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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만에 밝혀진 진실…보름달 작전은 '피의 학살'

감효전(甘曉典) 2012. 6. 28. 20:37

58년만에 밝혀진 진실…보름달 작전은 '피의 학살' 2009.07.16 17:34

58년만에 깨어난 진실
날씨는 맑았지만 새벽 한파는 뼛속까지 파고 들었다. 1951년 음력 정월 보름인 2월20일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가정마을 뒷산.

한달여 전부터 함평 해보면과 장성 삼서면 일대 민간인들은 "군경이 들어오면 모두 죽을 것이다"는 빨치산의 말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실제 군경에 의한 주민 학살현장을 지켜봤던 민간인들의 공포감은 빨치산의 말에 배가됐다.

그렇게 가족단위 민간인들은 불갑산 자락인 이곳 가정마을 뒷산에서 두려움에 떨며 근근이 연명하고 있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새벽 6시께 국군의 '보름달 작전'은 시작됐다. 당시 M1과 칼빈 소총, 박격포, 대전차포 등으로 중무장한 채 불갑산을 에워싼 국군 11사단 20연대 제2대대는 보름달 빛에 의지하며 포위망을 좁혀갔다.

그리고 잠시 후 중화기는 불을 뿜기 시작했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민간인들은 혼비백산해 산 정상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었다. 산을 둘러싼 국군에게 정상의 민간인들은 '독안에 든 쥐' 신세였다.

결국 어린 아이와 엄마, 노인까지 모든 민간인은 정상에서 길게 줄지어 앉은채 집단 사살됐다. 피의 학살은 밤 8시까지 이어졌다.

제2대대는 1005명을 사살하고 18명을 생포했다며 전과를 보고했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 3명, 부상 24명이었다.

특이사항으로는 '장병들의 사기가 왕성하다' 였다. 대승을 거뒀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생존한 빨치산 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불갑산 일대에서 활동한 빨치산은 120여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소탕작전이 벌어지자 대부분 나주쪽으로 탈출했다.

결국 국군이 비무장한 민간인들을 빨치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집단 사살한 것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58년 만인 16일 오후 가정마을 뒷산에서 유해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현장에서는 여성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거울과 은반지, 비녀, 빗, 담뱃대, 젓가락 등 생활용품이 다수 발견됐다. 희생된 대부분의 사람이 무고한 민간인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날 국군의 '보름달 작전'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문만섭씨(75)는 "총소리를 듣고 무작정 도주했지만 초저녁께 군인들에게 붙잡혀 300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방공호에 밀어 넣어져 무차별 총격을 당했다"며 "나도 팔과 가슴 등에 총을 맞았으나 죽은 척 하고 있다가 이틀 후 빠져나왔다"며 당시의 처참함을 전했다.

실제 이날 발굴된 유골 100여구는 모두 한줄로 길게 줄지어 있었으며 제대로 눕지도 못한 채 쪼그려 앉은 모습이었다.

불갑산에서 가족을 잃은 유족회장 장재수씨(74)는 "설마했는데 이렇게 많은 유골이 나와 무척 놀랍다"며 "58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 전쟁의 상흔이 너무나도 참혹하다"고 눈물지었다.

김동춘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이번 발굴로 58년간 묻혀있던 역사의 진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며 "특히 불갑산 발굴 현장은 공주 상왕동과 더불어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될 여지가 매우 커 복원 등을 통한 활용 방안에 대해 지방자치단체와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진실화해위는 가정마을 인근의 광암리 운암마을 뒷산에서 2차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관련사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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