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정만진 기자]
근대 또는 현대로 들면서 대구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의 대표격은 무엇들일까? 세 가지 사건을 들라면,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 1946년의 '10.1폭동사건(대구시사의 표현)', 1960년의 '2.28민주운동(대구근대역사관의 표현)'이 될 것이다.
그동안 대구시는 국채보상운동을 기리기 위해 상화고택 바로앞의 서상돈고택 정비, 시내 중심가 작은 공원에 '국채보상공원' 이름 부여, 시민회관 앞마당에 기념동상 건립, 대구시립 중앙도서관 1층에 국채보상운동 체험실 설치 등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의 의의에 견주면 그것들은 답사지로서 많이 미흡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2011년 10월 5일 국채보상공원 안에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을 개관함으로써 제법 역사여행 답사지다운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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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0.1폭동사건'에서부터 '10월항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을 가진 1946년 10월의 '대구사태(신복룡의 표현)'는 아무런 답사지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대구시의 공식기관인 대구근대역사관은 이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대구 시내에서 '1946년 10월의 대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답사지가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표지석도 없고, 안내판도 없다. 대구근대역사관이 단 한 줄로도 언급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것들은 애당초 기대할 수 있는 일도 아닐 터이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때 조봉암 후보는 대구에서 72%를 득표했다. 이승만 후보는 28% 득표에 그쳤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자는 이승만이었다. 대구사람들은 그처럼 열렬히 조봉암을 지지했지만, 전국적으로는 이승만 후보가 70%를 득표했기 때문이다.
대구 시내에 '1946년 10월'을 찾아볼 수 있는 '눈에 띄는' 답사지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은 '대구의 역사'에 대한 일정한 왜곡이다. 신복룡의 < 한국분단사 연구 > 를 읽은 답사자가 그의 책에서 '대구사태의 진원지는 대구의학전문학교'라는 '지식'을 얻은 다음에야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건물을 직접 찾아가야 하는 형편이니, 이래서야 어찌 '2011 대구 방문의 해'에 어울리는 외지인 초청 자세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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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89년 11월 14일 명덕로터리의 2.28기념탑은 끝내 철거되고 만다. 시내 중심가와는 거리가 아득한 두류공원 기슭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1960년 시위의 주동자였던 이대우(경북고), 최용호(대구고) 등이 대구시의 방침에 반대했지만, 정치적 의도를 가진 대구시 공무원들의 행정권력은 이를 기어이 관철시킨다. 경북일보가 주최한 2.28 제29주년 기념좌담회(1989년 2월 28일) 기사를 잠깐 읽어보자.
이대우 : 프랑스 같은 데는 도로와 건물을 옮길지라도 기념비적인 것은 보존한다. 부산의 안락동 충렬탑은 부산 교통에 방해가 되지만 누구 하나 옮기자는 의견이 없다. (중략) 2.28기념탑이 학생 데모의 의미를 주니까 당국이 옮길 찬스를 노리다가 시민들이 교통방해를 내세우자 장소를 갑자기 옮기려 하고 있다. 2.28기념탑은 1990년 2월 28일 두류공원 안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이후 2.28기념탑은 잊혀졌다. 2.28기념탑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대구시민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려온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는 정의감도 서서히 사라졌다고 말하면 비약인가. 1946년의 10월 1일도, 1960년의 2월 29일도 시민들이 기억하지 않기를 바라는 '우민 정치'의 획책은 결국 '관광 대구'를 햇살 받은 안개처럼 만드는 데 충실히 기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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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5,6,7대 대통령 가난한 농민의 아들 성실한 교육자 용기있는 혁명가 민족중흥의 위대한 정치인 1937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모교를 위하여 이 교사(校舍)를 세우다 '용기있는 혁명가'와 '민족중흥의 위대한 정치인'이라는 표현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 그는 과연 '성실한 교육자'였던가? 교육기관 안에 세워진 기념물들이므로 특히 이 부분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지 답사자들은 물론 교정에서 매일 생활하는 학생들에게도 오히려 부정적 인식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은 사실을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는 않으므로 논의는 이 정도에서 그치고 본론으로 돌아가야겠다. 과연 박정희 흉상과 기념비가 외지인을 초청할 만한 관광자원이 될 것인가? 이미 구미시에 '박정희 생가'가 있는데 그것과 겨룰 만한 경쟁력이 있을 까? 답은 당연히 '없다'이다. 1907년, 1946년, 1960년에 대구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은 나라 안에서 맞상대를 찾을 수 없는 비중을 지녔지만, 경북대사범대와 부속고등학교는 그렇지 못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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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2.28과 관련해서는 기념관 건립이 추진 중에 있다. 운동의 출발점인 명덕로터리 인근의 초등학교 교정에 건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하지만 2.28기녑탑을 두류공원에 둔 채로는 반쪽 기념관이 될 뿐이다. 명덕로터리 복판이 불가능하다면 남문우체국 앞으로라도 탑을 다시 옮겨 '현장'의 생생한 기운을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대구근대역사관에 1946년 10월에 관한 역사학계의 해석과 평가를 게재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곳곳의 현장도 되살려야 한다. 역사는 숨기고 묻어서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그렇게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인류의 발전을 저해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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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 네티즌본부
글쓴이 : 라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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