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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르크스에 있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감효전(甘曉典) 2012. 3. 10. 11:22

 

 

마르크스에 있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 목 차 -


Ⅰ.  서 론


Ⅱ. 맑스에 있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1. 인간과 자연의 (변증법적)관계

    2. 인간과 자연의 소외

    3. 보론(Exkurs)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그리고 그것의 맑스의 인간과 자연의 주제에 대한 방점.

    4. 인간과 자연으로부터 공업과

        과학의 소외

    5. 변증법적 사회화 테제


Ⅲ. 맑스의 비판과 전향의 요청


Ⅳ. 결  론


Ⅰ. 서  론


‘환경의 위기’를 다룬다고 할 때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란 환경문제를 다루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1)

오늘 환경위기의 상황에서 어떠한 충동적인 말도 필요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산업적 생산방식의 본질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다. 더 많은 생산과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은 자본주의적 사회나 사실로 실험된 사회주의 사회나 마찬가지이다. ‘원자에너지만이 과학과 기술에 대한 우리의 사고가 커다란 전환점에 도달하고 있음을, 인간사회의 발전과정에서 혁명적 시대란 물질을 인식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영역에서의 혁명적 시대를 동반할 것임을 명확히 할 수 있게 해준다... 무한한 기술적 가응성이 해방된 인류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의 결과는 히로시마 원폭이요 체르노빌 사건이며, 더 크게는 반감기 24360년이라고 하는 우리 시대의 쓰레기를 미래세대에게(그들이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르면서) 책임지우는 일로 나타난다.

오늘날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소외되어 나타난다면 바로 인간과 자연의 소외된 관계를 지양하고 해방된 사회적 실천을 모색했던 맑스를 다시 불러낼 당위성이 생긴다. 본 논문은 바로 이와같은 환경문제에 대한 실천을 모색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쓰여진다.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명제들을 설정하고 이를 증명한다.

명제 1. 이제까지의 연구자들은 맑스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사회적 질문 뒤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맑스에게 ‘방점’임을 보이고자 한다.

명제 2. 하버마스는 맑스의 노동개념에 기초한 사회적 실천이 인간존재의 기본범주와 인식적 범주를 포함하지만 인식의 자기반성을 위한 철학적 기반은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하버마스는 노동과 상호작용이 한 쌍의 범주로서 종속적 개념역할을 한다고 하면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사회적 실천에 포함시키기를 주장한다. 그런데 하버마스에게 이 점이 이론으로서의 결점을 가지고 있다. 반증가능하지도 않고 검증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본 논문은 하버마스 이론을 재구성하여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완함으로써 하버마스 이론이 반증가능하도록 한다.

명제 3. 하이데거는 기술의 탈은폐성을 지적하고 인간이 만든 존재의 위기의 막다른 골목에서야 전향의 가능성을 발견할 것이라고 한다. 하이데거에게 하버마스는 부족하다. 즉, 하이데거가 자연의 파괴에 대하여 더 강력하게 반발한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현재의 과학기술로부터 전향을 이야기할 때에는 일면 맑스와 친화력을 갖고 일면 전향의 방법이 맑스와 다르다. 본 논문은 하이데거와 맑스의 친화력을 정리함으로써 하이데거가 맑스를 보완하는 역할을 수행토록 한다. 그리고 전향의 차원을 달리함에서 맑스를 취함으로서 본 논문은 환경위기에서 사회적 실천이라고 하는 내적 일관성을 유지한다.

본 논문의 결론은 하버마스의 입장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명제 2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Ⅱ. 맑스에 있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1. 인간과 자연의 (변증법적)관계


맑스에게 ‘인간의 비유기적인 몸’으로서의 자연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① 자연은 인간적 삶과 인간적 활동의 전제가 된다. ② 인간은 자연에 의식적이고 활동적인 주체로 맞선다. ③ 이때에 인간은 여전히 자연에 의존한다. ④ 생산력 및 생산관계의 발전도 이 관계에 의존한다.2)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처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근본 규정을 인간이 자연에 부여된 존재로 해석한다. ‘인간은 직접적인 자연 존재로서 인간은 한편으로 자연적 능력(naturalischen Kräten) 즉 생존능력인 활동적인 자연 본질이 부여된다. : 이 힘들은 인간에게 (실천의) 맹아와 능력, 그리고 능동성으로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자연적이고 육체적이며 감각적이고 대상적 존재로서 슬퍼하고 조건지워지고 제약된 존재이다. 즉 인간의 능동성의 대상들이 인간의 외부에, 인간과 독립된 대상으로 존재한다... 인간이 육체적이고 자연적 힘이요, 살아있고 사실적이며 감각적이고 대상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이 인간본질의 대상, 즉 인간 삶의 외화 대상에 대하여 사실적이며 감각적인 대상들을 가지거나 또는 인간은 사실적이며 감각적인 대상들에만 자신의 삶을 외화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E I, 578)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는 ‘수고’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후에 인식론적 차원으로 진행된 본질개념과 관계있는 표현이 아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맑스가 출발점으로 삼는 전제는 도그마적 전제가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현실적 전제, 즉 생활의 물질적 전제이다. ‘모든 인간 역사의 제1의 전제는 당연히, 살아있는 인간 개인들의 생존(Existenz)이다. 그러므로 최초로 확인되어야 할 사실은 이 개인들의 신체적 조직과 이 신체적 조직에 의해서 주어진, 그밖의 자연과의 관계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인간들 자신의 신체적 성질을 상술할 수도 없고, 인간들이 당면하고 있는 자연조건들, 즉 지질학적, 산악수리학적, 풍토적 상황들이나 여타의 상황들을 상술할 수도 없다. 모든 역사서술은 이 자연적 기초들 및 역사 진행 속에서의 인간들의 행동에 의한 이 자연적 기초들의 변모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다.’3) [3.20 f]

엥겔스가 ‘새로운 유물론’이라고 부른 역사의 서술의 전제가 될 만한 이 구절의 설명은 ‘요강’4)에서 좀 더 자세하게 얻을 수 있다. 최초의 소유 형태인 자연 발생적 공동체 초지에 유목생활을 하던 씨족간의 결합으로 모였던 인류는 인간의 특수한 자연적 소질, 즉 인간의 씨족적 성격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여러가지의 외적. 기후적.지리적. 물질적 등등의 제조건에 의해 좌우되었을 것이다. 원숭이보다 그리 크게 나을바 없었던 이들 초기 인류에게 자연은 ‘거주지 및 공동체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노동 대상을 제공하는 것을 채집하는 형태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역사서술의 전제는 인간이 살 수 있어야만 함을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인용했다. 살아야만 하는 의식이 발전되어 사회적 의식으로 나타남을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네가지 의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의식의 초기(최초인간)에 ‘이 의식은 동시에 처음에는 인간에게 완전히 낮선, 전지전능하게 범할 수 없는 위력으로 대립하는, 인간이 순전히 동물적으로만 관계하는 인간이 마치 가축처럼 외경심을 가지게 되는 그러한 자연에 관한 의식’(3.31)이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아직 역사를 가지기 이전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의 논술과 인용이 자연에 속한 인간이라는 긍정의 내용이다. 맑스는 이러한 생각, 혹은 인간규정을 포이에르바하로부터 받아들였음을 암시한다. 포이에르바하가 ‘실증적이고 감각적인 활실한 것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음’(E I,569)을 맑스는 찬양하고 있다.5)

그러나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와 달리, 이러한 인간학적 규정6)에만 머물지 않는다. 포이에르바하를 포함하는 모든 유물론은 ‘대상.현실성 및 감각성을 오직 대상이나 지각의 형식으로만 이해할 뿐 감각적인 인간의 활동이나 실천으로 즉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테제 I)이 맑스가 인간규정을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인간세계, 즉 실천의 결가로서의 세계를 이것(제1전제)과 중재하려는 이유이다.7)

맑스의 인간규정은 이제 대상적인 활동을 하는 인간이요,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유적 존재의 개념은 인간은 결코 개별적인 존재로 규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존재인 동시에 역사적인 존재인 인간은 유적존재로서만 실천과 관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생산활동으로서만 ‘만드는’ 인간본성, 그리고 역사안에 있는 인간본성을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하는 면에서 맑스는 헤겔의 노동개념과 친화적이다.8) 유적존재에게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생명력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실천은 인간을 규정하는 두번째 단계인데, 이제는 유적존재는 의식적존재인 동시에 자유의지적 존재이다. ‘의식적 생산활동은 인간을 동물적 생산활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구별짓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유적존재인 것이다. 혹은 인간이 바로 유적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의식적 존재이며, 다시말해서 그 자신의 생활이 그에게 있어 대상인 것이다. 바로 이때문에 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인 것이다.’9)(E I 516)

맑스에게 의식이야말로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핵심이다. 의식은 동시에 역사를 만드는 인간의 근본전제이기도 하다. 초기 인류의 의식은 자연에 대하여 동물적이었으나(3.31) 노동으로부터, 그리고 노동의 발전단계인 분업단계에 이르러 나타난 인간의식은(최초의 인류분업은 제사장이었다)(3.211)‘세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힘’(3.211)이다. 즉 계몽인 것이다.

엥겔스가 받아들였듯이 맑스에게 의식은 노동과 함께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회가 노동과 함께 탄생한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노동과 실천이 인간들의 세계를 만든다고 이야기하듯이 맑스도 이점을 명백히 한다. ‘어떤 대상적 세계의 실천적 산출, 비유기적인 자연의 가공은 인간이 의식적인 유적존재라는 것, 즉 유에 대하여 자기자신의 본질에 대해서처럼 태도를 취하는 존재라는 것, 혹은 자신에 대해서 유적존재에 대해서처럼 태도를 취하는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다름아닌 대상적 세계의 가공속에서 비로소 현실적으로 자신을 유적존재로서 증명한다. 이 생산에 의하여 자연은 인간의 작용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현실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 생활의 대상화이다. 그 까닭은 인간이 의식에 있어서처럼 지적으로뿐만 아니라 활동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자신을 이중화하고, 따라서 자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속에서 자기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다.’(E 1, 516f) 10)

여기에서 맑스의 인간존재규정의 중심 즉 ‘대상적인 활동을 하는 인간’이 드러난다. 먼저, 인간은 현실적으로 자신을 대상화하여 나타낸다. 헤겔이 ‘존재의 진리는 본질’11)이듯이, 맑스에게도 자신을 차별화하지 않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자연을 자기 바깥에 갖지 않는 존재는 결코 자연존재가 아니며, 자연존재에 관혀하지도 않는다. 자기의 바깥에 어떠한 대상은 갖지 않는 존재는 결코 대상적 존재가 아니다...비대상적 존재는 비존재이다.’(E I,578)

맑스와 헤겔과의 차이점은, 헤겔이 추상적 존재로서의 존재와 본질을 대치시켰다면, 즉 정신의 차별성을 제시했다면, 맑스는 이것을 뒤집어서 인간의 일차적 규정에서 이어지는(맞닿는)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대상적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를 충족시킬 대상을 갖지 못한 존재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인용문의 맥락이다. ‘인간이 자연에 의해 생활한다는 것은 다용을 의미한다. 자연은, 인간이 죽지않기 위해서는 그것과의 지속적인 교호과정속에 있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활이 자연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자기 자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어떻한 의미도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E I, 516)12) 이 점은 4절에서 중요하게 취급될 것이다.

맑스가 헤겔이 노동을 첫째 인간의 자기 산출의 관점으로, 둘째 대상화는 자기 바깥으로 대상화함, 즉 대상에 대한 노동주체의 방식을 표현했다고 칭찬한다.(E I 574). 그러나 맑스는 헤겔의 정신적 주체에 만족하지 않는다. (포이에르바하로부터 배운것임이 확실시되는 어조로) 맑스는 헤겔의 정신의 자기구별로서의 존재는 기실 인간존재의 신비화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헤겔에게 인간의 역사적 주체는 빠져 있다는 것이요(E I 573)13), 더 나아가, 독일 자연 철학의 전통적 문제, 쉘링의 문제지평에 접근한다.

‘단단하고 둥근 대지위에서 모든 자연적인 힘들(Naturkräft)을 들이쉬고 내쉬는, 생동적이고 활동적인 살아움직이는(wirkliche) 인간(Mensch)이 그의 현실적이고 대상적인 존재능력(잠재태)(Wesenskräfte)을 그의 외화(Ertäußerung)을 통하여 낮선 대상들로 정립(Setzen)한다해도, 그 정립(한것)이 주체(활동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따라서 그 주체의 행동이 대상적일(gegenstandliche) 수 밖에 없는 대상적인 존재능력들의 주체활동이다. 대상적 존재는...(대상에 의해서만 정립되기때문에 또 원재 자연이기 때문에) 대상들만을 창조한다. 정립의 행동이 이러한 까닭에, 정립은 정리행동의 순수한 활동에 의한 대상의 창조(Schaffen des Gegenstandliche)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대상적인 생산이 그 대상적(gegenstandliche)활동, 즉 대상적이며 본래적인 본질의 활동인 대상의 활동만을 입증한다.14)(E I, 577)

맑스는 헤겔의 대상을 전도시킨다. 헤겔의 대상성은 존재와 본질의 모순에 의해 생겨난, 인간에 대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 맑스의 대상성은(물론 정신에 의한 것이 아닌) 살아있는 자연의 활동이라는 것, 즉 인간의 생산활동이란 살아있는 자연의 활동이라는 것(지극히 수동적인 활동)이다. 여기에서 인간과 자연관계의 세번째 측면이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다. 쉘링의 자연철학적 문제지평인 ‘자연과정 자체가 자연잠재태의 잠재적인 자기구성’은 인간과 자연 관계의 첫번째와 두번째 계기의 종합이다.15) 포이에르바하와 헤겔은 각기 일면적인 강조로 나타났으나, 그 둘 모두에게 반대하여  그 어떠한 자연도 인간에게 관계할 때 일면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주어질 수 없음을 강조한다. 있다면 한가지, 인간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생산활동에 의해서만 매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존재일 뿐만 아니라 또 인간적인 자연존재이다 :즉 자기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는 유적존재로서 자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식속에서도 스스로를 확증하고 실증하여야 한다. 인간적인 대상들은 직접적으로 제공되는 것과 같은 대상물들은 아니고, 또 인간적인 감각은 직접적으로 있고 대상적으로 있는 것과는 다르며, 인간적인 감성도, 인간적인 대상성도 아니다. 대상적 자연, 즉 주체적 자연도 직접 인간적인 본질에 맞다아있지 않다. 모든 자연적인 것들이 생성되어야 하듯이, 인간도 자기의 생성행위 즉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는 인간에게 의식된, 따라서 의식존재와의 생성행위로 고양된 생성행위이다. 역사는 인간의 참된 자연사이다.’(E I. 579)

인용된 문장은 이론적 인식, 실천적 외화, 인간사이의 관계라고하는 헤겔의 노동개념과 친화한다.16) 맑스는 먼저 강조를 통하여(mussen bestätigen) 자기의 과제로 이것을 떠맞는다. 이것은(이론적 실천) E I. 578에서 이어지는 맥락에 연결된다. 자기 밖에 대상을 갖는 존재는 이제 그 순간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다.(E I 577) 즉 자신을 반영한다. 실로 인간만이 자신을 반추하는 존재이다.17) 그 다음 인간의 생산활동을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생산으로 파악한다. 실로 인간들의 생산활동, 인간의 사회적 실천이 역사로 되는 것이지 (헤겔처럼)정신이 역사가 아니라고 함으로써 맑스는 헤겔과 차별을 둔다. 그리고 이점에서 쉘링과 결합한다. 인간의 역사가 탄생케하는 사회적 실천이 자연의 (실천적)부정이기는 하지만, 생산에는 자연자체의 생산일진대(잠재태의 외화) 역사도 기실은 인간과의 교호적 자연역사라는 것이다.

이절을 요약한다. 먼저 자연은 모든 인간들의 생산활동이 전제되어 있는 근거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의식화되면서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역사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역사는 오직 자연이 가진 생산능력을 빼고서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이 가진 생산능력은 인간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개별인간이 아닌 유(Gattung)의 생산적 활동을 통해서만 현실로 나타난다.

(맑스는 자연과 인간의식 어느쪽에 중점을 두는가. 퍼센테이지로는 반반이다.)그러나 주체로 나서야 하는 것이 인간의 임무라면 즉, (생명활동 자체를 의지와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E I,516)면, 그러니까 ‘인간의 활동대상은 전체인간, 즉 인간 유 뿐만 아니라 다른 종 전체, 한마디로 존재일반’18)이라면 강조는 인간의 책임에 두는 것이다. 그리하여 책임은 전존재에 대한 책임으로서의 역사가 된다.


2. 인간과 자연의 소의


헤겔에게 적극적 개념이었던 소외 혹은 외화는 맑스에게 부정적인 것으로 전도된다.19) 인간의 현재적 특정인 사회적인 삶의 외화, 즉 소외된 노동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물론 노동의 세 계기를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소외된 노동의 특징, ①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②노동의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노동 활동 자체로부터의 소외, ③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 ④인간의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로 규정된다(E I 516 f)20)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1. 자연을 소외시키고 2. 그자신을, 즉 그의 고유한 능동적 기능, 그의 생산활동을 소외시킴으로써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類를 소외시킨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의 유적 생활을 개인적 생활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린다... 소외된 노동은 따라서 3. 인간의 유적 본질을, 인간의 정신적인 유적능력 뿐만 아니라 자연은, 그에게 낮선 본질로, 인간의 개인적 실존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린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그 자신의 몸도, 그 바깥의 자연도, 그의 정신적 본질 그의 인간적 본질도 소외시킨다. 4.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신의 생활활동, 자신의 유적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의 하나의 직접적 귀결은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이다.(E I 516-517)’21)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신의 생산활동, 자신의 목적 물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하나의 직접적 귀결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이다.

맑스는 소외된 노동의 분석을 국민경제학적 상황에서 시작한다. 국민경제학은 노동자가 상품으로 전락하며, 자본의 경쟁에 의해 결국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분할될 수 밖에 없음을 밝혔다.(E I, 510)22) 그런데 국민경제학자는 현실적 분석에만 관심을 두었지, 현실의 근본토대, 즉 사적소유는 현실분석의 출발의 정당한 전제에 놓음으로써 국민경제학적 법칙은 추상적 법칙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법칙이란 경쟁, 즉 ‘소유욕과 소유욕을 가진 사람들의 경쟁’이다. 그래서 국민경제학자들은 (자본과 노동, 자본과 토지의 분리, 경쟁과 독점, 자본집중,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분화등의) 사이의 내적연과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고, 단지 주어진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사건들의 집합에 대한 현상적인 이해에 머물게 된다(E I, 510). 이 점은 맑스의 로크적 사유재산권에 대한 공격이다. 4절에서 고찰하게 된다.

국민경제학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헤겔의 변증법적 인식과 친화성을 갖는다. 헤겔의 인식론은 개별적 사실에 대한 피상적 인식단계를 넘어서 이성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즉 개념적 지식은 사태의 총체성, 즉 사태의 역사적 발전의 전과정에 대한 총체적 이해인데, 헤겔은 사태의 변증법적 발전과 지양과정에 대한 변증법적 총체적 인식을 개념적 인식‘이라하고 이를 지성적 단계의 표상적지식과 구별하였다.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인식론에 의거, 사태에 대한 인식은 사태의 총체적 발전과정에 대한 개념적이해라고 보았다.23)

국민경제학적 상황에서 노동자가 상품으로 됨으로써 노동의 생산물은 생산자로부터 하나의 독립된 힘으로써 노동자와 대립한다. 노동의 생산물이 하나의 대상속에 고정된, 사물화된(sachlich gemachthat) 노동의 대상화이다.(E I 512) 이 부분에 대한 루카치의 말은 아주 명료하다. 상품구조의 본질은 사람들간의 관계가 사물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24)

노동의 현실화는 노동자의 탈현실화로 나타난다. 그래서 노동자가 생산을 더 많이 하면 할 수록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점점 더 적어지는, 노동의 대상의 상실로 규정된다. 이는 마치 (포이에르바하가) ‘인간이 신속에 가져다 놓는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가 자기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 것은 더욱더 적어지게 되는 이치와 같다. 그리하여 노동자가 낮선 대상으로서의 그의 노동의 생산물에 관계한다는 규정 속에는 노동자가 더 힘을 들여 노동하면 할 수록, 그가 자신에게 대립되도록 창조한 낮선 대상적 세계는 더욱 강력해지며, 그 자신, 즉 그의 내적 세계는 더욱더 가난해지며, 그에게 그자신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은 더욱더 적어진다. 그리하여 ’그의 생산물 속에서의 노동자의 외화가 지니는 의미는 그의 노동이 하나의 대상, 하나의 외적 실존으로 된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로부터 독립되어, 그에게 낮설게 실존하며, 그에게 대립하는 자립적 힘으로 된다는 것, 즉 그가 대상에게 부여했던 생명이 그에게 적대적이고 낮설게 대립한다는 것이기도 하다.’(E I 512)

노동의 소외는 노동의 결과에서뿐만 아니라 노동의 내부에서도 나타난다. ‘생산물로부터 노동자가 소외되면서․․․․ 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며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노동자는 그의 노동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 그의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기자신와 함께 있다고 느끼며, 노동속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떠나 있다고 느낀다.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한하고 노동할 때에는 편안하지 못하다.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강요된것, 강제노동이다. 그 노동은 그러므로 어떤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그의 노동과정에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25) (E I, 514) 이러한 외화에서 노동자는 먹고 마시기 위한 동물적 목적만 있게 된다.

소외된 노동은 그래서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원래 동물적인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노동하는 유적존재요, 그 특성은 자유로운 활동인 것인데, ’소외된 노동이 인간의 유적 존재, 자연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의 유적 능력까지도 인간에게 나  낯선존재로 인간의 개인적 생존을 위한 존재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E I 517)

그런데, 노동의 대상물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못하고 어느 누구엔가 향유된다면, 향유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노동자)에 대해 주인의 관계에 있게 된다. 이때에 소외된 노동은 인간과 인간의 사이를 소외시키는 것이다.

‘그의 활동이 그에게 고통이지만 그것은 다른 인간에게는 향유이고, 다른 인간의 생활의 기쁨이지 않을 수 없다. 신들도 자연도 아닌 외적 인간 자신만이 인간위에 존립한는 이 낮선 힘 일 수 있는 것이다. ... 따라서 그가 낮설고 적대적이고 강력한, 그로부터 독립적인 대상으로서의 그의 노동의 생산일, 그의 대상화된 노동과 관계할 때에, 그는 그에게 낮설고 적대적이고 강력한, 그로부터 독립적인 다른 인간이 이 대상의 주인이도록 대상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부자유한 활동으로서의 자기자신과 관계한다면, 그는 다른 인간에 대한 봉사속에 있는 다른 인간의 지배하에 있는, 다른 인간의 강제와 멍에밑에 있는 활동으로서의 자기 활동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E I, 521)26)

원래의 선한 노동은 사회적 생산인데 소외된 노동에서는 인간의 본래적 삶의 관계는 없고 강제적인 노동만 있게 될 때 자연에 전제된 창조적 잠재태를 역시 강제된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맑스에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외화(노동)는 본재적인 자연의 실현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착취로 경험된다. 또 생산물들은 자연에 대하여 의식된 인간들의 표현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있음, 즉 자연과의 3중적 양식안에 있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이것의 파괴로 경험된다. 그리하여 유적 삶의 과제=역사(존재에 대한 책임으로서의 역사)는 소유욕(자본)에 종속되는 것으로 파악된다.27) 그리고 그 지양은 공산주의이다.

‘수고’에서 소외의 분석이 어느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대하여 이론의 여지가 있으나, 초기의 여러 저작들과의 맥락에서 볼 때, 소외의 지양을 위한 근거(공산주의)의 전제로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비판’에서는 좀 더 소외를 만드는 제약을 실증적으로 당대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소외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인간의 사회적 실천은 그것이 경제적 토대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자본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 즉 사회에서 행동하는 개인들은 그들의 생산활동이 가치(자본적 가치)에 의하여 규정당한다.28)

정치경제학 비판에서는 당대의 사회.경제적 토대에 대한 분석과 자본주의적 경제학의 논리가 주된 것이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수고’에서 아이디어적으로만 제시되었던 자연의 소외가 실증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자본주의적 분석이라는 한정된 관점에서 그 이중적 관계가 규정되고 있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본이 인간사회적 삶과 관련하여 자연스럽고 자기 논리를 가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맑스는 먼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동은 부의 원천이 아니요 자연도 사용가치의 원천이 아니다. 노동은 그 자체로서 자연력의 외화일 뿐이요, 인간노동의 외화일 뿐이다(19:15). 노동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 즉 인간의 본래적 능력이 자연의 본재적 능력과 매개되는 과정이다. 인간이 살아 있음은 자연력에 달려 있다. 인간의 행동에 의하여 자연을 변화시킬 때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시킨다.(23. 192) 자연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자연안에 숨어있는 잠재태들의 실현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연과의 결합적 성격은 모든 인류 사회구성체들에게 공통적이다. 왜냐하면 노동과정은 인간의 생활실수품을 얻기위한 합목적적 행위이기 때문이다.(23.198)

사회적 노동의 이와같은 이중적 측면, 즉 한편으로는 인간의 능력의 실현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능력의 외화라는 이러한 측면을 국민경제학은 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 관계를 왜곡한다. ‘인간이 그의 생산과정에서 자연을 재로적인 형식으로만 간주하여 변형시킬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파괴뿐이다. 이러한 노동에서 인간은 자연의 생산력을 착취할 뿐이다....그래서 자연을 회복할 수 없도록 한다’(23.57 f)

자연과 인간의 상호 교호적 측면을 분리시키는 것은 국민경제학적 상황이다.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는 자연과 인간의 결합을 역사적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과 인간의 이러한 소외된 관계는 당시의 생산관계안에 있는 자연의 분석에서 구체화된다. ‘농업분야에서 대공업이 낡은 사회의 보루인 소농민을 없애버리고 그를 임금노동자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가장 혁명적으로 작용했다...농업과 수공업에 대한 가족 연대의 분해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동시에 새롭고 높은 물질적 조건, 즉 농업과 공업의 재결합의 물질적 조건을 농업과 공업의 자리(근거)위에 적대적으로 적용된 형태로 창조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인구를 대중심지로 집결시키며 도시인구의 비중을 끊임없이 증가시킨다. 이것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한편으로는 사회의 역사적 동력을 집중시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토지 사이의 신진대사를 교란한다. 즉 인간에 의하여 식량의 수단과 옷의 수단의 형태로 소비한 토지의 영양성분들을 토지로 복귀시키지 않고, 따라서 토지의 비옥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침해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도시노동자의 육체적 건강과 농초 노동자의 정신적 생활을 다같이 파괴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순전히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된 저 신진대사의 상황을 사회적 생산의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법칙으로, 또 그것을 완전한 인간발전에 봉사하는 형태로 지배하기를 강요한다...도시공업에서와 같이 근대 농업에서도 증대하는 생산력과 노동의 증대는 노동력 자체의 파괴와 낭비에 의하여 얻어진다. 또 자본주의적 농업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로부터 박탈하는 기술의 진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토지로부터 약탈하는 기술의 진보이며, 주어진 현재시간을 위한 토지의 생산성의 모든 진보는 동시에 이러한 생산성의 항구적인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다. 한나라, 예를들어 북아메리카 국가 연맹에서와 같이 국가의 발전의 토대를 대공업에 두면 들수록 이와 같은 (토지의) 파괴과정은 더 빠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생성원천인 대지와 노동자를 파멸싴팀에 의하여서만 기술과 생산과정의 결합을 발전시킨다’(23.528 f)29)

맑스가 여기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한정하여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넓게 본다면 실현된 사회주의의 생산방식까지도 비판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의 진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지양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침해하지 않는 자연이용이 아닌 모든 생산방식에 대해 비난하고 있는 셈이다.

맑스는 자본 3권에서 마치 오늘날의 환경제국주의 논쟁에 참여하듯이 생태학적 위기를 가져온 생산방식에 대해 증언한다. ‘한 사회의 이익은 다른 사회의 공물을 요구하며, 대지를 착취하기를 요구한다...땅의 산출, 땅의 알맹이, 공기, 그리고 생활의 발전을 확장하기 위한 착취를 요구한다...그러므로 경제사회의 출발점에서 개별인간의 사적소유가 땅을 먹어치우듯이 다른 인간을 먹어치운다. 사회.국가현존사회는 땅을 소유할 수는 없고, 단지 함께 가지고 있을 뿐이다. (소유하는) 그들은 땅의 소유자일 뿐이고 이익을 얻는자일 뿐이요, 폭군의 가족으로서 후손들에게 땅을 유산으로 남기려고만 한다.’(25.782 f)

맑스에게 ‘초고’로부터 ‘경제학비판’에 이르기까지의 지속적인 인간-자연관계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완전한 해방이나 완전한 대립이 아니라, 오직 인간과 함께만 실현가능한 자연재료를 의식적으로 취급하는 것, 이때에 인간의 고려(Anerkennung)가 자연을 향하여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개인이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삶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하여 자연과 싸워야만 하듯이, 문명인도 그렇게 해야만 하고, 모든 사회형성체안에서와 모든가능한 생산양식 하에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인간의 발전과 함께 자연필수성(Naturnotwendigkiet)의 영역은 필요에 의하여 확장된다. 이 영역안에서 자유는 사회화된 인간, 연합된 생산자를 맹목적인 힘으로서 그들에 의해 강요되는 대신에 그들의 공동체적인 통제하에둔 자연과 합목적적으로 조화된 상품원료에만 가능하다: 원료를 가장 가벼운 힘의 소비와 함께 그리고 원료의 인간적 자연하에서 가장 가치있고 가장 적당한 조건을 수행케한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필요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25. 828)



3. 보론(Exkurs) : 엥겔스의 자연볍증법, 그리고 그것의 맑스의 인간과 자연관계에 대한 방점의 보완


맑스주의 철학은 철학, 정치경제학, 사회주의를 하나의 완결된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묶어내려는 이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맑스주의 철학의 원형이 엥겔스의 반듀링론 목차에 나타나있다. 엥겔스의 이상은 자기의 새로운 유물론 철학을 가지고 자연과 우주 전체을 포괄하는 전일적 세계관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30) ‘우리는 자연이나 역사 또는 우리 자신의 정신적 활동을 사유하기만 하면, 먼저, 무한한 연관과 상호작용의 착종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거기서 모든 사물의 성질과 존재장소, 상태가 고정되어있지 않고, 운동하고 변화하며 생성.소멸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20, 28). 그러한 세계관이 고대에도 있긴 했으나 그것이 전체현상을 설명하기는 한지만 역사와 같은 개별적 사실들(die Einzelheit)은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체계내지 법칙에 모든 존재하는 것 전체를 설명하려 한 엥겔스의 불행은 그 삶의 자리를 더 살펴보아야 밝혀지겠지만, 엥겔스에게만 국한될 것이 아닌,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다. 헤겔이 그랬고, 약간 다르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그랬으며, 과학에서는 헐버트스펜서가 그랬다.

엥겔스가 보기에 전체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근대자연과학과 형이상학도 마찬가지였다. 전자는 자연을 운동상태가 아닌 정지된 것으로 인식하고 후자는 사물과 개념을 분리시킴으로서 ‘개개의 사물은 보지만 그 연관을 보지 못하며 나무는 보지만 숲은 보지 못한다...그러나 모든 유기체는 어느 순간에나 그 자체인 동시에 또한 그 자체가 아니다...즉 긍정과 부정과 같은 대립의 양극이 상호 침투하고 있다는 것, 원인과 결과도 개별적인 경우에 적용할 때만 타당성을 갖는 개념이라는 것, 그러나 이 개별적인 경우를 세계 전체와의 보편적 연관에서 고찰하면 원인과 결과가 합치되어 일반적인 교호작용에 귀착됨으로써 원인과 결과가 부단히 그 위치를 바꾸어, 지금 여기서 결과인 것이 나중에 거기서는 원인이 되고 또 그 반대로 원인이 결과가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형이상학적 사유영역에는 적합지 않으며, 오히려 ‘사물과 이 사물의 개념적 모사를 본질적으로 그 연관에서, 그 연쇄에서, 그 운동에서, 그 생성과 소멸에서 파악하는 변증법이 위와같은 사유방식이다. 자연은 변증법의 증거이다.’(30)

반듀링론에서 발전시킨 변증법의 이상을 엥겔스는 자연변증법에서 관철시키고자 한다. 총체적인, 우주적인 과정인 자연을 자연자체가 가진 운동법칙과 구성법칙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엥겔스는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새로운 자연과학을 사용했다.31)  ‘물질의 운동은 영원한 순환(과정)이다... 최고로 전개된(Entwicklung) 시간안에 있는 순환은, 공간(Raum)이 존재 자기를 의시학는 존재가 있으므로 가치있게 되듯이, 유기적 존재의 시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의식하고 자연을 의식하는 존재의 시간이다: (즉) 순환은 물질의 영원한 현존방식이며...그러한 현존방식은 또한 순간적이다. 그 안에 영원한 것은 영원히 스스로 변화되고, 영원히 스스로 운동하는 물질뿐이며 물질이 스스로 변화하고 운동하는 법칙뿐이다.’(20,327)

엥겔스에게 ‘진정한 자연철학이란(변증법) 근대 자연과학의 증거로 풍부해지는 것’이었고, 헤겔 체계가 바로 이러한 철학으로서 ‘자연.역사 및 정신의 전 세계가 하나의 과정, 즉 부단한 운동, 변화, 전환 및 발전으로 파악되고, 이 운동과 발전의 내적 연관이 지적되었다’(20.31)고 보았기 때문에 바로 여기에서 그의 독특한 변증법적 주악상을 끄집어낸다. ‘변증법의 제법칙은 자연 및 인간사회의 역사로부터 추출된다... 나아가 이 법칙들은 전체적으로 세가지 법칙들로 환원된다; 양에서 질로의 변화 및 그 역의 법칙; 대립물의 상호 침투의 법칙; 부정의 부정 법칙. 이 세 법칙은 모두 헤겔에게는 그의 관념적 방식에서 순수한 사유법칙으로 전개되었다... 헤겔의 오류는 이 법칙이 자연과 역사의 사유법칙으로 강요되었지, 자연과 역사로부터 연역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20,348)

엥겔스는 (그들의 중요한 작업이었던) 정치경제학 비판과 비교하여볼 때 자연 과학의 자연인식에 대한 비판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32)  그래서 자연철학적 근본토대는 자연의 운동과정과 역사과정이라고 하는 저 자연과학적 표어들을 고착화하여 수용했다. 그래서 엥겔스는 당연히 자연과학의 객관적 법칙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객관적 법칙에 맞지 않는 신념들이 엥겔스에게 보인다. 또 이러한 법칙적 생각은 맑스라도 어울리지 않는다. 맑스의 박사학위 논문은 이것을 반대하는 유물론에 바치고 있다.33) 분명히 엥겔스의 역사이해는 맑스의 영향을 받고 있다.34) ‘우리는 인간과 함께 역사에 드러선다. 짐승들도 오늘에 이르기가지의 그들의 발생과 점차적인 발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동물의 역사는 비록 동물이 역사에 참여하고 있다 하더라도, 동물의 지식이나 의지가 없이 생긴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인간은 좁은 의미에서 동물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더 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며, 점점더 역사에서 예견되지 않은 영향이나 알려지지 않은 힘의 영향이 작아지며, 점점더 이전에 설정된 목표 역사의 결과가 일치한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더 이러한 척도를 역사에 적용시킨다면... 우리는 엄청난 불균형이 존재함을 발견하게 되며, 통제되지 않은 힘들이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힘들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계획적 생산과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생산이 의식적으로 조직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생산일반이 인간에게 특정한 측면으로 있게 되듯이, 사회적 관계에서 다른 동물계로부터 분리되어 고양시킬 수 있다... 거기로부터 인간들이 스스로 있는 역사, 인간 활동의 모든 부분이 인간과 함께 있는 역사, 특히 자연과학이, 지금까지 이루어진 모든 역사에 깊은 영향을 주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새로운 역사적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20,323 f)

인용구의 마지막 부분은 ‘과학기술혁명’을 주창하는 구 소련 당강령과 흡사하다.35) 코바르지크는 이 구절이 ‘생산력주의’의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36)  그러면서도 인용구의 중반은 초기 맑스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대단히 친화력이 있다. 더우기 여기에서 더 발전된 견해인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의 진화’에는 분명히 맑스의 인간과 자연의 변증법과 닿아 있다.37) 물론 차이는 있다. 맑스의 그것의 두번째 단계는 인간의식을 가지고 자연을 변형하는 것이요, 세번째 단계는 변증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에게는 인간진화의 행동양식(직립보행, 손, 말)과 자연역사적 인간화가 소박하게 결합되어 있고, 사회적 발전역사의 객관화로 연결되고 있다.38) ‘두뇌의 발달과 두뇌안에 있는 감각의 반작용, 점점더 명확해져가는 의식의, 즉 노동과 언어에 대한 추상능력과 추리능력의 반작용은 언어와 노동에(추상능력과 추리능력에)’ 항상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자마자 이러한 지속적인 발전이 종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족이 분리된 이후로도 그리고 다양한 차이와 방향에 따라 다양한 시대에까지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국지적, 일시적인 퇴행으로 말미암아 중단되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왔다; 즉 이러한 발전은 한편으로는 강력하게 추동하는, 다른 한편으로는 규정적인 방향으로, 환성된 인간의 출현과 함께 새로 등장한 하나의 요소, 즉 완성된 인간의 등장과 함께 ‘사회’(Die Gegelschaft)로 나타났다.’(20,448)

엥겔스는 인간의 출현은 또 다른문제(생태학적 문제)를 가져왔다고 한다. 원숭이는 그들의 식량 채집구역에서 먹이를 먹고 사는 데 만족했다. 그들의 배설물은 무의식적으로 자연에 걸음을 주었고, 자연이 제공하는 것 이상은 채집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동물 숫자도 그 이상 늘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원숭이와 인간의 특징적인 차이는 노동이요, 특히 도구를 사용한 노동으로서, 이것을 통하여 인간은 인간이 될 수 있는 육식적 영양분, 즉 두뇌에 대한 영양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요, 육식은 다시 불을 사용하고 동물을 사육하게 됨으로서 인간해방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 엥겔스의 생각이다.

인간이 동물처럼 살 때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외부의 자연을 변화시키기는 하되 자연속에서, 자연과 분리됨이 없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 반작용 했다고 한다. 그런데 생태위기의 문제는 바로 이와같은 사태, ‘즉 모든 것은 타자에 영향을 미치고 이 타자 역시 반작용을 한다’고 하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으로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 엥겔스의 생각이다. 그래서 방목 염소들이 그리스 삼림의 부활을 막고, 세인트 헬레나 섬에 처음으로 입항한 사람들이 초목을 전멸시켰다는 것이다.(20,449-451) ‘그러나 자연에 대한 우리 인간의 승리에 대해 너무 자랑하지 말자. 이러한 승리때마다 자연은 매번 우리에게 복수한다... 메소포타미아와 그리스, 소아시아 지역 등에서 경작할 수 있는 땅을 얻기 위하여 숲을 절멸시켰던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날 이 지역의 황폐화를 가져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20,452) 그들은 숲과 함께 수분의 집결지와 보존처를 없애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엥겔스는 우리가 ‘자연을, 마치 정복자가 타민족을 지배하듯이, 자연 바깥에 있는 어떤 자처럼 지배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오히려 우리는 살과 뼈, 머리까지 포함하여 전적으로 자연에 속하는 존재이며, 자연의 한 가운데 서 있으며, 우리의 자연에 대한 지배의 본질이 모든 다른 피조물보다 우수하게 자연의 법칙을 인식하고 이를 올바로 사용할 줄 아는 데 있다’(20,452-453)는 것이다. ‘쿠바에서 산비탈의 산림을 불태우고, 그 잿더미를 가장 수익성 높은 커피나무 한세대를 양육할 만한 거름으로 삼았던 스페인 이주민-그 이후에 적도 지방의 호우가 내려 이 아무런 보호도 없이 내버려진 비옥도를 씻어 내려가 버리고 벌거벗은 바위들만이 남아 있게 된다 한들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20.452)

현대의 생태학적 윤리학자의 말을 듣는 듯39) 한 엥겔스의 이 구절들은 분명히 변증법적으로 개념화된 자연철학적 진술이 아니다.40) 오히려 생태위기에 대한 실증학문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맑스가 그의 자본 비판에서 항용하는 것으로 볼 때 엥겔스에게도 문제가 없는, 익히 아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인용구들은 자연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하는 측면에서 맑스와 인접해 있음은 확실하다. 또 자연의 소외의 문제를 계급해방의 관점으로 연관시키는 점에서도, 즉 소유관계의 소멸과 관련시키는 관점에서도 맑스와 닮아있다. ‘현재의 생산양식 하에서는 자연과 사회에서 주로 최초의, 가장 확실한 성과만이 고려될 뿐이다... 모든 재산이 갈수록 비노동자의 손에 집중되어가는 반면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 소유는 필연적으로 노동자의 무소유로 전락해간다는 사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역에서 오랜, 흔히 힘겨운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적 소재의 집적과 연구를 통해서 우리의 생산활동이 낳을 비교적 먼 장래의 간접적인 사회적 결과를 명백히 인식함으로써 이러한 결과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를 실현하는데에는 단순한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에는 종래의 생산양식과, 이와 더불어 현재의 전 사회질서를 완전히 변혁하는 것이 필요하다.’(20,454)41)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 대한 비판은 맑스주의 외부에서는 포퍼에 의하여, 그리고 맑스주의 내부에서는 슈미트에 의하여 비판을 받았다.

포퍼에게42)   이론의 진리내용이란 이론으로부터 따라나오는 참된 명제들의 집합을 뜻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유용한 진리내용인데, 이것은 참된 명제보다 거짓된 명제로부터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이론은 될 수 있는 한 명백히 표현하여 반증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포퍼의 주장이다. 이론이나 이론을 뒷바침하는 증거를 계속 수정해 감으로써 이론과 증거가 일치하도록하여 반증이 되지 않도록 체계적인 노력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맑스주의자들은 그렇게 반증을 체계적으로 회피하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독단론을 과학으로 보장시킨다.

엥겔스는 맑스를 이어서 맑스 사후 맑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하여 좀더 실증적으로 정리하고 있다고 보아도 틀린것은 아니다. 이 때에 엥겔스의 보완에 의하여 맑스는 그의 이론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방점으로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엥겔스를 통하여 맑스의 이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4. 인간과 자연으로부터 공업과 과학의 소외


인간의 현재의 (사회적 관계가 소외되어 있고)자연이 파괴되었다면 무엇보다도 자연과학과 공업에 의해 주도되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자연에 대한 태도와 관련되어있다. (헤겔이 도구라고 부른) 공업에 의하여 생성된 물질적 힘을 맑스는 ‘수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것은 소외의 극복의 대안으로서, 즉 공산주의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공업의 역사와 공업에 의해 생성된 대상적 현존재가 인간의 존재능력(Menschlichen Wesenskräfte=자연)에 의해 열려진 책임을 안다.43) 이것은 (공업의 역사와 그 현존재) 언제나 인간의 본질과 연관하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외적인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파악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소외의 내부에서 움직이는-인간의 보편적인 현존재를, 즉 종교를 또는 인간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본질인 역사를, 정치, 예술, 문학 등으로, 또 인간존재능력의 전개로, 인간 類의 능력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상적이며 물질적 공업에대하여 감각적이고 외화되고 유용한  양식으로 파악해야한다. 과학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여야 한다.....공업은 인간의 외화된 행동이다.... 인간 노동의 대부분을 추상화하려하고44) 인간의 모든 노동이 이안에 모아진 것이지, 과학 자체로서는 불완전한 것이다. 과학이 인간활동이 집적된 「부 Reichtums」인 한 과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욕망 Gemeins, 천박한 (통속적인) 욕망!」’(E I, 542)

맑스는 인용구에서 먼저 철학과 과학이 왜곡되었음을 지적한다. 소외된 철학과 과학은 인간의 창조적인 실천이 오직 정치.예술.문학. 종교로만 간주하지 인간의 물질적 생산은 사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여 맑스는 인간의 유적존재의 증명은 인간의 생산활동이요, 현재적 공업도 인간의 존재능력의 전개(열려진 책)라고 강조한다. 또 공업이 생산하는 물질도 인간과 별개의, 인간노동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인간노동활동이 다른 모습을 띠고 전개된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이때에 공업은 다음과 같은 이중적 측면을 갖는다. 자본주의적 공업은 본래의 인간적 존재능력이라는 것. 또 자본주의적 공업이 그러한 한 인간의 능력을(그것은 또한 자연의 잠재태이기도 하다) 착취하고 있다는 것. 다른 한편 자연을 공업으로 만드는 지식인 자연과학이 분명히 자연에 대한 현실적 인식이긴 한데, 이 지식이 인간 본질에 대립된, 소외된 형태로 있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은 엄청난 활동을 전개하여 왔으며 끊임없이 물질 생산을 증대하였다. 철학은, 자연과학이 철학에서 분리되었듯이 철학도 자연과학에서 분리되었다... 자연과학이 공업을 매개로 하여 실천적으로 인간의 삶에 개입하여, 인간의 해방을 준비하면 할 수록 자연과학은 더욱더 인간의 비인간화에 작용한다.’(E I, 543)

과학과 철학이 잠깐씬 만나 과학을 계몽의 계기, 유용성의 계기, 위대한 발견의 계기로 간주하긴 하였으나 그 둘이 연합될 수는 없었다.(E I,543) 결국 분리되어 자연과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확장하는데 기여하여, 자연을 지배하는 지식으로 구체화된다. 이때에 과학은 인간의 자연과의 결합을 우선은 양적인 물질생산을 위하여 분리하고, 그 다음은 완전히 자연을 정복하기 위하여 주체와 객체로 분리한다.

그러면 자연과학이 원래 이렇게 악한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이 소외를 지양할 길이 없다. 원래의 자연과학은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자란것, 즉 인간과 자연관계가 진행되어온 역사의 한복판에서 자라온 것이었다. 이렇게 파악할 때 선한 목적으로서의 자연과학의 길이 열린다. ‘공업은 현재 역사와 자연의 관계이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 과학과의 관계이다.: 즉 공업이 인간적인 존재능력의 외적인 드러남(exoteische Enthüllung)으로 파악됨에 따라서, 자연의 인간적 본질, 또는 인간의 자연적 인간적 본질, 또는 인간의 자연적 본질이 이해되며, 따라서 자연과학은 추상적(abstrakt 지상적) 물질적 방향이나 관념적 방향을 버리고 인간적인 과학의 토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소외된 형태일지라 해도 자연과학은 현실적인 인간의 삶의 토대이다.45) 그래서 과학 이외의 인간의 삶을 위한 다른 토대는 원칙적으로 허구이다.’(E I, 543)

코바르지크에 의하면 맑스가 과학을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지식에 의하여 생긴 것이요, 또 지식도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노동에 의해 생긴 결과라고 보았을 때, 쉘링의 인간정신이 포함된 자연철학, 동시에 자연이 포함된 자연철학을 지향한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자기의 실현이 자연을 자신의 부분으로 간주하는 한에서만 인간은 그의 지식의 실현도 자연의 잠재태에 관심을 갖게된다46)는 것이다. 즉 이때에만 자연을 참으로 염두에 둔 지식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감각적인 (포이에르바하적47)) 의식의 대상으로 되고 「인간으로서 인간의 요청(das Bedürfnis des Menschen als Menschen)」이 요청으로 되기 위하여, 모든 역사는 (자연안에서48)) 준비된 역사, 즉 전개된 역사로 되어야 한다(damit Da zu ist). 역사 자체는 자연 역사의 현실적인 부분, 즉 인간을 위한 자연생성의 현실적인 부분이다. 자연과학은 나중에 인간을 위한(von) 과학이 될 뿐만아니라 스스로 인간에게 복종하는 과학이 될 것이다. 즉 본래적 과학이 될 것이다'(E I, 543). 현대적인 자연과학이 선한 것이라는 표현이 아니다. 또 현재 자연과학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역사도 교조적인 목적 지향적 고착적, 정지적 역사가 아니다. 거꾸로, 역사는 노동을 매개로 자연이 제공하는 그 신비한 잠재태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다. 역사의 산물, 자연의 산물이 과학이다. 그리고 과학은 이때에 본래적인 자기 임무를 찾을 것이다.(E I, 543)

‘인간은 직접적인 과학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을 위해 직접적으로 감각되는 자연은 직접적인 인간적인 감성이기 때문이요...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하여 감각적으로 현전하는 인간으로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고유한 감성은 다른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그 자신을 위한 인간적인 감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을 위한(von) 과학의 직접적인 대상이다. 인간의 일차적인 대상-인간-은 자연, 감성, 그리고 특별하고 인간적이며 감각적인 존재능력(잠재태)들이다. 마찬가지로 이 존재능력은 자연적인 대상들 안에서 그 대상적인 현실화가 기초되며, 자연본질의(탐구인) 학문일반 안에서 그 자기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사유자체의 요소, 즉 사유의 삶의 외화의 요소, 즉 언어는 감각적인 자연이다. 자연의 사회적 현실성과 인간적인 자연과학 또는 인간을 위한 학문은 동일한 표현이다.’(EI 545)

맑스는 과학을 낙관적으로 보았는가. 그리고 과학기술이 생산력을 강화시키는 적극적인 것으로 보았는가.49) 그렇지 않다.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오히려 그 반대진술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또 두가지 사실들이 나타난다. 첫째로 생산력들은 개인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것으로서, 개인들로부터 떨어져나온 것으로서, 개인들의 바깥에 독자적인 세계로 나타나는데, 그 까닭은 그들의 능력들이 생산력들인 반의 개인들로 분열되고 서로 대립하에 존재하는 반면에, 이러한 능력들은 다른 한편으로 오로지 생산력들의 총체가 존재하는데, 이 생산력들은 말하자면 하나의 사물적인 형태를 취해왔으며, 개인 자신들에게 있어서 더이상 개인들의 능력들이 아니라 사적 소유의 능력들이며, 따라서 사적 소유자들인 한에서의 능력들이다.’(3.67)50) 이렇게 사적 소유에 의해 독자적 힘으로된 생산력은 원래 이것을 생산한 다수의 개인들과 대립한다.(3.67) ‘(그리하여) 개인들이 생산력들 및 그들 자신의 실존과 맺고 있는 유일한 연관인 노동은 그 개인들에게 있어서 자기 실행의 모든 외관을 상실해버려, 그들의 발전을 방해하는 삶을 유지시켜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태는 개인들이 자신의 자기실행에 도달하기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단지 일반적으로 그들의 생존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생산력들의 총체를 전유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3.67)51)

인용구의 마지막 부분은 혁명의 필요성에 대하여, 즉 생산수단의 전유의 필요성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전반부는 앞의 인용구와 연관하여 어떻게 사적 소유가 생산력들로부터 개별인간을 소외시키는가를 이야기한다. 결국 과학이 인간들의 것일진대 과학의 열매인 생산력들도 인간들의 것인데, 이것이 독립적인 힘으로 개인들과는 대립하고 자본에만 봉사한다는 것이 맑스의 과학의 비판이다. 과학은 맑스에게 인간의 생산력 확대를 위하여 무시간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었던 것 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과학의 주체는 사회적 노동이며 자연 잠재태의 실현인데 소외된 사회관계에서 자본이 이것들을 흡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과학이 자본과 결합되면서 자연잠재태에 대한 고려는 완전히 없어지게 된다는 것, 더 나아가 노동과 과학은 분리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맑스에게 과학의 형식규정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이 점은 다음장에서 하이데거로부터 도움받을 것이다. 맑스에게 단지 과학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의하여 선한 사회적 목적에서 벗어난 것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그 부분에서 맑스는 사회적 실천의 담지자들인 개인들이 어떻게 과학을 그들의 일반적인 생산력으로 점유하고 그들의 공동적인 책임하에 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래도 조금 명확하다. 그것은 공산주의적 점유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맑스 및 사회주의 소유 테제로 인정해오다가 도구의 실태로 버린, 그리고 소수의 교조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절망적으로 고수되는 그러한 공동소유는 아니다. 참 공동소유, 맑스 본래의 소유의도를 4)절에서 다룰 것이다. ‘이러한 힘들의 전유는 그 자체, 물질적 생산도구들에 조응하는 개인적 능력들의 전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생산도구들의 총체적 전유는 이미 개인들 자신속에 있는 능력들의 총체의 전개인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자기 실행은 물질적 생활과 일치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치는 개인들의 총체적 개인들로의 발전 및 모든 자연 성장성의 탈각에 조응한다... 연합된 개인들이 총체적 생산력들을 전유함과 동시에 사적 소유는 정지한다.’(3.67 f)52)


여기까지 다룬 맑스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인간의 사회적 노동의 산물은 자연의 산물이다. 이때에 인간은 그의 창조활동의 순수한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연적인 존재능력(잠재태)을 실현하는 반쪽 주체로 된다. 그리고 인간이 반쪽 주체로 사용하는 학문은 자연과학이 소외가 되지 않는다면 인간을 위한 학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지 않고 자연 자체의 고유한 잠재태의 실현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2) 자연의 소외는 사회적인 노동과 일맥 상통한다. 그래서 자연의 소외를 혁명적 실천을 위한 계급적인 고려로 편입했다. 이때에 부가적으로 얻을 만단 것이 있다. 인간의 소외의 지양과 자연의 소외의 지양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면 자연소외에 더욱 더 관심을 갖게된다. 왜냐하면 소외 극복의 정당성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인간과 자연 양자를 함께 고찰할 때에만 진정한 해방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인간의 모든 세계 역사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생성)전개이다. 이때에 인간은 오직 자연에 의하여 타생한 것이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어떠한 시도도 가능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역사를 자연으로부터 만드는 인간의 적극적인 자기인식 뿐이다.(EI, 546) 그 인식은 이제 자연이 인간존재처럼 존재한다고 하는 존재에의 일치로 향해야만 한다. 그것이 참 바른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때에 인간은 자연에 대하여 참으로 책임을 느낄 수 있다. 자연과 역사의 일치가 이제 철학의 실천적 근거로 요청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맑스의 두 가지 자연을 정리해야 한다. 맑스는 우선 잠재태로서의 자연을 설정한다. 그의 노동의 제 1 전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 다음 맑스는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자연을 설정한다. 자연 잠재태와 노동이 합쳐진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서 전자는 하이데거식으로 존재요 후자는 존재자라고 볼 수 있다. 이 때에 존재에로의 일별을 요구한 하이데거를 맑스의 보완으로써 불러낼 여지가 생긴다.



5. 변증법적 사회화 테제


앞절 결론 부분으로부터 맑스의 생각을 보완한다면 (자비의 논리), 맑스는 노동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 자연의 잠재태 혹은 대지와 노동에 의해 생산된 생산수단을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53) 이점은 로크적인 노동에 의한 소유의 권리에 대한 반대로 나타난다. 그리고 맑스는 그 합으로서의 ‘공동점유’를 주장한다. 이 점을 변증법적 사회화 테제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54)

존 로크는 ‘제2의 정부론’의 ‘소유론’에서 소유권의 근거를 인격의 투영으로서의 노동에서 찾았다.55) 그는 하나님이 대지를 인간 자손들에게 공동으로 주었다는 성경구절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신이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생명의 최대가능한 이익과 편이를 위해 세상을 이용하도록하는 이상을 부여하였음을 환기시키면서 대지의 과실들을 인간의 소유물로 할 수 있는 천부인권을 도출하고 그 정당성을 이 과실대상을 대지로부터 분리, 획득하는 노동에서 구하고 있다. ‘대지와 모든 하등 생명체들이 물론 인간들에게 공히 속한다 할지라도, 각 개인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는 그 자신 외에 아무도 권리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육체노동과 그의 손의 작품이 본원적인 의미에서 그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이 예치하고 배치한 상태에서 그가 무엇을 때어내든간에 그것을 그는 자신의 노동과 뒤섞어 그의 고유한 것을 그것에 덧붙였고 따라서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었다. 즉 인간은 그것을 자연이 배치한 공동점유 상태에서 때어냈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의 권리를 배체하는 무엇인가를 노동에 의해 덧붙인 것이다. 이 노동은 노동하는 자의 논란할 여지가 없는 소유이기 때문이다.’(21) 자기 노동을 통해 대지로부터 구한 재료를 가공하여 자연과 구별되는 생산수단과 생산도구를 생산, 소유하는 이 논리는 근대적인 관점이다. 이 소유이론에서 보면 물론 자기노동에 기초한 ‘개인적 소유’는 정당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남의 노동의 착취에 근거한 모든 형태의 소유에 대한 비판의 내재적 척도가 된다. 로크의 개인적인 사적소유는 근대적인 ‘사적소유’를 정당화하고 있다.56) 그리고 앞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맑스는 이러한 사적 소유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소외를 분석했다.

로크와 국민경제학자들이 노동을 부의 원천이라고 보았을 뿐 인간의 삶의 질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그러나 맑스는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의 소외가 인간의 자기소외임을 단언하고 그 지양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다루기 전에 좀 더 살펴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본 논문의 주체, 즉 3장 1절에서 전제로 했던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고 하는 생태학적 위기, 혹은 환경문제와 관련되어 제기되는 사적 소유의 문제이다.

생태학적 환경론자들에 따르면 현대적 생산양식에서 극복해야 할 과제들 중  하나는 ‘엔트로피’ 법칙의 문제이다.57) 물질과는 달리 에너지는 재사용될 수 없는데, 이는 에너지가 한번 사용되면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하기 때문이다. 물질의 형태변화 역시 열의 형태로의 에너지 방출을 수반한다. 열역학의 법칙에 의하면, 일정한 양의 에너지 체계는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으며 다만 변형될 뿐이다. ‘엔트로피’는 바로 ‘일에 소모된’ 에너지의 찌꺼기인데, 이 엔트로피가 생태계가 처리할 수 있는 이상으로 잘이게 되면 엔트로피의 대폭발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비극을 막는 길은 무엇보다도 가용자원의 재활용이 과제로 등장한다. 그런데 맑스주의적 생산관계의 분석을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의한 공황의 도래로 특징지워진다. 자본주의는 불가피한 쓰레기 창출과 더많은 수요의 법칙을 버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58) 자본주의 생산 양식은 내적모순에 의해 비롯되는 ‘성장’이라는 쳇바퀴에 묶여 있는데, 이 모순이 바로 잉여가치의 극대화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반드시 상품의 교환가치가 노임보다 높아야 한다. 그러나 이 생산품을 팔아야만 하므로 튼튼한 소비시장의 형성을 위해 노동자들도 구매력을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자본은 노동을 자본화하고자 하여 실업자를 창출하면서 구매력의 축적을 감소시킨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상품을 구매하여 잉여가치를 창출해주는 노동자의 구매력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노동자에게 충분한 일을 제공하기 위한 끝없는 생산확대가 요구된다. 따라서 시장확대를 통해 더 많은 소비자 확보, 더 많은 임금지불이 요구된다. 그런데 임금이 오르면 자본가의 이윤은 감소되므로, 이윤을 메꾸기 위해 더많은 생산확대, 또 늘어난 생산구매를 위한 노동자 임금증가의 단순한 과정이 반복된다.59)

거칠게 요약한 이와같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은 공황으로 귀결되고 필경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것이 맑스의 결정론적 역사법칙의 골자인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효한가 아닌가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새겨들어야 할 요소가 있다면 현대적 생산방식이 가지고 있는 낭비적이고 소비적인 상황이다.

맑스가 노동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 자연과 노동에 의해 생산된 생산수단을 구별하면서 로크적 사적소유의 권리에 반대하면서 들고 나오는 것은 공동소유이다. 그리고 공동소유를 다루기 전에 집어야 할 점이 당시의 조야한 또는 집단화 공동소유에 대한 맑스의 비판이다.

맑스의 변증법적 사회화테제의 正(Thesis)은 사적소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소유가 로크에 반대하는 사적소유와 모순될 수는 없다. 맑스는 개개인의 생존에 필요한 사적소유를 누누히 강조해왔다. 인간과 자연관계의 세 계기중 어느 하나도 이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맑스의 노동개념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맑스의 공동점유도(실험된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필요로서의 사적소유와 같은 맥락에 있다.

이러한 공동점유는 조야한 공산주의의 이념을 비판해야만 드러난다. 그 비판의 시작은 본 논문 3장 3절의 맥락에 이어져야 한다. 그러니까 사회적 실현의 담지자들인 개인들이 어떻게 과학을 그들의 일반적인 생산력으로 점유하고 그들의 공동적인 책임하에 둘 것인가에 대하여 모색하기 위하여 맑스는 그 부정적 요소를 지적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생시몽 등의)60) 공산주의는 지양된 사적소유의 긍정적 표현, 무엇보다도 보편적인(allgemeine) 사적소유이다. 사적소유의 일반성(Allgemeinheit)안에 있는 이러한 관계 때문에 공산주의는 다음과 같이 파악된다. 1. 공산주의의 일차적 형태안에는 사적소유의 완성된 보편화와 사적소유의 완성만이 있다.;공산주의는 그 자체로서 이중적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사실적(Suchlichen)소유의 지배가 공산주의에 반해서(자기 모순적으로) 너무 크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적소유로 점유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모든 것은 부정하려고 한다.; 공산주의는 폭력적인(gewoltsam) 방식으로 재능(Talent) 등등을 도외시하려고 한다. 신체적이고(physche) 직접적인 점유(Besitz)는 공산주의에 삶과 현존재의 유일한 목표로 취급된다. 노동자의 규정은 지양되지 않고 만인에게 연장된다.’(E I. 534)

실험된 공산주의를 직접 비난하듯이 맑스는 집단주의에 의해 말살되는 개인들의 창조성의 문제를 비난하며, 또 이러한 공산주의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외시킨다고 비난한다.

우리는 그러한 공산주의가 정확히 어떠한 형태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맥락속에서 그 형태를 추적할 수는 있다. ‘이러한 공산주의는-인간의 인격성을 완전히 부정하기 때문에-그 부정이어야 할 사적소유의 일관적인 귀결일 뿐이다. 보편적인 시기심, 자신을 힘으로 자랑하는 시기심은 턈욕이 스스로 생기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충족시키는 은폐된 형식이다. 모든 사적 소유의 관념은 그 자체로서 (필요의) 최소한의 사적소유에 반대해서 시기심과 평준화로 전도된 것이므로, 이것은 또 경쟁하는 존재를 만든다. 설익은 공산주의는... 결코 현실적인 점유(Aneigiung)인 사적소유의 지양이 아니요, 오히려 문명화되고 교양있는 모든 세계의 추상적인 부정만을 입증하며, 가난하고 욕망을 잃은 인간의 비자연적인 단순성에로의 복귀를 입증한다. 그들은 사적소유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번도 성취하지 못한 사적소유에 도달하는 것이다.’(E I.534 f)

그러한 공산주의 집단은 마치 부부관계까지도 공유하는 집단으로 묘사되며, 문명세계를 부정하고 자연속에 파뭇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봐서 열광적 종교집단이거나, 당시 신세계에서 유행했던 자연주의자 집단인 것처럼 보인다.

참인 공산주의는 인간의 소외에 대하여 의식적이고 연대적으로 강조하는 개인들의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서만 지양될 수 있다. 그 공산주의는 위에서 보았듯이 바쿠닌식의 방영제도 아니도, 맑스-레닌주의자들의 ‘국가’나 ‘조합’적인 ‘공동소유’, 개인의 권리를 말살하는 전체주의적 공산주의가 아니다. (이러한 공산주의가 아님을 우리는 맑스의 말로부터 들었다.) ‘사적소유의 긍정적 지양, 즉 인간의 자기외화, 따라서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의한 인간적 본질의 사실적인 점유인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휴머니즘, 즉 완성된 휴머니즘=자연주의이다. 공산주의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사이에 일어나는 모순의 진정한 해결이요... 공산주의는 역사의 해결로 수수께끼이며 자기 자신을 이러한 해결책으로 인지한다.’(E I.536)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즉, 환경과 관련된 ‘관계’에서 공산주의를 본다고 하는 점에서 맑스의 목적론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전지구적 인류의 위의 앞에 선 인간은 기존의 욕망충족적 생산과 생활태도에서 회심하여야 할 시점에 밀려서 있다. 과학이 이 위기를 해결해 주리라고 믿는다면 한가지를 놓치고 있다. 자연이 그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무한정 퍼다 쓸 수 있는 화수분이 아니라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류의 멸망을 기정사실화할 수도 없다. 인류의 현재의 위기는 현재의 인류가 저지른 것이지 미래세대가 저지른 일은 아니다. 미래세대는 현인류의 죄악만 아니라면 행복하게 살 잠재태이다. 이때에 맑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제 윤리로 나타난다. ‘자연의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인 인간에 대하여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과 결합된 곳에서, 즉 다른 인간에 대한 인간의 현존재이며 그 인간에 대한 다른 인간의 현존재로 있는 곳에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현실성의 생존요소로 있는 곳에서만 비로소 자연은 인간의 고유한 인간적인 현존재의 근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인간에게 인간의 자연적인 현존재는 인간의 고유한 인간적인 현존재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을 위한 자연이 된다.’(E I. 538)

국가적 소유 또는 공동소유가 맑스의 이론인가에 관한 문제제기르 하는 연구자들 중 중요한 한 사람이 황태연이다. 그는 교조 맑시즘과 서구 맑스주의자들이 비슷하게 인정해온 맑스의 ‘사회적 소유’=공동소유제 테제에 반기를 들고 이 둘을 분리한다. 황태연에 의하면 첫재, 맑스는 사적 소유의 국유화 및 집단화를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조치로 간주하여 원시적-집단주의적인 공동소유를 사회주의적핵심구조로 제한하지 앟았다는 것이다. 황태연에게 맑스의 소유권문제는 비 집단적이다. ‘자본주의적 착취양식,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Privateigentum)는 개인적인(individuell), 즉 자기 노동에 근거한 사적 소유의 첫번째 부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이...그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의 부정이다. 이 부정은 사적 소유를 다시 산출하지 않지만, 물론 자본주의 시대의 전취물, 즉 협업 및 대지와 노동에 의해 생산된-생산수단의 공동점유(GemeinBesitz)를 다시 산출한다.’(23.791)

점유(Besitz)범주는 소유(Eigentum)로부터 파생한 하급범주인데, 헤겔은 우유적 점유아 실체적 소유를 구별했고61) 이를 추종한 맑스는 ‘개인적 소유’와 ‘공동소유’를 의식적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결정적인 중요성은, 공동점유 상태의 생산수단에 대한 개인적 소유이다.63)

황태연은 앞에서 인용한 자본론의 공동점유(Gemeinbesitz)가 원래 자본론 1판과 2판(1867. 1873)에서는 공동소유(Gemeineigentum)이었으나 1875년 프랑스 역본에서 맑스가 직접 propriété commune 대신에 possession commune라는 술어로 교체했음을 밝힌다. 황태연은 이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맑스적인 “사회적 소유”의 형태로 연합한, 즉, 연대적 소유라고 한다. 그래서 이 “개인적 소유”는 자기노동과의 동일성에 기초하는 한에서 개인적이되 동시에 사적인 소유인 것이라고 한다(황,122).

황태연은 맑스가 개개노동자들의 명확히 구별된 개인적 소유 부분들의 연합방식으로서 “공동점유”를 제안하는 데, 이에 입각하면 사회주의 안에서 소유권자들은 개인들이고, 이에 반해 공동체는 한 낱 점유권자들에 지나지 않으며, 점유권자로서의 이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그리고 법적 지위는 오로지 개인적 소유부분들로 부터만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황태연을 이러한 한에서 맑스의 변증법적 사회화 테제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최대부분이 자본주의적 집중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소유”로 경향적으로 지향되고 이 자본주의적인(이제 더이상 사적이지 않은) 소유는 노동자들과 사무직원들의 개인적인 소유로 사회화될 수 있고, 또 그래야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황,122). 황태연은 그러한 근거의 부설로 맑스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사회적 소유로의 전환이라는 표현을 제 3,4 판에서 자본주의적 소유의, 사회적 소유로의 전환(23,791)으로 교정하였음을 밝히고, 이러한 자본주의적 소유가 오늘날 회사자본 또는 회사소유로서 주식회사라는 법의제적인 법인 형태로 조직되어 있고 맑스는 이 주식회사의 소유형태를 부루주아적 소유의 마지막 형태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42,42)는 것이다. 황태연은 이 주식회사적 소유형태는 ‘옛사회의 품안에서 부화된’(13,9) 미래사회의 암시적 소유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122f).

생산과정 안에서 황태연의 이러한 분석도 논문의 의도처럼 가용자원의 재생산에 기여할 수 있는 소유제도가 무엇인가를 묻는 과정에서 분석해낸 것이다. 본 논문은 이것을 따른다. 그리고 이에서 나아가 결론에서 하버마스의 이론을 재구성하면서 이와같은 분석을 실증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인간을 고려치 않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지양되어야 하며 지양될 수 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철학은 어떤 역할를 수행한다. 철학의 전통적 역할인 사고, 숙고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돌이킴, 새로운 인간과 자연의 관계의 모색, 바로 그것이다. 동시에 이점에서 사상적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맑스로부터 하이데거로 넘어갈 연관점이 생긴다.


Ⅲ. 맑스의 비판과 전향의 요청


맑스이론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대단히 많다. 본 논문의 주제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은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64)에 나타난 노동을 매개로 한 맑스의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인식과 관심에서 하버마스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인식과 관심의 연관성을 분석하기 위해 신실증주의를 낳은 이전의 학의 역사를 역사적 방향에서 추적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사유의 내적 운동을 추적하고 학이 반성에 의해서 비로소 사회이론의 문에 도달토록 하고자 함’인데 ‘이러한 생각은 맑스에게서, 그리고 맑스의 자기 이해에 나타나 있지 않을지라도 맑스의 사회이론에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31) 그러나 맑스의 노동에 의한 물질적 세계의 변형이론은 노동과 그 상호작용, 즉 자연과학적 지식 사회이론등 인류의 자기 창조의 객관적 맥락에 속하는 것들의 대립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서 정신과학을 자연과학에 포함시킨 과학주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에게 인류의 자기 형성의 기본조건으로 여기는 노동과 상호작용은 한쌍의 범주로서 종속적 개념의 역할을 하며, 그는 이것으로 맑스를 수정한다.(99)

하버마스는 맑스의 노동개념의 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그의 사적 유물론의 폐쇄성을 지적한다. 맑스는 그의 자본론에서 노동을 정의하기를 ‘인간과 자연의 물질적 교환, 즉 인간생활을 조정하기 위한 모든 사회형태로부터 독립한 인간존재의 조건, 자연의 영원한 필연성’이며, ‘노동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간의 과정, 인간이 그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자연과의 물질적 교환을 조정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과정이다’(39)라고 정의 한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보기에 맑스는 의식의 자기반성은, 사회적 노동의 기본구조를 드러낸다는 것, 즉 맑스의 의식의 자기반성은 노동이라는 테마에만 국한시켰지 반성은 안했다는 것이요, 그 안에서 대상적 활동을 하는 자연을 인간과 그의 객관적 주위자연간의 종합을 발견한다는 신념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이러한 맑스 비판은 의사소통으로 이어진다.

하버마스는 노동이 유물론에서 종합이라는 성격을 갖는다고 본다(35). 환경을 이루는 자연은 사회적 노동과정에 의하여 주관적 자연존재인 인간과의 매개에서 ‘우리들에 대한 객관적 자연’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노동은 하버마스가 보기에 인간학적으로 근거지워진 범주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식론적 범주이기도 한데, 맑스가 이 종합을 사유가 아니라 노동이라는 매체에 의하여 와성시킨다면, 종합이라는 성과의 재구성을 위한 연결점은 논리가 아니라 경제이며, 따라서 맑스에게는 관념론에서의 형식논리 비판의 위체에 정치경제학 비판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노동을 통한 이 종합은 논리적 구조를 생성시키지도 않으며 인간과 자연간의 절대적 통일을 창출하지도 않는다고 한다(41). ‘사회적 노동에 의한 유물론적 종합의 개념은 인류 역사에 대한 맑스의 관념들을 칸트에서부터 시작하는 사고의 사고의 움직임 안에서 체계적으로 수용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피히테에 의해 규정된 전환점에서, 맑스는 칸트적 인식비판의 입장에 대한 헤겔의 반론의 의도를 받아들인다. 동시에 그는 인식론 자체의 기반을 잃게하는 동일철학에 대해 투쟁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유물론의 철학적 기초도 인식의 철저한 현상학적 자기 반성을 성립시키기에는, 그래서 실증주의적 인식론의 장애를 막기에는 불충분한 것임이 증명된다. 내재적으로 고찰해보면 그 이유를 나는 인류의 자기산출 활동을 노동으로 환원한 것에서 찾는다’(50).

인간의 자기 생산활동을 단지 노동으로 환원시켰다는 것, 그래서 인식의 자기반성을 위한 철학적 기반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맑스비판의 핵심이다. 그러나 하버마스에 의하면, 사회적 교류에서는 문화적 전승에 따른, 주체가 자연과 자신을 해석하는 언어적 의사소통 연관이 결정적이며, 이 의사소통과정이 억압없이 자유스럽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비판적 반성의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따라서 맑스의 한계는 의사소통적 연관을 무시하고 모든 사회적 관계나 교류를 오직 생산을 위한 도구적 행위로만 설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구적 행위의 귀결은 오직 굶주림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필연적으로 예종과 타락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

하버마스의 맑스비판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가 본 맑스의 미래적 윤리적 요청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이 부족하다면 인식의 자기반성적 연관을 딛고넘어 존재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는 하이데거로부터 맑스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도구로서의 기술에 대한 비판은 하이데거에서 잘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기술에 대하여 물음을 던진다. 그는 그 물음이 사유의 길이라고 한다. ‘기술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것은 두가지 대답을 가진다. 하나는 기술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요, 다른 하나는 기술은 인간 행동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 대답은 목적을 설정하고 거기에 맞는 수단을 끌어다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은 하나의 수단이며 인간 행동의 하나라고 보는 기술에 대한 통념을 우리는 기술의 도구적 인간학적 규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65)

하이데거는 현대기술도 마찬가지로 목적을 위한 도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들은 기술을 ‘정신적으로 장악’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리고 ‘이처럼 기술을 지배하려는 의지는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커질 수록 더욱 절박해질 것’이라고 한다.

하이데거가 기술의 본질을 물음으로써 밝혀보고자 하는 것은 기술로 인간을 규정해 보고자 하는 관심이다. 기술은 자연력에 대립하여 간접적으로 자연을 지배한다. 이때에 인간의 지성이 기술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실로 인간은 자기의 목적을 위해 ‘제작하는’ 동물이다(19).

다음으로 하이데거는 세계가 기술로 되어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새로운 도구 즉 기계의 사용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술은 사물과 인간 사이에서 중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때에 기술의 탈은폐성이 드러난다. 기술이 현실과 사물의 존재에 대해 중립적으로 관계하는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술적 매개를 과소평가한 것이요 오히려 기술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함께 규정하면서 현실의 근거제시에 참여하는 것이다.66) ‘따라서 기술은 그저 하나의 수단만은 아니다. 기술은 탈은폐의 한 방식이다. 이 점에 우리가 유의한다면 기술의 본질이 갖는 전혀 다른 영역이 우리에게 열린다. 탈은폐의 영역, 즉 진리의 영역이 그것이다’(35).

탈은폐성이란 말 그대로 숨어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인데, 기술의 본질을 물음으로써 기술이 도구일 때 가지고 있었던 숨어있던 사실(중립적)을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탈은폐성’을 말한다(33). 그리하여 현대기술은 단순히 목적을 위한 도구를 벗어나게 된다. 오히려 그 자체가 자연현실, 세계의 구성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과거의 기술, 예를 들어 풍차는 자연의 힘에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기술은 자연에 무엇을 내어놓으라고 강요한다(Stellt). 최소내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창출하려한다(56). 채굴하다. 분배하다. 전환시키다등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모두 탈은폐의 방식이요, 실은 자연에 대해 강요하는 기술의 존재방식이다(45).

기술의 탈은폐적 방식인 자연에 대한 강요는 ‘획일화’, ‘기능화’, ‘주객의 양극화’로 귀결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빼앗은 것은 상품으로만 기능한다는 것이 획일화이다. 그리고 이때에 사물들의 고유함과 특수함은 보편적인 교환수단인 화폐속으로 사라져버린다.67) 그 다음에, 자연에 대한 강요는 ‘대지를 한낱 광석 저장고라고하는 기능으로 환원시켜버린다’(41). 과거에 침해되지 않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현대기술의 탈은폐방식에서는 오직 자연은 에너지 공급원으로 기능화되어버려서, 자연과 인간의 현재의 관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르게 되었다.68)

그리고 기능화는 모든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조응하는 개개의 부분이상이 아니다. 탈은폐는 그래서 이제 자연을 부품으로 주문하도록 요청한다. 부분으로 중문하도록 요청하는 자연관은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작업장 Gestelt, 그것도 도발적으로 요청하는 자연을 강요하는 작업장의 의미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다(53,55).

기술의 탈은폐적 방식이 가져오는 주객의 양극화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고대,중세의 전통적인 주체의 개념은 ‘존재자’와 연관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 존재자의 믿바탕에 놓여 있는 것, 본래 사물을 그 사물로서 형성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의미했으나 근대에 들어와 이 개념은 외연이 축소되었다. 그리하여 주체는 오직 인간존재에만 통용되었고, 바로 여기에서 인간과 자연관계의 결정적인 변화가 기록되게 됐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인간은 주체로서 자연을 대상화할 뿐이다. 이 대상화의 발걸음을 제촉하는 것이 바로 기술의 탈은폐방식이요, 반대로 이러한 대상화가 기술의 탈은폐상식을 도와준다는 것이다.69)

하이데거가 현대기술이 세계를 구성하는 탈은폐상식이라고 했을 때 그 특징은 자연에 댜한 강요였다. 하이데거는 현대기술의 본질이 바로 ‘강요 Stellen’70)라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의 농토경작은 자연을 강요하는, 이전과 다른 종류의 경작 방법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이제는 그것도 자연을 도발적으로 강요한다. 경작은 이제 기계화된 식품공업일 뿐이다. 공기는 이제 질소공급을 강요당하고, 대지는 광석을, 광석은 우라눔을, 우라늄은 원자력 공급을 강요당하고 있다’(41).

자연에 대한 강요는 도발적 요청을 수반한다. ‘현대기술속에 盛하고 있는 탈은폐는 도발적 요청이다. 그것은 에너지를 내어놓으라고 무리하게 요구한다’(40). 그리고 종국엔 자연을 강요하는 작업장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작업장으로서의 자연에 댜한 인간의 태도는 더이상 인간을 자기자신의 본래의 모습으로 보지 못하게 한다(71). 왜냐하면 인간이 모든 명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인 것이 나름대로 그때마다 그 안에서 자신을 내보이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는 바로 그 비은폐성만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47-49). 문제가 생겨나오는 곳은 작업장에서이다. 인간이 기술에의해 변형된 세계에서 자기자신까지도 이 변형된 세계의 물질적 대상으로만 보게되는 위험이 생긴다. ‘작업장은 현실적인 것을 주문요청하는 방식에 의해 부품으로 탈은폐하도록 인간을 강요하는, 그러한 강요를 집약하는 것이다. 이렇게 도발적 요청을 받은 자로서 인간은 작업장의 본질의 영역에 서 있는 것이다. 인간은 나중에 추가로 닦달고 어떤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어떻게 기술의 본질과 관련을 맺어야 하는가하는 물음은 질문이다’(65).

하이데거는 인간을 탈은폐의 길로 보내는 이것을 역운(versammelnde schieken)이라고 부른다(65). 역운이 전개되는 모든 곳에서 신마져도 인과율의 하나로 전락해 버린다(71). 즉 존재의 원인이요 존재의 근거였던 신, 인간이 모든 사물과 자신의 존재의 근거로 보았던 신은 그 신비로움을 상실해 버린다면 모든 참된도 사라져 버리고, 따라서 인간의 참됨, 자기자신에 대한 존재의 근거까지도 잃어버리게 되는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역운’의 의미이다.71) 그 역운의 원인은 기술이다.

이제 기술은 단순한 인간적 행위도 아닌 그 이상이요, 단지 인간적 산물도 아닌 그 이상인데, 인간을 어디서나 매시간 어떠한 형태의 기술적 시설이나 장치로 몰아세우고 묶어두고 끌고 다니는 압박하는 힘이다. 그런데 그 힘은 ‘자기 자신만을 믿고 있는 인간의 행위로서는 제어될 수 없다’고 한다. ‘그 본질이 존재 자체로 되어버린 기술은 결코 인간에 의해 극복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할 때 이 말은 곧 인간이 존재의 주인이라는 말이 되어버릴 것이다’(107). 존재자체의 물질로서의 기술이란 기술이 오직 ‘강요’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강요가 독립적인 위험으로 존재하게 되어 이제 기술은 존재자체의 진리를 점하게 된다(106). 이때에 필요한 것이 전향을 위한 ‘사고’이다. 순서상으로 사고가 먼저이다. 그 사고는 존재의 끝으로 향해야 한다. 즉 신을 향해야 한다. 거기에 도달해서만 모든 본질의 은폐성이 드러나는 ‘전향’을 배우게 된다(111).

전향을 배울 때 모든 ‘역운’이 무가치한 것만은 아니다. 전향은 ‘즉 존재의 망각이 존재의 본질의 참됨에로 오는 전향은, 오직 그 은폐된 본질 자체내에서 전향의 위험이 한번 그것이 무엇인바 바로 그 위험으로서 제대로 합당하고 밝게 드러날 때에만 일어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113). 그 예화로서 하이데거는 휄더린의 시를 인용한다. ‘위험이 있는 곳에 그러나 구원의 힘도 함께 자라네’(115).

전향의 내용은 ‘존재에로의 일별’이다. 단, 전제가 있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을 꿰뚫은 인간, 맑스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의식화된 인간이 전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전향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맑스의 측면과 친화한다. 존재에로의 일별은 존재자에 대해서 갖는 통찰이 아니다(123). 번갯불같은 번쩍임으로서의 일별의 사건이다. ‘강요’가 모든 존재의 위험의 원인이라면 구원의 사건은 인간적인 고집, 즉 강요의 자세를 버리고 죽을자로서의 세계에 존속된 요소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에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요소인 세계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이다(127-133).

하이데거의 생각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고려라고 할 때 사상의 다음에도 불구하고 맑스와 한편에서 친화력을 가진다. 하이데거에게 하버마스의 ‘인식의 자기비판’은 성취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한다. 맑스도 잠재태로서의 자연과 제 2 의 자연을 구분한다. 맑스와 하이데거의 구체적인 친화점은 실체 혹은 에네르기로서의, 잠재태로서의 존재를 인정하는 점이다.


Ⅳ. 결 론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느 측면에서 하이데거와 맑스가 친화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세계 구성으로서의 하이데거의 기술과 맑스의 노동이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기술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세계의 구성에 참여한다. 물론 이때 세계를 구성하는 기술은 하이데거에게 부정적이다. 이와 반대로 세계를 구성하는 맑스의 노동은 긍정적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자연과정이지만 단순한 자연과정 이상의 것이어서 그것은 신진대사를 규제하며 세계를 구성한다.72) 만약에 맑스의 노동이 맑스에게 ‘사회적 삶의 가능한 재생산이라는 사실적인 조건과 아울러 동시에 경험대상에 관한 가능한 객관성의 선험적인 조건을 형성’73)한다면, 하이데거의 기술도 바로 이와같은 것이다. 실로 맑스와 하이데거에게 공히 ‘만일 우리가 인간을 도구를 만드는 동물의 범주에서 파악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실에 의하여 행위와 세계파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도식’을 뜻하며 ‘노동은 자연과정이지만 단순한 자연과정 이상의 것이어서 그것은 신진대사를 규제하며 세계를 구성한다’74) 고 할 수 있다.

두번째로, 맑스와 하이데거에게 공히 목적론적 혹은 종말론적 경향이 있음을 들수 있다. 인간과 자연의 소외된 관계의 한 가운데서 맑스는 그 지양이 공산주의에 의하여 성취된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죽을자로서의 인간 가운데 구원자의 종말적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종말론적 혹은 목적론적인 그 두 사람의 관점은 바로 그들의 철학의 실천적 방향으로 나타난다. 물론 맑스는 정치적 실천이지만, 하이데거는 철학적 실천이다. 만약 하이데거와 하버마스의 실천개념을 비교한다면, 똑같은 이론에서의 실천이지만, 강도에 있어서는 하이데거가 더 높다.

셋째로, 맑스의 잠재태와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를 들 수 있다. 본 논문에서 인간의 목적적 활동은 자연잠재태의 실현이었음을 밝힌 바 있다. 잠재태와 노동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 대상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자연은 존재자는 될지언정 존재는 아니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는 존재자와의 차이에 관한 존재(das Sein hinsichtlich seiner Differenz zum Seinden)이다. 그리고 사고하는 차이로서의 차이이다(ist die Sache des Denkens....Differnz als Differenz).75) 하이데거가 귀속하는 곳은 희랍 초기의 사유세계이다.76)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존재하는 것은 유일자로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이다. 존재자는 개별자가 거기서 서로 비교되고 드러나 있을 수 있게되는 공통의 기반이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경험의 말이다.77) 이에 반하여 존재는 하이데거에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능동태적인 실체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사유였는데78) 기술의 발달과 함께 버린 것이다.

그러면 하버마스의 맑스에 대한 인식비판이 어떻게 하이데거에 의하여 성취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버마스는 맑스의 인류의 자기형성과정에 대한 견해를 두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사회적 노동을 수행하는자들의 생산적 활동에 의해 추진되는 자기창조의 과정, 둘째, 제계급의 비판적․혁명적 활동에 의해 추진되고 또한 반성의 경험 안에 저장된 자기형성과정이다.79) 하버마스에 의하면 맑스의 노동개념은 이 두측면을 연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맑스의 이 유물론적 종합이 도구적 행위의 범주적 틀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류의 자기형성과정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맑스비판 전술은 하나이다. 철학의 학문에서의 보존 : 그것은 ‘학문에서 비판으로 보존되는 것’ 이다. 즉, 반성이다.

하이데거는 하버마스의 비판을 선취하는 셈이다. 세계의 구성으로서의 기술의 반성은 이론의 종말론적 실천으로 나타난다. 맑스에게 하버마스의 지적대로 세계형성으로서의 노동과 소외의 지양으로서의 실천이 별개라면 하이데거에게 비록 그 실천이 이론적이긴 하지만 세계구성과 소외극복의 실천이 하나이다. 기술이 곧바로 종말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물론 둘다 존재 혹은 자연잠재태를 향하는 것으로 본 논문에서 정리되었다.

본 논문은 인간과 자연관계의 소외, 혹은 환경위기의 극복의 과제에서 출발했다. 물론 이론적 실천이긴 하지만 여기에 머물 수는 없다. 즉, 정치적 실천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때에 하이데거의 철학적 신 혹은 존재로의 관심에 머물수는 없다. 이를 위하여 하버마스를 보완하여 필자의 입장으로 삼아야 한다. 즉 하버마스에게 없는 인간과 자연관계에 대한 이해를 하버마스의 기존의 논리를 통하여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은 딜타이의 해석학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방법을 중요하게 수용하고 있다. 내담자와 상담자 사이의 대화가 텍스트요 그 텍스트의 이해를, 말하자면 문화적 전승의 이해를 해석학적 방법으로 보고 있다. 이 때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비판이론인데, 비판이론은 ‘해방에 대한 인식관심에서 그 과제를 발견’한다(244f). 필자는 하버마스의 이러한 도식을 보완하여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들어가야 한다.

정신분석학의 참 의의는 자기반성적 성격에 있으므로(280), 텍스트에 억압되어 있는 내용을 해석학적 절차에 의하여 풀어내야 한다. 이 때에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정치적 왜곡의 해방이다.80) 그 목표는 ‘문명의 방향지시를 위한 이성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344)이다. 그리고 사회적 제관계는 모든 규범의 타당성이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 안에서 도달된 합의에 의거해서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식으로 맑스를 볼 때, 맑스 텍스트의 억압은 노동과 혁명의 결합점(1. 탐구실천, 2.탐구의 제한된 철학적 자명성(강 50))이 없다는 것이다. 이 억압을 풀어내는 길은 오직 딜타이의 해석학적 경험 밖에 없다. 딜타이의 정신과학의 명제는 체험의 범주가 관건이다.81)

자, 우리는 지금 노동의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관계의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맑스의 텍스트 안에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과 자연의 소외는 분명히 지양되어야 한다. 그 지양의 시도는 실험된 사회주의에서는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고해서 맑스의 인간과 자연관계의 소외의 지양의 이념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 이념의 성취는 엔트로피법칙의 문제와 자원 재활용의 문제가 오늘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실험된 공산사회든 자본주의 사회든 이 두가지 문제에 한하여서는 실패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맑스 텍스트에서는 어렴풋하게나마 인간과 자연관계의 소외의 지양을 위한 정치적 태도로서 주식회사의 발전된 형태를 이야기 하고 있다.82) 엔트로피 법칙의 문제와 자연재활용의 경험을 우리가 못할 바는 아니다. 그것을 필자는 별지의 신문기사를 제공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하버마스에 대한 맑스 텍스트로부터의 재구성은 하버마스의 이론에 기여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하버마스 이론이 반증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83) 더 나아가서 하버마스의 이론을 이와같이 재구성함으로써 그 이론을 반증가능하게 하고 검증가능하게 하는 점이다.

재구성된 하버마스의 이와같은 입장은 동시에 본 논문의 입장이기도 하다.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자연소외는 지양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이 관계를 소외시킨다면 그도 지양되어야 한다. 이론적 실천 - 정치적 실천의 괴리도 극복되어야 한다. 본 논문은 여태까지 그것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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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성공최면심리 행복한 마음여행
글쓴이 : 마음코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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