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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46.11.30 서북청년단 결성

감효전(甘曉典) 2012. 3. 11. 17:54

1946.11.30  서북청년단 결성

 

 

광복 후 자유를 찾아 남하한 이북 출신의 청년들은 출신지에 따라 평남청년회와 함북청년회, 황해청년회 등을 결성하고, 좌익을 쳐부수는 일에 앞장섰다.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 강당에서 '서북청년회(서청)'로 통합한 이들은 세력확대를 꾀했다. 미군정이 이들을 좌익 공격의 선봉에 세운 탓에 좌익의 준동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이들이 해결사로 나섰다. 이들에게 과한 힘을 실어주다 보니 부작용이 없을 수 없었고, 폐해는 제주도 4·3사태 때 가장 극심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나뉘어 내홍을 겪다 합동파는 1948년 9월 전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이 주도한 대동청년단에 통합됐다. 반대파는 1년 뒤인 1949년 12월 이승만이 결성한 대한청년단에 대동청년단과 함께 흡수 통합됨으로써 자연 해체됐다.

 

 

/국제신문

 

 

 

서북청년회 [ 西北靑年會 ]

194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청년운동단체.

 

〔조직경위〕

1946년 11월 30일 월남한 이북 각 도별 청년단체가 대공투쟁의 능률적인 수행을 위해 선우 기성(鮮于基聖)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여 설립한 우익청년운동단체이다. 1946년 8월경부터 대한혁신청년회·함북(咸北)청년회·북선(北鮮)청년회·황해도회(黃海道會)청년부·양호단(養虎團)·평안(平安)청년회 등의 각 대표 사이에 통합협의가 진전되어 서울 종로 YMCA강당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창단하였다.

 

〔강령 및 지부결성〕

강령으로는 ①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전취(戰取), ② 균등사회의 건설, ③ 세계평화에의 공헌 등을 내세웠고, 기구는 중앙집행위원장 외 11개 부서와 감찰위원회 및 지부로 구성되었다. 제일 먼저 결성된 지부는 강계(江界) 출신 청년들이 중심이 된 서울종로지부로서 김이협(金履浹)이 위원장이었다.

 

1947년 1월 이선파(李鮮波)를 위원장으로 한 서울중구지부, 평안북도 청년들의 서부지구, 청단지부(靑丹支部), 인천지부 등이 잇따라 결성되었고, 1947년 6월 10일 임일(林一)을 위원장으로 하여 대전에 남선파견대본부(南鮮派遣隊本部)를 설치하였다. 서북청년회는 좌우익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우익진영의 선봉역할을 하였다.

 

1947년 3·1절 기념식을 각각 가진 좌우익의 시가행진중 남대문에서 충돌한 남대문충돌사건, 공산주의를 찬양·고취하던 민족예술제를 광복청년회와 합동으로 저지시킨 부산극장사건, 부산좌익청년운동의 본부격인 민주애국청년동맹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서북청년회 부산지부의 간판을 건 좌익단체사무실점령사건 및 대북공작 등이다. 이러한 격렬한 반공투쟁은 모두가 공산치하의 학정에 못 이겨서 자유를 찾아온 그들의 과거경험이 크게 작용한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통합 및 해체〕

이렇게 서북청년회가 대공투쟁을 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1947년 4월에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지청천은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李範奭)이 만든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과의 갈등 속에서도, 전국 청년의 대동단결을 전제로 한 청년조직을 강력히 추진하여,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기존 청년단체들의 통합공작을 시도하였다.

 

통합공작에 참가한 단체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을 비롯하여 광복청년회·대한독립청년단·청년조선총동맹·서북청년회 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북청년회는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분열되어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다가,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고, 합동반대파는 문봉제(文鳳濟)·김성주(金聖柱) 등이 중심이 되어 서북청년단을 재건하였다. 이 조직은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됨으로써 자연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韓國靑年運動史 Ⅰ(鮮于基聖, 錦文社, 1973)

/네이트 백과사전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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