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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진주 민간인학살의 진실, 60여년만에 드러나

감효전(甘曉典) 2012. 3. 23. 08:18

진주 민간인학살의 진실, 60여년만에 드러나

국민보도연맹원 150여명, 진성고개 3개소에서 학살돼 

구자환 기자 hanhit@vop.co.kr  
 
 
진주 민간인학살

29일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가늘골 민간인 피학살자 유골발굴 현장을 유족들이 둘러보고 있다.ⓒ 민중의소리


진주 민간인학살

이해기(80세.진주 하봉면) 할머니는 현장에 도착하자 말자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민중의소리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로 추정되는 민간인의 유골이 60여년만에 참혹한 모습을 드러냈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30일 경남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가늘골에서 민간인 집단학살 피해자들의 유골을 공개했다. 진성고개에서는 가늘골을 비롯해 웃법륜골과 까치골 등 3곳에서 150여명이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집단으로 학살돼 진주 주변 각 지역에 매장된 민간인들은 1950년 7월 진주형무소 재소자이거나 한국전쟁 직후 진주형무소에 일시적으로 수감됐던 국민보도연맹원들로 알려져있다. 이날 희생자들의 연령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의 남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번 발굴현장 중간보고회에는 전국유족회와 진주유족회, 마산유족회 소속 유족들, 김동춘 상임위원 등 진실화해위 관계자가 참석했다.

진주 민간인학살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가늘골에서 발굴중인 민간인 피학살자들의 유골발굴 현장. 이번 발굴에서는 54구의 유골이 나왔다. 희생자들의 연령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의 남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민중의소리


진주 민간인학살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가늘골 민간인 피학살자들의 유골발굴 현장ⓒ 민중의소리



가해자는 군인, 희생자들은 국민보도연맹원으로 추정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경남대학교 이상길 교수(사학과)는 “발굴된 의류품으로 볼 때 이곳에서 학살된 민간인들은 진주형무소재소자가 아니라 국민보도연맹원들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가해자는 M1을 소유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발굴 장소에서 M1소총과 권총의 탄피가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제한된 군인, 또는 관련자가 M1소총을 소지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가해자는 국군으로 추정된다.

희생자들은 맨 윗줄에 8명이 2명씩 질서있게 쓰러져 있다. 이 교수는 두 사람이 팔을 서로 교차되도록 손목을 묶인 채 순차적으로 사살됐으며, 가해자는 희생자들을 학살현장 위에서부터 사살한 후 다시 그 시신 사이로 희생자들을 엎드리게 한 후 사살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의 남성으로 추정된다.

유골, 과 함께 허리띠와 버클 11개, 구두와 작업화 등 신발 38짝, 지퍼, 칫솔, 빗 등이 나왔다. 또, 당시 물약으로 보이는 작은 병도 나왔다.

진주 민간인학살

경남대 이상길 교수가 발굴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진주 민간인학살

학살현장에서는 M1탄피등 다수의 유류품이 나왔다.ⓒ 민중의소리



진성고개의 민간인 학살사건의 전말

주민들의 증언과 발굴현장을 종합하여 알려진 진성고개 민간인 학살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하순(25일 추정) 진주형무소를 출발한 3대의 차량에는 각각 50여명의 민간인과 다수의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민간인이었고, 교복을 입은 학생도 있었다.

문산읍을 통과해 까치골 입구에 1대의 차가 멈추었고 군인들은 사람들을 끌고 산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고개를 향해 올라가던 2대의 차량 가운데 1대가 현재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가늘골에, 나머지 1대는 200여 미터를 더 올라간 웃법륜골에 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 2명씩 짝을 지어 손이 뒤로 묶인 상태였고, 그들의 손목을 묶은 끈은 죄수복을 찢은 천이었다.

다른 학살지와 마찬가지로 가늘골 학살도 구덩이에서 이뤄졌다. 50여명의 민간인들은 2명씩 뒤로 묶인 채 산으로 올라가 매장지 근처에서 줄지어 서서 죽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맨먼저 8명이 구덩이의 가장 높은 곳에 엎드렸고, 뒤에 서 있던 군인들은 총을 쏘았다. 그리고 다음 7명이 먼저 죽은 사람들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두고 엎으린 채 총을 맞았다. 아홉 번이 반복됐다. 학살이 끝난 후 억지로 끌려 온 마을 주민들은 소나무 가지와 좌우에서 파낸 흙으로 시신을 덮었다.

당시 까치골과 가늘골은 문산에서 온 주민들이 시신을 매장하는 데 동원됐고, 웃법륜골은 진성에서 온 주민들이 시신을 매장하는 데 동원됐다. 희생자들을 싣고 온 차가 마을 주민들을 태우고 왔고, 주민을 동원하는 과정에는 현지 경찰도 참여했다.

진주 민간인학살

유족회 회원들이 발굴상황을 듣고 있다.ⓒ 민중의소리


진주 민간인학살

전국유족회와 진실화해위 관계자들이 발굴현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민중의소리



유족들의 통곡

이해기(여.80세.진주) 할머니는 현장에 도착하자 말자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그는 결혼 3년 만에 국민보도연맹으로 남편을 잃었다. 당시 남편의 나이는 21세. 남편은 1950년 친척집으로 상망제(3년 상에서 보름 만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부친을 잃은 성증수 할머니는 이곳을 지날 때 마다 머리를 조아리고 다닌다고 했다. 혹시나 선친이 유골이 여기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오늘도 그는 ‘개승만’을 연신 외치면 당시 정권에 대한 극도의 증오감을 나타냈다.

김동춘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은 “유족과 위원회가 머리를 맞대고 학살현장을 통해 아픈 역사를 알려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억울한 분들을 기억하고 알려내는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며 청와대에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특별법 제정과 조사 발굴 사업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가늘골의 매장지는 과수원 소유자인 이봉춘 할머니의 제보로 알려졌다. 이 할머니는 1980년대 초반 산을 매입하면서 당시 산주로부터 이곳이 학살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까지 원상을 유지하면서 관리해 오고 있었다.

유해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경남대학교 박물관은 가늘골에서의 발굴이 끝난 후 나머지 2개소에 대해서도 발굴 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 봄호수
글쓴이 : 남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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