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호국원에 감추어진 학살의 현장 |
반공에 가려진 추악한 역사 임실군 청웅면 폐광굴을 가다 |
![]() 6·25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지 57년, 이데올로기에 뒤덮인 산하에 숨 쉬고 살았던 이유만으로 총부리에 가슴을 난자당했던 이들.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묻고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 하소연조차 못하고 살아야 했던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말한다. 56년의 금지된 역사
호국영령의 달 6월, 취재진은 망자의 소리없는 절규를 쫓아 임실로 향했다. 임실호국원에 우뚝 솟은 현충탑, 망자의 절규가 흘러나온 것은 그곳 왼편 산자락이었다. 좌익과 우익의 거대한 이데올로기 폭풍에 휩쓸려 쓰러져야 했던, 국군의 총부리에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56년의 시간 동안 하소연조차 못했던 슬픈 영혼들, 그들의 통곡이 이름없는 야산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의 역사가 그랬듯이 추악한 역사로의 진입을 붙들려 함인가? 현충탑 왼편으로 5분여를 걸어가자 ‘진입금지’ 팻말이 일행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누구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고희를 훌쩍 넘긴 역사의 증언자들. 하늘이 그들에게 허락한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터. 암울한 시대, 슬픈 영혼들의 기록을 더는 늦출 수 없는 이유이다. 가슴에 한으로 남은 어머니
“어떻게 잊어, 어머니가 고통스럽게 흰 거품을 토하며 몸을 들썩이는데, 군인들이 무서워 다가가지도 못했어. 모시고 나왔으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박순남(72. 임실군 청웅면) 씨의 눈가에 습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이내 굴곡진 인생이 고스란히 새겨진 주름을 타고 흘러내렸다. 박 씨는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2007년 임실호국원의 하늘,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먹구름이 가득한 1951년의 음울한 하늘이었다. 1950년 13살의 어린 나이에 전주의 한 약국에서 애기 담사리를 하던 박 씨는 6·25 동란이 일어난 직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푸근한 가슴이 아닌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상잔의 현장이었다. 낮에는 경찰과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하기를 반복했다. 하루하루 민초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겨우 생을 잇고 있었다. 박 씨의 가족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인민군을 따라 막내오빠가 집을 나선 이후 국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릴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린 나이었기에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국군이 들어오면 인민군의 가족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들을 수없이 들었던 터였다. 어머니나 셋째오빠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1951년 1월 27일, 박 씨는 어머니와 셋째오빠, 그리고 만삭이 된 올케언니와 함께 청웅면 남산리 야산에 있는 폐광굴로 향했다. 일제강점기에 금광으로 유명했던 곳이지만, 6·25 전쟁 이후에는 마을사람들의 피신처로 변한 곳이었다.
사냥꾼을 피해 둥지로 숨어든 짐승처럼 박 씨는 가족과 함께 칠흑처럼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박 씨는 올케와 어머니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 손을 놓치면 어둠 속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앞섰다.
동굴은 꽤 넓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부락별로 모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굴속에 샘이 있었고, 연기도 잘 빠져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굴속 생활에 적응해 갔다. 매캐한 연기가 덮쳐온 것은 한 달 여가 지난 다음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뜨끔거렸다. 헝겊으로 입을 가렸지만 마땅히 연기를 피할 곳도 없었고 입구가 어느 방향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마냥 몸을 땅에 붙인 채 버티고 또 버티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저기 신음소리가 들리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들려왔다. 굴속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소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득해졌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횃불을 든 경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아비규환처럼 여기저기 널려있는 주검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저만치 떨어진 곳에 쓰려져 있었다. 어머니의 입술 사이로 흰 거품과 함께 그르렁거리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다가가려 몸을 일으켰다. 목 뒷덜미로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 것은 그 때였다. “일어서.” 고개를 돌려 손 주인을 찾았다. 경찰복을 입은 사내의 얼굴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음이란 단어가 뇌리에 스치고 그것은 공포로 바뀌었다. 어머니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겁에 질린 나머지 몸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경찰의 위협을 이겨내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들의 위협에 떠밀려 굴 밖으로 나온 것은 그 다음이었다. 오십여명의 생존자. 그녀는 그들과 함께 청웅면 갈담지서로 끌려갔다. 인민군의 가족을 살려줄 리 없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체념했다. 헌데, 뜻밖에 구원자가 나타났다. 전주에서 애기 담사리를 했던 약국집 오빠가 군복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3일 후, 생존자는 전원 11연대로 이송되었지만, 그녀는 지서에 남아 8일간 더 조사받은 뒤 풀려났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11연대로 이송된 이들은 전원 강진면 회진리 맷골에서 총살을 당했다. 그녀만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러나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굴속에서의 악몽, 그것은 잊으려 해도 결코 잊히지 않았다. 널려있는 주검들, 가릉거리는 어머니, 매스꺼운 내음, 눈만 감으면 그것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는데, 조금만 용기를 내서 모시고 나왔으면…….”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선연하다는 박 씨, 그녀의 가슴엔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지 못한 자책이 응어리져 있었다.
잔혹한 현대사 민간인 토벌작전
당시 폐금광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당시 한국청년단 소속으로 경찰의 지시에 따라 학살에 가담했던 한청산(가명. 77. 청웅면) 씨는 믿기 힘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기자 - 사건이 일어난 때가 정확히 언제였습니까? 한청산 - 음력 2월 8일이었지.(1951년 3월 15일) 기자 - 당시 어떤 일을 했나요? 한청산- 한국청년단에서 죽창 들고 빨갱이 잡으러 다녔지. 기자- 굴 밖에서 불을 땐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한청산- 가족들이었어. 기자- 굴속에 있던 사람들의 가족이었습니까? 한청산- 경찰들이 가족들을 데려가 불러내면 나올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불렀지. 대답이 없었어. 기자- 가족들은 어떻게 찾았습니까? 한청산- 굴속으로 피하지 못한 노인네들하고 어린애들은 집에 있었는데, 경찰에서 모두 불러 수용소(현 청웅초등학교)에 가뒀었어. 그곳에서 데리고 왔지. 기자- 그들도 굴속에 자신의 가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한청산- (고개를 끄덕이며) 총 들고 쏴 죽인다니까, 어쩔 수 없이 지른 거지. 기자- 불을 땐 전후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한청산- 불러도 굴속에서 아무도 안 나오니까, 2월 7일(양력 3월 14일)에 불을 지폈지. 그런데 빨치산과 인민군 패잔병이 총을 쏴서 방화를 막았어. 그래서 다음날(양력 3월 15일) 새벽에 연막탄 두 개를 까서 던지고, 수류탄을 몇 방 터뜨렸어. 그랬더니 조용하더라고. 다시 부락 사람들을 오라해서 고춧대하고 나무로 불을 땠어. 3일 정도. 기자- 혹시 뛰쳐나온 사람은 없었습니까? 한청산- 수십명이 뛰어 나왔지. 나오는 사람 모조리 쏴 죽였어. 기자- 이후에 안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한청산- 경찰들이 앞에 들어가고 청년단이 뒤에 따라갔어.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비린내가 푹 나더라고. 사람들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고. 매형도 그곳에서 죽었어. 기자- 친 매형 말씀이죠? 한청산- (고개를 끄덕이며) 5~6명 정도 산 사람을 발견해서 데리고 나왔는데, 작은 외숙이 연기를 먹고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어. 순경들이 데리고 나왔지. 나중에 여기서 살아난 사람들하고 함께 11사단에서 인계를 해갔어. 외숙이라고 해도 살려달라고 할 수도 없었어. 나중에 11사단에서 덕치면 망월리(맷골)에서 총살시켰다고 들었어. 기자- 왜 불렀을 때는 아무도 안 나왔을까요? 혹시 생각해 보셨습니까? 한청산- 쏴 죽일까봐 못 나온 거지. 그리고 안쪽에선 아무 소리도 안 들려. 굴이 깊어서. 이상의 증언에서 당시 군·경의 만행이 얼마나 추악했는지 엿볼 수 있다. 가족들을 동원하여 피붙이를 죽이라고 사주한 만행으로 인해, 스스로 가족들을 죽여야 했던 사람들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에 시달렸다. 군·경의 만행과 관련, 임산부까지 총살시켰다는 증언도 있었다. 당시 청웅면에 거주했던 박홍길(77. 서울) 씨의 형수는 폐광굴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산달이 가까워 걸음을 못 옮기자 11연대 소속 군인은 서슴없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축사로 변한 맷골 매장지 18년 전, 정진열(60. 강진면) 씨는 축사를 지으러 터를 다지던 중, 땅에서 나온 유골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무서운 곳이라며 동네 사람들이 접근을 꺼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유골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정 씨는 마을 어른을 찾아 물었고, 부응리 폐광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데려와 이곳에서 군인들이 총살했다는 답을 받았다. 1951년 당시, 국군이 총살한 후, 마을 사람들이 보릿대로 사체를 덮어두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흙이 쌓인 것이었다. 축사를 만들기 전 그곳은 평평한 곳이 아닌 계곡 형식의 V자 모양이었다. 헌데, 정 씨는 뜻밖의 증언을 했다. 축사를 만들 당시 발견된 유골을 누군가 모두 수거해갔다는 것이다. 정 씨는 그들이 왜 유골을 수거해 갔는지, 혹은 어느 기관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정 씨는 “당시 현장에서 공사를 지휘했기 때문에 유골을 직접 보았다.”면서 “발굴하면 분명히 유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박탈당한 선택의 자유
당시 청웅면에 거주했던 박홍길 씨는 자신을 노령학원 빨치산 4기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선택의 권리가 없었다고 항변했다. “낮에는 군인들 무서워 산에 있고 밤에만 내려왔어. 형님이 자위대장이어서, 밤에 내려오면 민청에 있었지. 안 죽으려고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했던 거지.” 그 역시 몇 차례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 1951년 청웅면 지서를 찾아가 자수를 하고, 생존을 위해 군민방위군과 향토방위군에 찾아가 가입을 하려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러던 음력 1월 말에 임실군청 정운대(우익진영단체)의 호출을 받았다. 자수했던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그는 그곳 11연대에서 1주일 정도 정신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중대장으로부터 사살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정운대 대장이 나서서 만류하지 않았다면 다 죽었어.” 하지만, 그 사이 폐광굴 사건이 일어났다. 작은 형, 다섯 살 난 조카, 사촌 처남의 사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형은 목격자가 있음에도 끝내 사체를 찾지 못했다. 그 사이 또 다른 비보가 전해졌다. 시체를 안장하는 사이 만삭인 형수가 11연대에 끌려가 사살당했다는 소문이 마을에 나돌았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울화가 치밀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목숨을 보존하는 길이었던 까닭이다.
좌익선택은 울분의 표출이었다 임실 폐광굴 학살과 관련, 뜻밖에 비전향장기수로 복역했던 전상하(77. 임실 청웅면) 씨를 만날 수 있었다. 폐광굴에서 백부님을 잃기도 한 그는, 자신의 좌익 선택은 “한 모 씨에게 당한 울분”이었다고 주장했다. 1950년, 전북 임실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이념의 갈등을 피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현장이었다. 48년 10월 전후, 20여명이 남원방면에서 예비검속으로 사살당한 이후 임실엔 암운이 감돌았다. 청웅면에 우익과 좌익에 적극 가담한 이들이 각각 3명과 5명이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런 사상과 거리가 멀었다. 배운 사람들과 지주 부자들, 동네 유지는 우익과 가까웠지만, 밑에 서민들은 우익도 좌익도 아니었다. 굳이 그들의 성향을 논한다면 오직 전쟁의 혼란기에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런 시대적 정황에서 그가 한 씨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한 씨는 일제강점기에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친일파였던 작은아버지의 영향으로 우익으로 전향한 인물이었다. 전 씨는 그런 한 씨에 대해 “해방 이후 청년단을 조직,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들에겐 서슴없이 몽둥이를 휘둘렀고, 마을 사람들은 그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피해 다녔다.”라고 증언했다. 6·25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기 얼마 전 한 씨가 이끄는 청년단원이 집으로 찾아와 그의 아버지를 폭행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제강점기에 그의 아버지가 좌익으로 활동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20살 피 끓는 나이였던 전 씨는 이를 악물고 울분을 삭였다. 그러던 차에 6·25 전쟁이 일어났고 인민군이 내려왔다. 전 씨는 이때다 싶어 그동안 삭여왔던 울분을 토해냈다. 한 씨가 이끌던 청년단을 만나면 혈기와 울분으로 매질을 했다. 전 씨는 눈앞에서 아버지를 때리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는 반문으로 좌익을 선택한 것에 대해 변론했다. 분열과 화합, 선택은 정부에 달려
진실 발굴은 화합을 위한 절차 임실 폐광굴 학살 관련, 지난 1993년 전북도 추정 사망자 수는 340명. 그러나 유족회는 700여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추정한 수치로, 1951년 학살 당시 유족들이 찾아간 시신이 100여구에 이르고, 이후 누군가 광산 개발을 이유로 400여구를 치웠다는 증언, 그리고 살아서 11연대에 이송된 이들이 50~60명에 이른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피해자 수에 관한 논란은 대부분의 학살사건이 그랬듯이 영원히 미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유족회에서도 숫자에 대한 논란은 큰 의미가 없다면서 ‘진실’을 강조했다. 유족회에서는 1951년 학살 당시의 진실과 함께, 두 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앞에서 언급한 맷골 유골발견과 관련, 땅 주인인 정진열 씨는 “누군가 유골을 수거해 갔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유족회에서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기관이 아니면 그곳에서 유골이 발견된 것을 몰랐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신빙성 있다. 연고자가 아니면 굳이 유골을 수습해 갈 이유가 없다. 하지만 당시 유골은 흙과 뒤범벅되어 있었고 한꺼번에 가져갔다는 점에서 연고자가 수습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훼손되지 않은 사체라면 해부용으로 가져갔으리라 추측할 수도 있지만, 그마저 타당성이 떨어진다. 결론적으로 인근 주민 몇 명만 유골이 발견된 것을 알고 있었는데, 정부기관 이외에서 정보를 듣고 찾아왔다고 믿기 어렵고, 정부기관을 제외하면 이를 수습해 갈 이유가 있는 곳은 전무하다. 1967년 즈음 민간인이 광산 개발을 하겠다며 인부들을 동원, 폐금광을 청소한 일이 있었던 점도 의혹을 부풀리고 있다. 당시 인부로 일을 나섰던 정인권(76. 청웅면) 씨는 “약 400여구의 유골을 치웠다.”면서 “이후 유골이 어디로 치워졌는지는 모르겠다.”고 증언했다. 유족회에서 의혹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부분이다. 당시 민간업자는 약 12일간 폐금광을 청소했을 뿐, 금맥 탐사 등은 전혀 하지 않았다. 유족회는 정부에서 학살 사실을 감추려 폐금광을 청소했을 것이란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유족회에서 원하는 것은 진실일 뿐, 이러한 의혹의 책임자를 찾아 문책하고자 함이 아니다. 유족회장 박탁 씨는 인터뷰 과정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은 화합을 위한 절차”라고 수차례 강조하면서 “유족회가 원하는 것은 역사의 진실”임을 분명히 했다. 6·25 당시 군·경 토벌작전 1950년 10월 5일 정부는 국군 주력부대를 북진작전에 투입하는 한편 육군 제11사단을 후방에 배치, 미군 제9군단 사령부의 지휘아래 지리산 일대의 공산유격대 토벌에 임하게 했다. 그러나 공산유격대의 항전이 극렬했고, 이에 국군은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한다. 1950년 10월 15일 이형근 준장으로 하여금 새로 제3군단을 편성, 예하에 육본직할이었던 유격사령부와 제2사단, 제5사단, 새로 편성된 제9사단과 제11사단을 배속시켜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남한의 민간인 사상자 수는 공식집계만으로도 99만명을 넘어섰고, 일부 연구에서는 200만명이 넘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에 의해 통제된 언론은 이런 가공할 학살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비가 국군으로 가장해 학살을 저지르고 모략 선전한다’는 등의 발표를 함으로써 모든 참상을 묻어버리거나 ‘인민군의 만행’으로 돌렸다.
진실로 가슴에 맺힌 눈물 씻고 가슴과 가슴에 화합의 가교를 6·25 동란은 참전 군인보다 민간인 피해가 큰 전무후무한 전쟁이었다. 민간인 피해가 100~200만에 이른다는 학계의 연구발표도 있다. 임실 폐광굴 학살도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군·경에 의한 범죄행위였다. 이들은 전쟁의 특수성을 이용, 국군에 의해 살해당한 이들에게 모두 좌익이란 족쇄를 채워 범죄를 미화하고 정당화했다. 육십년 가까운 세월, 6·25 당시 발생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무게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억울한 죽음에 대해 하소연조차 못하고 가슴에 묻어야 했고, 울고 싶어도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이를 앙다물어 참아야만 했고, 연좌제로부터 자녀를 자유롭게 풀어주고자 겉으로 표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의 가슴에 맺힌 울분과 한이 새카맣게 타버렸음을 물론이다. 6·25 동란의 비극도 이제 57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미 상당수 역사의 증언자는 세상을 떠났고, 살아있는 분들 역시 대부분 고희를 넘겨 노환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선조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즉, 우리에겐 그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길 책임이 있다. 울분과 한으로 가슴에 맺힌 그들의 눈물을 이제라도 씻어주어야 한다. 진실, 누군가에게는 그 진실이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겐 양심이 있다. 역사의 범죄로 가해자가 되어야 했던 이들은 한결같이 양심이란 절대 선(善)에서 벗어난 행위로 인해 평생 그 업보에 시달렸다고 토로한다. 이러한 면에서 그들 역시 또 다른 피해자이다. 진실, 그것은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혼란과 분열이란 진실을 감추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그러한 두려움을 떨치고 진실의 증언을 통해 서로의 가슴과 가슴을 잇는 평화의 가교를 세우는 것이다. 진실, 이것은 우리 후손들의 평화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진실을 통한 바른 역사 정립을 통해 우리는 “다시는 역사의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라는 다짐을 한다. 이러한 다짐으로 우리는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 지금 임실 폐금광은 지역사회 스스로 화해를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임실군에서는 임실호국원에 폐금광으로 가는 길 조성에 대해 협조요청을 했고, 호국원에서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지역사회에서도 강진면 부흥광산과 청운면 남산광산 발굴 및 위령탑 건립을 통해 후세에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도,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분열의 종식과 미래를 위한 화합이다. 두 갈래 길에서의 선택이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음은 물론이다. 끝으로 정부의 현명한 선택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최재호 부장 anansi@newslife21.com |
출처 : 貪 嗔 痴
글쓴이 : 멧돼지 원글보기
메모 :
'역사 > 보도연맹,형무소재소자 학살사건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미국 기밀문서가 말하는 한국전쟁 당시의 집단학살 (0) | 2012.06.12 |
---|---|
[스크랩] 한국전쟁때 ‘형무소 집단학살’부산·진주·마산 3400여명 희생 (0) | 2012.06.12 |
[스크랩] "한국 정치범 총살현장"-서울 (0) | 2012.06.12 |
[스크랩] "한국 정치범 총살현장"-대전 (0) | 2012.06.12 |
[스크랩] 한국 정치범 총살현장"-대구 (0) | 2012.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