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보도연맹,형무소재소자 학살사건자료

[스크랩] 고흥 금오마을 학살보복사건의 진실

감효전(甘曉典) 2012. 3. 22. 23:32

 

 ▲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금오마을 전경. 이 마을에서 보복학살사건이 발생했다.

 

        ▲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증언자의 동생이 받은 국가유공자증. 고 박민옥은

           마을을 지키던 야경대원으로 활동하다가 봉기군에게 학살됐다.

 

 ▲ 당시 마을을 지키던 목책초소가 있던 마을회관 터. 이곳에서 마을청년들이 봉기군에게 무참히 보복학살을 당했다.

 

두원 금오마을 학살보복사건


이 사건은 전국 양민학살사건의 사례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건으로 이념의 잣대가 아닌 단순한 집안 간의 감정이 학살을 낳고 다시 보복을 해야 했던 가슴 아픈 곳이다. 1948년 여순사건이 평화롭던 한 마을을 피로 물들여야 했던 그 사연을 쫓아가보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금오마을. 예전에 이 마을에 정자가 있었고 그래서 1948년 여순사건이 발발하던 당시에는 정문등(亭門嶝)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은 밀양박씨와 청주 한씨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다른 성씨들도 조금 살았던 평화로웠던 농촌마을이었다. 지금도 그렇듯 논농사가 주업이었고 농업용수가 귀하던 당시에는 논에 물대기를 하다 다투는 일도 많았다. 그 갈등이 두 가문의 씨족간 갈등으로 골이 깊어져 여순사건이 발발하면서 그 학살의 빌미가 되었다. 청주 한씨 가문의 여유로운 생활은 시기의 대상이었고 순천 등지로 유학을 보내는 등 풍족한 집안이었다.


처음 진압 전투경찰에 의해 학살당한 쪽은 청주 한씨 대종손 집안이었다. 10월 19일 여순사건이 일어났고 진압군과 전투경찰에 의해 고흥군은 직접 가담한 증거가 없어도 투서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총살을 당하던 분위기였다. 이 한씨 집안은 모두 4명이 희생을 당했다. 당시 한상기의 둘째딸 한모방이 순천에 살았고 사위 지유석씨가 당시 순천에서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사위가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가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둘째 딸이 자주 친정에 다녀갔다는 것이 빌미가 되었다. 그 딸에 의해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제보가 고흥경찰서에 접수되어 10월 29일 그녀의 오빠인 한천행 집에 전투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날 아침 식사중이던 한천행은 마을 뒷산으로 피신하고 그의 처 박준임만 포박되어 끌려가 고흥읍 남계리 238번지 오리정공동묘지(현 고흥중학교 터)에서 아무런 조사나 항변도 없이 총살당했다.

그리고 일주일만인 11월 4일 다시 경찰이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을 마을앞 논으로 불러 모았다. 박씨 가문의 의해 제보돼 이미 큰며느리가 총살당한 한상기 부부는 포박당해 군용트럭에 실려 같은 장소인 공동묘지로 끌려가 죽창에 찔리고 다시 총살당했다. 당시 마을이장이던 김부만이 한상기의 손자, 즉 한천행의 5살 외아들까지 끌고 가려 하자,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항변하여 죽음을 면했다.

당시 총살당한 시신은 함부로 수습할 수 없었다.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동조하는 자로 간주해 함께 처단하겠다는 엄포에 아무도 나서지 못하다가 며칠이 지나 읍내에 거주하던 집안 친척이 야간에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했다.

이곳으로 끌려온 이들 한씨 부부와 며느리 박씨는 어떤 조사나 재판도 없이 학살현장에서 “빨갱이 좌익분자의 가족”이라는 누명아래 죽창에 찔리고 총으로 난사하여 학살당했다.

한상기의 막내아들 한용희는 당시 16세로 대전누님댁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어 화를 면했다가 다시 경찰에 제보되면서 대전에서 체포돼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대전형무소 수감자들은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후퇴하던 국군에 의해 대부분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마을 뒷산으로 피신했던 한천행은 팔영산으로 숨어들었다가 당시 활동중이던 반란군과 합세하게 되었다. 이념에 의해 가담한 것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고 보복하기 위해 가담한 것이었다. 그리고 반란군과 함께 야간을 틈타 마을로 기습한 한천행 일행은 박씨 집안을 피로 물들이는 보복을 했고 다시 산으로 숨어들었다. 토벌군과 전투경찰의 포위망이 팔영산을 향했고 두원면 대전리로 숨어든 한천행 일행은 겨우 배를 구해 보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정보를 확보한 전투경찰이 대서면 송림부근에서 발견하고 기관총으로 난사하여 전원 사살되었다. 한천행 시신은 송림모래사장에서 발견돼 그의 어린 아들과 집안 친척들이 수습해 매장했다.


한천행의 동생은 그후 서민호 의원 비서를 지냈고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그의 집안이 “빨갱이 분자”라는 증거가 있었다면 공직에 진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사건은 이념이 아닌 집안 간의 갈등이 비화되어 피의 학살과 보복으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출처 : 大 / 通 / 하 / 는 // 세 / 상
글쓴이 : 빛너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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