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먹인 연실에 내 마음 띄워 보내 저 멀리 외쳐본다. 하늘 높이 날아라. 내 맘마저 날아라. 고운 꿈을 싣고 날아라. - 라이너스 연(79년 대학가요제 금상곡)”
이 노래의 가사처럼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인류가 처음 그 꿈을 실어 바람에 날려 보낸 기구가 연(鳶)이다. 연날리기는 정월 대보름 무렵에 즐긴 대표적인 세시 민속놀이이다.
군사용도로 탄생한 연
연을 최초로 날린 나라는 중국과 그리스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유안(劉安, BC 179〜122)이 편찬한 [회남자(淮南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노반(魯般)과 묵자(墨子)의 솜씨가 교묘하여 나무를 깎아서 매를 만드니 사흘을 날아다니며 내려앉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무로 날아다니는 새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사흘간 내려앉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과장이다.”
노반은 곧 공수반(公輸般)으로, 묵자(B.C 480~390)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과학자다. [한비자(韓非子)]에는 묵자가 직접 나무 연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대체로 중국 연의 기원은 약 2,400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나무로 새 모양의 연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 연의 기원은 그리스의 장군이자 기술자인 아르키타스(Archytas, B.C 430~365)가 나무로 새 모양을 깎아 공중에 띄우기를 시도한 것에서 비롯된다. 공수반, 묵자, 아르키타스 모두 전쟁 관련 무기 개발자이기도 하다.
송나라 고승(高承)이 펴낸 [사물기원(事物紀原)]에는 연에 관한 다음의 기록이 있다.
“한 고조(高祖)가 진희(陳豨)를 공격할 때 한신(韓信, ?〜BC 196)이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연을 만들어 띄워서 미앙궁(未央宮)의 멀고 가까운 거리를 측정한 뒤 땅을 뚫고 궁중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혹은 양(梁)나라 태청(양 무제의 연호, 547~549)시기에 후경(候景)이란 자가 대성(臺城)을 공격해 포위하자, 양간(羊侃)이 어린아이를 가르쳐 종이 연을 만들게 하여 연에 문서를 매달아 바람에 날려 연락을 취함으로써 구원병을 부를 수 있었다.”
이처럼 연은 처음부터 전쟁에 사용되기 위해서 발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유신 장군이 날린 연
우리나라의 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647년 선덕여왕 재위시기에염종(廉宗)과비담(毘曇)이 반란군을 일으켜 명활성에 주둔하고, 왕은 월성에 주둔하여 10여 일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때 한밤중에 큰 별 하나가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 등이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유혈이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왕이 패망할 징조라”고 했다.
별똥별이 떨어진 사건은 민심을 동요하게 하였고, 심지어 선덕여왕까지 불안에 떨게 했다. 이때 김유신(595〜673)이 여왕을 뵙고, “길하고 흉한 것은 정한 것이 없으며, 오직 사람이 하기에 따르는 것입니다.”고 말하며 계책을 내었다. 그는 곧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안기고 풍연(風鳶)에 실어 날려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이 하였다. 그리고는 소문을 퍼뜨리기를 어제 저녁에 떨어졌던 별이 간밤에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적군으로 하여금 의혹을 품게 만들었다. 결국 연을 날려 군인들의 사기를 드높여서 비담의 반란군을 패배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연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사람을 태운 연
마르코 폴로(1254〜1324)는 [동방견문록]에서 중국에서 배가 출항할 경우 항해가 잘 될지 안 될지를 점치기 위해, 큰 연에 술 취한 사람이나 바보를 묶어 끈을 잡아 날려 보내는 풍습을 소개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연이 하늘 높이 올라가면 배가 빠르고 순조로운 항해를 할 것이라고 믿었고, 연이 하늘 높이 올라가지 못하면 그 배에 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사람을 연에 태워 하늘에 올리려는 시도는 곧 하늘을 나는 도구의 발명을 촉진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정평구라는 사람이 하늘을 나는 수레인비거(飛車)를 만들어 일본군에게 포위당한 성안에 날아 들어가 사람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여암전서(旅菴全書)]등에 전하고 있다. 연이 없었다면 비거도 발명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연과 새 신앙
연을 가리키는 말로 기록에 따라 방연(放鳶), 풍금(風禽) 등의 명칭이 등장하기도 한다. 풍금은 새처럼 바람을 타고 날 수 있는 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연이란 말 그대로 소리개(솔개)를 나타내는 한자어 ‘鳶’을 우리말로 옮겨놓은 것이다. 또한 ‘풍연(風鳶)’ ‘요자(鷂子)’ ‘요응(鷂鷹)’이라 하여 연을 각각 솔개, 갈매기, 매로써 부르고 있는 것에서도 새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새는 단순히 동물의 차원을 넘어선,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새는 하늘에 계신 신의 말씀을 전달하거나, 신의 자식을 지상에 내려놓는 매개체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늘을 나는 새는 인간이 갖지 못한 능력을 가졌고,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연을 만들어 날리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놀이로 즐긴 연날리기
중국에서 발명된 연을 신라에서 647년 경 날렸다면, 그보다 앞서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연을 날렸다고 추정할 수 있다. 5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장천1호 벽화고분의 앞방 서벽에는 씨름, 사냥, 술래잡기, 춤과 노래, 수레바퀴 던지는 재주 부리기 등 고구려 시대에 행해지던 다양한 놀이가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새 모양의 연을 날리는 사람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다. 초기의 연은 새의 모습이었다. 아래쪽에 있는 사람은 손목을 위로 올리고 고개를 젖혀 새를 바라보고 있다. 비록 연줄은 분명하지 않으나, 연날리기 모습임이 분명하다.
고구려와 신라에서 즐긴 연날리기는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칠월삼일에 바람을 읊다.’ 라는 시에서 “유월의 뜨거운 날에는 연을 보기 어렵더니, 가을에 접어든 지 사흘 만에 한결 쌀쌀해졌네. 이웃 아이들 모여서 부산하게 떠들며, 좋아하며 높은 하늘에 지연(紙鳶)을 날리네.”라고 고려시대 연날리기 모습을 묘사했다.
장천 1호분 벽화의 연날리기 장면, 새를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은 연을 날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기의 연은 솔개 등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려사] ‘충선왕’ 편 기록에는, 어느 날 궁노(宮奴)가 동네 아이들의 지연(紙鳶)을 빼앗아 충선왕(1308〜1313)에게 바치자 왕이 이들 다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아이들이 연을 날리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으며, 연날리기는 임금도 즐기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가을철에도 날리던 연이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設)]에 따르면 ‘우리나라 어린아이들이 상원(정월 대보름)에 연놀이를 한다.’고 하였으니 연을 날리는 시기가 조선시대에 와서 변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액막이연
한 해의 액운을 멀리 날림과 동시에 복을 기원하기 위해 띄워보내는 액막이연.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나라의 대표적 연은 방패연과 가오리연이다. 방패는 사각형으로, 이는 땅을 상징한다. 또한 방패는 액을 물리는 도구(除厄)이자 상징물이다. 즉 방패연을 띠우는 것은 땅의 기운을 하늘에 실려 보내는 것을 뜻하며 나쁜 것을 쫓는(辟邪)의 의미가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음력 12월에 들어서면 농한기에 사람들이 여유가 생기면서 연을 띄우기 시작해 정월 대보름 수일 전에 절정을 이룬다. 특히 정월 대보름날 밤이 되면 달맞이를 하고 난 후에 각자 띄우던 연을 가지고 나와 ‘액막이연’에다 ‘액(厄)’자 한 자를 쓰거나 ‘송액(送厄)’ 혹은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는 액을 막는 글을 쓴다. 이렇듯 방패, 새 형상의 연을 날림으로써 땅의 기운을 담아 하늘에 올려 보내는 풍습은 우리 민중의 생산과 풍요에 대한 소망을 담아낸 것이다. 이처럼 연날리기는 민속 신앙적 의미도 갖고 있다.
연의 추락을 기피하다
1566년 1월 15일 [명종실록]에 따르면 여염집 사람들이 멋대로 연을 날려 궁중에 많이 추락하게 된 것에 대해서 오부 관령을 추고(推考- 죄과를 추문하여 고찰함)하여 치죄(治罪- 가려내어 벌줌)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당시 풍속으로는 연이 추락한 집에는 그 해에 재앙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명에 대해서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정월대보름에 연을 날리는 것은 오랜 풍속인데, 임금이 이를 의심하고 민간에 떠도는 말로 아동들의 놀이를 금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평을 하기도 했다.
1782년 1월 8일자 [일성록(日省錄)]에는 파수군(把守軍) 전우룡(田雨龍)이란 자가 몰래 종묘의 무너진 곳에 들어와 손에 종이 연을 가지고 도로 나가다가 잡힌 사건을 적고 있다. 사람들은 연이 민가에 추락하는 것을 피했다. 권필(權韠, 1569〜1612)이 쓴 [석주집(石州集)]에 등장하는 다음과 시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 우리 집의 모든 액운일랑 네가 가져가서, 인가에 떨어지지 말고 들판 나무에 걸려라. 그러면 봄 하늘에 비바람이 칠 때에, 자연히 액운 소멸해 찾을 곳도 없어지리.”
연싸움
우리나라의 연날리기는 높이 날리기와 연줄 끊기 두 종류로 행해진다.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은 중국의 연날리기 풍습에는 멀리 날리는 풍습만 있고, 연줄이 맞부딪치거나 잘라 먹는 법을 모른다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연줄 끊기는 한국과 일본 정도에서만 보이는 풍습이다. 연싸움은 쌀밥이나 민어부레로 만든 풀에 유리가루나 사기가루를 섞어서 연줄에 발라 상대방의 연줄을 끊는 것이다.
장유(張維, 1587〜1638)는 [계곡집(谿谷集)]에 실린 ‘지연(紙鳶)’이라는 한시에서 “연싸움의 열기가 더운 지방의 열대병에 걸린 것보다 치열하여 하늘을 날던 연이 허공 속으로 뚝뚝 떨어져 나가네.” 라고 연싸움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의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연싸움을 잘해 이름난 아이는 양반집이나 부잣집에 불려가기도 하였고, 매년 정월 대보름 전날에는 수표교(手票橋) 주변에서 연싸움을 구경하는 이들이 담을 쌓듯이 모여 선다고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연싸움이 대단한 볼거리로 성행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연의 장점
연의 제작 과정. 전통 공예기술로,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전 세계에는 수많은 연들이 있다. 우리나라 연은 그 종류만 100여종이 넘고, 창작 연은 그 종류를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우리 연의 대표는 직사각형 중앙에 방구멍이 있는 방패연이라 할 수 있다. 방패연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독특한 것으로서 연의 가운데에 방구멍을 내어 맞바람의 저항을 줄이고 뒷면의 진공상태를 즉시 메워주기 때문에 연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한 바람을 받아도 잘 빠지게 되어 있어 웬만큼 강한 바람에는 연이 잘 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날리는 사람의 손놀림에 따라 상승과 하강, 좌우로 빙빙 돌기, 급상승과 급강하, 전진과 후퇴가 가능하다. 또한 얼마든지 높이 날릴 수도 있고 빠르게 날릴 수도 있어 연싸움도 가능했던 것이다.
세계인이 즐기는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세계인이 즐기는 놀이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연날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다. 연을 날리는 놀이는 생활의 긴장을 풀어줌과 동시에 즐거움을 주었기에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
참고문헌:최상수, [한국민속놀이의 연구], 성문각, 1985;전경욱, [한·중·일 연의 역사와 민속], 태학사, 1996;김호동 역주,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사계절, 2003;유재혁 저, [연의 세계 세계의 연], 교학사, 1995.
글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