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중국시민의 글은 조선족 동포가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알기 위한 것으로써 본사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느 책에 나오는 외래어들의 의미가 아리송해 이 사전 저 사전을 뒤지다가 우연히 아래의 글을 보게 되었다.
“빅 뉴스(big news) 놀라운 소식. * 김일성 사망소식은 정말 ~였다.” (<개정 증보판 상용 외래어 사전>, 월간 고국소식 편집부 2002년 5월 20일)
감회가 새로웠다. 1930년대부터 수없이 되풀이하던 그놈의 “빅 뉴스”가 번번이 거짓말임이 드러나다가 드디어 사실로 확인된 지 11돌이 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북한의 김일성은 가짜 김일성”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직설(直說)”을 자랑하는 김동길(金東吉) 연세대 명예교수는
<월간조선> 2005년 2월호에 “金正日에게 나라를 내주기로 작정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불행하게도 38선 이북에서는 金日成(김일성)이라는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피의 숙청을 감행한 뒤 자리를 잡고 일제下 일본 천황 자리를 이어 받았다. ”
좋은 교육을 받고 역사학을 연구한다는 교수가 이런 말을 거리낌없이 던진다는 사실이 참으로 희한하다. 하긴 김 교수는 서양학이 전공이라니 우리민족의 역사에는 조예가 깊지 못할 수도 있겠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황당한 “가짜 김일성”설이 수십 년 이남사회를 지배했고 지금도 신봉자가 남아있다는 사실은 이 중국시민의 눈으로 볼 때 참으로 우리민족의 수치이다.
중
국의 조선족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인 이유나 정치적인 이유 혹은 그 어떤 다른 이유로 김일성 주석을 좋아하지 않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증오하기까지 하지만 중국에서는 “가짜 김일성”설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항일전쟁시기 김일성 주석의 수하에서 싸웠거나 김
주석을 만난 조선족과 한족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보천보 전투나 간삼봉전투에 참가한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이미 여러 해전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같은 이들이 “‘김일성 가짜설’ 누가 퍼뜨렸나”,
“'김일성가짜설'의 생산구조과 그 의미” 등 논문을 발표해 진상을 밝히는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짜김일성”설과
“진짜김일성”설 등을 집대성한 홈페이지 “프로조선”에는 아직도 한심한 내용들이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만가지 설을
모아두어 필자 같은 사람들이 반면자료를 찾는데 도움을 주는 것만은 고마운 일이라 할까? 그런데 몇 해 지나도록 별로 갱신을 하지
않았으니 관리자들의 맥이 좀 빠진 모양이다.
필자의 기억에는 “가짜김일성 만들기”의 최근 노력이 <월간조선> 2004년 12월 호에 실린 “(북한의) 金日成은 普天堡 습격 당시 현장에 없었다” (기자 배진영裵振榮)였다.
이야기를 엮으려면 근사하게 엮어야지
이름난 항일투사 박달(朴達)의 연락병이었다고 주장하는 전직 경찰관이며 당년 84세 이선호(李善鎬, 1920~)씨가 월간조선을 찾아와 털어놓았다는 “놀라운 얘기”를 읽으면서 구역질이 나는 것을 겨우 참았다.
보
천보(普天堡) 사건 당시 박달의 연락병으로 김일성 장군과의 연락을 맡았다는 사람이 말하는 시간, 지점, 인물들이 틀려도 여간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반박할 가치조자 없건만 당시 전후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래도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고(아마도
<월간조선>이 이런 점을 노렸으리라), “가짜김일성”설을 믿지 않는 이라도 충분한 근거로 반박할 여건이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까운 품을 팔아가면서 그 허황한 점들을 밝혀본다.
1937년 6월 4일 밤 10시에 김일성부대가 벌린 보천보 전투를 이씨는 1937년 7월 13일
새벽 1시경에 독립군들이 쳐들어왔다고 한다. 그 자신은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서…. 난 7월로 기억하고 있어요.”라고 변명했으나
코미디라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이선호씨와 동행한 이명산(李明山)씨는 “미국 정부기관에서 근무했던 북한 전문가로 김일성의 행적을
오랫동안 추적해 왔다”는데 “워낙 오래된 일이라서 한 달 정도의 착오는 있을 수 있다......중요한 것은 구체적 정황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했다니 “재미 북한 전문가”로 행세하는 사람의 수준을 알만하다.
시간이 이처럼 엉터리인데 지점은 어떠한가? 이선호씨는 자기가 이렇게 주장한다.
“朴
達씨 연락병이 된 지 얼마 후 만주의 본부에서 普天堡 시내에 대한 상황 보고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朴達씨가 시키는 대로
상황을 조사해서 문서로 정돈해 암기한 후, 간도성 조양천 연락소에 가서 金日成 장군에게 전했어요. 그가 金日成 장군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일제가 만든 간도성이란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로서 조양천은 간도성의 중심지인 국자가(局子街,
지금의 연길시)에서 10여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김일성 장군”이 그런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주장이 워낙
우습거니와 지리적으로는 더욱 기막히다. 조양천은 두만강 중하류에 있는 남양(南陽)에서 강을 건너 5, 60킬로미터 가면 되는데,
보천보는 압록강 상류 강가에 있다. 두 지점의 지도상 직선거리만 해도 180킬로미터나 되고 실제 거리는 적어도 몇 배 더 길다.
누가 손바닥만한 보천보를 치기 위해 수백 리 밖에 앉아 정보를 받아보겠는가?
인물은 더욱 가관이다. 1936년 3, 4월경 16세 때 “나는 만주에 있는 독립군 총사령관인
金日成 장군 다음가는 국내 책임자인 朴達이라는 사람이다”라고 자칭한 박달의 연락병이 되었다는데, 당시 박달은 “4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한다. 허나 실존인물 박달(1910.12.28~ 1960.4.1)의 나이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 그리고
박달이 김일성부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36년 12월의 일이다. 게다가 이씨가 “朴達씨와는 普天堡 사건 이후에도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 접촉을 했다”는데 박달은 항일역사에서 유명한 이른바 “혜산사건”으로 1938년 9월에 체포되어 광복될 때까지
감옥살이하면서 고생했다. 그러니 이씨가 어떻게 감옥에 있는 박달과 접촉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 주장의 핵심으로 되는 “진짜
김일성 장군”은 “모두 열두세 번쯤 만났”는데 “50代의 柔한 인상”이라 한다. 당시 지세가 험하고 날씨가 무섭게 추운 중국
동북일대에 50대 항일장령이 활약했다면 그야말로 세계유격전역사의 최대기적이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주장을 받쳐주기 위해 모자이크
맞추기를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니, 이명산 전문가님은 멋들어지게 설명했다.
“보천보 사건을 지휘했던 진짜 金日成 장군은 1901년 생입니다. 山中에서 유격대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10여 세 정도 나이가 들어보일 수는 있었을 겁니다.”
박
달이든 김일성 장군이든, 이씨가 사람의 나이를 보는 눈에는 문제가 심각하다. 1930년대에 만난 50대 김일성이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극찬한 이씨는 뒷날 1946년 2월, 고향인 함경남도 정평군
인민위원회에서 일할 때 만나본 “북한 김일성”을 비하한다.
“30代 중반의 젊은이인데, 말하는 게 꼭 깡패 같았어. 사람을 억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있는 것 같았고…. 말은 잘 못 했어. 인물은 준수하더군. 자기가 조국독립을 위해 백두산을 수백 번 넘나들었다고 말하는 데 「뭐
저런 거짓말을 다 하나」 싶어 기가 찼어요. 나중에 인민위원회 사람들도 「가짜 金日成 장군 아니냐」며 수군거렸어요. 잘못될까 봐
남들 앞에서 대놓고 얘기하지는 못했고…”
결국 그는 “‘가짜’가 金日成 장군 행세를 하는 마당에, 내가 진짜 金日成 장군을 안다는 사실을
‘가짜’가 알게 되면 어쩌나 싶어 겁이 나기도 하고, 서울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 越南”했다 한다. 헌데 그의
상관으로서 “진짜 김일성”을 더 잘 알아야 할 박달은 오히려 광복과 더불어 감옥에서 나온 뒤 38선을 넘어 평양에 가서 그 “가짜
김일성”을 만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았다. 일제의 혹형에 척추와 다리가 부러지고 척수결핵에 걸려 침대를 떠나지 못하면서도
<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 등 수기를 써서 후대들에게 항일투쟁사를 알리려고 애쓴 박달이 그래 눈이 멀어 가짜와
진짜를 가려보지도 못했는가?
물론 이런 정도의 의문에는 이씨가 엉뚱한 주장을 내놓기 훨씬 전에 답이 생겨났다.
“박달이 김일성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북
한 김일성이 가짜”이기를 바라는 어느 “탈북자”의 주장이다. 누가 어떻게 말했다고 찍지 못하고 “모두 어쨌다 하더라”는 식의
논리가 바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험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역사연구에서는 금물이다. 실제로 1940년대 후반에 평양의 특별병원에서
박달과 함께 치료를 받으면서 한담하곤 했던 작가 김학철(1916~2001)은 후에 “김일성” 세 글자만 들어도 이를 갈게
되었지만, 박달의 말들을 기록하면서도 박달이 자기를 문병하러 찾아온 “북한 김일성”을 알아보지 못했다고는 쓰지 않았다.
<김학철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1995년 8월에 펴낸 책으로서 헌 책방에 가면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일성 매도”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의 주장이 각기 심한 모순을 보이는 것 또한 꽤나 우스운 일이다.
다시 이씨의 주장으로 돌아와 그가 그린 보천보 전투를 보면 소설 삼아 감상할 재미는 있다. ()는 원래 있는 것이고, {}안은 인용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필자가 월간조선 기자의 질문을 압축해 넣은 내용이다
“昭
和(소화,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연호) 12년(1937년) 7월10일경, 만주 본부에서 武裝兵(무장병)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 여덟
명이 와서 사흘 동안 보천보 마을 지리를 확인하고, 공격시 병영 배치 등을 계획했어요. 나는 그들이 왔을 때 안내하는 일을
했어요. 7월13일 새벽 1시경 독립군들이 쳐들어왔어요.
{이씨가 한 일은?} 복면을 쓰고 독립군들을 데리고 마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여기가 초등학교다’, ‘여기가 주재소다’ 하고 가르쳐 주기도 하고…
{연설은?}그런 거 없었어. 내가 金日成 장군, 朴達씨 하고 같이 사령부에 있었기 때문에 알아.”
박달도 와 있었다는 그 사령부가 보천보의 어디에 있었는지 조금 궁금해진다. 허나 더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이씨 주장의 다른 허점들은 분석할 생각이 없다. 마지막으로 역사사실과 이씨의 기억이 시간상 한 달 이상 차이나는 허점에 대해 “보완”해줄까 한다. 1937년 7월 13일이 음력으로는 6월 6일이다. 이씨가 양력 6월 4일에 일어난 사건을 음력 6월 4일에 일어났다고 기억했다면 시간 차이가 이틀로 줄어든다. 그렇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마음은 꼬물만치도 없다. 이씨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환각이 생겼거나 노망이 들었다는 해석을 내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인데.
“가짜김일성”설의 규모가 퍽 줄기는 했으나
“가짜김일성”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증명하고 싶어 몸살이 나 하는 것이 “진짜 김일성”의
존재이다. 이 진짜 김일성이 이선호씨의 입에서는 공산당유격대가 아닌 독립군으로서 사실 민족주의자계열이었노라고 주장함을 알 수
있다. 이씨의 주장이 “가짜 김일성”설 중에서는 잘 엮지 못한 셈인데 그나마 나름대로의 근거를 댄 것만은 점수를 좀 쳐주어야겠다.
언젠가는 아무런 근거도 내놓지 못하면서 그저 “북한 김일성은 가짜”라고 우긴 시절도 있었으니까.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 주석의 모습(오른쪽) [자료사진]
<상해 임시정부와 백범 김구>(범우사 1987년 8월 개정판 1쇄)는 적잖은 역사관련 저서를 내놓은
손충무(孫忠武1940~)씨의 역작으로서 필자가 본 한국의 역사연구저서로서는 괜찮은 편이다. 대체로 주장에 자료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단 “김일성”을 언급하기 시작하자 학자답던 서술이 180도 변해 “김일성은 음흉한 미소를 띄우며 능글맞게
말했다”는 식이다. 그리고 1948년 남북연석회의 도중에 김일성, 김두봉, 김구, 김규식이 모여 앉은 4김회담에서 김구가
“공산당은 소련으로 가라”면서 김일성을 꾸짖었고 김일성이 대꾸도 하지 못했다고 묘사했다.
“내가 알고 있는 김일성이는 그런 졸장부가 아니야. 김일성은 왜놈들의 칼이 들어와도 하고 싶은
것은 하는 사람이야. 이제 보니 자네는 김일성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구만. 차라리 민족을 위해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거야. 겁쟁이 김일성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아.”
김일성의 허구성을 정면에서 반박했다. 노애국자의 신랄한 추궁에 가짜
김일성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김두봉은 그 후 가짜 김일성을 타도하기 위해 반란
계획을 세웠다가 김일성에게 숙청되었다. 김일성은 김구가 자신이 가짜 김일성임을 드러내여 밝힘으로써 이 사실을 김두봉이 알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256페이지)
이 책은 1976년 8월에 초판이 나왔다는데 손충무씨가 정말 자기가 믿는 대로 썼는지 아니면
당시의 정치분위기를 인식해 적당히 알맞은 기술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줄곧 중국 내지에서 활동한 김구가 머나먼 중국
동북지대(만주)와 조선 북부에서 활약한 진짜 김일성을 만날 기회조차 없었는데, 어떻게 진짜 가짜를 가렸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학술적으로 통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위대한 민족주의자 김구”가 순전히 냄새로 “가짜 김일성”을 알아내고 질책한 듯이 그려진
것이다. 이제는 반도 남반부에서도 내놓고 말할 수 있듯이 김구의 평양행차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으나 이건 여기서 다룰 소재가
아니니까 지나가기로 한다. 아무튼 손충무의 저서를 비롯한 한국의 많은 책들을 보면 이른바 “진짜 김일성”은 공산주의와 거리가 먼
“위대한 민족주의자”이다.
우스운 일이지만 이남사람들이 오랫동안 믿던 “진짜 김일성 장군”은 백마를 타고 만주벌판을 내달리며
왜적들을 삼대 베듯 족친 민족주의자인 모양인데, 이 사람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데리고 누구와 어떻게 싸워 어떤 전과를 거두었는지
그 누구도 똑바로 대지 못한다. 부하가 없고 적수가 없고 전투경력이 없고 전과도 없이 완전히 홀몸으로 비상한 도술을 부렸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홍길동이라도 활빈당이라는 무리를 거느렸는데 이 김일성장군은 슈퍼 홍길동이었나?
“가짜 김일성”설의 변화사는 한홍구 교수가 논문들에서 소상히 적었으니 여기서 중복할 필요는 없다. 개인적인 인상을 말해보면 “가짜 김일성”설의 규모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위의 민족주의자 대영웅이 차차 설득력을 잃으니 당시 항일한 사람들 중에서 “진짜김일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눈부셨다.
평
생 정력을 기울여 가장 체계적으로 “가짜 김일성”설을 정리한 이명영(李命英) 전 성균관대 교수는 죽을 때까지 주장을 바꾸지
않았으니 그런 고집을 찬양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른바 “동명이인”설을 집대성한 그의 주장을 보면 북한의 金日成(본명
金聖柱) 이전에 1907~1922년 함남 단천 일대에서 활동했던 의병장 金一成(본명 金昌希), 일본 陸士 출신의 金光瑞(일명
金擎天),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師長을 지낸 金日成(본명 金成柱), 동북항일연군
제2방면군장을 지낸 金日成(본명 金一星) 등 네 명의 진짜 金日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항일역사를 좀이라도 파고든 사람이라면 잘 알다시피 6사를 주축으로 하여 제2방면군이
생겨났고 6사 사장이자 바로 제2방면군 지휘자이다. 뒷날 제2방면군은 항일연군의 실력을 보존해야 한다는 전략적결정에 의해 소련으로
들어가 훈련하면서 소부대정찰활동을 많이 벌렸고 광복 후 조선으로 돌아와 정권과 군대의 주축을 이루었다. 6사 사장=제2방면군
지휘=조선 수상~주석 김일성임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다. 1932년부터 유격대 지휘자 김일성과 잘 알았던 항일연군의 최고급
장령이며 소련에 있던 88여단에서 최고지휘자였던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을 비롯한 중국의 많은 전우들이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 명의 진짜 김일성” 중에서 세 명은 결국 한 사람이다.
진짜 김일성이 전사하니 그 부하로서 본명이 김성주인 사람이 김일성으로 행세했다는 사이비 전문가와
학자들의 주장은 정말 소 웃다 꾸러미 터질 노릇이다. 김일성이 하도 유명하고 전설적인 이름이기에 아랫사람이 그 이름을
도용했다는데, 항일무장투쟁역사에서 수많은 고급장령들이 전사했어도 그 이름을 이어서 쓴 사례는 하나도 없다.
위대한
민족주의자 김일성이 허구로 밝혀지자 공산당 계열 부대에 유능한 장군 김일성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으니, 우익학자들의 기준으로는
“진짜 김일성”의 위상을 벌써 많이 낮추었다. 허나 그 유능한 김일성이 전사하니 무능한 김성주가 그 이름을 가로챘다는 식으로 두
김일성을 대조해 “북한 김일성”을 깎으려 했다. 그러다가 그런 주장도 설득력을 잃게 되니, 이제는 “북한 김일성”이 항일하기는
했지만 중국공산당 휘하에서 중급 지휘관이었다고 내리깎지 못해 안달이 나한다. 한때 보천보 전투가 허구라고 떠들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제 와서는 보천보전투의 의의를 줄이더니 나중에는 보천보를 친 김일성 장군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식의 주장까지
만들어낸다.
숱한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거리에 낭비하는 정력이 아깝기만 하다. 허황한 주장임이 연달아 밝혀지는데도 새로운 총알을 대주는 사람들이 나타나니 이 역시 희한한 상황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2005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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