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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양세봉"항일명장, 조선혁명군 총사령관[1896.6.5~1934.8.12]

감효전(甘曉典) 2012. 6. 12. 21:05

- 1932년 초 홍경현 대회전을 앞두고

장군이 연설한 대목의 일부분 - -

친애하는 동지들,

이번 전투는 동포 동지들의 생사를 담판하는 결전입니다.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조국광복군과 동만 백만동포들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일당백의 용감한 정신과 아울러 이번 전투에 승리의 믿음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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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출신으로 어릴적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처단에 크게 감동되다

 

1896년 6월 5일 평안북도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은 서봉, 윤봉이며, 호는 벽해이다. 선생은 어려서 가정이 매우 어려워 처산군 어느 서당에서 소사로 일하면서

 천자문, 동몽선집, 명심보감 등응 어깨넘어로 배웠다.

일제의 침략행위가 이 지역에도 미치어 선량한 주민들을 약탈하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어린 가슴에도 항일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일제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처단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 의사의 기개에 경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 1910년 형장으로 끌려가는 안중근의사(32세). 뤼순(여순)감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이다.

16세기가 되던 1912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선생은 일찍부터 집안 살림을 맡게 되었으며 1916년에 임재순과 결혼하여 가계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국내에서 생활하기가 곤란하여 1917년 엄동설한에 가족과 같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관전, 환인을 거쳐 영릉에 도착하여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가족의 생계를 연명해 갔다.

 

 1919년 봄 신빈현 홍묘자로 이사하여 살던 중 국내에서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흥동학교 교장 이세일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홍묘자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천마산대에 가입, 무장활동에 참가하다

 

1922년 독립단 대장인 김명봉, 정창하 등과 연계하여 항일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또한 독립단 소속 지방공작원이 되어 식량을 공급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동년 겨울에 의주, 삭주, 귀성군의 경계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천마산대에 가입하여 창성군 대유동경찰서, 금광사무소와 영림창을 기습, 군수물자와 금괴 등을 노획하여 군자금으로 충당하였다.

 

 천마산대는 1920년 12월 최시흥, 최지풍, 박응백 등이 중심이 되어 청장년 500여 명으로 조직한 무장독립군으로서 재래식 무기인 화승총 및 적에게 빼앗은 무기로 무장하고

도내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의 주재소,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일제의 밀정과 경찰들을 처단하는 등 맹활약을 하였다.

 

 

 1923년 초 천마산대에 대한 일제의 소위 '토벌계획'으로 독립군의 근거지는 물론 그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되자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하여 최시형은 천마산대를 이끌고 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하였다.

 

그후 천마산대는 그곳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광복군총영과 합류하여 광복군철마별영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때 선생은 동영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어 불량한 병사들을 선도하는 등 군기확립에 진력하는 한편 훈련을 강화하여 의용군을 정규군 수준으로 끌어올리어 총영장인 오동진 장군으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9월 중국 관전현 안자구에서 발족한 무장 단체로써 임시정부의 직할군대였으며 북한일대를 관할하였다. 대한통의부의 의용군에 가입하여 일제기관 및 주구배 처단에 앞장서다

 

 

▲ 1924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외무성 아세아국장 등에게 보내는 고경(高警) 제1297호이다. 대한통의부의 조직에 관한 건 등과 대한통의부 조직 및 임원표 등이다.

 

1922년 8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을 비롯하여 대한광복군 군영, 대한광복군 총영, 평안북도 독판부 등

 8단 9회의 대표들이 중국 환인현 마권자에서 남만 한족 통일회의를 개최하여 남만의 각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대한통의부를 결성하였다.

 

 

 통의부는 총장(김동삼), 부총장(채상덕)아래 민사, 교섭, 군사, 법무, 재무, 학무, 실업, 권업, 교통, 참모의 10부를 두었으며 부밑에 국을 두고 비서과와 사판소를 설치하여 남만지역에서의 민, 군정을 통합한 독립정부형태를 갖추었다.

이때 선생은 대한통의부의 의군 산하 제3중대(중대장 : 최지풍)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5월경에는 평북 창성군, 초산군 판면, 의주군 고령 영산 일대의 일본 경찰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수십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3년 8월 독립운동 방략의 대립으로 대한통의부가 의군부로 분할되자 통의부의 의용군 소속 제 1, 2, 3, 5 중대를 주축으로 하여 환인현 마권자에서 참의부를 조직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군무부에서는 참의부를 군사단체로 인정하여 압록강 연변과 중국의 집안현을 중심으로 무송, 장백, 안도, 통화, 유화 등의 동포 사회의 민정과 군정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참의부는 국내진입 작전을 통해 활발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참의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국경 순시차 온 조선총독 재등실에 대한 저격을 지휘하다

 

▲ 재등실 참의부 소속 제3중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선생은 1924년 5월 16일 평북 초산군 성남동, 강계군 고산하에서 일경과 교전하여 수명의 적을 사살하였으며

특히 일제 침략의 원흉인 조선총독 재등실이가 국경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동월 19일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소대장 한웅권)와 합세하여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못한 만주쪽 강변인 마시탄 절벽에 정예병을 배치하고 재등실이가 국경 순시차 압록강 경비선을 타고 지나갈 때

사격을 가하였으나 의외로 사거리가 너무 멀고 또 재등실이 탄 배가 전속력으로 도망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재등실 자신이 3.1운동후 소위 문화정치라는 미명으로 한국통치에 대하여 거짓 자랑만 하고 있었으니 그에게 폭탄적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대내외에 한국 독립군의 활동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삼시와 만주의 봉천성 경찰청장 간에 소위 삼시협정이라는 재만한인취체법을 체결하게 되었고

 중국 당국은 독립운동을 탄압할 의무를 갖게 되어 독립군 활동에 적지않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평북 강계, 위원 등지에서 국내진공작전을 활발히 전개하다. 1924년 6월에는 참의부 소대원을 이끌고 평북 강계, 위원에 진입하여 일제 경찰대와 교전하였으며 동년 말에는 참의부 제3주대장으로 승진하여 남만주 화전현일대에서 항일 무장활동, 부일배 숙청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동년 7월 통의부 사령장 겸 군사위원장 신팔균 장군이 왕청문 이도구 밀림리에서 무관학교 관병들을 훈련시키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떼들이 급습하여 위기에 몰리자 선생은 대원들과 함께 신속히 구출작전을 펼쳐 엄호 사격을 가하였으나

신팔균 장군 등 수십명의 독립군들이 전사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의 간계에 의해 중국 마적단의 습격으로 신팔균 장군이 전사하는 등 큰 타격을 입게 되자 통의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 중국 길림성에서 조직된 정의부 대장 양세봉의 명에 따라 제5중대 소대장인 조화선 등 10여 명이 관전초구(寬甸草溝)에 잠복하여 양편의 경비 상태를 정탐한 정보 사항이다.

 

정의부 제1중대 소대장 김경호와 관련된 활동, 참의부 제1중대장 장기초의 활동 등을 보고한 내용이다.

 

 1924년 7월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를 개최하여 대동단결에 합의를 보고 동년 11월 25일 통의부를 비롯하여 대한 군정서, 길림주민회, 의성단 등 10여개 단체의 대표인 김동삼, 고할신, 이진산, 이천민, 김호, 이장녕 등 25명이 회집하여 김동삼 선생을 의장으로 선출한 후 협의를 거듭한 끈에 정의부를 결성하였다.

 

정의부는 지역군사 재정, 행정, 교육, 사법 등 모든 부문을 국가체제에 준하여 조직하였다.

 

그러나 정의부가 성립된지 1년이 못되는 1925년 9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선임된 이상룡은 재만 독립운동 지도자인 오동진, 김동삼, 윤세용, 이유필, 김좌진, 현천묵 등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대표자를

 고루 임정각료로 입각시키게 됨에 따라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독립운동상의 실리론이 대두되어 정의부의 내분이 표출되었다.

 

이에 1926년 1월 중앙회의 상임위원장 이해룡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비상의회격인 군민대표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헌장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중앙의회와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정의부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일제군경 등을 제거하는데 앞장서 맹활약하다

 

▲ 왕청문 화흥학교는 중국 요녕성 신빈현 왕청문에 있는 학교로, 남만주의 민족운동 영도단체인 정의부에서 세운 것으로 조선혁명군이 관할하였다.

 

화흥학교가 있었던 자리는 지금은 왕청문 조중중심소학교(朝中中心小學校)로 바뀌었다. 이로써 정의부는 남만지방에 있어서 공화정체를 뚜렷이 한 한족행정부로써 기반을 굳혔다.

 동년 11월 선생은 정의부 1중대장에 임명되어 일제 군인, 경찰 등을 제거하는데 앞장서 활약하였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은 국공합작에 의하여 통일전선이 형성되고 국내에서 좌우익의 통합체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등 연합전선을 추진하는 통합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지역에서도 정의부를 주축으로 하여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중국 화전과 반석 등지에서 18개 단체의 대표 39명이 참석하여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를 개최하였다. 정의부 대포로 민족유일당 조직회의에 참석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에 앞장서다

 

 이때 화전현에서 정의부의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선생은 정의부 대표로 유일당 조직회의에 참석하여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새로 결성하였으나 청년동맹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민족유일당 촉성조직동맹(당시 공산주의자와 연계되어 있었음)의 비협조로 유일당 조직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후 1928년 9월 길림 근방 신안둔에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대표가 모여 3부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듬해인 1929년 4월 정의부를 주축으로 신민부 민정위원회측(대표 이교원)과 참의부측(심용준)이 모여 새로운 군정부인 국민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선생은 제1중대장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며, 국민부 산하 선민부토벌 지휘부를 조직하여 동 지휘부의 부사령이 되어 총사령 이웅과 함께 일제의 주구기관인 「선민부」를 토벌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여 일제 기관을 습격하고 일제 밀정 등을 처단하는데 앞장섰다. 국민부 산하 무장단체인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부사령에 취임하다

 

▲ 조선혁명군기와 조선혁명군 대원 명단 동년 12월 국민부 중앙회의에서 민족 유일당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개편하고

 

, 동시에 그에 소속되어 있던 혁명군을 독립시켜 국민부 예하조직으로서 무장단체인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종전의 정의부에 소속 되어 있던 부대를 개편하고 참의부와 신민부에 있던 일부 병력을 흡수하여 통합시켰다. 선생은 부사령이라는 중책을 맡아 적기관 습격 및 일제의 밀정처단 등 무장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0년 8월 조선혁명당 대표자 회의가 개최 되었을 때 조선혁명당은 국민부를 지지하는 민족주의와 이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고 있었다. 선생을 비롯하여 현익철, 고이허, 김문학, 양하산 등 민족주의 인사들은 국민부를 적극 지지하고 당의 위원회에서 결정한 사항의 실행을 주장한 반면,

 

고할신, 김석하, 이 웅, 현정경, 이성근 등은 이에 반대하여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을 해체하고 군대를 적위군에 편성하고 농민은 농민협회를 조직하여 유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주사변후 한중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대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국과 중국의 연대투쟁의 필요성이 절실하여 선생은 동년 11월 신빈현 왕청문에서 중국인 왕동헌의 요녕농민자위단과 협의하여 연합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 왕청문 유적지 왕청문(旺淸門)은 중국 요녕성 신빈현에 있는 지역으로, 조선혁명군 사령부의 소재지가 있는 곳이었다.

 

 

또한 이곳은 독립투쟁가인 양세봉이 중국인 왕동헌과 연합해서 요녕농민자위단을 조직하여 일제와 싸운 곳이기도 하다. 1932년 1월 조선혁명당.군의 주요 간부들은 중국 신빈현 하북에 있는 서세명의 집에서 중앙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9.18사변이후 당면한 현안 문제를 논의하던 중

 

 

친일주구단체인 보민회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통화 일본영사 분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 부사령 장세용, 부관장 박치화, 경위대 대장 이규성,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원장 이종건 등 10여 명이 피체 되었고, 이후 3월 초까지 계속된 일경의 검거로 9개 현에서 간부 83명이 피체되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조선혁명군 총사령이 되어 부대를 재정비하고 군사양성에 힘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선생을 비로하여 양기하, 고이허 등 조선 혁명당의 중견 간부들은 조혁군각지부대 수뇌회의를 소집하고 위기에 처한 조선혁명군과 조선혁명당의 자구책을 토의한 후 조직을 재정비 하였다.

 

 

선생은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선임되고 조선혁명당 주석에 고이허, 국민부집행위원장에 김동산, 혁명군 참모장에 김학규, 재정부장에 이상관, 외교부 및 임시정부 특파원에 홍심원을 각각 임명하였다.

 

 

 ▲ 조선혁명군 군관학교(속성무관학교) 유적지 속성무관학교는 양세봉이 일제와의 결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통화현 강전자에 세운 것으로 주로 독립군 간부 양성 및 병사들의 훈련 장소로 쓰였다. 전성기 때는 재학생이 700여명이 될 정도였으나 1933년 가을 일본군 군용기가 폭격하여 소실되었다.

 

 총사령에 임명된 선생은 일제와의 결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군의 조직을 5개사로 개편하여 제1사령에 박대호, 제2사령에 한검추, 제3사령에 조화선, 제4사령에 최윤구, 제5사령에 정광배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총사령 본부를 홍경현 왕청문에 이동하여 설치하고 정의부에서 세운 화흥중학을 속성사관학교로 개편하여 조선혁명군 관할하에 귀속시키는 동시에 강전자로 옮겼다.

 

속성사관학교의 교장에 양하산, 총대장에 윤일파, 교관에 한국신 등을 임명하고 선생은 명예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항일역량을 높히는데 진력하였다.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200여 차례에 걸쳐 항일전을 치르다

 

▲ 조선혁명군이 항일투쟁을 위해 동북인민혁명군에 한중공동작전을 제안하는 서한이다.

 

 동시에 밖으로는 중국 의용군 총사령인 이춘윤과 협의하여 요녕 민중자위군을 조직하는 협정을 체결한 후 조선혁명군은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편성하여 선생이 요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 김광옥은 선전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혁명군이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게 된 것은 중국군에 비해 부대규모가 작지만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중연합군의 편성은 각처에서 발호하고 있는 중국인 무장단체인 대도회와 홍창회 등의 무질서한 행동을 자제시키고 동시에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도 호전되었다.

 

 또한 중국 군벌인 당취오, 왕육문, 손수암, 장종주, 왕봉각, 서대산 등도 이에 호응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협정을 맺은 후 동년 10월까지 요녕민중자위군과 조선혁명군의 연합군은 일군과 거의 2백여 차례의 대소 전투를 치루었다.

 

 

 1932년 3월 선생은 참모 김학규, 중대장 조화선, 최운구, 정봉길 등의 3개 중대를 인솔하고 중국 의용군 왕동헌.양석봉 등의 부대와 합세하여 신빈현의 왕청문에서 무순 천금채로 진군하는 도중 신빈 남쪽에 숙영하게 되었다.

 

 이 정보에 접한 신빈현 주둔 적 관동군은 박격포, 기관총 등 중화기로 무장하여 연합군을 총 공격하였다.

 

 

 그러나 지리에 익숙한 조선혁명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교전 1시간 만에 일군이 고지를 빼앗기고 퇴각하자 30여리를 추격하여 이날 신빈 동쪽에 있는 영릉가성에 이어 상협하까지 점령하였다. 한․중연합작전으로 영릉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다

 

 

▲ 조선혁명군의 전투지인 신빈현 영릉가 앞산인 연두산(延頭山). 조선혁명군 대원들은 낮에는 이 산에 숨어 있다가 야간에는 산에서 나와 군사작전을 수행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는 한편, 한.중 양 민족간의 갈등을 융화시키고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2년 3월 하순 영릉가 전투에서 참패 당한 일군이 폭격기까지 동원하여 전격적으로 흥경성을 점령하자 장군은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중국 의용군 이춘윤 부대 1만여명과 연합하여 조선혁명군은 동문으로 돌입하고 중국 의용군은 북문으로 총 공격하자 기진 맥진한 적군은 서남문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마침내 흥경성에서도 태극기와 청천백일기가 펄럭이면서 전승축제가 무르익어 사기가 충천하였다.

 

 

동년 5월 초 요녕민중항일자위군의 이춘윤, 왕동헌 분대와 함께 일.만군을 타격하기 위하여 신빈현 영릉가로 진격,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병력 등의 부족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10월까지 조선혁명군은 여러차례의 대소전투를 치루었으나 공군력이 없기 때문에 열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당시 요녕민중자위군 중국측의 사령관이던 왕동헌의 기고문을 통하여 조선혁명군의 피눈물나던 혈전을 되새겨 본다.

 

 

▲ 중국에서도 추앙받는 양세봉 장군의 흉상(신빈현). 민국(民國) 21년 2월 8일 한.중 민중으로서 총이 있는 사람이면 총, 총이 없는 사람은 호미, 낫, 괭이 심지어는 단도까지 들고 나와서 동지들을 모았다.

 

 

 이와같은 호소에 호응하여 적을 격멸하기를 지원해 나온자가 한국사람이 8백 명, 그리고 중국측에서는 전 자위단(前 自衛團) 용사 5백 명을 빼고도 2천 5백명이나 되었다.

 곧 맹세해서 의거를 일으켰다.(중략) 슬프다! 산하(山河)는 그대로 있건만,

 

 

인사(人事)는 기대에 어긋났다. 양세봉, 양하산 두 장군은 전후(前後)해서 전망(戰亡)하고 김학규 대표는 관내(關內 : 산해관 안의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하략) (본 기고는 중경에서 발간했던 월간 한민(月刊韓民)에 수록된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한 것임)

 

 

 1933년 1월에는 중국 당취오 부대가 와해, 붕괴됨에 따라 왕청문 남의 목수둔에서 조선혁명군 수뇌부 소집회의를 개최하여 선생을 총사령에 재임용하고 부사령에 박대호를 임명하는 동시에 부대를 3개 방면군으로 개편하고 조선혁명당 총령에 고이허, 국민부 부위원장은 김동산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병력 충원과 재정조달방법을 모색하고 군규를 제정하여 민족단결을 꾀하고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동년 4월 조선혁명군의 활동무대를 집안현, 임강현일대의 한.중 국경지대로 옮겨 유격전과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였으며, 5월에는 서원준을 국내유격대장의 직책으로 황해도에 밀파하여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하였다.

 

 

1934년 3월 홍경현 쌍립자에서 조선혁명군은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1) 조선혁명군의 항일연합 범위확대 (2) 항일근거지 건립 (3) 일본침략자 타격 등에 대한 방침을 정하여 다른 무장투쟁세력과 연계하여 추진하기로 하였다.

 

 

 홍경성, 노구대, 쾌대무자 전투에 참전하여 연전연승을 거두다 동년 6월 참모장 김학규를 북경에 밀파하여 중국 관내로 철수한 당취오와 연락하고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홍경현 진주령에서 일본군 기차를 습격하여 수십명의 적을 처단하는 등 동년 6월까지 계속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 조선혁명군이 일본군을 섬멸한 통화현 쾌대무자.

 

 

동년 7월 7일 일군이 영릉가 석인구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습격하였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은 과감한 반격을 하여 일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3정과 중포 1문, 소총 80여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 중순에 양세봉 부대는 이춘윤 의용군 부대의 잔류병 5백명과 합세하여 무순현 노구대를 점령하고 1개 연대규모의 일군과 교전, 만 2일간의 격전을 치루었다.

 

 

 그 뒤 일군은 다시 1개 대대의 병력으로 통화현 쾌대무자에 주둔하고 있는 제1방면군 최윤용 부대를 습격하였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을 받아 일군은 격퇴되고 말았다. 이때 패퇴하는 일군을 다시 최주봉 부대가 추격하여 80여명을 사살하였다. 독립군 최후의 맹장이 일본 밀정에 의해 최후를 마치다

 

 

 ▲ 남북 국립묘지 묻힌 유일한 독립투사. 양세봉의 묘지는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과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무렵 일제의 밀정 박창해가 혁명군을 직, 간접으로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을 매수하여 환인현에 머물고 있던 장군을 찾아가 중국 항일군과 연합을 논의하자는 구실로 장군을 환인현 소황구의 골짜기로 유인하였다.

 

 

 1934년 8월 12일(음) 장군은 부관 김광욱, 김성해, 김추상과 같이 왕씨를 따라 나섰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던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수십명의 괴한이 뛰쳐나와 일행을 포위하는 순간 왕씨는 장군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나는 지난날의 왕씨가 아니다.

 

 이 탄환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일본군에게 항복하라"라고 고함을 쳤다. 장군은 두눈을 크게 부릅뜨고 위엄있게 꾸짖었으나 끝내 밀정 박창해와 중국인 왕씨 등 주구배들의 저격을 받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장군이 순국하자 동지들은 일제측에서 모르게 산 중턱에 평장을 하였는데,

 

통화 일본 영사관 경찰이 이를 탐지하고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목을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니 인륜도 도덕도 없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야만이요 그 잔악상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인가.

 

 

장군이 순국한 후에도 김호석이 총사령에 취임하였으나 조선혁명군은 급격히 세력이 위축되어 소규모 유격전으로 겨우 독립군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항일무장투쟁사에 있어서 일찍이 명성을 떨쳤던 김좌진, 홍범도 등과 함께 실력과 명망을 가진 벽해 양세봉 장군의 위국헌신과 멸사봉공의 투철한 정신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리라. .

 

 

[민족반역자처단협회]

작성&출처-민족반역자처단협회(http://cafe.daum.net/kokoin)
출처 : 貪 嗔 痴
글쓴이 : 멧돼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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