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자료/그것이 알고 싶다

[스크랩] 박정희 의 실체

감효전(甘曉典) 2012. 5. 1. 12:29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 그리고 ‘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쓴 종이와 함께 동봉된 등기로 도착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모든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스러운줄 아오나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할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이 다하도록 충성을 다 바칠 각오입니다. (중략) 한 사람의 만주국 군인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고자 해도 자격 연령이 16살 이상 19살까지이기 때문에 23살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同君)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滿洲新聞』1939.3.31. 7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 해당 기사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라고......


이래도 박정희씨가 친일파가 아니라고 할것인가...ㅉ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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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군 화백]  ' 친일파는 살아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통제가 가능했을터...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만주의 친일파도 친일파고,

 

민족반역자들 역시 친일파...

 

친일반민족주의자들의 칼부림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친일반민족주의자들이나 그 후손들에 대해서 공소시효없는 법적용으로

 

반드시 그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

 

고위공직 등 관직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고 대한민국 땅에서 모두 추방 시켜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 정체성이 확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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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주모자로서 동지들을 밀고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남로당원 박정희는 훗날 대톡령이 되자 그때의 '악몽'같은 기억을 잊기 위함인지 무수한 딸나이의 여자를 강간합니다.(펌)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았습니다--


1) 만주군 출신답게 때로는 여자에게 기모노를 입힌 채로 강간 하는 게 취미.

2) 김세레나가 김추자와 머리끄댕이 잡고 싸우다 '네 이년 각하가 내 서방이야, 일러서 혼내 줄텨'하고 을렀다가 중정에 끌려 가 되게 맞았음.

3) 한 밤중에 정윤희 아파트에 찾아 갔다 엘레베이터에서 한동 아줌마와 딱 마주쳤음. 이 아줌마 온동네 말하고 다니다 중정 끌려가 되게 맞았음. (당시 정윤희는 해태껌 모델이었는데, 지만이는 롯데껌 모델 서승희(서미경)와 섹스하던 사이라, 시중에 "아빠는 해태껌, 아들은 롯데껌"이라는 유행어가 돌았음).

4) 삼청각에서 기생과 섹스하고, 말레지아 국왕한테서 선물 받은 금라이터를 두고 귀청와대. 그 기생은 각하와 잔 징표로 이 라이터를 자랑하고 다니다 중정 끌려가 되게 맞았음.

5) 새마을 어머니배구대회 우승팀과 악수하다 점찍은 유부녀 선수를 강간.

6) 국군통합병원에 엑스레이 찍으러 갔다 점찍은 간호장교를 강간.

7) 육영수 죽은 후 차지철은 박정희가 저녁에 TV 볼 때면 반드시 경호실 직원을 뒷쪽에 대기 시켰음. 맘에 드는 가수나 탈렌트를 보고 박정희가 "음"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 바로 이름을 메모, 그날밤으로 강간시킴.

8) 당시 인기 탈렌트 안은숙('별들의 고향' 나왔던 안인숙이 아님)을 강간한 후, 그녀의 유방이 풍만하다며, 출연중이던 드라마에 노브라로 나올 것을 강요.

9) 윤정희도 단골 피해자였는 데, 백건우와 결혼할 때 마지막으로 한번 더 '할' 것을 강요.

10) 같은 고령 박씨 성 가진 여자를 선호하는 묘한 변태취미가 있었다 함.

11) 김세레나와 섹스가 끝난 뒤 김세레나 엉덩이를 두드려 주며 "니는 대한민국 국보1호다카이'하며 그녀의 방중술을 극찬.

12) 한번은 저녁에 딸 근혜, 근영과 함께 '미드나잇 카우보이'란 영화를 보다, 야한 장면이 나오자 솟구치는 성욕을 참지 못하고 보던 도중에 일어나 안가로 가서 영계를 강간함. (근혜는 자기 자신이 친아빠 성욕을 돋구는 역을 했음을 알아야 할 것이로다.)

13) 한혜숙은 좀 특별한 케이스인데, 침실까지 유인이 되었으나 뒤늣게 의도를 간파한 한혜숙이 침대를 가운데 두고 돌며 빤스만 입고 덤비는 박정희를 피함. 결국박정희에게 명실상부(!) 한 강간을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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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및 박정희 저격사건 등의 정부기록 공개,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광화문' 현판교체, 10.26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사람들> 개봉 등으로 연초부터 '박정희 바람'이 불고 있다. 이번주에 발행된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 <시사저널>이 각각 '박정희'와 '10·26'을 커버스토리로 다룰 정도다.

'박정희 시대'가 사람들의 입에 다시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26년 전 그의 치세에 종지부를 찍은 한 남자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뚜렷이 간직한 사람이 있다.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69)가 그 주인공이다.

80년 신군부의 서슬에 눌려 김재규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사후에라도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아직도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강 변호사는 김재규를 '의인(義人)'으로 추켜세우는데 아직도 주저함이 없다.

<오마이뉴스>는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1월 31일 오후 서울 서초동 그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박지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씨가 영화 <그때 그사람들>을 상대로 낸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 임박한 터라 그것부터 얘기를 꺼냈다. 당시에는 법원 결정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어떤 게 논란이 되는지는 들었어. 아마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야. 영화가 꼭 사실만 정확하게 다룰 수는 없는 법이지. 허위사실로 한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면 모르지만, 실재했던 사건의 일부를 영화화한 건데…."

- 영화를 본 기자들 중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여자관계를 다룬 부분은 일부 지나치다는 평이 있다.
"그게 전부 사실인 걸 어떡해? 요새 젊은 사람들이야 그걸 잘 모르지. 우리가 자제해서 박의 여자문제를 재판에서 정면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박정희의 여자문제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법정에서 박정희의 여자문제 말하려 하면 김재규가 가로막았다"

강신옥 변호사는 누구?

강신옥 변호사는 74년 민청학련 사건의 변호인을 맡았다가 법정 구속될 정도로 유신시대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이다.

그는 58, 59년 고등고시 행정과와 사법과를 연달아 합격하고 62년 서울지법 판사에 임용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판사 생활을 오래하지 않고 63년 변호사를 개업했다. 경북 영주 태생에 경북고를 졸업한 TK 출신이었지만 박정희 세력에 협력하길 원하지 않아 일찌감치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는 후문.

유신시절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다가 86년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이사장으로 있던 한국문제연구소 소장을 맡아 정계에 입문, 88년 13대 국회의원(서울 마포을)에 당선됐다. 90년 YS가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했을 때 3당합당에 적극동조하기도 했지만 96년 신한국당(민자당의 후신)을 탈당하며 YS와의 정치적 인연을 끊었다.

2002년 정몽준 의원의 요청으로 국민통합21의 창당기획단장을 맡았지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강 변호사의 '김재규 변론' 전력을 문제삼아 정 의원과의 연대를 거부하자 스스로 당직을 사퇴했다.
- 영화에서 박 대통령의 사생활 부분을 다룬 것은 문제가 안된다는 얘기인가?
"실제로 있었던 일에 비하면 영화에서 다룬 건 1/10, 1/100도 안돼. 당시 소문이 거의 공공연한 사실이었어. 그런 행동을 한 것만으로도 박정희는 대통령으로서 당당한 사람이 아니었어. 일정한 선을 넘었던 거야. 혼자 살면서 예전의 로맨틱한 관계 때문에 여자를 만났거나 결혼을 목적으로 여자를 만난 게 아니라 박정희는 연예인들을 아주 밝혔어. 결국 권력을 업고 인간들을 성적으로 정복한 거야.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이건 말도 안되지."

- 김재규 등의 변호인단 접견기록에 박정희를 접대한 연예인들의 이름이 남아있나.
"그건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우리끼리 은밀하게 얘기로 나눴다. 하지만 좀 심하게 얘기해서 당시 현역 연예인들 거의 대다수가 걸려들었지. 안 한 사람이 거의 없는데, 묘하게도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여자연예인들이 자기만 박정희를 만난 것으로 알고 있더라."

- 박정희의 여자관계를 부각시키는 게 당시 변론전략 아니었나.
"처음에는 그렇게 작정했었는데, 주변에서 '뭐 그런 것까지 다루냐'고 말렸다.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법정에서 그 얘기를 하려고 하면 김재규가 가로막기도 했고, 대통령을 상대한 여자들이 연예계의 일류스타들을 망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게 다 밝혀지면 그들의 일생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었지."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작년 8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가 김재규의 민주화유공 심사에 착수했지만, 찬반 표결 얘기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내부 진통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 보도사진연감

"김재규에 대해 여러가지 평가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전두환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김재규가 아버지 같은 박정희를 집에 초대해놓고 총질을 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신군부 입장에서는 김재규를 병신으로 만들어놔야 자기들 집권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에 '김재규가 후처가 있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았다'는 등의 얘기를 쏟아냈지. 신군부가 집권한 12∼13년간 그런 얘기를 계속 늘어놨으니 젊은 세대는 진실을 모르는 거야.

민주화보상심의위원들 중 상당수도 김재규를 '권력 잡으려다 실패한 사람' 정도로 잘못 알고 있더라. 내가 김재규를 안중근에 비유했더니 '안 의사를 모욕하지 말라'는 심의위원도 있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쏠 때의 마음과 김재규가 박정희를 쏠 때의 마음은 똑같이 애국하는 마음이었을 텐데…."

- 김재규가 원래 박정희를 죽이려던 게 아니고, 차지철과 파워게임을 하는 와중에 우발적으로 박정희를 살해한 게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김재규가 강 변호사를 처음 만났을 때 거사 동기에 대해 뭐라고 했나.
"차지철과 말다툼 끝에 '욱'하고 일을 저질렀다는 게 바로 조갑제의 논리다. 그러나 김재규는 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10·26 국민혁명'이라는 표현을 썼다. '유신타파를 위해 소의를 버리고 대의를 택했다'는 말도 했다. 자신의 거사 동기를 너무도 명료하게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변호인들이 크게 감동했다. 그런데 신군부는 '민주화운동에 전혀 관심도 없던 김재규가 반체제 변호사들로부터 그런 논리를 배워서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고 다닌다'고 매도하더라."

- 김재규가 거사 직전에야 부하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박정희를 암살한 후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정황을 '우발적 범행'의 근거로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절대권력자를 죽였으니 원래의 거사는 성공한 것으로 봐야 한다. 아무 행동도 못하는 못난이들, 지식인들이 '김재규의 우발적 행동이 도리어 민주화에 걸림돌이 됐다'고 뒷말을 하고 다닌다. 김대중(DJ) 같은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혁명이 일어날 분위기였는데, 김재규가 찬물을 끼얹었다'는 말까지 했다. 말이야 좋지.

박정희가 그 때 죽지 않았다면 아마 10년은 더 해먹었을 거야. DJ가 정치를 재개할 수 있었던 것도 김재규 덕분인데, 그가 생명을 바쳐서 유신을 종식시킨 것에 대해 감사하고, 또 김재규 구명에도 나섰어야지. 대통령을 죽인 후에 YS와 DJ가 잘 했다면 5·18도 없었을텐데, 서로 자기가 대통령 하겠다고 싸우는 통에…."

▲ 지난 2001년 5월 24일 경기도 광주시 모 공원묘지 묘소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김씨 추모 모임인 재야단체 송죽회 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추모식.
ⓒ 연합뉴스 신영근
"김재규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10·26 국민혁명'이라는 표현을 썼다"

- 어떤 과정을 통해 김재규 사건의 변론을 맡게 됐나.
"내가 김재규라면 나도 박정희를 죽이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박선호 가족이 찾아와서 변론을 부탁했다. 또 김수환 추기경 측으로부터도 '김재규 변론을 도와주라'고 연락이 와서 흔쾌히 수락했다."

이후 강 변호사는 13·14대 국회의원(통일민주당·민주자유당 등)을 지내기도 했는데, '김재규 변호인' 전력이 2002년 대선 당시 정치적 운신의 폭을 제한하기도 했다.

- 2002년 정몽준 의원의 대선 운동을 도와주려다가 박근혜 의원이 강 변호사의 정몽준캠프 참여를 문제삼는 바람에 두 사람의 연대가 결렬된 적이 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치려는 것과 내가 정몽준 캠프에 있었던 게 무슨 관계가 있어? 박근혜가 정몽준과 함께 하지 않으려고 내 핑계를 댄 거지."

- 2002년과 지금의 박근혜 의원은 위상이 전혀 다르다고 봐야하지 않나.
"뭘 그래? 똑같지. 박근혜는 (대권의) 희망이 없다. 과거 문제도 있고…. 박정희 향수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도와줘서 그렇지, 박근혜 자신이 대단한 지도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선 때 이회창에게 갔다가 망했는데, 이회창이 몰락한 후 박정희 향수가 부는 바람에 박근혜도 뜬거지. 권력자의 아들딸이 집권한 사례가 외국에선 있을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어림없어. 박정희 향수는 엄청나지만, 딸에게까지 표를 줄 정도는 아니다."

- 지금 시점에서 왜 박정희 얘기가 다시 화제가 된다고 보나.
"일련의 움직임들이 박근혜를 한나라당 대표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때 얘기들이 흥미거리가 될 만하니 자꾸 얘기가 나오겠지. 군사독재 물러나고 YS·DJ·노무현이 연달아 집권했지만 '민주화시대가 박정희 시대만도 못하다'는 실망이 터져나오면서 박정희 향수가 번지는 것이다.

박정희에게는 공도 있고 과도 있다. 경제부흥을 이끈 박정희의 집념은 그의 인기가 좀 시들해져도 나중에도 높이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경제발전만으로 민주화와 인권을 유린한 박정희를 훌륭하다고만 할 수 없다. 경제부흥을 위해 김대중을 납치하고 인혁당 사람들을 처형해야 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논리다."

인터뷰를 마친 뒤 법원이 영화사에 박정희의 이름을 거론한 대목 등 3곳을 삭제하도록 요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강 변호사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름 석 자를 기술적으로 못 고치겠어? 고쳐서라도 상영해야 한다"면서도 "이름을 쓰지 말라는 게 참 웃기는 짓이다. 숲을 봐야지, 나무를 본 결정"이라고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천문학적 금액 ‘부정축재’ 유산]

문제는 위정자들의 장기집권과 부정부패를 숨기기 위해 자행된 범죄에 대한 배상을 지금 이 시대 우리가 낸 세금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범죄는 30~40년 전 위정자가 저지르고, 그 배상은 지금 우리가 낸 세금으로 한다면 이건 너무 억울하다. 범죄를 저지른 위정자나 그 유산을 물려받은 후손이 돈이 없다면 혹시 모른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른 위정자들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부정축재했고 이를 후손에게 물려줬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박근혜씨다. 그는 자산이 10조원이니 13조원이니 하는 MBC 주식의 30%를 가졌고 지방 유력신문인 부산일보의 실질적 사주이며, 무려 264만㎡(80만평)의 캠퍼스를 가진 대학교도 사실상 그의 소유다. 여기에 경향신문사 부지도, 현재 동생끼리 운영권을 놓고 싸우고 있는 서울시 능동의 육영재단도 모두 박씨의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다.

박씨가 물려받은 이 유산은 그의 부친이 18년간 대통령 월급을 착실히 모아 마련한 것이 분명 아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 이 유산은 대부분 명목상 헌납이고 사실상 빼앗거나 다른 이권과 교환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정희 정권이 많은 사람을 직장과 학교에서 쫓아버리고, 고문하고, 투옥하고, 사형에 처한 그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부정축재를 정당화 혹은 은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축재한 재물이라면 마땅히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훨씬 좋은 데 쓰는 것이 도리이고, 상식이고,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정부가 만든 공식위원회는 원소유주에게 ‘돌려주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훨씬 더 과거의 일인 친일파 재산을 강제로 환수하는 것에 비하면 너무 점잖은 조치였다.

하지만 박정희의 자식들은 이런 권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려받은 유산 다툼에 몰두하고 있다. 박씨는 유산이 사회에 환원된 것이라고 하는데 공익법인이니 ‘부친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을 돕기는 더욱 쉽다.

가족사에 기본 책임의식 가져야

우리 민법에 따르면 재산은 물론 부채도 상속된다. 박근혜씨의 정치적 역량의 대부분은 부친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게다가 그는 엄청난 금전적 재산도 물려받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긍정적인 유산만 물려받고 부정적인 유산은 나몰라라 하는 것은 법정신은 물론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하물며 ‘큰 뜻’을 품고 있는 정치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최근 미디어법 개정에 찬성한 박근혜씨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하늘을 찌를 듯 높다. 게다가 초등학교 줄반장 선거보다 못한 절차로 통과된 이번 미디어법을 통해 그는 언론계의 ‘큰 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사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의식이 없다면 박근혜씨의 정치적 역량이나 언론에서의 위상은 모두 허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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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친인척을 보시요]

대한민국을 19년간 떡 주무르듯이 가지고 놀고, 동서남북 찢어서 국민들 가슴에 상처를 주고, 수많은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던 그 명문 박정희 가문에 대해 알아보자.

어쨌든 박정희는 불법적인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후, 탈취한 권력을 악용해 끊임없이 추악하게 정권 연장을 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최고권좌에 앉아 있었다.

물론 그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가문도 엄청나게 번성시켰다.

무슨 박정희가 검소하고, 역대 가장 청렴한 대통령이고, 친인척을 멀리했다는 소리들을 그렇게 하는데 다 거짓말이다. 죽을 때까지 이 나라에서 천황으로 살았는데 무슨 소리하는 건가? 정수장학회 얘기는 듣지도 못했나?

그 문란했던 사생활을 보고도 검소하고 청렴하다는 얘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나? 친인척을 멀리하기는 뭘 멀리해? 쓸 수 있는 사람은 다 끌어다 한 자리씩 줬다.

당시 박정희 친인척비리가 불가사의하게도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를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있어도 잡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는 걸 몰라??

우선 박정희의 딸 박재옥부터 알아보자. 사람들이 박근혜가 큰 딸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박재옥이다. 박재옥은 박정희의 첫째 부인 김호남이 낳은 딸이다. 박재옥은 한병기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한병기는 1931년 평남 안주 출신이다. 홍익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을 하자마자 불과 30살의 나이에 별 경력도 없이 주뉴욕총영사관 영사가 되었다. 35살의 나이에 건설공제조합 이사장이 되기도 했다. 선주협회 회장을 지내고 박정희 시절 설악관광케이블카 회장이 되어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유엔대사, 캐나다대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공화당 총재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박정희가 죽자마자 권력에서 멀어졌다. DJP연대로 사촌 동서인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득세하자, 방송개혁위원회 위원, 국무총리 자문위원장이 되는 등, 조금 고개를 들었다.

이래도 박정희가 친인척을 멀리한 건가?

그 다음에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아들 박재홍을 보자. 그러니까 박정희는 박재홍의 작은 아버지다.

1941년 경북 구미 출신이다. 대구상고, 고려법대를 졸업하였다.

28살의 나이에 포항제철 행정실장이 됐고 32살의 나이에 동양철관 회장이 되었다. 이거 정상적인 건가??

민정당, 민자당에서 국회의원을 4번씩이나 해 먹었다. 그 후 자민련으로 갔다가 다시 한나라당으로 갔다가 국민회의로 건너오는 등 이상한 정치행각을 보여주었다.

또 박정희의 또 다른 형 박상희의 아들 박준홍을 보자.

1947년생이다. 경북 구미 출신이다. 계성고, 경희대 정외과,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였다. 김종필의 부인 박영옥이 박준홍의 누나다.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1급 관리관 정무조정실장이 되었다. 요거 요즘같은 대명천지에 가능한 얘긴가? 그러더니 32살 때 그 막강한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었다.

박정희 사망으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방황하다가 매형 김종필이 만든 자민련에 들어가서 지금도 자민련 경북 구미갑 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촌형인 박재홍과 맞붙기도 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박정희의 친인척 가운데 쓸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 썼을 뿐이지 쓸만한 사람은 다 갖다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의 오빠, 그러니까 박근혜의 외삼촌인 육인수 같은 경우에도 학교 교사로 있다가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승승장구하면서 5선 의원 씩이나 지낸 거 아닌가?

그 육인수의 사위 이석훈은 청주 MBC 사장을 지내고, 충청일보 사장을 거쳐서 현재 일신산업 회장이다.

김종필 같은 경우에도 박정희가 끔찍이 생각했던 형 박상희의 딸인 박영옥의 남편 아닌가? 박정희의 처조카 김종필이 이후락 등과 함께 80년 신군부에 의해서 부정축재한 재산이 환수조치됐는데 그 총 규모가 887억원이다. 25년 전에 887억원이면... 이건 계산이 불가능한 돈이다.

이래도 박정희가 깨끗하고 청렴한가? 그걸 몰라서 가만히 놔 둔 건가? 박정희 개인은 절대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축재할 필요가 없었을런지는 모르겠다.

박정희 덕이 아니라면 박근혜가 어떻게 정수장학회를 지배하고 있나? 정수장학회가 말이 장학회지, 그 규모가 1조 300억원에 이른다. MBC의 30%가 정수장학회 소유다. 부산일보도... 경향신문 사옥 부지도.

박정희의 또 다른 딸 박근영(박서영으로 개명)은 또 어떻게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나? 육영재단도 수천 억원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 무슨 수로 코스닥에서 한방에 46억원 짜리 대박을 치나?

이게 청렴한 대통령의 표상이라는 박정희의 모습이다.

게다가 시골에서 농사만 지었다던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딸 박재선을 의사와 결혼시키고, 형 박상희의 둘째 딸 박계옥의 남편 김용태를 그 막강한 대통령 경호실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그 뿐이랴!!!!

박상희의 세째 딸 박금자를 총리실에서 근무하는 반기언과 혼인시키고, 결정적으로는 박상희의 막내 딸 박설자를 벽산그룹 창업자 김인득의 아들인 김희용과 결혼시켰다. 김희용은 현재 벽산계열인 동양물산기업 대표이사 회장이다.

이 박설자로 말미암아 박정희 집안이 드디어 그랜드 서클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박정희의 조카 박설자의 남편 김희용의 형 김희철이 현재 벽산그룹 회장이다.

김희철의 부인, 그러니까 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가 바로 LG그룹의 한 축인 삼양통상의 창업자 허정구의 딸 허영자다. 이 허영자의 조카사위, 그러니까 허영자의 남동생의 사위가 바로 조선일보 후계자로 알려진 방준오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한번 가보자. 참 웃기는 거 발견했다. 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인 허영자의 오빠가 현재 삼양통상 회장인 허남각이다.

이 허남각의 딸 허정윤이 얼마 전에 정대호라는 청년과 결혼을 했는데 이 정대호가 그 유명한 황해도 재령의 대지주의 아들인 강원산업 창업자 정인욱의 손자이자, 현재 강원산업 회장인 정문원의 아들이다.

이 정문원의 부인 최금자의 언니가 최금숙이다. 최금숙이 누구냐? 바로 얼마 전에 형제의 난으로 물러난 두산그룹 회장 박용오의 부인이다.

게다가 정문원의 동생이 정도원인데 정도원에게 두 딸이 있다.

큰 딸 지선이는 기아자동자 회장인 정의선과 결혼했다. 정의선은 누구냐? 현대자동차 정몽구의 회장의 외아들이자 정주영회장의 손자다, 이 말이다.

작은 딸 지윤이는 박성빈이라는 청년과 결혼했다. 이 박성빈은 또 누구냐? 포항제철 박태준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포철 박성빈이랑 현대 정의선이랑 동서가 된다. 따라서 현대그룹이 철강산업을 하려고 부지까지 선정하러 다니다가 포기한 배경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 박성빈을 좀 파헤쳐보면 아주 재밌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여러분들에게 미안해진다. 양해 바란다.

박성빈은 미국 실리콘 밸리에 있다가 요즘 무슨 통신 솔루션 업체인 사운드파이프 코리아 대표이사로 있다.

이 회사를 가만히 보니까 무슨 다국적 기업인 것 같은데 국내 대리점을 영업하는 듯 하다. 전자신문같은 걸 보면 꽤 잘 나가는 듯 하다. 잘 나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사운드파이프에서 무선랜 환경을 구축했다는 아산병원은 현대 계열 아닌가??

박성빈도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 박태준이 국무총리직에 있을 때 드러난 박성빈의 부동산만도 강남구 역삼동의 170평짜리 카센터와 강남구 신사동의 빌딩 등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한남동에 빌라도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고구마 줄기라고 할 수 없다.

박성빈의 매형 김형수를 주목해야 한다. 김형수는 박태준의 한국화가 딸 박유아와 결혼을 했는데, 박유아는 본래 변호사 고승덕과 살다가 헤어졌다.

이 김형수는 또 이력이 만만치 않다. 한국맥도널드 사장과 국내에서 일본 도요다 자동차 렉서스를 수입판매하는 렉서스 케이모터스 대표이사다.

그런데 이 김형수의 부친이 그 유명한 동일고무벨트 창업자인 김도근이다. 이 김도근의 이력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치지향적인 것이 분명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등등 골 때리는 이력이 꽤 많다.

문제는 김도근의 큰 아들이자 김형수의 형인 김진재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박정희시절부터 여기저기 부산지역을 마구 쑤시고 돌아다녔다. 청년회의소니 부산 싸이클 연맹이니 뭐니 닥치는대로 자리라는 자리는 마다하지 않았다. 총력안보 부산시 협의회 특별위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부산시 청소년 선도위원도 맡았다.

부산 동래구 새마을지도자연합회 고문직도 맡았다.

열심히 하면 위에서 알아보는 법, 전두환이 급조한 민정당 간판을 달고 11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막론하고 내리 5선의원이 되었다.

[△ 한승수 ⓒ ]

이 김진재의 아들인 동일고무벨트 기획이사 1972년생 김세연이 그 유명한 춘천 한승수의 딸 한상은과 결혼을 했다. 그러니까 왜 한승수가 무소속으로 있다가 뒤늦게 또 다시 한나라당으로 들어갔는지 답이 나온다.

그런데 이 괴상한 상황을 우리 여러분들이 알아야 한다. 이 한승수가 박정희의 부인인 육영수의 조카 사위다. 한승수의 장모가 육영수의 큰언니 육인순이다. 그러니까 박근혜에게 한승수는 사촌 형부다. 한승수의 장인은 일제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낸 홍순일이다.

이 박정희의 동서 홍순일의 사위들이 세명이나 국회의원이 됐다. 예전에 서주산업이라는 회사에서 나온 혓바닥 시뻘겋게 되는 아이스 바를 다들 먹어 봤을거다. 그 서주산업의 회장이 바로 국회의원을 지낸 홍순일의 다섯째 사위 윤석민이다.

한승수의 부인인 육영수의 조카 홍소자가 혜원여고 교장을 지냈는데 알아보니까 혜원여고 이사장 윤석민의 처형이네?? 헐... 신문에는 그런 관계가 안 나와서 참 재미가

또 만주지역에서 엄청나게 크게 농장사업을 벌였던 천재라는 장덕진이라는 사람이 육영수의 언니 육인순의 사위다. 이 사람은 박정희정권하에서 장관도 지냈다. 분명히 장덕진과 한승수가 춘천고 동문으로 친분이 있어서 동서가 된 거 같다.

전국민이 뻔질나게 소풍가는 한국민속촌 회장 정영삼도 육인순의 사위로서 육영수의 조카 사위다.

어쨌든 이렇게 오만가지 요직은 다 해 먹었는데 무슨 박정희가 친인척을 등용하지 않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한승수의 아들 한상준은 얼마 전 이희현이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내가 깊이 파보니까 이희현의 아버지, 그러니까 한상준의 장인은 유니드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이화영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 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웬걸??

이 이화영이라는 사람이 마지막 개성상인이니 뭐니 하면서 언론에서 띄워주는 성북동에 사는 동양제철화학그룹 명예회장 이회림의 아들이었다. 다들 봐서 알겠지만 ITV 폐업할 때 그 모습이 마지막 개성상인의 모습인가?

내가 그동안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후원회장 이회림이 왜 그랜드 서클 안에 안 들어오나, 의아했다. 그러니까 이회림과 한승수가 사돈을 맺은 거다.

어쨌든 한승수같이 유엔총회 의장까지 지낸 학벌 좋고, 경력 좋은 사람이 부인까지 데리고 가서 박정희를 추모하고 애도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 깜빡 속아넘어가겠다. 여러분, 한승수는 박정희의 조카사위에요, 조카사위!!!!!!!!!!!!!!!!!!!!!!!!!!!!!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아까 언급했던 박태준의 사위 중 튀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박태준의 딸 가운데 디자이너인 박경아가 있는데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과 이혼을 하고, 김병주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김병주는 1962년생인데 얼마 전까지 미국 칼라일 그룹 아시아지역 회장 겸 이사였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대를 졸업하였다.
김병주는 국민의 정부시절 자민련이 연정을 할 즈음 박태준이 총리가 되기 직전에 칼라일 코리아 사장이 되었다. 김병주는 쌍용정보통신을 꿀꺽 하더니, 5000억원을 쏟아부어 한미은행을 먹었다. 하나은행마저 잡아먹기 위해 공을 들였다.
한미은행을 4억달러에 사서 씨티 은행에 27억달러에 팔아먹었다. 물론 그 이익은 미국 칼라일의 몫이었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외국계 인사로 초대된 것으로 봐서 한국인이기 보다는 미국인으로 추정된다.
요즘 칼라일 간부 5명과 `MBK 파트너스`라는 사모펀드를 만들어서 돈을 긁어 들이고 있다. MBK는 마이클 병주 김의 약자다. 싱가포르 정부투자기관에서 5억 달러를 끌어들였고, 캐나다 교직연금에서 2억 5천만 달러를 끌어들였다. 삼성생명, 대우정밀 등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 인물은 민주개혁세력이 끊임없이 눈여겨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로 다시 돌아가자.
지금 청렴하다는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 박재석은 연필장사를 하다가 박정희 덕분에 국제전기기업 회장이 되었다. 자민련 부총재를 지냈던 조부영같은 사람이 거기 이사출신인 걸 보면 대단한 은혜를 입은 거다.
게다가 박무희의 또 다른 아들 박재호는 벽돌공장에 다니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후 동양육운 회장이 되었다.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있나??
박정희가 친인척에게 엄했고 공사구별이 철저했다는 소리는 다 뻥이다. 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나 않겠다. 이상과 같이 해 줄만큼 다 해주고 해먹을 만큼 다 해 먹었다.

출처 : 海印濟
글쓴이 : 金 海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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