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둥이로 죽이고, 젖먹이는 총살”...백야사 ‘쥐잡기 작전’ 증언 잇따라 |
기사입력: 2011/07/07 [20:17] 최종편집: ⓒ 자주민보 |
[편집자 주: 편집자의 개인 사정으로 이미 보도했어야할 이 기사를 늦게 보도한 점 독자여러분들께 양해를 구합니다. 복수에 복수를 낳는 더 이상의 민족 내부 갈등을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반민족 반역행위에 대해 반성을 모르고 날뛰는 민족반역세력들과 이를 미화분식하는 현 언론의 행태는 어떤 이유로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자중과 반성을 바라는 의미에서 늦게나마 기사를 소개합니다.] 일제강점기 괴뢰 만주국의 간도특설대 중위로 항일유격대 토벌에 앞장서 친일인사로 낙인찍힌 백선엽 씨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전국언론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회 특별취재팀은 최근 경남 산청군 일대를 방문, 현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백 씨의 양민학살을 확인했다. 산청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지리산 토벌작전 중심지로 이른바 ‘빨치산’과 양민학살이 대규모로 벌어진 곳이다. 그동안 몇몇 전역군인과 빨치산 출신 인사의 주장에 이어 언론이 현지 주민의 증언을 통해 민간인 학살 사실을 재확인함으로써 백 씨에 대한 비난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방송은 지난 24-25일 백선엽 씨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전쟁과 군인’을 방영, 친일파를 미화한다는 시청자들의 비난을 산 바 있다. <미디어오늘>은 28일 특별취재팀 기사를 통해 백선엽 씨가 지휘한 백야전전투사령부(백야사)의 민간인 학살 만행에 대해 심층 보도했다. 특별취재팀은 3만 명 병력이 투입된 지리산 토벌작전명은 ‘쥐잡기 작전’이었다며 주민 이통주(79세) 할아버지의 말을 인용, “지리산 여기는 6.25 전쟁도 난리지만, 6.25전쟁은 아무것도 아닌기라요”라고 당시 참혹했던 분위기를 전했다. 삼장면 대하리의 조재현(69세) 씨는 “1951년 무렵 마지막 토벌할 때 토벌군에 의해서 조부님(조주환 당시 55살)이 지리산 중산리 칼바위 근처에서 잡혀서 희생당했다. 몽둥이로 맞아 하반신이 다 부서져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이어 두 살 배기 사촌동생 인현을 거론, “아주 포동포동하니 참 잘 생겼는데.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그런데 총살 당했어”라고 회고했다. 취재진은 이 같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1952년 3월까지 이뤄진 백야사의 ‘쥐잡기 작전’은 지리산 정상을 향해 포위망을 좁히면서 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키는 토끼몰이 방식의 토벌작전이었다”며 “군의 소개작전으로 마을은 불탔다. 주민들은 어디론가 끌려갔다”고 전했다. 또 다른 지옥, 광주 포로수용소...“거적에 덮인 시체 매일 트럭에 실려 나가” 이번 취재결과 지리산에서의 학살에 이어 광주에서도 엄청난 비극이 벌이진 것으로 밝혀졌다. 취재진은 “1951년 백야사의 토벌작전에서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다른 곳에서 죽거나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며 “광주에 있었다는 포로수용소 이야기가 처음 불거져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토벌군에 붙잡힌 것은 빨치산만이 아니었다. 백야사는 일단 생포된 민간인들을 광주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이송했다”며 “또 다른 비극의 현장이었다”고 전했다. 취재진은 “매서운 한겨울에 생포된 사람들 대부분은 입은 옷 그대로 산에서 끌려왔다. 전쟁 와중의 포로수용소, 환경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며 “매일 사람이 죽어 나갔다. 추위와 배고픔에 얼어 죽는 이도 있었고, 무엇보다 수용소 내 열병이 돌면서 희생자가 크게 늘었다”고 강조했다. 광주 포로수용소에 잡혀갔었던 조재현 씨는 “수용소 환경이야 뭐, 지금 생각하면 개돼지 키우는 곳 같았지”라며 “시체를 매일 거적때기 덮어서 트럭에 싣고 나갔지. 우리 식구만 해도 우리 할머니, 큰 숙모, 사촌 등 세 명이 죽었어”라고 말했다. 당시 백야사 작전참모, “무고한 양민 광주 잡혀갔다 반 수 이상 죽어...백 씨 책임” 취재진은 당시 백야사 작전참모였던 공국진 전 예비역 준장의 1965년 증언록도 곁들였다. “아이들, 부녀자들을 다 적을 만들고 포로해 오는데 추럭(트럭)에 실(싣)고 광주까지 후송하면 다 얼어 죽을 것입니다. (중략) 그 엄동설한에 우리는 바카(파카) 입고 히타(히터) 해도 추운데 수많은 양민들이 광주가 갔다가 반 수 이상 죽었어요. 백 장군 당신이 정치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성과가 늦드(더)라도 그렇게 해야지... 사고가 많이 났어요. 전시니까 그렇지 지금 같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겁니다.”(1965년 공국진 증언록) 취재진은 “백선엽이 진두지휘한 백야사의 토벌은 공국진의 증언처럼 ‘성과위주’의 무차별한 작전이었다”며 “백선엽은 그렇게 한국전쟁의 영웅이 됐다. 어쩌면 그의 공적은 희생된 무고한 양민의 피로 쌓아올려진 것은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취재진은 끝으로 “지리산 토벌 작전,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져야할 당시 군책임자인 백선엽도 이미 고령”이라면서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제는 진실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백선엽 씨는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으로 전역한 뒤 프랑스·캐나다 등 대사와 교통부장관, 한국종합화학(현 한화) 사장 등을,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건국60주년기념사업회 고문과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
출처 : 꽃망울
글쓴이 : Flowerbud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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