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 "약산 김원봉"

감효전(甘曉典) 2012. 2. 20. 21:35

일제가 가장 무서워한 김원봉, 우린 왜 모르지?
김원봉 선생 사망 50주년... 친일파에게 수모당해 월북 후 의문사
심규상 (djsim)
   
의열단과 김원봉 단장을 다룬 신문기사.<약산 김원봉 평전> 발췌
ⓒ 오나이뉴스 심규상
약산 김원봉
 
   
미소공동위원회 환영시민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발췌
ⓒ 오마이뉴스 심규상
약산 김원봉

'의열단 단장, 혁명간부학교 교장, 민족혁명당 당수,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

 

약산(若山) 김원봉 선생(1898~1958?)이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며 얻은 직책들이다. 묵직한 그의 직위마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의 열정과 투지가 묻어 나온다. 

 

올해는 그가 사망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때맞춰 그의 평전이 나왔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최근 <약산 김원봉 평전>(시대의 창)을 펴낸 것.

 

김 관장은 평전에서 김원봉 선생 앞에 접두사 같은 몇 가지 수식어를 붙여 놓았다. '한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대표적 혁명가',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운'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등이다.

 

실제 많은 학자들이 일제강점기 중국 관내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우파의 백범 김구 선생과 좌파의 김원봉 선생을 꼽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김원봉 선생이 낯선 이유는?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인데 왜 우리에게는 그

이름이 낯설기만 한 것일까? 평전은 이 같은 의문을 추적한다. 우선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항일투쟁의 업적'을 확인시킨다.

 

그가 선택한 독립운동 방법은 '폭렬투쟁(暴烈鬪爭)'이다. '자유는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판단에서다.

 

그가 조직한 의열단은 1920~30년대 민족운동단체 중 임시정부를 제외한 가장 긴 활동단체로 기록된다. 그는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에 감격하면서도 무력항쟁이 아닌 비폭력 정신으로 전개된 데 대해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훗날 신채호 선생도 김원봉 선생의 간청으로 쓴 <조선의열단 선언>을 통해 '독립운동 한다면서 칼 한번, 총 한 방 쏘지 않고 편지질이나 하고 외국, 심지어 적국의 처분이나 기다리는 세력'을 성토하기도 했다.

 

이는 김원봉 선생이 폭력투쟁과 무력항쟁, 유격전 등을 벌이는 의열단을 조직한 이유이기도 하다. 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위임통치론이 아닌 노동자 농민이 주체가 된 폭렬투쟁만이 일제를 몰아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칼 한번, 총 한 방 쏘지 않아도 독립이 올까?

 

이후 의열단은 폭탄 국내 반입의거, 부산경찰서장 폭사의거, 밀양경찰서 폭사의거, 종로경

찰서 폭파의거, 일본 육군대장 저격의거, 일제 밀정 처단의거, 경북 의열단 사건, 동양척식

주식회사와 조선식산 은행 습격 의거 등 항일운동에 큰 행적을 남겼다. 일제에게 의열단은 어떤 존재였을까?

 

"일제에게 의열단은 끔찍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본 외무대신은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경비는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할 것'이라는 요지의 훈령을 상해 총영사관에 하달하기도 했다…(중략) …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됐다. 언제 어디서 의열단원이 나타나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다" 

 

민족혁명당 창당과 조선의용대의 창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조선의용대는 나라가 망한 뒤 국제 정규전에서 독립군이 직접 참전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에 자극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혁명가들 조차 '조선의용대를 학습하자'는 글을 게재했다.

 

이들은 "조선의용대는 중국항전을 지원하고 일본혁명가들과 관계를 형성했다"며 "이는 일본 혁명 투쟁운동 역사상 유례 없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 일"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조선의열단 단원들.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발췌
ⓒ 오마이뉴스 심규상
김원봉

"조선의용대 창설일, 고딕체로 기록해야" 

 

김 관장은 평전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1938년 10월 10일과 관련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고딕체로 기록되어야 할 날"이라며 "근현대사 교과서나 대부분 독립운동사 자료에 이 날이

기록돼 있지 않은 것 자체가 반쪽짜리 독립운동사"라고 지적했다.

 

1942년 김원봉 선생은 조선의용대의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때는 조선의용대 주력이 중국 공산당인 연안 쪽으로 넘어간 이후였지만 이는 김구 중심의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김원봉 중심의 좌파 민족주의 세력 간 대통합을 이루었음을 의미했다. 그는 한국광복군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맡아 싸우다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그를 소외시켰고 귀국 또한 김구 주석 등 다른 임시정부요인 15명 보다 열흘 가까이 늦게 2진으로 들어왔다. 이는 1진의 탑승자 선정을 놓고 논란이 일자 김원봉 선생이 스스로 2진으로 양보한 데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대중들로 하여금 1진으로 도착한 '김구=임정'이라는 등식을 구축하게 했다. '민혁당과 김원봉'은 자연스럽게 가려져 임정 내 2인자임에도 당시 4인자로 소개됐다.

 

김원봉 선생은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다. 임시정부 계열이 좌우합작을 거부하고 미군정에 협조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했다.

 

'해방조국'에서 3일간 통곡한 이유

 

   
<약산 김원봉 평전>
ⓒ 오마이뉴스 심규상
김원봉

하지만 그는 정작 해방조국에서 3일간 통곡해야 하는 기막힌 현실과 대면했다. 1947년, 김원봉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지시로 총독부 악질 경찰 출신인 노덕술에게 피체돼 갖은 수모와 고문을 당했다.

 

그는 "내가 일본 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냐"며 통곡했다 한다.

 

김 관장은 친일파들이 활개 치는 '해방조국'을 이백의 시 <만분사(萬憤詞)>를 내세워 힐난했다.

 

가시나무를 심고 계수나무를 뽑는다(樹楱拔柱)

봉황새를 가두고 닭 따위를 귀히 여긴다(水鳳寵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월북해 조선인민공화당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 꾀했다.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본격화되자 북한에 남아 초대 국가검열상을 지냈다.

 

하지만 이 때문에 6·25 한국전쟁에서 9남 2녀의 형제 중 친동생 4명과 사촌 동생 5명이 보도연맹으로 죽임을 당했고 부친 또한 외딴 곳에 유폐됐다가 굶어죽게 되는 참혹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선생은 1957년 북한 노동상에서 해임된 후 이듬해 9월을 끝으로 이름이 사라졌다. 김 관장은 그의 숙청설과 은퇴설· 자살설 중 숙청설에 무게를 실었다. 저자는 외세의 간섭 없는 중세중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납북독립운동가들과 뜻을 모으다 처형당한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결국 그는 사인이 무엇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채 사라졌다. 해방 후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남과 북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었던 김원봉 선생.

 

평전의 끝자락에서 김 관장은 독자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그가 저승에서라도 '조국을 외면하지 않도록' 조국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김 관장은 답변대신 마지막 글귀를 이렇게 적었다.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먹물들의 사대주의 근성"
    또 다른 독립운동사 <약산 김원봉 평전>
 
   
약산 김원봉 선생. 해방직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약산 김원봉 평전> 발췌
ⓒ 오마이뉴스 심규상
약산 김원봉
<약산 김원봉 평전>은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의 6번째 인물평전이다.
 
김 관장은 <박열 평전>을 시작으로 <백범 김구 평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등을 펴냈다. 하나같이 한국근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김원봉 평전>은 김 관장이 기자 신분으로 김원봉 의열단장을 만나 가상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속에서 김 관장은 체 게바라에 못지않은 그의 삶이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을 '먹물들의 사대주의 근성'이라고 꾸짖는다. 
 
평전은 김원봉 선생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선 길가는 나그네의 목을 적시는 옹달샘처럼 글 곳곳에 시가 들어 있다. 선생을 '그림자 같은 혁명가'로 칭하면서 김소원의 시 <그림자>를 배치한 경우가 그것이다.
 
특히 선생이 3일간의 통곡의 사연을 전하면서 허균의 <통곡헌기>를 소개한 대목은 평전읽기의 재미를 더한다. 
 
이 책은 또 다른 독립운동사다. 주인공뿐만 아닌 함께 의열단 활동을 했던 동지들의 삶을 부족하지 않게 수록해 놓았다. 누구나 책장을 덮을 때쯤 신흥무관학교, 임시정부와 의열단, 민족혁명당, 황포군관학교, 조선의용대는 물론 항일무장투쟁사, 해방전후사 등 해외 독립운동사를 자연스럽게 정리하게 된다.
 
이 책에는 그동안의 연구결과외에 일본 정보기관의 자료 등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자료가 많이 들어 있다.
 
김 관장은 지금도 밤잠을 줄여가며 자료를 찾고 또 다른 글을 쓰고 있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앞두고 <안중근 평전>을 준비 중이란다.
 
내년에 나올 <안중근 평전>을 기다리기에 앞서 적어도 <약산 김원봉 평전>을 미리 읽어 두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일 듯싶다.

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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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98k  (121.♡.122.72) 08-02-28 11:38
어떤 작자는 김원봉 선생은 "공산당과 협력했기 때문에" 위인으로 대접해서는 안된다고 하네요.

독재자  (203.♡.218.1) 08-02-28 11:46
87년 우연히 약산 김원봉 관련 서적을 보았지요....
조직적 무장 항일 투쟁의 일선에 서신 분이지요.  솔직히 임시정부라는 곳에는 너무 많은 기회주의자가 있었습니다. 속된 말로 간판만 들고 도망다닌 사람들도 많고, 독립 후 자기 자리 마련하려고 한 자들도 많고...(김구선생님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약산 선생님의 평가가 너무 절하되었지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공산주의가 대세였음에도.  중세시대 기독교도라고 전부 폄하 할 수 없듯이..약산도 재평가 되어야 할 듯합니다.

자호  (211.♡.170.215) 08-02-28 13:09
조선혁명선언 --단재 신채호

의열단선언이라고도 한다.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은 활발한 활동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들의 행동강령 및 투쟁목표가 필요함을 깨닫고 신채호에게 선언문을 청하였다. 5개 부분, 6,400여 자로 쓰여진 이 선언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 ·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는 의미에서 그의 민족주의 이념의 폭과 질의 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선언에 표명된 민족해방운동 방략의 핵심은 ‘민중 직접 폭력혁명론’으로, 민족주의 우파 세력에 의해 주창되던 외교론 ·준비론·문화운동론 ·자치론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민중 중심의 철저한 반일 민족해방 투쟁의 전개를 강조하였다. 특히 선언에 구체화된 민중 직접혁명론은 의열단의 이후 진로를 규정한 것이었으며, 의열단원 자신이 그 선도적 역할을 담당할 필연성을 제기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는 의열단 노선의 재정립과 방향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선언에 의하여 의열단은 항일 투쟁노선을 정당화하고 지표가 되는 이념을 확립하게 되었다. 만해 한용운의 ‘조선독립의서’와 함께 식민지시대 2대 명문장으로 평가된다.

1923년/의열단 조선혁명선언
의열단은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가장 선명하게 지향한 독립운동단체로서 김원봉이 주도하였다.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기림에서 김원봉·윤세주·이성오·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옥·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 13명으로 결성되었다.

공약으로

①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키로 함

②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키로 함

③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④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하시하처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하시하처에서나 조회에 필응함

⑧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團義)에 진함

⑨일(一)이 구(九)를 위하여 구(九)가 일(一)을 위하여 헌신함

⑩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함

등의 10개조를 정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기관은 물론, 일인 지배자·매국노·친일파
거두·밀정 등을 암살 파괴하고자 했다.
의열단 활동은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밀양경찰서 폭탄투하사건, 조선총독부 폭탄투하사건, 종로경찰서 폭탄투하사건, 동경 이중교 폭탄사건, 동양척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하사건 등 눈부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의열단 투쟁의 정신은 1923년 신채호가 김원봉의 부탁으로 작성한 의열단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혁명선언>

1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川澤)·철도·광산·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百一稅)·지방세·주초세(酒草稅)·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 하에서 멸망할 뿐이오, 대다수 인민과 일반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일년 내내 소득으로 자기 한 몸과 처자의 호구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갖다바치어 그 살을 찌워주는 영원한 소·말이 될 뿐이오, 끝내는 그 소·말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의 수입이 해마다 높고 빠른 비율로 증가하여 '딸깍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가 굶주린 귀신으로부터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될 뿐이며,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 발짝의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울분과 원한이 있으면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 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양성소-학교로 보내고, 조선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된다 하면 '단군을 속여 스사노오노미코토(表잔嗚尊)의 형제'라 하여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이 다스리는 땅'이라 한 일본놈들의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를 찬미하는 반(半) 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하는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 하에 감옥에 구류되어, 주리를 틀고 목에 칼을 씌우고, 단근질·채찍질·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팔다리를 달아매는, 콧구멍에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刑律), 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감옥문에서 나온대야 평생 불구의 폐인이 될 뿐이라. 그렇지 않을지라도 발명 창작의 본능은 생활의 곤란에서 단절하며, 진취 활발의 기상은 처한 형편의 압박에서 소멸되어 '찍도 짹도' 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채찍질·구박·압제를 받아, 바다에 둘러싸인 삼천리가 하나의 큰 감옥이 되어, 우리 민족은 아주 인류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 본능까지 잃어 노예부터 기계가 되어 강도수중의 사용품이 되고 말뿐이며,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지푸라기로 보아, 을사 이후 13도의 의병 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군대가 행한 폭행도 이루다 적을 수 없거니와, 즉 최근 3·1운동 이후 수원·선천 등이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서간도·노령 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주민을 도륙한다, 촌락을 불지른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능욕한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몸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아동을 잔혹하게 다룬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따라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異族)통치가 우리 조선민족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죽여 없앰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2.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평화' '한국독립조선'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 강토를 집어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조선인민 생명재산 자유보호' '조선인민 행복증진' 등을 신명(申明)한 선언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2천만의 생명이 지옥에 빠지던 실제를 못 보느냐?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민원식 등 한 두 매국노를 시키어 이 따위 미친 주장을 부름이니, 이에 부화뇌동하는 자-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사한 무리가 아니냐?

설혹 강도 일본이 과연 관대한 도량이 있어 이들의 요구를 허락한다 하자. 소위 내정독립을 찾고 각종 이권을 찾지 못하면 조선민족은 온통 굶주린 귀신이 될 뿐이 아니냐? 참정권을 획득한다 하자. 자국의 무산계급의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강도국의 식민지 인민이 되어 몇몇 노예 대의사(代議士)의 선출로 어찌 굶어죽는 화를 면하겠느냐? 자치를 얻는다 하자. 그 어떤 자치임을 막론하고 일본이 그 강도적 침략주의의 간판인 '제국(帝國)'이란 명칭이 존재한 이상에는, 여기에 딸려 있는 조선인민이 어찌 구구한 자치의 헛된 이름으로써 민족적 생존을 유지하겠느냐?

설혹 강도 일본이 갑자기 부처·보살이 되어 하루아침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돌려주며, 내정과 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와 경찰을 일시에 철수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이름뿐인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모두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받든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할지니라.

일본 강도 정치 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전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망이 있으랴? 쇠망한 인도족·유태족도 문화가 있다 하지만, 하나는 금전의 힘으로 그 조상의 종교적 유업을 계속함이며, 하나는 그 토지의 넓음과 인구의 많음으로 오랜 옛날 자유롭게 발달한 남은 혜택을 지킴이니, 어디 모기와 등에 같이, 승냥이와 이리같이 사람의 피를 빨다가 골수까지 깨무는 강도 일본의 입에 물린 조선 같은 데서 문화를 발전 혹 지킨 전례가 있더냐? 검열·압수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스스로 떠들며,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이상의 이유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내정독립·자치·참정권 등을 주장하는 자)나 강도정치 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문화운동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3

강도 일본의 구축(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름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첫째는 외교론이니, 이조 5백년 문약(文弱)정치가 '외교'로써 나라를 지키는 으뜸 계책으로 삼아 그 말세에 더욱 심하여, 갑신(甲申)이래 유신당·수구당의 성쇠가 거의 외국의 원조 유무에서 판결되며, 위정자의 정책은 오직 이 나라를 끌어들여 저 나라를 제압함에 불과하였고, 그 의로하는 습성이 일반 정치사회에 전염되어 즉 갑오(甲午)·갑진(甲辰)양전쟁에 일본이 수십 만의 생명과 수억 만의 재산을 희생하여 청·러 양국을 물리치고, 조선에 대하여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하려 하는데 우리 조선의 '조국을 사랑한다. 민족을 건지려 한다'하는 이들은 한 자루의 칼과 한 방의 총알로 어리석고 탐욕스러우며 포악한 관리나 나라의 원수에 던지지 못하고, 청원서나 여러 나라 공관에 던지며 탄원서나 일본정부에 보내어 국세(國勢)의 외롭고 약함을 슬피 호소하여 국가존망·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그래서 '을사조약' '경술합병'-곧 '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뒤 몇 천년만의 처음 당하던 치욕에 조선민족의 분노적 표시가 겨우 하얼빈의 총, 종로의 칼, 산림유생(山林儒生)의 의병이 되고 말았도다.

아! 과거 수십 년 역사야말로 용기 있는 자로 보면 침 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어진 자로 보면 상심할 역사가 될 뿐이다. 그리고도 나라가 망한 이후 해외로 나아가는 아무개 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미일전쟁·러일전쟁 등 기회'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고, 최근 3·1운동에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 있게 분발하여 전진하는 의기를 쳐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둘재는 준비론인, 을사조약 당시에 여러 나라 공관에 빗발돋듯 하던 종이쪽지로 넘어가는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정미년의 헤이그 밀사도 독립회복의 복음을 안고 오지 못하매, 이에 차차 외교에 대하여 의문이 되고 전쟁 아니면 안되겠다는 판단이 생기었다. 그러나 군인도 없고 무기도 없이 무엇으로써 전쟁하겠느냐? 산림유생들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성패를 생각하지 않고 의병을 모집하여 높은 관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로 지휘의 대장이 되며, 사냥 포수의 화승총을 몰아가지고 조일(朝日)전쟁의 전투선에 나섰지만 신문 쪼가리나 본 이들-곧 시세를 짐작한다는 이들은 그러할 용기가 아니 난다. 이에 '오늘 이 시간에 곧 일본과 전쟁한다는 것을 망발이다. 총도 장만하고 돈도 장만하고 대포도 장만하고 장관이나 졸병감까지라도 다 장만한 뒤에야 일본과 전쟁한다'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준비론 곧 독립전쟁을 준비하자 함이다. 외세의 침입이 더할수록 우리의 부족한 것이 자꾸 느껴지고, 그 준비론의 범위가 전쟁 이외까지 확장되어 교육도 진흥해야겠다. 상공업도 발전해야겠다. 기타 무엇 무엇 일체가 모두 준비론의 부분이 되었다. 경술(庚戌)이후 각 지사들이 혹 서·북간도의 삼림을 더듬으며, 혹 시베리아의 찬바람에 배부르며, 혹 남·북경으로 돌아다니며, 혹 미주나 하와이로 돌아가며, 혹 경향(京鄕)에 출물하여 십여 년내와 각지에서 목이 터질 만치 준비! 준비를 불렀지만, 그 소득이 몇 개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 없는 모임뿐이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의 부족이 아니라 실은 그 주장의 착오이다. 강도 일본이 정치·경제 양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게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법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 전투력의 백분의 일에 비교되게라도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4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구축할지며, 강도 일본을 구축하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이 없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종사하려면 어느 방면부터 착수하겠느뇨?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이상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곧 '을'의 특수세력으로 '갑'의 특수세력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인민은 혁명에 대하여 다만 갑·을 양세력 곧 신·구 양상전 중 누가 더 어질고 누가 더 포악하며 누가 더 선하고 누가 더 악한가를 보아 그 향배를 정한 뿐이요, 직접 관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목을 베어 백성을 위로한다'가 혁명의 유일한 근본취지가 되고 '한 도시락의 밥과 한 종지의 장으로써 임금의 군대를 맞아들인다'가 혁명사의 유일한 미담이 되었거니와, 오늘날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 고로 그 비등·팽창의 뜨거운 정도가 숫자상 강약 비교의 관념을 타파하며, 그 결과의 성패가 매양 전쟁학상의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 돈 없는 군대 없는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富力)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국의 도적도 구착하나니,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첫 걸음은 민중각오의 요구니라.

민중은 어떻게 각오하느뇨?

민중은 신인(神人)이나 성인(聖人)이나 어떤 영웅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이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각오의 첫째 길이니라.

일반민중이 굶주림·추위·피곤·고통, 처의 울부짖음, 어린애의 울음, 납세의 독촉, 사채(私債)의 재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 되는 강도정치의 시설자인 강도들을 때려누이고, 강도의 일체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四海)에 전하며 뭇 민중이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굶어죽음'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라 하 길이 남아 잇음을 깨달아, 용기 있는 자의 그 의분에 못 이기어 약한 자는 그 고통에 못 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보편적으로 전염하여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사·교활·잔혹·포악한 강도 일본이 마침내 구축되는 날이라. 그러므로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새로운 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養兵)십만이 한 번 던진 폭탄만 못하며 억천 장 신문·잡지가 한 차례 폭동만 못할지니라.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발생치 아니하면 그만이거니와, 이미 발생한 이상에는 마치 낭떠러지에서 굴리는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안하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라, 우리 지나온 경과로 말하면 갑신정변의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우던 궁중의 한때 활극이 될 뿐이며, 경술 전후의 의병들은 충군애국의 대의로 분격하여 일어난 독서계급의 사상이며, 안중근·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하였지만 그 뒷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으며, 3·1운동의 만세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언뜻 보였지만 또한 폭력적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도다. '민중·폭력' 둘 가운데 하나만 빠지면 비록 천지를 뒤흔드는 장렬한 거동이라도 또한 번개같이 수그러지는도다.

조선 안에 강도 일본이 제조한 혁명 원인이 산같이 쌓이었다. 언제든지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개시되어 '독립을 못하면 살지 않으니라' '일본을 구축하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구호를 가지고 계속 전진하면 목적을 관철하고야 말지니, 이는 경찰의 칼이나 군대의 총이나 가사 교활한 정치가의 수단으로도 막지 못하리라.

혁명의 기록은 자연히 처절하고 장엄한 기록이 되리라. 그러나 물러서면 그 뒤에는 어두운 함정이요, 나아가면 그 앞에는 빛나는 활기이니, 우리 조선민족은 그 처절하고 장엄한 기록을 기리면서 나아갈 뿐이니라.

이제 폭력-암살·파괴·폭동-의 목적물을 대략 열거하건대.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찰꾼·매국노

4. 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완화하고 중상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써 마주할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 강도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로 구축할지니라.



5.

혁명의 길을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별될 뿐이요 정신사에서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세력을 파괴하려는 것이,

첫째는 이족 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이란 그 위에 '일본'이란 이족 그것이 전제(專制)하여 있으니, 이족 전제의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적 조선이 아니니, 고유적 조선을 발견하기 위하여 이족 통치를 파괴함이니라.

둘째는 특권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민중'이란 그 위에 총독이니 무엇이니 하는 강도단의 특권계급이 압박하여 있으니, 특권계급의 압박 밑에 있는 조선민중은 자유적 조선민중이 아니니, 자유적 조선민중을 발견하기 위하여 특권계급을 타파함이니라.

셋째는 경제 약탈제도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탈제도 밑에 있는 경제는 민중 자기가 생활하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가 아니요, 곧 민중을 잡아먹으려는 강도의 살을 찌우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니 민중생활을 발전하기 위하여 경제 약탈제도를 파괴함이라.

넷째는 사회적 불평등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자 위에 강자가 있고 천한 자 위에 귀한 자가 있어 모든 불평들을 가진 사회는 서로 약탈, 서로 박탈, 서로 질투, 서로 원수로 보는 사회가 되어, 처음에는 소수의 행복을 위하여 다수의 민중을 해치다가 마지막에는 또 수수끼리 서로 해치어 민중 전체의 행복이 끝내 숫자상의 공(空)이 되고 말뿐이니, 민중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파괴함이니라.

다섯째는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전해 내려오는 문화사상의 종교·윤리·문학·미술·풍속·습관 그 무엇이 강자가 제조하여 강자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더냐? 강자의 오락에 공급하던 도구가 아니더냐? 일반민중을 노예화하던 마취제가 아니더냐? 소수계급은 강자가 되고 다수민중은 도리어 약자가 되어 불의의 압제를 반항치 못함은 전혀 노예적 문화사상의 속박을 받은 까닭이니, 만일 민중적 문화를 제창하여 그 속박의 철쇄를 끊지 아니하면, 일반민중은 권리사상이 박약하며 자유향상의 흥미가 결핍하여 노예의 운명 속에서 윤회할 뿐이다. 그러므로 민중문화를 제창하기 위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함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족 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등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타파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나아가면 파괴의 '칼'이 되고 들어오면 건설의 '깃발'이 될지니,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할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 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이요 둘이 아닌 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 줄 알진대, 현재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 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 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다리 위'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출처 : 밀양광장 ("동남권 신 국제공항" 밀양 유치, 밀양지리, 역사)
글쓴이 : 레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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