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1년 전인 1949년 4월 9일 경북 영천군 청통면에 살던 이영쇠(당시 37살, 농업)의 집에 군인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리고 이씨는 군인들에 의해 뒷산으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1960년 제 4대 국회가 작성한 ‘양민피살자신고서’의 일부 내용이다. 50년 가까이 흐른 지난 2008년 이영쇠씨 사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를 통해 그 진상이 드러났다. 조사 결과 ‘군인들은 이씨에게 금전을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자 좌익혐의를 씌워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청통면 주민 강용수씨(2008년 증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부대 1개 분대가 신녕면 화성여관에 주둔하였고, 돈 많고 똑똑한 살마들에게 좌익 혐의를 씌워 괴롭히는 사례가 있었다.” (강용수 2008년 진실화해위 면담보고 중)
석달 뒤인 1949년 7월 2일 강원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번엔 백담사였다. 전윤산(여·당시 40살 전후)씨는 남편과 함께 백담사에 기거했다. 그런데 전씨는 군인들에 의해 백담사 근처 잣나무 숲에서 살해당했다. 전씨가 희생당한 이유는 뭘까? 진실화해위가 면담했던 당시 마을주민 장모씨(진술당시 90살)의 진술내용은 처참했다.
“쌀 안준다” 좌익혐의 씌워 살해
…
“당시 지위체계 책임자 백선엽”
“백담사로 들어온 군인들이 쌀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전씨가 부처님께 공양해야 해 못준다고 하자, 희생당했다.”(진실화해위 2010년 1월 19일 진술조서).
죽임을 당한 방식은 더욱 잔인했다고 했다. 장씨의 증언은 짧지만 끔찍했다.
“유방을 칼로 베어내서 사망했다.”
(2010년 1월 19일 참고인 진술조서)
진실화해위는 두 사건 모두 ‘불법적인 민간인 학살’로 규정했다. 그리고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다고 결정했다. 가해자는 누구였을까? 당시 일부 주민들은 이들 군인들이 육군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일부는 ‘계급장은 따로 달지 않았다’고 전했다.
경북 영천의 강모씨(86살) 등 주민들은 이들 군인들에 대해 ‘경찰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며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었다고 진실화해위에 증언했다. 이 무서운 사람들의 정체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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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0년 있었던 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 25주기 추도식에서 백선엽씨가 추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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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 육군소속 ‘호림(虎(덧말:호)林(덧말:림))부대’ 소속 일부 군인인 것으로 확인됐다.‘호림부대’, 일반에게 다소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지난 5년 동안 진실화해위 조사보고서를 보면 그 명칭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민간인 희생의 한 가해 주체의 일부로 자주 등장한다. 경북 영천과 청도, 경산, 경남 거창 뿐 아니라 강원도 인제군 등 민간인 희생사건이 대표적이다. 실제 1960년 국회가 작성된 ‘양민피살자신고서’에 등재된 영천지역 피살자 383명 가운데 가해자로 ‘호림부대’ 특정해 기록된 희생자만 모두 10명에 이를 정도다.
호림부대는
1949년 2월, 월남한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됐다.
주로 북의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국군이 창설한 본격적인 유격부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해 2월 창설 직후 북한지역에 투입되기 전 일부 부대원들이 ‘북파훈련’의 일환으로 빨치산 토벌작전에 투입됐다.
이게 화근이 됐다. 토벌작전에 투입되면서 일부 호림부대원들이 집단양민학살에 개입된 것으로 진실화해위 조사로 밝혀진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 호림부대원이 저지른 민간인 희생에 대한 군 지휘체계상 책임은 누가 져야할까?
진실화해위는 생존해있는 호림부대원의 증언과 정부 자료를 근거로 육군 호림부대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책임은 그 지휘체계상 “호림부대의 소속기관인 육군 정보국에 있다고 판단된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당시 문제의 육군 정보국의 책임자, 즉 정보국장은 백선엽(당시 대령)이었다. 백선엽은 1948년 4월부터 다음해인 1949년 7월 말까지 ‘통위부(육군본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백선엽은 호림부대의 양민학살에 대해 책임을 전면 부인했다. 백선엽은 2008년 진실화해위 면담 조사에서 “호림부대는 국방부 소속이라며, 육군본부 정보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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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일보 1941년 2월9일자 간도특설대 지원자 모집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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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가기록원의 기록이나 정부 공식 간행물을 보면 백선엽의 주장과는 상당히 다르다. 먼저 2003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한국전쟁의 유격전사’라는 정부간행물. 이 정부 기록물에는 “호림부대는 1949년 2월 25일 국방부 제4국이 해체된 후 육본 정보국의 지원을 받아 호림부대로 확대 개편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국가기록원의 홈페이지 기록도 마찬가지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이 작성한 글을 보면 호림부대가 “1949년 2월 25일 367명의 서북 출신 장정들이 서울의 영등포에서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으로 창설되었다”고 돼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백선엽이 육군 정보국장으로 재직하던 시기(1948년 4월∼1949년 7월) 가운데 호림부대가 창설된 1949년 2월 이후부터 5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전인 1949년 7월 말까지, 약 5개월 동안 일부 호림부대원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한 최종 책임은 백선엽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해 백선엽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선엽 본인이 진정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싶다면 한국전쟁 전에 일어났던 호림부대원에 의한 집단양민 학살에 대해서도 입을 열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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