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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5월 광주의 배후 미국과 전두환의 굴욕

감효전(甘曉典) 2012. 5. 20. 11:05


오늘은 5.18광주민주화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기념일'입니다. 지금에야 역사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기에 기념일까지 제정되었지만, 5.18을 말한다는 것은 우리 현대사에 금기에 해당할 만큼 숨겨진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5월 광주에서 벌어진 만행과 학살을 기억합니다. 광주 시민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아픔을 자행했던 학살자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가 바로 전두환입니다.


'박정희의 충성스런 군 친위대'

전두환을 말하는 사진 중에서 그의 인생을 말해주는 한 장의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영관급 장교로 작전브리핑 시간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전두환의 포즈를 보면 그가 얼마나 무뢰배인 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군대는 계급 사회입니다. 영관급 장교가 장군들이 앞에 있는데 저런 포즈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무서운 계급 사회인 군대에서조차 서열을 무시했던 그의 막강한 파워는 바로 박정희였습니다.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하는 육사생도의 시가행진을 주도했던 전두환을 박정희는 총애했고,그를 최고회의 민원비서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으로 중용했습니다.

박정희가 전두환을 믿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또 하나는 전두환은 다른 정치군인처럼 국회의원 등에 진출하지 않고 군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는 군 친위대 조직으로 전두환은 믿음직한 인물이었고, 그런 이유로 하나회는 박정희의 지지 속에서 군부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 12.12 군사쿠테타 주역들과 5.17 비상계엄조치에 대한 신문기사


'1980년 5월 광주의 시작'

우리가 1980년 광주를 말하기 전에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이 두 가지입니다. 바로 '12.12 군사쿠데타'와 '5.17비상계엄전국확대'입니다. 12.12 군사쿠데타는 군인으로 국가가 아닌 독재자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했던 전두환이 박정희를 따라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사건입니다.

5.17비상계엄전국확대는 신군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모든 국정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든 근거였습니다.

1980년 5월 광주는 이런 신군부와 전두환의 권력 장악 음모를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고, 전두환은 특전사를 동원해 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기에 5.18광주의 아픔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군대의 이동과 작전은 미국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미국이 5.17 비상계엄전국확대와 광주 진압을 위한 군대의 이동을 승인했다면 미국 또한 광주 학살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 1989년 광주특위에 보낸 미국 답변서 내용을 보도한 한겨레 신문 기사

'1980년 광주의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미국'

미국은 1989년 국회 광주특위가 미국대사관을 통해 보낸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질의서에서 5.17비상계엄전국확대 조처에 대해 17일 밤 9시30분에 청와대로부터 18일 새벽 1시를 기해 실시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실 5.17비상계엄확대조처를 법으로 의결했던 국무회의는 17일 밤 9시 42분에 소집됐기에 미국은 대한민국 의결기관이 승인도 하기 전에 벌써 5.17비상계엄전국확대를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단순히 5.17비상계엄전국확대만 사전에 알고 있었을까요? 미국이 병력이동을 알고, 승인했다는 정황은 미국의 외교전문 곳곳에서 나옵니다.

○ 군대 투입 사전 인지

5월8일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는 전두환과 최규하를 만나기 전에 워싱턴에 외교 전문을 보냅니다.

(주한 미국대사관)
“한국 정부가 군대를 투입하는 것에 대해 미국 정부가 반대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다.”

(워싱턴에서 보낸 답장)
“미국 정부는 법과 질서유지를 위한 한국 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데 동의한다.”

“주한 미군사령부는 포항의 해병 1사단이 대전과 부산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있으며 해병 1사단은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 있으므로 병력이동에는 미국 당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아직 한국 군부로부터 병력 이동에 대한 아무런 요청이 없지만 만일 요청이 오면 미군사령부는 동의할 것이다.” (5월7일 미국의 외교전문)


미국은 전두환의 비상계획을 10일 전에 알고 있었고, 군대 투입에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공수부대뿐만 아니라 해병대까지 동원할 경우 승인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곳이 미국이었습니다.

특전사 대신에 20사단을 투입에 동의했다는 미국을 보면 마치 평화로운 중재자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사단은 하나회 소속 박준병이 사단장으로 있던 부대로 확실하게 전두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던 군대였습니다. 즉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직속부대를 보낸 것입니다.

○ 미국이 광주에 개입했던 증거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광주의 무자비한 진압이 이루어진 5월27일 작전이 원래 25일이었고, 이는 미국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 5월25일 한국에 입항했던 미국 항공모함 코럴시호

미국은 광주에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 야쿠스카 기지에 있던 미드웨이호와 필리핀에 있던 코럴시호 항공모함을 한국에 보냅니다. 그런데 일본에 있던 미드웨이호는 금방 올 수 있었지만, 23일 필리핀을 떠난 코럴시호는 25일까지 한국에 들어 오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미국이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진압날짜를 늦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항공모함을 한국에 들어오는 날짜를 맞추기 위해 진압날짜를 연기했던 것입니다.

또한 1980년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들은 시민의 보호를 위해 출동하기 위해 대기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주항쟁이 시작되자 내가 근무한 부대는 일상업무를 중단한 채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갔으며 폭동진압훈련을 받았다.그 대상은 일반 시민이었으며 광주상황이 악화되면 추가로 미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1980년 경기도 포천군 험프리 공군기지에서 근무했던 앨렌 바필드)

이런 상황을 몰랐던 광주의 시민들은 미국이 설마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를 옹호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광주 시민들은 미국을 통한 중재 노력을 시도했습니다.

“학생지도자들이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휴전을 요청했다.” (5월25일 뉴욕타임즈 보도)

그러나 미국은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광주 시민들의 휴전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글라이스틴은 앞서 말했듯이 신군부와 벌써 광주를 진압하기 위해 작전을 승인하고 군대 이동에 관여했기에, 휴전할 마음도 시민을 보호할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 1981년 전두환 미국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방송과 언론

'레이건을 만나기 위한 전두환의 굴욕'

1981년 대한민국의 모든 방송은 전두환의 방미를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레이건과의 만남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이 명실상부한 미국의 파트너가 됐다는 그들의 방송은 거짓과 기만이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아프카니스탄에 소련군이 들어오고,1979년 이란혁명으로 미대사관이 점령되는 등 미국의 세계전략을 위협하는 사건이 터지자 한반도에서마저 자신들의 전략적 요충지가 무너지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1980년 5월 광주에 개입했고, 전두환을 도와줬을 뿐입니다.

즉 자신들의 전략에 따라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인정했던 것이지, 그를 미국과 대등한 외교 파트너로 생각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런 미국의 자세에 전두환은 애가 탔고, 방미를 통해 확실하게 미국의 지원과 한국 내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전두환의 갖은 구애에 결국 레이건은 공식 대통령 서한도 아닌 대통령 메시지 양식의 달랑 다섯 줄 짜리 편지 한 통을 보내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허락합니다.

외교관례상 한 나라의 대통령이 초청 서한을 받고 열흘 만에 방문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의전,경호,회동 내용을 조율하기 위해 적게는 수개월부터 많게는 1년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정상회담이기 때문입니다.

▲ 한국방송은 5분짜리 정상회담을 '두 정상 의기투합' 등으로 미화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전두환의 방미는 결국 레이건과 총 회동시간 10분 미만, 실제 인사를 뺀 만남은 달랑 5분만에 끝났습니다.

더 굴욕적인 외교의 증거로 나온 것이 통상 정상회담과 함께 이루어지는 미국 주최 만찬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사교모임 형식의 점심을 한 번 제공한 적이 있지만, 2박3일간의 일정 중에서 저녁 만찬은 모두 주미한국 대사, 즉 한국이 자기 돈을 내고 먹었다는 것입니다.

전두환의 방미가 그냥 공짜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전두환은 미국이 주는 소액의 금융지원을 받는 대가로 미국에 소맥과 옥수수의 전매권을 주었고, 미국산 쌀 구매와 미국산 무기 구입을 대가로 얻어진 결과입니다.


미국을 우리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파트너이자 친구라고 생각하며, 반미는 빨갱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한 번도 자신들의 이권과 전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한국을 도와준 적이 없습니다.


미국을 배척할 필요는 없지만, 미국이 대한민국의 수호천사로 인식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사기꾼의 말에 속아 지갑을 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주권국가입니다.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민을 학살하는 독재자들이 나올 때마다 한국은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강대국의 손짓에 벌벌 떨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바치면서 살았습니다.

1980년 5월 광주는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그런 아픔을 막는 일은 대한민국의 지도자를 주권국가의 대통령으로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 누구의 편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덧붙임:이명박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4년내내 불참했고, 오늘은 아예 기념사까지 생략했습니다.)

출처 : 시민이 지키는 참언론
글쓴이 : 참지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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