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8.15광복'부터 시작되다 | ||||||||||
미.소 냉전씨앗-한국전쟁직전 38선에서는 760여회 국지전 있었다 | ||||||||||
윤복현 저널리스트 | ||||||||||
년이 넘도록 우리 민족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소련(러시아)이 심어 놓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대립과 갈등으로 결국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60년이 넘어 마침내 민주주의와 민족통합과 공존번영이라는 평화노선을 추구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족분단시대를 종식하겠다는 의지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국방위원장과 만나 포웅하고 <우리 민족끼리 교류.협력,연방통일정부 구성추진>이라는 6.15남북공동선언에 합의하고,노무현정부시절 10.4남북합의로 실행의지를 구체화하여 민족통일의 기반을 다지니 실로 민족과 세계가 놀라운 사건이였다. 그러나,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경제적 지원을 할 수 있다는 비핵개방3,000을 들고 나온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이후 현재 6.15/10.4남북합의정신은 상실되고 국민적 의혹만 부추긴 천안함사건이후 남북관계는 다시 냉전기로 접어 들고 말았다.그러나, 다시 반드시 6.15/10.4남북합의정신은 이행될 것이며 민족의 앞날은 만개한 꽃처럼 밝아질 것이다.
8.15이후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은 남과 북이 다르다. 왜냐하면 모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미.소이념에 사로 잡혀 있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유리한대로 분석하고 싶은 심리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자주적 관점으로 객관적으로 기술되야 할 것이다. 일제가 강점한 8.15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은 한반도진공작전을 앞두고 있었다. 8.15이후 한반도지역은 좌우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주도한 건준위가 일본군무장해제와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자치를 실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지역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과 소련.영국 등 연합국들은 독일지역을 동.서로 분단시켜 미.소 냉전지역으로 만든 이후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였고 마침내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일본제국주의가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자, 한반도지역의 일본군은 무장해제되고 일제의 행정은 중단되고 일본인들은 일본열도로 이주해야만 했다. 일본이 한반도지역에서 무장해제되자, 미국과 소련과 영국 3국 정상은 모스크바에서 한반도문제를 다뤘다. 그리고 마침내 미.소.영.지나국이 5년간 공동관리하는 신탁통치안을 의결했다. 합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1.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미,영,소,중 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치안은 사실 형식에 불과한 것이고, 이미 북한지역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소련군정을 실시하고 있었고, 남한지역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파견하여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하며 미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소련이 내세운 인물은 일제하 백두산지역을 중심으로 항일빨치산투쟁을 벌이다 보천보전투로 일제의 수배령이 떨어지자 소련으로 망명하여 스탈린과 친분을 맺어 눈도장을 찍고 소련군이 진주할 때 소련군 장교로 들어 온 김일성이였고, 미국이 내세운 인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미국의 위임통치를 주장하다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 탄핵을 당하여 미국으로 추방당하자 맥아더 등 미국정계와 친분을 맺었던 친미기독교인 이승만이였다. 김일성은 소련이라는 뒷빽이 강하게 존재하였기에 신탁통치안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한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 등을 제거한 후에 북한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고, 남한 또한 외세개입절대반대를 내세운 민족주의자 김구 선생과 8.15이후 한반도전역에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일본군무장해제및 치안과 자치를 주도했고, 미.소 공동위원회를 조정하여 민족단일정부를 구성하려고 헌신했던 몽양 여운형 선생 등을 제거한 이승만이 남한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이 기획하고 소련이 동의한 민족분단선이 그어지게 되는 것이다. 민족사적으로 통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자체가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였다. 미국과 소련과 영국이 진정 한반도인들의 자주주권을 인정해 주었다면 일본군해제이후 군대를 철수시키고 한반도인들의 자치를 전제로 자주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5년간의 공동관리라는 신탁통치안에 합의한 것이다. 사실 한반도지역을 서로가 분할해서 갖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 전쟁성 작전국(OPD)이 1945년 7월 한반도를 연합국이 분할 점령하는 계획안을 마련했는데, 이 때 소련은 원산 이남을 제외한 함경남북도를, 영국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미국은 원산 이남의 함경남도 일부와 강원도, 경기도, 충청북도, 경상남북도를, 중국은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점령하도록 계획했다는 그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최종안은 미국이 전쟁 수행에 관한 의견과 정보를 신속히 교화하고 전쟁 수행 방향을 최종 결정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국무성, 전쟁성, 해군성의 요원이 모여 만든 3성 조정 위원회(SWNCC)에서 내놓은 북위 38도선안이다. 이 안건을 내놓은 사람은 전쟁성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딘 러스크 중령이었다. 러스크 중령은 전쟁성 대표 조지 링컨 소장에게 보고하였고, 이는 ‘일반 명령 제1호’로 확정되어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이때 러스크 중령은 지도를 보니 38도선이 눈에 띄어 그 선을 분단선으로 삼았다고 위증했다. 오늘날 러스크가 선을 그은 지도가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10도 단위로 위선이 그어져 있어 38도선은 나타나지 않는다.이 최종안에 대해 미국은 소련이 이를 선선히 응낙한 데 놀랐고, 소련은 위도가 그토록 후하게 남쪽으로 내려간 데 놀랐다. 당시 소련은 북위 40도만 확보해도 좋다고 여겼다고 한다. 38도선이 확정되자, 남북한 지역에서는 김일성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을 대변하는 분단권력들이 들어서게 된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군정의 도움으로 권력을 이양받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친일파들을 숙청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원칙에 따른 토지개혁을 시행하였고, 중공업을 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그리고 소련은 군대를 철수시키고 김일성을 후원하였다. 이에 반해 남한지역은 친일파들이 군대와 경찰을 장악하고 이승만의 충견들이 되었으며, 반민족주의자처단협의회가 이승만과 친일파들의 방해로 해체되었으며,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반농민적인 토지개혁은 농민들의 반발을 사서 남한내 사회주의 세력인 친소박헌영의 남로당의 빨치산에 농민들이 대거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든 배경이 된다. 그리고 제주4.3민중항쟁이 일어나게 되고 위기에 빠진 이승만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이에 남로당원들로 구성된 군인들이 제주토벌명령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이에 남한군대의 1/3이 진압에 나서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일본군장교출신의 남로당원 군인으로 동료들의 명단넘기고 혼자 살아남은 박정희가 부각되게 된다. 여순반란.제주4.3민중항쟁을 진압한 이승만은 미국의 신임을 확실히 받으며 적극 지원과 후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김일성과 이승만은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필요한 소련과 미국의 적극 지원을 받기위해 38선에서 760여회의 국지전을 일으키게 된다.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미군 또한 철수한 직후의 군사적 충돌이였던 것이다. 서부전선 웅진반도를 중심으로 뺏고 빼앗기는 전투를 수백차례했던 것이다. 당시 국가기반이 부재했던 김일성과 이승만은 자신들의 권력를 공고히 하고 미국과 소련의 적극적인 군사지원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자료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내용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즉, 웅진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할 계획이니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스탈린이 미.소 군사적 충돌을 우려하여 중지하라고 요구한 내용이 그것이다.(한국전쟁을 조명한 참조영상 http://sptv.co.kr/bbs/board.php?bo_table=01_01&wr_id=84) 친미기독교인이였던 이승만은 무신론을 죽도록 싫어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지역으로 변해버린 북한을 공격해서라도 점령해야만 했다. 그래서 북진통일이라는 정읍발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자 김일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본주의 지역으로 변해가는 남한지역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점령하여 인민대중을 사회주의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사유하고 있었다. 마침내 미국이 한반도지역을 군사지역에서 배제시킨 에치슨 라인이 선언되자, 이를 계기로 한국전쟁은 발발했던 것이다. 에치슨 라인이란 미국이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沖繩]-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정하며, 타이완, 한국,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네시아 등은 이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고 그들 지역들은 국제연합(UN)의 보호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정치사 속에서 애치슨 연설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부분은 6·25전쟁과의 관련이다. 학계의 전통주의자들은 이 연설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배제시켰음을 선언한 것이었으며, 북한은 이를 남침의 신호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여 이를 미국의 결정적 실책으로 언급하고 있다. 반면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은 애치슨 연설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고도의 음모적 술책이라고 본다. 그러나 두 주장 모두 일면만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연설의 의미는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이 군사전략상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채택하고 있음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렇게 에치슨 라인을 가지고도 북한과 남한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주장들과 분석들을 하고 있는 나라와 민족상황이 한심하다 할 것이다.
미군이 철수하고 레치슨 라인이 선언된 이후 김일성은 스탈린을 방문하여 남한공격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고 스탈린도 이에 동의하고 스탈린이 동의하니 모택동도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스탈린 군사전략참모들을 북한에 보내고 군사력을 지원한다. 그리고 모택동은 장개석과의 국공내전에 참여한 조선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보내 달라고 하자, 3개 사단을 북한으로 보내 준다. 이들 3개 사단이 한국전쟁당시 최전선에서 싸운 부대다. 이 3개 사단은 일제하 지나대륙에서 광복군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8.15이후 남한군대에 들어간 광복군이 결국 한국전쟁을 통하여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으니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서도 비극이요 비참한 수치였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이 내세운 이념을 위하여 우리 민족은 총부리를 겨누며 서로를 죽이고 증오했던 것이다. 정말 참을 수 없는 민족의 수치가 아닐 수 없으며, 소련-지나국과 미국을 등에 업은 김일성과 이승만의 반민족적이고 사대주의적인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절대 인민해방이니 자유민주주의이니하면서 남북한 권력들에 의해서 미화될 수 없는 것이다. 현재도 이러한 악순환은 지속되고 있다. 외세가 박수칠 일을 우리 스스로가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6.15/10.4남북공동선언은 남북한 인민 모두가 자주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민족미래의 청사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동족상잔을 거부하고 우리 민족끼리 시간을 가지고 협의해서 외세가 주입한 상호이념을 극복하는 새로운 우리민족의 홍익인간이념(너도 좋고 나도 좋은 공생주의=너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결합한 융합주의)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장점과 자본주의의 장점을 융합한 3의 길로 가자는 것이다. 3의 길이야 말로 하나가 되는 길이며,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길이요 부처님의 길이요 군자.대인(홍익인간)의 길이요, 무게중심으로 절대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중도라는 것이다. 중도가 없어 서 서로 치고 박고 대립하고 분열하고 민족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미사어구로 포장된 이념일찌라도 그것이 진정으로 인민대중을 살리는 이념이 아니라 인민대중을 숨죽이고 고통스럽게 하고 자신들의 권력유지용으로 악용된다면 반드시 인민대중의 저항에 부딪혀 폐기수정되고 말 것이며, 인간의식의 진보와 역사발전을 위해서도 백해무익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김일성 항일세력(타도제국주의동맹)이 백두산을 근거지로 빨치산투쟁을 할 때 탄생했다는 북한의 통치이념으로 자주성-주체성-창조성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북한의 주체사상은 이론상으로 매우 훌륭한 것 처럼 보인다.그러나, 주체사상의 주인공은 실질적으로 인민대중이라기 보다는 우두머리되는 수령으로 귀결되고 만다는 문제점과 한계가 있다. 수령이 최고의 사람이라는 요지가 주체사상인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고 있는 북한통치이념인 주체사상의 주인공은 이제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넘어 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사상이 권력유지를 위한 통치이데올로기로 비판받는 이유이기도 하다.자주성-창조성-주체성을 가진 사람이야 말로 세상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수령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할 수 있어야 하고, 국민(인민)이 투표권을 가지고 가장 투명하고 공정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권력자가 선출되야만 한다. 그러나, 왕권이나 독재권력에 도전하거나 교주에 도전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치고 온전히 살아 남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한민족사를 자기역사화하기 위하여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고구려 성터를 날조하는 등의 파렴치한 지나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할 소리 못하면서 3대로 계승되고 있는 북한의 세습체제는 엄밀히 따지자면 김일성 왕조라 할 수 있다.북한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진행하였다. 1957년부터는 제1차 5개년계획(1957~61)이 시작되어, 천리마운동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이 진행되었다. 이 사이에 김일성은 유일사상 지도체제를 확립하면서 김일성숭배를 강화시켰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의 세습과정에 있어도 주체사상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90년대 이후 심각한 식량위기와 경제위기에 빠졌다. 1997년 10월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총서기에 취임하였고, 98년 9월에는 국방위원장(헌법의 개정에 의해 국가주석이 폐지되어 실질상 국가최고위가 되었다)으로 재취임하였고 김정일 체제가 공식 출범하였다. 북한의 불안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권력이 김정일에게 승계될 수 있었던 것은 주체사상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 체제의 공식출범 이후 경제정책의 내용이나 방향에 대해서 공식적인 제시는 없었지만 김일성 시대와는 차별화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1998년 8월 22일 「노동신문」사설을 통해서 ‘강성대국론’을 김정일 시대의 새로운 목표로 제시하였다. 국민(인민)을 배 고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학살하는 사상이나 권력은 백해무익하거나 허상이며 반드시 국민의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고로 백성를 진심으로 하늘처럼 대하며 어진 정치로 백성들이 배고픔이 없이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 고대 한인.한웅.한검천황들이 그랬듯이 정치.경제.문화.교육적으로 "만민이 행복할 수 있도록 널리 이롭게 하겠다."는 단순명쾌한 우리 한국민족의 홍익인간이념만이 영원만세토록 인민대중과 역사의 환영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우리 남북한 민족이 8.15이후 외세의 틈바구니속에서 못나게 살아온 세월들을 반성하면서 민족사와 인류사의 새로운 시대를 개막시킬 6.15/10.4남북합의를 반드시 이행하는 길만이 아무도 넘보지 못하고 함부로 하지 못했던 유라시아 중심국가 KOREA(고구려)시대를 여는 지름길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구.여운형.김규식.조소앙.김원봉 등 남북한 권력에 암살되거나 정치적으로 숙청되어야만 했던 순수 민족주의자들의 꿈이였다고 확신하며 그들의 길을 따라 가는 것만이 또한 외세강점속에서 처참히 죽어가야 했던 그들의 명예와 꿈을 회복시켜 주는 길이라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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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 울
글쓴이 : hahnwoo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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