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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양민학살 전모 밝힌 AP

감효전(甘曉典) 2012. 6. 12. 21:28

AP, 미국과 이승만정권 당시 국민 0.5%학살

국군의

<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양민학살 장면, 지령자는 야전상의를 입고 학살을 지시하는 바로 저 미군이다. 미군의 학살 뿐만 아니라 해방후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의 책임도 미국이 져야 한다. 그들이 국군을 창서라고 실질적으로 지휘하였기 때문이다. >


ap 통신은 지난 5월 18일,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이뤄진 양민학살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ap통신은 지난 2000년,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밝혀내어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한국의 언론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지난 노근리 사건은 일개 지역에서 자행된 미국의 양민학살에 대한 취재였다면, 이번에 ap통신이 발표한 내용은 노근리와 같은 양만학살 사건이 한국전쟁 초기에 이승만 정권의 통치력이 닿는 거의 전 지역에서 광범위하고, 대규모적으로 자행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학살 지역이 광범위하고 학살피해자의 수가 10만여 명에 달하는 점에서 이번 ap통신의 보도는 지난 노근리 학살 보도와 더불어 중요하게 볼 의의가 있다.


ap통신의 보고서는 1950년 7월, 충격적인 양민학살 현장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국전쟁 초기, 어떤 때는 이런 학살 현장에 미국 장교가 참관했다. 북한군이 전면적으로 남하함에 따라 한국군과 경찰은 수감자들을 감옥에서 데리고 나와 줄을 세운 후 머리에 사격을 가하고 시신을 급하게 파놓은 참호 속에 묻어 버렸다. 몇몇 지역에서는 시신들을 폐광산이나 바다 속에 던져 넣기도 하였다. 여성과 아이들도 그런 희생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많은 희생자들은 재판이나 증거가 없이 학살 되었다.

(with u.s. military officers sometimes present, and as north korean invaders pushed down the peninsula, the southern army and police emptied south korean prisons, lined up detainees and shot them in the head, dumping the bodies into hastily dug trenches. others were thrown into abandoned mines or into the sea. women and children were among those killed. many victims never faced charges or trial.)

 


노근리에 이은 ap의 두 번째 특종 : 10만 대학살


ap통신은 대전의 산내, 경기도 수원, 경남 부산, 충북 청원과 경남 울산 등등 이승만 정권의 통치력이 닿는 모든 지역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통신은 이렇게 학살당한 민간인이 최소 10만 명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the commission estimates at least 100,000 people were executed.)


당시 한국국민 전체가 2000만 명이었음을 고려하면 전체 국민의 0.5%가 이승만 정권의 총구 앞에서 집단학살당한 것이다. 1970년대 캄보디아를 전율에 떨게 하였던 <킬링필드>가 무색할 정도이다.


1950년 7월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면으로써 북한군의 대대적인 남하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ap통신은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좌익혐의로 구속 수감된 서대문형무소의 정치범을 모두 석방하였으며, 이들은 대부분 북한군으로 입대하였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후퇴하는 길에서 수감 중인 모든 좌익혐의자들에게 총구를 겨누었고 그 결과 무려 10만여 명의 생명이 불과 몇 주 사이에 처참한 시신으로 땅속에 묻혔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학살당한 10만 명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점이다.


ap통신은 1950년에 남한에 수용된 정치범은 3만 명이라고 밝혔다.

(by 1950, southern jails were packed with up to 30,000 political prisoners.)


정치범이 3만 명이었는데 학살자가 최소 10만 명이라면, 7만 명이 넘는 대다수 학살자들은 감옥에 수감되었된 사람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ap통신은 희생자들이 대부분 보도연맹(national guidance league)원들이었다고 한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1948년, 날치기로 통과시킨 국가보안법을 이용,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목적으로 3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을 등록시켰던 단체이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보도연맹에는 좌익 활동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보도연맹 학살을 은폐한 미국

ap통신의 이번 보도가 지금까지 한국전쟁 집단학살 보도와 차원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민간인 학살 과정에서 미국이 주도면밀하게 개입되었으며 대학살의 상흔을 은폐하는데 개입하였다는 것을 밝힌 점이다.


ap통신은 민간인 집단학살 현장에 미군 장교도 자리에 있었다고 전하였다.

(with u.s. military officers sometimes present,)


이들 정보부 장교들은 cia와 함께 워싱턴에 보고서를 제출하기 전에도 문서를 돌려보면서 이를 "기밀사항"으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이는 미국당국이 이승만 정권의 집단학살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이를 '기밀'로 묻어버리기 위해 대학살에 주도면밀하게 개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군사위원단의 lt. col. bob edwards는 미국군사위원단이 남한에 도착하여 남한사람들에 의해 "수천 명의 정치범들이 1-2주 사이에 학살당했다"고 믿은 채 군사정보부의 대전 사진들을 워싱턴의 정보부로 날랐다고 썼다.


동시에 미국은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대학살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각지의 미 대사관까지 동원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영국공산당 기자였던 alan winnington은 북한군과 함께 대전 학살지역을 방문, 기사를 취재하여 송고하였는데 cia와 미군 정보부는 winnington의 취재내용을 "기밀사항"으로 분류,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작 런던의 미 대사관은 winnington의 기사를 '조작'으로 비난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대학살 은폐 시도 가운데 최고 초점은 당시 태평양 방면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집중된다. 맥아더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수권을 보유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승만과 함께 하는 미국 군사고문단, 학살현장에 개입한 정보부 장교를 지휘하는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ap통신은 맥아더가 비록 한국군을 통제하였지만 대학살을 한국의 "국내문제"로 보았다고 하였다.

(gen. douglas macarthur viewed the executions as a korean "internal matter," even though he controlled south korea's military.)

한 가지 확인해두어야 할 사실은 대학살이 자행되던 그 당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미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게 있었다는 점이다.


미군장교가 학살현장에 참관하였던 점, 미군 정보부가 대학살에 대한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였던 점, 대학살은 미군이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한국군이 동원되어 저질러졌던 점, 미국대사관이 은폐에 나섰던 점, 무엇보다도 미군사령관인 맥아더가 대학살을 용인하였던 점으로 미루어볼 때 미국은 한국전쟁 초기 발생하였던 최소 10만여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 가입자에 대한 집단 대학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ap통신은 광범위한 학살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함께 보도하였다. 통신은 "청원과 울산에서도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고 전하였다.

(it has officially confirmed two large-scale executions — at a warehouse in the central south korean county of cheongwon, and at ulsan on the southeast coast.)


그리고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이 지역에서 150여 곳의 대규모 무덤을 발견했고, 400구 이상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수원에서 미 공군 정보부에서 근무하였던 donald nichols 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수원에서만 대략 1800여 명이 학살당하였다고 술회하였다.

("the unforgettable massacre of approximately 1,800 at suwon,")


물론 대학살 만행을 밝히려는 노력은 이어져왔지만 그 때마다 번번이 정권의 방해로 진실은 묻혀있었다. 4·19혁명 시기 국회의원이었던 박장현은 부산에서만 한국전쟁 당시 1만여 명 이상이 학살당하였다고 주장하며 연구조사를 벌였는데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이후 대다수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이처럼 많은 문서기록들이 대학살 사실 자체를 파묻어버릴 정도로 파괴되어 버렸고 미국은 그 위에서 새로운 가식의 역사를 조작해내었다. ap통신은 전쟁이 끝난 1953년, 200만 명의 사람들이 죽은 이후 미국 군사범죄 보고서는 대전 산내에서 있었던 모든 학살사건을 북한의 "살인 야만" 탓으로 돌렸다며 미국의 양면성을 지적하였다.

(u.s. army war crimes report attributed all summary executions here in daejeon to the "murderous barbarism" of north koreans.)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죽은 영혼들을 위하는 길


이번 ap통신의 보도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안개 속에 묻혀 있던 보도연맹 사건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미군의 작전과 관리, 통제, 은폐 속에서 자행된 10만여 명의 대학살극은 그간 독재정권의 방해와 은폐에 가려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동안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한 연구도 점차로 이뤄지고 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ap와의 인터뷰에서 "학살과 관련된 1200여 명을 포함한 7000여 명의 탄원서와 1950∼51년 사이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숨진 이들에 대한 215건의 기록을 종합해서 알아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래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다소간 난관을 겪고 있다.


ap통신은 이명박 정부 아래서 진실규명 위원회는 예산과 정책지원이 더욱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lee myung-bak, whose party is seen as democratic heir to the old autocratic right wing, the commission may find less budgetary and political support.)


하지만 한국전쟁 시기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전체국민의 0.5%에 달하는 수많은 무고한 국민들을 학살하였다. 10만 명이면 5·18 광주항쟁 유족규모의 50배에 달하는 규모로 천인공노할 만행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학살의 집약성으로 본다면 일본의 난징대학살을 능가하며 그 광기로 본다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비할 수 있다.


이번 ap통신의 보도를 기본으로 한국사회 내에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가슴 아픈 진실을 광범위하게 알려야 한다. 이것만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죽어야 했던 50년대의 순박한 어르신들에게 후대의 책임을 다하는 길이라고 본다. 


출처 : 貪 嗔 痴
글쓴이 : 멧돼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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