형사찰의 사원다례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음이 확인되어 한일 간의 차문화 교류는 지속적이었던 것으로 증명됐다.

    신 대표는 “고려 차의 행다 절차는 당나라의 차 작법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신라시대의 음다풍속과 달리 한민족 특유의 행다절차를 완성한 것으로, 이러한 작법이 고려시대와 같은 시기인 무로마치시대의 일본에 전해져 몇몇 사찰에서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중국 사신들에게 고려의 차가 입에 맞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차는 본래 중국이 원산지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맛에서 중국차를 앞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법제 기술의 차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차 잎의 성분이나 육질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다. 한반도에서 차의 재배가 가능한 곳은 북위 36도 이남인데 그나마도 차의 성분에서는 중국차에 견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는 중국 인삼이 한국(고려)의 인삼보다 못한 이치와 같다. 중국에는 차, 한국에는 인삼이었던 것이다.

    위에서 토산차라고 하는 것은 고려의 뇌원차(腦原茶)이다. 아마도 뇌원차는 고려에서는 가장 좋은 차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도경 제32권 ‘기명3’(器皿三) ‘차조(茶俎:차상)’에는 다기(茶俎)·술독(瓦尊)·등잔(藤尊)·도로(陶爐)·밥그릇·옹기 등의 자기와 그릇의 종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서긍의 기록 중에는 고려의 차생활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 많다. 특히 비색소구(翡色小?)는 깊이가 있는 찻 사발(鉢) 혹은 완(碗)이다. ‘구’는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것이다. 경덕왕이 충담사를 만나 “나에게도 한 사발의 차를 나누어 주겠소(寡人亦一?茶有分乎)”라는 구절에 나온다. 이는 키가 낮은 사발 형태의 찻잔으로 말차에 사용했을 것이다.

    서긍은 또 더운 물을 담은 그릇을 호(壺)라고 하고 있다. 항아리 모양의 탕호(湯壺)이다. 위에는 뚜껑을 하고 아래는 받침을 하여 더운 기운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옛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보온(保溫)을 하기에 좋은 형태이다. 고려인들은 차를 끓일 때 자주 이 호를 사용하였다. 탕호를 겸하는 고려인의 다례는 중국 다례법과는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 제26권의 ‘연례연의조(燕禮燕儀條)’는 고려청자에 관한 모양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릇은 금이나 혹은 은으로 도금한 것이 많고 청자는 값진 것으로 친다.”

    그는 중국에 없는 고려의 청자도기(靑磁陶器) 중에서도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는 ‘주준’(酒尊·술항아리)과 사자 모양의 비색향로인 ‘산예출향’(?猊出香·사자 모양을 한 도자 향로)을 감탄하고 있다. 서긍의 안목에도 출중한 것을 인정한 것을 보면 고려의 도자기술이 이미 국제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기의 색이 푸른 것을 고려인들은 비색이라고 한다. 근년에 들어와 제작이 공교해지고 광택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술항아리(酒尊)의 형태로 참외 모양과 같은데, 위에는 연꽃 위에 오리가 엎드려 있는 모양의 작은 뚜껑이 있다. 또한 완·접시·찻잔·꽃병·탕잔도 잘 만들었는데 모두 중국의 일정한 형태의 기명을 만드는 정기제도(定器制度·중국의 일정한 형태의 기물을 만드는 법칙)를 모방했으므로 생략하며 그리지 않겠으며, 술항아리만은 다른 그릇과 다르므로 특별히 알려둔다.”(陶尊條)

    “산예출향 역시 비색(翡色)이다. 위에는 쭈그리고 있는 사자 모양의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연꽃(蓮花)이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만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지금의 저장성 사오싱현)의 고비색(古秘色)이나 여주(汝州·지금의 중국 허난성 린루현)의 신요기(新窯器·새로 개발된 기물)와 대체로 유사하다.”(陶爐條)

    고려의 차 문화는 수준 높은 고려청자의 기술과 솜씨 덕분에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갔던 것 같다. 차와 함께 찻그릇·화로·주전자 등의 기물들은 고려의 차 정신과 품격을 높이는 데에 일조를 한 것 같다. 

    청주 서원대 차학과 학생들이 중국 장시(江西)성 등왕각에서 열린 한중차문화교류대회에서 고려도경의 궁중다례를 시연하고 있다.
    차를 마시던 환경도 고려도경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고려도경 ‘관사(館舍)’조에 보면 순천관(順天館)은 사신들이 머무는 숙소인데 정청 뒤에 길이 있고, 그 가운데에 낙빈정(樂賓亭)이 세워져 있다. 좌우 두 자리를 정사와 부사가 거실로 사용하였다.

    서쪽 자리의 북쪽은 산세를 배경으로 향림정(香林亭)이 있어 창을 열면 산을 대하게 되어 있다. 맑은 물이 감돌며 높은 소나무와 그 그늘 아래에 여러 풀꽃들이 울긋불긋 다투고 있다. 8면에 난간이 만들어져 기대어 앉아 쉴 수도 있다. 옆으로 누운 소나무와 괴석들이 어우러져 있고 바람이 불면 서늘하여 사신들이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던 곳이다.

    순천관은 왕휘(王徽·고려 문종)가 세워 별궁으로 사용했는데 원풍(元豊·송 신종의 연호) 연간에 조공을 바친 뒤부터는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관사로 고쳐서 순천(順天)이라고 명명하였다. 순천관은 매일 사절단 일행에게 3식을 계급에 따라 차등을 두어 제공하는데 차도 세 차례 대접한다. 사절단이 처음 순천관에 도착한 날에 베푸는 불진회(拂塵會)를 첫 번으로 하여 5일에 한 차례씩 사절단 전원에게 주연을 베푼다. 순천관과 향림정은 사신들을 접대하고 차를 마신 대표적인 장소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지만 한국의 전통 정원에는 항상 소나무와 괴석이 있고, 물이 흐르고 있거나 연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백제시대부터 있었던 전통정원의 모습이다. 다원(茶園)도 마찬가지이다.

    고려도경에 최상품의 차로 기록된 용봉차는 ‘고려사’(高麗史)에는 왕이 중신들에게 하사하는 귀중품으로 되어 있다. 중신들에게 하사한 차와 물품의 내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왕 성종은 매우 슬퍼하여 교서를 내려 최승로의 공훈과 덕행을 표창하고 대사벼슬을 추증했으며 부의로 베 1000필, 밀가루 300석, 입쌀 500석, 유향(乳香) 100량, 뇌원차 200각, 대차 10근을 주었다.”(‘고려사’ 권 제93, ‘열전’ 제6권)

    “성종 14년에 최량(崔亮)이 죽으니 왕이 매우 슬퍼했으며 태자태사를 추증하고 부의로 쌀 300석, 보리 200석, 뇌원차 1000각을 주었으며 예식을 갖추어 장사지냈다.”(‘고려사’ 권 제93, ‘열전’ 제6권)

    “목종 원년(998년)에 서희가 나이 57세로 죽었는데 부고를 받고 왕이 몹시 애도했으며 베 1000필과 보리 300석, 쌀 500석, 뇌원차 200각, 대차 10근, 전향 300량을 부의로 주고 예식을 갖추어 정사를 치르게 했으며 ‘장위’라는 시호를 주었다.”(‘고려사’ 권 제94, ‘열전’ 제7권)

    고려시대에는 차를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것 이외에도 노인과 병자에게 하사한 기록도 있다. 아마도 차는 건강을 증진하는 데에 도움이 되며 약품으로 사용되었음을 반증한다.

    “현종 1년, 갑술일에 서울에 있는 90세 이상의 남녀노인들에게 술·밥·차·약·포백 등을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현종 1년, 9월 기사일에 서울에 있는 80세 이상의 남녀노인들과 중환 폐질자들에게 술·밥·차·포백 등을 차등 있게 주었다.”(‘고려사’ 권 제4, ‘세가’ 제4권)

    ‘고려사’에는 한국 토산차로 뇌원차, 대차, 그리고 중국산 용봉차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는 조선과 달리 중앙집권이 아직도 덜 된 왕조였다. 지방토호들이 아직도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며, 중앙의 문화가 각 지방으로 퍼져간 것이 아니라 호족중심의 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지방에 따라 차문화가 달리 발전하였다. 차도 차산지를 중심으로 중국과 교역이 활발한 지역에서 보급되었을 것이다.

    신라와 백제의 다(茶)풍속을 이어받으면서 송나라에서 건너온 음다문화의 토착화에도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국가행사인 팔관회와 연등회에서도 헌다의례는 빠질 수 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과 교역이 활발했던 강진 지역에는 청자생산 관요가 많았으며, 초기에는 무문형(無紋形) 토기를 만들다가 12세기 무렵에는 상감청자를 만들어낸다. 요업의 발달은 음식문화와 함께 차 문화를 발달시켰음에 틀림없다. 차를 끓이고 담을 용기의 풍성함은 차 문화의 격조를 높였을 것이다. 국제적 수준의 청자기술은 차 문화의 수준을 국제적으로 향상시켰을 것이다.

    궁궐의 기구에도 차를 전담하는 다방(茶房)이 있었으며, 다군사(茶軍士)를 두어 왕의 행차에 수행토록 하였다. 불교국가였던 까닭에 사원에 대한 국가의 후원도 상당했다. 승려들은 군역이나 노역에서 면제되었고, 사원의 살림살이가 윤택해지니 사찰에 다당(茶堂)을 별도로 짓고 다고(茶庫)도 따로 둘 정도가 되었고 사찰 인근에는 다촌(茶村)이 형성되었다.

    왕실과 사찰에서 차가 크게 번성하니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다점(茶店)이나 다소(茶所)가 생길 정도였다. 다구와 다기의 제작이 늘어남은 물론이다. 무신정권기의 혼란이 안정되면서 차 문화는 다시 흥해지는데 이자현(李資玄)에 이어 이규보(李奎報)를 비롯한 최자(崔滋), 이제현(李齊賢) 부자, 이인로(李仁老), 김극기(金克己) 등의 선비들이 뒤를 잇는다.

    고려의 차는 점차 차를 겨루는 투다(鬪茶), 명전(茗戰)으로까지 발전한다. 고려의 차는 절정기를 이루지만 국가적으로 생산량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차농들에게 과중한 공다(貢茶)를 부여해 도리어 침체기를 맞게 된다. 문화는 항상 물질문화와 정신문화가 창조적 생산을 유지하면서 균형을 잡으면 확대 재생산되고 그렇지 못하면 쇠퇴하게 된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출처 : 경독재(耕讀齋)
글쓴이 : 강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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