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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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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1949. 호는 백범(白凡). 일제 식민지 시절 활약한 민족 지도자, 교육자, 통일 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기에서 구해냈으며, 광복군을 창설,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독립 조국을 건설하려 했음. 수많은 콤플렉스와 역경을 초인적인 의지로 극복한 민족의 영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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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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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와 해방으로 이어지는 대격변의 시기, 한민족을 이끌었던 모든 지도자 중 가장 현명하고 가장 강인했던 인물. 그는 이완용처럼 얄팍한 교양으로 치장하지 않았고, 윤치호처럼 나약하고 오만한 철학에 허우적대지도 않았음. 그가 생전에 보여준 현명함과 주체성, 강인한 의지는 오랜 역경과 고난 속에 길러진 것이라 더욱 값짐.
'상놈'의 자식에 못생기고 정규 교육도 못 받았다는 콤플렉스에 스스로 당당했음. 스스로의 깨달음과 굳은 의지, 꾸준한 노력을 통해 열등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음.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로 가는 곳마다 추종자를 만들어 냈음. 동학 포교를 할 당시 자기 밑으로 수천 명의 신도를 거느렸으며, 공중 부양을 하는 등 신통력을 발휘한다는 소문까지 떠돌았음. 인천 수감 당시 수많은 수감자들을 애국 사상으로 감화시켰으며, 심문하는 일본 순사를 되려 주눅들게 만들기도 함.
낙관 극복 능력이 탁월함. '간판'에 불과했던 무력한 임시 정부를 살리기 위해 수 차례 과감한 의거를 일으켰고, 이는 임시 정부가 강력한 조직으로 재 탄생하는 계기가 됨.
칼을 든 일본 군인을 맨 손으로 제압할 정도로 체력적으로 강인했으며, 지적으로도 영민했음.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신탁통치를 예견했으며, 공산주의 정권의 음모, 미국 주도 하의 자본주의와 세계시장 경제의 음모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음.
현실 안주형이 아닌,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었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어느 한편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했으며, 현실에 안주해 남북이 서로 다른 정부를 설립하면 더 큰 비극이 올 것이라 예상함.
포기와 좌절을 모르는 불굴의 의지의 소유자. 70대의 나이에, 지지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비현실적인 옹고집 노인'이라는 비난을 무릅쓰며 외세로부터 독립된, 통일된 조국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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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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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해주의 가난한 하층민의 아들로 태어나 갖가지 사회 부조리를 체험함. 출생 당시 성명은 창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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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중국으로 가는 도중 밀정으로 활동 중인 일본군 중위 츠시다를 살해함. (김구는 츠시다를 죽이고 그의 돈을 사람들에게 나눠준 뒤, 자신이 죽였다는 방을 써 붙임.) 이 일로 인천 감리서로 압송돼 심문을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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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의 수감 생활동안 심문하는 순사 면전에서 항일 발언으로 유명해졌으며, 다른 수감자들을 교화시켜 우국 사상에 눈뜨게 함. 그의 심문 날엔 온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왔으며, 황성신문에 그의 '활약상'이 보도되기도 함. 결국 고종 황제의 칙명으로 사형 집행이 중지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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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 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을 역임. 처음엔 임시 정부의 문지기 자리를 요청했으나, 안창호의 강경한 반대로 경무국장으로 취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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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이름 뿐인 조직에 불과했음. 활동에 필요한 자금은커녕 생활비도 구하지 못해 임정 요인들이 모두 거리에서 밥을 빌어 먹는 상황이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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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을 타개한 이가 김구였음.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일으켜 일약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알림. 당시 중국 언론은 수억의 중국인들이 못한 일을 조선이 해냈다며 놀라움을 표했고, 이후 중국 및 미주 지역의 한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 소련, 미국의 당국자가 비밀리에 자금 지원을 함. 이로서 임시정부는 완전히 독립된 정치 체제로 부상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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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경에서 찍은 가족 사진. 왼편은 큰 아들 인. 가운데 아래쪽이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한번은 곽 여사의 생신 잔치를 준비하던 중, 곽 여사께서 직접 자시고 싶은 것을 사 드신다고 돈을 받아 가셨음. 그런데 곽 여사께선 곧 그 돈으로 권총 한 자루 사 들고 오시더니 이것으로 일본놈 하나 더 쏘라고 하셨다 함. (사단법인 백범김구선생기념 사업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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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충칭(重慶)에 임시정부 주석(主席)이 됨. 이곳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전개. 연합국으로부터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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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한국으로 귀환하기 전 장개석과 함께 한 환송 만찬. 김구 선생은 당시 중국에서 굉장한 거물 인사로 존경과 대접을 받아, 그 뒤 중국 공산당에서도 성대한 환송연을 여는 등 각계의 환송행사가 잇따랐다. (사단법인 백범김구선생기념 사업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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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을 때 미국의 군정은 김구의 존재를 한국의 '주체 세력'으로 판단, 이를 방해하려는 의도를 보임. 미군정은 김구를 국가 대표가 아닌 개인 대표로 귀국케 했으며, 그의 귀국 보도를 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귀국 연설 시간도 2분으로 제한함. (미국은 한국에 '친미 정권'이 세워지는 것을 원했으며, 이런 미국의 의도에 김구와 임시정부는 강력한 방해 세력이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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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의 동족상잔 비극을 예감한 듯,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 죽는 순간까지 민족 스스로의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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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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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관상을 보았더니 부자가 될 만한 관상은 없고 오로지 가난한 흉상(凶相)으로만 되어 있다.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상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얼굴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관상이 좋은 호상인보다 마음이 좋은 호심인이 되기로 하였다." - 어린 시절 과거에 떨어진 뒤 진로 고민을 할 때
"하느님, 우리 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주십시오." - 중국으로 망명 전 기도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1948년 [삼천만 동포에게 눈물로써 고함]이라는 성명에서
"너희들은 내가 함정에 빠져 갖은 억울한 욕을 다 보고 있을 때에는 낮잠만 자고 있다가, 내가 옳은 일을 해보려면 밤잠을 자지 않고 반대하니 도대체 뭣들이냐! 오늘도 내가 이 땅의 민족을 위하여 옳은 일을 하려 북행하려는데 너희들이 이렇게 방해를 놓고 있으니 한심하다… 북한의 공산당이 나를 미워하고 스탈린의 대변자들이 나를 시베리아로 끌고 가도 좋다. 북한의 빨갱이도 김일성도 다 우리들과 같은 조상의 피와 뼈를 가졌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나는 이북의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보아야겠다" - 조국 통일을 위한 마지막 시도로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을 떠날 당시
"소련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공산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독점 자본주의의 발호로 인하여 무산자를 외롭게 할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자기 상품 시장화 하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 우리는 진실로 국제적으로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친선을 촉진하면서, 우리가 삼천만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자주독립의 조국을 가지기만 원하는 것이다." - 죽는 순간까지 통일을 위한 희망을 끈을 놓지 않으며
"우리 스스로가 경축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남이 주관하는 연회에 춤추는 격이니, 이 기념식을 '춤팔이 경축'이라 하자" - 8.15 기념일 날
"세상에 가장 현실적인 방법과 수단이 어찌 한 두 가지에 그칠 것인가. 땀을 흘리고 먼지를 무릅쓰며 노동을 하는 것보다 은행 창고를 뚫고 들어가 금품을 도취하여서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도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고, 청빈한 선비의 정실이 되어 곤궁과 싸우기보다 차라리 모리배나 수전노의 애첩이 되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도 가장 현실적인 길일지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구절양장(九折羊腸)일지라도 그것이 정도라면 그 길을 택하여야 하는 것이요, 진실로 이것만이 인도(人道)인 것이니 여기에 있어서는 현실적이니 비현실적이니 하는 것은 전연 문제 외의 문제인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나의 소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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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그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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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다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암살됨. 안두희는 김구를 암살한 그 자리에서 자백하고 단독 범행이라 주장. 그러나 안두희의 단독 범행 사실을 뒷받침할 근거는 없음.
현재 김구의 생존 가족은 작은 아들 신(信)이 유일.
김구의 첫딸 화경은 1913년 사망. 아내 최준례는 1924년 상하이에서 계단에서 낙상한 후유증으로 사망. 큰 아들 인(仁)은 1941년 중경에서 병을 얻어 사망함.
작은 아들 신은 해방 후 아버지를 보좌하며 조국 통일에 힘쓰다 아버지의 사망 후, 남한 정부 하에서 공군참모총장, 주중대사, 교통부 장관, 국회의원을 지내며 지도층 인사로 자리잡음.
―뒷날에 뉘 있어 스스로 나라를 사랑했다 이를 양이면 스스로의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고 이제 白凡 가신 이의 생애에다 물어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나 나라를 사랑했다 생각하지 말아라―
박두진(朴斗鎭)의 시 [噫! 白凡先生]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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