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한국전쟁의 복잡한 기원, 분단에는 이유가 있었다(하)

감효전(甘曉典) 2012. 3. 22. 23:56

다시 쓰는 한국전쟁사 (3)
06.06.19 22:30 ㅣ최종 업데이트 06.06.19 22:41 이정환 (andie0712)

1-3.외적 기원론-소련의 책임

이 대목에서부터 소련의 책임부분을 짚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소련 군정은 정치를 잘 몰랐던 야전군인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달리 슈티코프와 로마넹코 등 세련된 정치장교들을 전면에 포진시키면서 발 빠르게 세를 확장해갔다. 상편 모두에 인용된 치스차코프의 온정에 넘치는 포고문은 그들이 사실상 점령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군이라는 인식을 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게다가 스탈린은 45년 9월20일 한반도에서의 급격한 소비에트 화를 자제하고 유연한 정치대응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지시는 당시 38도선 이북의 상황을 면밀히 검토하여 내려진 지시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당시 한반도는 식민지시절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이었고 해방 후 사회개혁을 주도했던 좌익이 우익에 비해서 더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38선 이북지역 특히 평안도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평안도지역은 19세기부터 보수성향의 기독교세력의 주요 근거지였고 식민지시절에는 상업이 번창하여 상업자본가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을 무시하고 섣부른 공산화를 추진할 경우 커다란 반발을 살 수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점령 하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곧 공산화가 되었을 거라는 결론은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추론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소련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정치세력에게 정치적 주도권을 내 줄 리는 결코 없다고 봐야한다. 45년 당시의 소련 외무성 극동과의 한반도 관련정책 자료는 소련에 적대적인 기지가 되지 않도록 한반도에 적극적인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한반도 그 자체보다는 일본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지역의 급속한 사회주의화는 소련의 적극적인 정책보다는 분할 점령이후 지주와 자본가 그리고 기독교세력의 대거 월남으로 인한 공백상태가 북한지역 사회주의화 여건을 조성했던 때문으로 봐야 할까? 일부 그러한 측면도 분명히 인정된다.

그러나 박명림, 김성보 등의 연구는 소련이 38선 이북에서 어느 만큼은 사회주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분명 해방직후 38선 이북에서 실질적 힘을 가졌던 것은 소련군이었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들은 미국보다는 훨씬 더 세련되고 유연하게 38선 이북지역을 자기 영향 하에 두는데 성공했으며, 일련의 개혁과 토지 재분배에서 38선 이북지역의 민중에게 이남의 미국과는 좀 다른 인식을 주었다는 점도 확실해 보인다.

미국이 남한에서 실질적인 행정권을 남한정부에게 이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반면, 소련은 건국준비위의 후신인 인민위원회에게 점령 3개월 만에 행정권을 이양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그들의 한반도 점령통치가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한다. 물론 신의주등에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소련군과 김일성은 남한의 미군정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유연하고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구소련의 책임론연구는 아직 미완의 단계에 있다. 아직 미국의 수정주의학파들처럼 그 오류와 한계를 다 노출하기에는 좀 더 많은 자료 분석과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소련책임론이 등장하게 되면서 수정주의 학파들 역시 자신들의 일부 학설(가령, 북침 설)을 수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소련책임론은 미국 책임론과 더불어 상호보완적인 존재로서 그 가치를 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동향이 신자유주의추세와 맞물려 수정주의가 마치 완전한 오류인 것처럼 주장할 때 소련책임론을 근거로 내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소련책임론이나 미국책임론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모두 유효한 부분이지, 어느 한 쪽만을 정설로 주장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전통주의적 해석의 회귀에 지나지 않는다.

1-4. 사례를 통한 외적기원론 비판

외적 기원론은 한국전쟁의 기원이 되는 한반도 분단이 외세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부요인보다는 외부요인이 결정적이라는 시각이다. 그것이 미국이건 소련이건 아니면 둘 다이건 간에 분단과정을 음미해보면 내부 기원론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하나의 대안적 비판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당시 2차대전의 결과로 우리와 거의 같은 상황에 직면했던 두 나라 (오스트리아, 베트남)의 경우는 사뭇 결과가 달랐다. 왜 우리만 분단되었을까?

패전국 오스트리아는 우리와 같이 미·소에 의해서 분할점령 되었지만 사회민주당의 칼 레너를 대통령으로 하여 기독교 사회당, 공산당이 모두 참여하는 임시 연합정부를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55년까지 승전국들의 신탁통치와 감시를 받기는 했으나, 좌·우 모두를 아우르는 국민적 단결을 통해서 스스로의 주권을 회복했으며, 영세중립을 조건으로, 한국전쟁으로 촉발된 미소의 냉전이 극심한 상황에서도 결국 분단되지 않고 냉전의 완충지대로서 20세기 후반 내내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오스트리아의 현명한 처신과 선택이 그들의 나라를 관광과 예술의 국가로 번영을 누리게 했던 반면, 한반도는 냉전체제하에서 양극의 극단적인 시스템을 유지하며 분단을 지속해왔다. 남과 북은 분단 이데올로기를 자국의 국민에게 강요하면서 유지될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의 성공적인 경제개발과 도약에는 분단 이데올로기가 적당한 자극제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분단으로 인한 막대한 비용과 그 간의 엄청났던 희생을 상쇄했다고 보긴 어렵다. 남과 북의 민중들은 전쟁 그자체로도, 또 전쟁 후 형성된 정전체제하에서 여전히 전쟁을 준비하고 의식해야 하는 고통을 오늘도 감수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환경에서 왜 이런 판이한 결과를 가져왔을까? 결국 그 원인은 우리 내부에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번에는 베트남을 살펴보자. 그들은 우리와 비슷했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렸고,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통치를 경험했다. 우리는 국권을 상실했던 시간이 비교적 짧았지만, 그들은 수백 년의 지배를 받았다. 어찌 보면 우리보다 더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분단을 극복했고 자주권을 획득했다.

물론 베트남의 통일이 결과적으로 더 좋았는지에 대해서는 내·외적인 고려를 통해서 다시 고찰해야 할 문제지만, 그들은 초강대국 미국의 개입을 이겨내고 분단을 극복했다. 그렇다면 우리와 베트남은 무엇이 달랐던 걸까? 오스트리아, 베트남과 우리를 비교하면서 남는 문제는 결국 내적인 요인밖에는 없다.

2.분단과 전쟁의 필요충분조건

상편에서 전쟁의 내부 기원론을 비판하고서 또 다시 내적 요인을 언급하는 모순에 직면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부분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야 한다. 분단과 전쟁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핵심은 외세에 의한 분할점령이었다. 이것은 곧 필요조건이었다. 외세에 의해서 분단국가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갈등이 표출되었다 하더라도 국지적인 충돌이상으로 확대되기는 어려웠다.

한국전쟁에서 쓰인 무기들은 전부 강대국들이 우리에게 쥐어준 것이었다. 이걸로 같은 핏줄을 나눈 형제지만 나와 생각이 다른 놈은 가차 없이 말살하라면서.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한 나라와 민족을 외세가 분단시킬 수 있었는가를 밝혀내는 일이다. 이는 외세의 힘만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분단을 하려는 외세의 힘에 부합하는 내부의 힘이 있어야만 한다.

해방이후 한반도는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들의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 그런데, 그 갈등과 대립을 통합으로 풀기 보다는 외세와 결탁하여 특정지역에서라도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졌던 세력의 존재가 바로 민족 분단과 한국전쟁의 충분조건이 되고만 것은 아닐까?

‘외세’라는 필요조건만으로는 결코 분단과 전쟁에 이르는 과정을 온전하게 분석해낼 수 없다. 거기에 외세와 결탁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이라는 충분조건이 결합 했을 때에야 비로소 분단과 전쟁이라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외부세력이 아무리 분단을 강요하려고 하여도 내부에서 이에 호응하는 세력이 미약하거나 민족전체의 역량을 집결하여 이를 잘 극복했던 오스트리아와 베트남의 경우를 다시 상기해보자.

베트남의 경우는 외세에 호응했던 세력 자체가 너무 역량이 부족했으며 부정부패한 탓에 민중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고 외세가 손을 떼자마자 그들은 순식간에 해체되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좌우가 단결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함께 지켜낸 매우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외세가 강요하더라도 이에 호응하는 세력이 없다면 분단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단이 더 좋겠다고 판단하는 세력들이 남과 북에 분명 존재했고, 그 세력들은 일정한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분단의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봐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지난 60년간 계속된 분단 구조를 설명 할 수 없다. 남과 북은 서로를 괴뢰라고 비난하며 살아왔지만, 분단을 유지시키는 내부적인 힘이 없었다면 60년씩이나 이 체제가 지탱 되었을 리 만무하다. 냉전체제가 붕괴되었음에도 냉전의 산물이라는 한반도 분단이 여전히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한반도가 여태까지 분단 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서 이제 남과 북 모두가 허심탄회하게 바라봐야 할 필요가 여기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남과 북의 정권은 수십 년 간 유지되었고, 때로는 각각을 지원하는 외세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남과 북 모두가 단순히 외세에 의해 유지되는 정권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결론적으로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이후, 한반도에는 남과 북이 통합 할 수도, 분열 할 수도 있는 구조와 여건이 모두 공존했지만, 이 때 외세의 힘과 우리의 내부 역량은 불행히도 분열의 길로 작동하고 말았다.

이 시점에서 다시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해보자.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실로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왜 우리는 우리수중에 달렸던 행복의 조건들을 죄다 던져버리고 분단과 전쟁이라는 최악의 쓴잔을 선택하고 말았던 걸까? 아니, 왜 우리는 여전히 그 쓴잔만이 유일한 선택이었음을 아직도 믿고 있는 걸까? 여전히 치스차코프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모든 선택은 아직도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출처 : 문학 역사 철학
글쓴이 : 똥 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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