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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73.08.08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감효전(甘曉典) 2012. 3. 11. 17:31

 

1973.08.08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출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32846

사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28674

내란음모사건 구속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27510

노벨평화상 선정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30446   

노벨평화상 수상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32092

 

 

 

 

'사전 미행했던 현장 납치조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 19분 행동 개시. 6명이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 2212호에서 양일동을 만나고 나오는 김대중을 납치해 2210호로 끌고 들어감.

 

  침대에 눕혀 마취제로 기절시킨 뒤 오사카 오카모토 빌딩 302호 총영사관 숙소로 알려진 중앙정보부 안가로 옮김. 코만 남기고 화물 포장용 테이프로 얼굴 전부를 포장하고 9일 새벽 1시쯤 용금호 선창 밑 타기실에 감금.

 

  9일 오전 8시 45분 오사카항 출발, 12일 오전 7시 부산 부두 진입. 구급차로 위장한 수송차량에 태워 서울의 중정 안가에 감금. 13일 밤 납치 129시간 만에 동교동 집 앞에서 풀어줌.’

 

  이상은 박정희 유신체제 하에서 외국 땅에서 자행된 '김대중 납치사건'의 과정이다. 일본 경찰청의 조사 결과 한국 정부가 개입됐음이 드러났으나 정부가 이를 완강히 부인해 한·일 외교가 교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사건 발생 30여 년이 지나 여기저기에서 사건의 전말을 밝히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에서 중정 요원에 의한 조직적 범행이었음이 밝혀진 상태이다.

 

 

/매일신문

 

 

 

동경 김대중 납치 사건 상보

동아일보 보도/사건내막 이철희 증언과 문헌/납치 계획 실행 과정/중요 쟁점/사람들


1. 동아일보 특종 보도

동아일보(98/02/19)가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상보를 특종 보도했다. 인용 문건은 '케이티 사건 행동별 관계 인사 일람표'와 박정희 대통령 보고 필(79/03/10)이라고 김재규 사인이 들어 있는 '케이티 공작 요원 실태 조사 보고'서이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이철희 전 중앙정보부 차장(사건 후 유정회 국회의원, 장영자와 결혼 후 장영자/이철희 사건 주역)을 직접 인터뷰했다.

 

이철희는 5.16 전야 방첩대장이었으므로 당시 참모총장인 장도영이나 국방장관인 현석호에게 박정희의 쿠테타 음모 사건을 보고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점과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관여했느냐 안했느냐로 글 쓰는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아직도 장영자 경제 사건과 그의 역할이 무엇인지 의문 투성이로 남아 있다.

 

지난 20 여 년간 여러 루트로 이철희에 대한 탐문 증언을 계속한 바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내가 들을 수 있는 이철희의 말은 '죽이려고 했으면 못죽였겠느냐'는 단 한 마디였고, 이번 동아일보 보도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 되어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 직전에 터져 나온 당사자 사건에 대하여 사실 규명은 필요하나 처벌은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사건 지휘 내막

-이후락 부장이 불러서 궁정동 안가에 갔다.

-일본에 있는 김대중 문제 이후락이 꺼내

-죽일가 살릴가 문제도 나와

-이후락이 동경에 있는 김대중을 무조건 데려오라고 명령

-하태준 국장과 이철희가 두 차례에 걸쳐 반대했으나 이후락은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느냐'고 핀잔하여 어떤 상부 지시가 있는 것 같아 반대할 사안이 못된다고 판단

-박정희 지시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태준 해외공작국장이 총괄하고 윤진원 공작단장이 현장 지휘를 했으며 김기완 주일 공사 등이 동원되었다.

-동원된 인원은 동경에서 25명, 오사카와 부산에 오는 용금호 선상 21명 등 총 46 명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

-실행팀은 9개조로 편성되었다.

3. 납치 계획 실행 과정

-사전 미행 실시

-주일한국대사관 유충국 홍성채 유영복 김기도 등

-73.8.8.13:19 현장 납치조 행동 개시

-6명이 그랜드 팔레스 호텔 2212호실에서 양일동을 만나고 나오는 김대중을 납치

-2210호로 끌고 들어감

-침대에 눕히고 마취제를 묻힌 수건으로 코 막음

-엘레베이터에 실어 지하주차장으로 감

-총책 윤진원이 현장 지휘, 대사관의 한춘 김졍찬 홍성채 그리고 유영복 유충국 가담

-현장에서 김병찬과 유충국은 사라짐

-행동대 행동 개시/동경에서 오사카로 호송

-6명중 나머지 4명이 승용차 뒷자리 바닥에 깔고 오사카로 감

-운전은 유영복

-차내 지휘는 윤단장이

-대여섯 시간 후 오사카 중정 '안의 집' 안가 도착

-오카모토 빌딩 302호 총영사관 숙소로 알려짐

-안가에서 도쿄에서 온 4명과 박승민 김기도 합류

-안가 안내 연락책 김명기 박성일 김봉실/타자수 등

-윤이 엘리베이터로 다른 다다미방으로 이송

-코만 남기고 화물 포장용 테이프로 얼굴 전부 포장

-차에 태워 오사카 부두로 감/운전사 안용덕과 납치범 4명 동행

-이동조 행동 개시

-용금호 통신장 정용석/오사카에서 정 사장이 이희호 여사에게 전화했다는 소리 다방에서 들음

-용금호 선원 위장 박정열 정운길 등 참여

-9일 새벽 한 시경, 김대중 배에 납치

-눈에 안대, 검은 보자기에 싸아 로프로 선창에 실어

-선창밑 타기실에 감금

-자해 못하도록 붕대 감은 막대기를 재갈로 끼웠다가 막대기 제거

-일반 선원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9일 오전 8:45 오사카 출발

-관문해협 통과

-이 때 주한미국대사 하비브가 박정희 만나 풀어줄 것을 요청

-10일 현해탄 건너

-선원들에게 죽일 것이나 아니냐 물어 봐, 안 죽인다는 대답 들어, 성호 그어.

-11일 밤 부산 도착

-12일 오전 7시 부산 부두 진입

-부두에 김진수 중정 일본과장/강재원 공작과장/윤석만, 김선대의무실장 등 나와

-신상 체크

-부산에서 서울로 엠블러스 위장차로 호송, 안가 감금

-하태준이 직접 와서 김대중임을 확인

-다음날 이휘윤 소령/운전사/강제원 과장 등이 동교동 집 앞에서 놓아줌

4. 중요 쟁점/당사자와 납치자들의 증언 틀리는 부분

-가장 큰 부분이 현해탄 미국 비행기 출현설과 수장설

-아직은 결론이 나지 않아

가. 비행기 출현설

-납치자는 비행기 소리 들었다고 증언

-선원들은 엔진롬 옆 방이라 엔진 가속 소리를 비행기 소리로 들었을 것이라고 증언

-갑판원 임익춘/65세, 비행기 나타난 사실 없다고 증언

-당시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도 미국 비행기 출동설 부인

-납치자 자신도 후에 미대사관측에 물었으나 대사관측이 부인

나. 납치자 현해탄 수장설

-김대중 납치자는 수장설 증언

-이철희는 죽이려고 했으면 해외공작팀이 아닌 다른 팀이 투입되었을 것이라며 수장설 부인

-선원들도 수장설은 부인

5. 사람들

-이후락, 74세, 중앙정보부장, 대통령비서실장, 주일대사, 김대중사건 공식 지시자, 하남과 광주, 그리고 서울에 거주, 도자기 취미, 권세가 이후 노후에 재산가로 알려짐, 이제는 이후락이 입을 열을 차례! 김대중에 대해 박정희가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과잉 충성으로 납치했다는 설 있슴.

-이철희, 5.16 당시 방첩대장, 중정차장, 이후락한테 김대중 사건 지시 받고 본부 총지휘, 유정희 국회의원, 장영자와 결혼, 장영자/이철희 사건 주역, 서울 청담동 거주,

-하태준, 71세, 김대중 납치 계획 문제가 대두하자 베르린 사건을 상기하며 처음에 반대, 이후락 강요로 계획 착수, 윤진원에게 납치 계획 수립 지시, 78년 차장보로 퇴직, 롯데 사장, 호남석유화학 사장

-김기완, 주일 공사,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 가담, 5년 전에 사망.

-윤진원, 73세, 함안 태생, 부산공고 졸, 육군종합학교 졸업, 소위 임관/1950, 임관후 에치아이디 근무, 이철희도 에치아이디 출신, 1961년 중앙정보부 소령 입사, 1973년 준장 진급 실패, 1급으로 계속 근무, 국내 정치 담당을 제의했으나 거절한 일화, 자신은 대북만, 80년 은퇴, 이태원 거주, 대북 공작 베테랑, 작고 다부져, 목숨 걸고 사선 넘어, 오직 국가를 위해서만, 우국애국인생 30년, 애국자 칭호 받음,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30년 인생에 오점.

-공소 시효 다 지나

 

 

 

"다시 없는 영광으로 생각한다. 오직 감사할 뿐이다. 오늘의 영광은 지난 40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남북간의 평화와 화해 협력을 일관되게 지지해 준 국민들의 성원 덕분이다. 이 영광을 국민 모두에게 돌리고자 한다. 우리 국민과 더불어 이러한 노력을 성원해 준 세계의 민주화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감사한다. 그동안 고난을 같이 해 온 가족, 동지, 친지, 그리고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한 이 땅의 많은 분들과 영광을 나누고자 한다. 앞으로도 인권과 민주주의,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아시아와 세계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서 계속 헌신하고자 한다." 

-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소감 中에서-  2000. 10. 13 [매일경제]

 

 

 

1971년 첫 대권 도전···공화당 박정희 대통령에 석패

 

 

 

 

'4.27'서 고배 마신 신민당 후보 김대중씨
1971.04.30 3면 [동아일보]


'4.27'서 고배 마신 신민당 후보 김대중씨 
야당 대통령후보로 그동안 초정력적으로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싸워 전례 드문 야당 붐을 불러 일으켰으나 끝내 패하고만 신민당 김대중 후보는 패장답지 않게 아직도 투지에 찼다...
(중략)

"이번같이 초유의 국민 궐기를 가지고도 정권교체가 안된다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고 야당을 유지하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이 사태를 타개하는 길이 무엇이냐에 나의 온갖 생각과 고민이 잠겨 있읍니다"라고 개탄했다...(중략)

"그것은 부정선겁니다. 공화당의 부정이 표차로 나타난 구십사만표뿐이겠읍니까. 최소한 이백만표는 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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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도쿄 납치 사건

 

 

김대중씨, 돌연 서울 자택에
1973.08.14.1면 [경향신문]


김대중씨, 돌연 서울 자택에 

일본 동경 그랜드파레스호텔에서 지난 8일 하오 1시반 괴한에게 납치 실종됐던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씨가 실종된지 만 5일9시간만인 13일 하오 10시20분쯤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의 1 자택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구국동맹 행동대원을 자칭하는 괴한들에 의해 마취 되어 납치됐었고 대판 근처인 듯한 곳에서 다른 범인들에게 인계되어 해상으로 끌려가 한때 바다에 던져 살해하려는 듯한 위협을 받았고 한국내의 알 수 없는 어느 해안에 상륙했다고 서울로 돌아온 경위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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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씨 서울 자택에 데려다놔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죽음 직전에서도 예수님께 꾸준히 기도하고 국내의 동포들과 일본을 비롯한 우방의 인사들이 걱정해 준 덕택"이라고 말했다. 수염이 텁수룩하고 피로한 기색이 짙은 김씨는 경위 설명 도중 한참동안 눈을 감고 울음을 삼키다가 말을 계속...(중략)

1973. 8. 14 [동아일보]

 

 

1976년 명동사건 (3.1 민주 구국 선언)

 

 

재야인사 11명 구속 서울지검 ,「3.1선언사건」 발표 9명 입건 "정부 전복 선동"
지난 1일 명동성당에서 열렸던 3.1절 기념 미사행사를 이용한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전복선동 사건」 관련자 20명을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입건, 이 중 김대중 씨 서남동 함세웅 신부 등 11명을 구속하고...(중략)...「민주회복」이라는 명목 아래 이른바 민주구국선언」을 발표, 청중을 선동하여 시위를 촉발함으로써 민중 봉기로 유도 확산시켜 사회를 혼란에... 1976. 3. 11 [동아일보]


명동 사건 항소심 징역 5년 선고 김대중·윤보선 피고

서울고법 제 3형사부는 29일 하오 2시 명동사건 관련 피고인 항소심 선고 공판을 열고 김대중 피고인 등 14명에게 최고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에서 최저 징역 2년6월 자격정지 2년6월까지의 실형을 선고...  1976. 12. 29 [경향신문]

 

 

1978년 석방 · 가택연금

 

구속 2년9개월만에 김대중씨 석방
1978.12.27 7면 [경향신문]


구속 2년 9개월 만에 김대중 씨 석방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으로 복역 중이던 김대중 씨(53)가 27일 새벽 1시55분 수용 중인 서울대병원 특901호실에서 대사면 조치에 따른 형집행 정지결정으로 석방됐다. 김씨는 「명동 사건」과 관련, 지난 76년 3월 10일 구속된지 만 2년9개월17일 만에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중략)...김씨는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가족과 친지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서 기쁘다"며 "민주 회복만이 국민이 원하는 자유와 정의와 안보와 통일의 길"이라는 내용의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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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연금 해제

 

김대중 씨 연금 해제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씨가 8일 0시를 기해 긴급조치관련 구속자 석방과 함께 관계 당국의 보호관찰에서 풀렸다...

1979. 12. 8 [경향신문]

 

 

1980년 사면 복권 

 

"새역사 출발…속시원하다"
1980.02.29 7면 [동아일보]


"새 역사 새 출발…속 시원하다"

복권 소식이 전해진 이날 오전 서울 마포구 동교동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씨(55) 집엔 김씨의 친지 신민당 국회의원 당원 사회인사 고향 사람들이 대거 몰려와 김씨의 복권을 축하하며 환호했으며...(중략)...김 씨는 앉자마자 미리 준비해둔 복권 조치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밝힌 유인물을 기자들에게 나눠준 뒤 "만시지탄의 감이 있으나 복권 조치는 다행스러운 것" 이라며 유인물을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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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구속 (5.18 민주화운동)

 

계엄사 발표 부정축재·소요조종 혐의... 26명 조사 김종필·김대중 씨 연행

"지도급 정치인 사회 불안 선동…학생, 근로자 소요로 중대 위기, 정치발전 변함없다" 최 대통령은 "북한 공산집단은 우리 학원의 소요사태를 고무·찬양 선동함으로써 남침의 결정적 시기조성을 획책하고 있다"고 지적 "이 같은 중요한 시기에 일부 정치인 학생 및 근로자의 무책임한 경거망동은 사회를 혼란과... 1980. 5. 18 [경향신문]

 

 

 

 

 

1980년 사형 선고

김대중 사형 선고
17일 오전 10시 육본대법정에서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선고공판을 열고 김대중 피고인에게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계엄법  외국환관리법위반죄를 적용,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1980. 9. 17 [동아일보]

 

김대중사건 12명 사형 등 원심확정

김대중 피고인(56)에게 사형이 확정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3일 오후 2시 대법원 대법정에서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관련 피고인 12명에 대한 상고심 선고공판을 열고 이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 원심 형량을 그대로 확정했다... 1981. 1. 23 [동아일보]

 

 

1982년 석방 · 미국 망명

어제 저녁 김대중 씨 출국 부인·두 아들도

서울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김대중 씨가 23일 오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가족과 함께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다. 김씨는 부인 이희호 여사 차남 홍업씨 3남 홍걸군 등 가족 3명과 함께 이날 저녁 7시반 「노드웨스트」 020편으로 출국했다... 1982. 12. 24 [동아일보]

 

 

1985년 미국에서 귀국

김대중 씨 귀국 동교동 자택 직행

내란음모죄로 징역 20년형을 복역 중 신병치료를 위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지난 83년 12월 23일 도미했던 김씨는 현재 18년 1개월의 잔여 형기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앞서 "인도적 견지에서 김씨가 자택에서 요양을 계속토록 하기 위해 재수감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바 있다... 1985. 2. 8 [경향신문]

 

 

1985년 해금 조치

 

김대중·김영삼·김종필씨 해금
1985.03.06 1면 [동아일보]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씨 해금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씨 등을 포함한 마지막 전면 해금 조치가 6일 취해졌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를 기해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88년 6월 30일까지 정치활동이 금지돼 있는 미해금자 14명에 대한 전면 해금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써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과, 지난 80년 11월 5일 공포된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80년 11월 24일 정치활동 금지가 확정됐던 5백67명에 대한 규제조치는 4년 4개월 만에 모두 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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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민추협 공동의장 취임

 

김영삼·김대중 씨 단독 회담 민추 확대 시·도 지부 두기로

김영삼 씨와 김대중 씨는 15일 상오 서울 창천동 김상현 씨 자택에서 회담을 갖고 ▲김대중 씨의 민추협 공동의장 취임 ▲민추협 조직의 직할 시·도지부까지 확대운영 등에 합의하고 민주화에 공동노력을 전개하기로 했다... 1985. 3. 15 [경향신문]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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