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오래된 강연 초록입니다. 그러나 우리 노동운동에서 짚고 가야 할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아직도 이 글의 내용은 유효하다고 생각되어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피아골의 강연장
지리산은 해방전사의 어머니
민주노총 금속연맹 지역본부 간부 지리산 답사 강연
오늘 금속연맹 경기본부 여러분들이 초청하셔서 이곳 지리산의 피아골에서 지리산의 역사에 대해서 강연하게 된 것을 대단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지리산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습니까만 8.15 해방을 소년으로 맞았고 미제의 식민지 땅에서 한 소년의 눈앞에서 민족이 둘로 갈라지는 뼈를 깎는 듯 한 아픔을 안고 이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섰고, 한때 투쟁의 마당에서 이탈되어 학문의 길에 들어섰지만 후대의 청년학생들의 줄기찬 해방투쟁에서 다시 용기를 얻어 투쟁을 한층 더 높이기 위하여 핵심 근간을 조직하는 사업을 했으나 적의 탄압으로 두 번이나 감옥살이만 된통으로 얻어맞기만 해서 제가 한 일이 과연 우리 민족해방전선에서 어떤 의미를 준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혹시나 해방투쟁에 도움은커녕 해나 끼치지 않았는가 하는 자책마저 하기도 합니다.
저는 지리산에 대해서 그저 산이 좋아서 그리고 여기에 우리들의 수많은 동지와 선배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뼈를 묻은 곳이어서 젊을 때는 1년에 적어도 서너 번은 찾아왔고 이 큰 산의 많은 골짜기와 여러 갈래의 능선을 한두 번도 아니게 다녔습니다.
제가 경북대학교에서 유신체제에 반대한다고 쫓겨난 다음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이 지리산이었고 그 다음에 나의 고향 밀양의 천황산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와 같은 길을 걷다가 조국의 산에 피를 뿌리고 뼈를 묻은 곳에 있을 해방전사의 영령들에게, 그리고 한 대열에서 싸우다가 지금 조국의 산하에 붉은 꽃을 피우면서 있을 나의 어린 시절의 동무들의 혼령에게 내가 앞으로 갈 길을 인도해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1.
우리민족은 단군조선이 창건되어 반만년의 역사를 창조해 왔고 그것은 자주의 역사였으며 창조의 역사였습니다. 조선반도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그렇기는 하지만 세계에서 자주성이 강하기를 비길 데 없기 때문에 외세의 수많은 침략을 받으면서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또 어느 계급사회에서도 그렇지만 그 사회의 사회발전의 추동력은 근로민중이었고 특히 우리민족의 근로민중은 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국난을 겪을 때 그 해방운동의 주체로서 그 주력군이었으며 민족사회가 계급사회로서 지배자들에게 압제를 받을 때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가는 변혁에서도 주체로서 주력군의 역할을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 이 지리산은 조국의 남부에 있으며 서쪽으로 질펀한 호남벌판이 퍼져있어서 나라의 식량을 담보해주는 나라의 부의 원천으로 되고 있습니다. 호남의 민중은 나라의 부를 창조하는 생산도 활발하고 그 생산활동에서 아름다운 문화도 꽃피는 곳입니다.
그러나 근로민중의 생산활동이 활발한 곳에는 착취와 압제의 기승 또한 심한 곳입니다. 다른 산악지대도 그렇지만 지리산은 호남평야와 동쪽의 영남지방의 평야지대에서 지배자들의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다가 더는 살길을 찾을 수 없게 된 민중들이 찾아드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지리산은 산이 깊고 산에는 자연이 주는 여러 가지 재부가 수없이 널려있어서 여기에 들어온 유랑민은 허기진 배를 달랠 수 있고 숨을 자리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과연 지리산은 민중에게는 조국의 어머니였습니다. 자식이 밖에서 남에게 당하다가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자식이 한 일을 묻지도 않고 가슴에 품어주고 찬밥일망정 따뜻하게 허기진 배를 채워주며 누추한 이부자리지만 따뜻한 곳에 잠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바로 조국의 산 지리산은 이처럼 시달리는 민중에게는 바로 어머니의 치맛자락이고 그 골짝은 어머니의 품입니다.
이미 259년에 발생한 신라 농민들의 통치계급에 맞선 저항으로, 그리고 499년에 일어난 백제 농민의 초기 봉건체제에 대한 봉기로 농민군과 그들의 가족들은 이 지리산의 어머니 품으로 찾아들어와 봉건체제를 이탈하여 산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왕조지배체제의 역사로는 산적이라고 또는 초적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지배자들의 수탈에 더는 참지 않고 산의 자연의 엄중함을 견뎌내고 어머니의 품을 찾듯이 거기에서 사람다움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역사 공부를 많이 못해서 가지가지 다 들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고려, 조선 왕조의 봉건체제에서 농민들이 수탈을 당하다가 더는 견딜 수 없는 처지에 빠지면 그들이 억매어있던 땅을 버리고 찾아드는 곳이 깊은 산중입니다. 또 지배자들에게 맞서 봉기를 했을 때 봉기의 주력군은 농민이었고 지도부가 전멸되거나 투항하면 중하층 농민들은 살던 고향을 버리고 산으로 찾아듭니다. 이처럼 우리 민중은 더는 살기 어려운 처지에 몰리면 어머니의 품을 찾듯이 깊은 산을 찾습니다. 산은 모든 가난한 민중을 풍요로운 자연으로 먹여주고 재워줍니다.
포악한 일제 식민지체제에서 땅을 빼앗기고 기르던 집짐승까지 빼앗겨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민중들은 산을 찾아듭니다. 그 시대에 우리 농민들은 얼마나 많이 빼앗겼습니까. 나중에는 딸까지 빼앗아 갔습니다. 정말 모진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말기에는 우리 청년들을 징병으로 끌어다가 그들의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했고 대학생들을 학병으로 끌어갔으며 징용이야 보국대야 하면서 탄광이나 전쟁터에서 종으로 부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중은 자주성이 강하기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민족이기에 많은 청년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을 반대하여 깊은 산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지리산 자락 함양에서 청년들을 지도하고 계시던 이현상 선생은 지리산에 들어온 이들을 모아 일제를 반대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리산뿐만 아니라 조국의 깊은 산마다 무장대오들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이현상 선생은 이들에게 일제를 반대하여 연합군이 조선반도에 상륙하기 전에 후방에서 적을 타도할 무장을 준비하고 빈약한 무기로 훈련을 했으며, 무장을 위하여 이들 대오를 이끌고 일제의 항복하기 바로 얼마 전에 함양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서의 무기고를 털고 불을 질렀습니다. 이것은 이제 조국 안에서도 조선민중이 손에 무기를 들고 일제와 결전한다는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낸 장거였습니다.
2.
1945년 8월 15일 왜놈들이 이 땅에서 쫓겨나서 우리 민족에게는 일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반봉건사회를 타도하여 민중의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는 민족해방민주주의 혁명의 과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는 조국의 남부를 해방하기 위하여 들어온 것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들어왔습니다. 미군은 일제의 무장해제를 한다는 명목으로 조국의 남부에 들어왔지만 미제는 일제의 통치기관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기반을 만들고, 조선을 미합중국의 한 주로 해달라고 청원한 바 있는 그들의 충실한 앞잡이인 이승만과 연결을 지웠습니다.
미제는 일제의 무장해제 이후 조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뒤집어엎고 미소공동위원회를 무산시켰습니다.
일이 이 지경으로 되어버리자 소련은 우리들이 해야 할 무제해제의 임무가 끝났으니 조선문제는 민족자결의 원칙으로 조선민족에게 맡기고 조선반도에서 주둔군은 1947년 연말까지 동시 철수하자고 하고 그들은 철군하고 말았습니다. 미제는 난데없이 당시 그들의 거수기 노릇을 충실히 했던 국제연합으로 조선문제를 끌어가서 유엔감시하의 선거를 한다고 했으나 북에서는 조선문제는 조선사람의 문제이므로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유엔의 기관이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남부 민중은 미제와 이승만 일당의 조국분단책동에 반대하여 1948년 2월 7일 총파업을 결행했고 결사 투쟁의 길로 나갔습니다. 조국의 남부의 민중들은 이러한 조국의 분단책동에 결사적으로 항쟁했습니다. 이때까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라고 반대했던 김구 선생도 조국의 분단을 앞두고 「남조선 인민에게 읍소함」이라는 성명서를 내고 눈물로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를 호소했습니다.
이러한 남북조선민중의 결의를 담아 분단을 반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이 평양에서 모여 조선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했습니다.
이승만 일당과 친일지주,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리고 미제가 들어오자 새로 제 세상인 양 날뛰던 숭미사대주의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남북의 민주정당 사회단체들은 조국의 분단이라는 현실을 눈앞에 두고 정치협상을 진지하게 논의하기 위하여 평양에 모였습니다.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당시 우익이라고 지칭했던 민족주의 인사들도 대거 참여했습니다.
거기에서,
1. 조국을 분단하는 남조선 단독선거를 결사반대한다.
2. 조선문제는 조선인민의 자결권에 맡겨라,
3. 미군을 즉시 철수하라,
4. 남북 조선의 각계각층의 의사를 망라하고 참여하는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는 내용을 담은 결의를 했습니다.
미제는 1948년 5월 10일에 유엔감시하에 조국의 남부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친일지주와 일제에 붙어서 동족을 못살게 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모아 이승만 정권을 만들어냈습니다.
한편, 미제와 이승만 일당은 1947년 7월말 미소공동위원회가 파탄나자 남부 전역에 야수적인 대탄압을 했습니다. 더 이상 같은 동포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의 탄압은 잔인했습니다. 민주인사의 집을 불지르고 기둥에 밧줄을 매어 끌어당겨 집을 엎어버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북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와 토지개혁에서 쫓겨난 친일지주들이 월남하여 이승만의 비호를 받아 조직된 「서북청년회」와 일제 때 만주에서 동족을 못살게 굴던 일제밀정 노릇을 불사했던 깡패들과 돈을 주면 무슨 일이나 하는 국내 깡패들이 친일 정치인들의 비호를 받아 설쳤던 우익폭력집단들의 경찰의 비호를 받아 무법천지를 방불한 테러들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이들에다 노골적인 남조선 단독선거를 위한 경찰의 조직적 탄압과 폭력으로 남의 민중은 누구나 집에서 안심하고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그리고 도시소시민들, 그 중에서도 남로당을 위시하여 민주정당, 전평, 농민위원회, 민청, 민애청, 소년단까지 민주단체에 활동했던 사람들, 더구나 김구 선생님이 조직한 한국독립당까지, 거기에서 한때나마 조금이라도 가입한 사람들까지 모두 체포, 구타, 파괴로 조국의 남부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맞아죽고, 병신이 되고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테러와 탄압으로 이제는 더 견딜 수 없게 된 민중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들고일어난 것이 2.7 총파업이었습니다. 역사는 이를 2.7구국투쟁이라고 부릅니다. 그 투쟁은 결사적이었습니다. 철도, 전기가 끊어지고 공장이 서고 시골에서는 경찰관서를 백주에 습격하여 경찰 무기를 탈취하여 투쟁에 가담한 민중들은 무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기를 든 민중들은 야산에 들어가서 야산대를 조직했습니다. 곳곳에서 야산대가 조직되고 이러한 무장대오가 여기저기에서 한데 모여 하나의 조직으로 이루어진 것이 남조선 유격대라는 것이었습니다.
강원도와 경북북부일대에서 하나로 뭉쳐진 태백산빨치산, 경북남부와 경남북부일대에서 뭉쳐진 운문산빨치산, 전라남북도에서 지리산에 모여들어 조직된 지리산빨치산, 경북서부와 충북일대에서 모여든 덕유산․가야산빨치산 등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이승만이 이북에서 넘어온 「서북청년단」의 정착지로 한다는 공공연한 선동에 힘입어 대거 제주도에 들어와 제주도의 농민들과 어민들을 못살게 굴어 민심이 험해지고 있었습니다.
2.7구국투쟁과 남조선 단독선거를 위한 대대적 탄압을 계기로 수많은 청년들이 한라산으로 들어가서 야산대를 조직하고 있던 중 제주시에서 일어난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와 서북청년회 해체를 주장하는 시위군중에게 서북청년회와 경찰들이 총격을 가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를 계기로 1948년 4월 7일 전제주도의 한라산 봉우리마다 봉화를 올려 유격대를 조직하여 경찰관서와 서북청년단 회관을 불 지르는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바람에 전제주도의 치안이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미제와 그의 직접 지도를 받은 전투경찰이 투입하여 진압을 했지만 일제가 숨겨두고 간 무기를 찾아 무장한 유격대를 당해낼 수 없게 되자 미제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했습니다.
3.
결국 제주도에서는 남조선 단독선거 투표를 하지 못했고, 8월 15일에 이승만정권이 성립되자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병력을 계속 투입했고, 이 와중에 제주도 진압을 위해 여수항구에서 대기하는 양심적인 국군의 하층 장교와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동포의 가슴에 총을 쏠 수 없다, 동포를 학살하는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병영을 뛰쳐나와 경찰서를 습격하고 여수에서 기차를 타고 가서 순천을 점령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여수․순천반란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반란군은 한때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인민위원회를 복구하여 경찰관과 이승만의 졸개 청년단을 잡아가두고 그 중에서 악질적인 자 몇을 처단하기도 했지만 대거 투입된 진압군을 맞아 총탄이 떨어지고 준비도 없는 상황이어서 진압되어 점령한 도시를 내어주고 지리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리하여 지리산빨치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 빨치산을 구빨치산이라고 부릅니다. 이 구빨치산에 대해 한국전쟁 이후 북의 인민군이 후퇴를 못한 부대가 지리산에 들어와 새로이 빨치산 투쟁을 벌린 전쟁 후의 빨치산을 신빨치산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이 나기 전 한때 지리산빨치산은 위세를 떨쳤지만 이를 지도하던 당시 남로당의 모험적인 투쟁과 당의 지도부에 들어있던 핵심간부들의 밀정적 파괴공작으로 다른 지역의 빨치산과 더불어 숫한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또 토벌부대의 야만적인 농민학살로 지지 기층대중을 잃어 전쟁이 일어날 때는 깊은 골짝에 소수 대원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지리산은 이현상 선생님의 지휘를 받아 토벌부대의 공격을 영활하게 받아넘겨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다른 지역의 빨치산은 거의 토벌되어 명맥이 있다고 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 사이 지리산에는 수많은 겨레의 청년들 피로 적셨고 산자락 마을은 불탔으며 거기에 살던 농민은 이른바 통비분자로 몰려 학살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은 출생부터 수만의 민중들의 피로 젖은 손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남부 민중의 해방투쟁의 총결집체였던 빨치산 투쟁의 불꽃이 시들고 있었지만 민중의 역량은 다른 곳에서 불붙고 있었습니다.
4.
이승만의 야만적인 학살 만행에 대한 민중의 원한과 분단에 대한 통분의 가슴으로 1953년 5월 31일의 총선거에서 절대적인 패배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미제와 이승만 일당은 이러한 국면을 만회하기 위하여 생각해낸 것이 전쟁이었습니다. 미침 미국은 전승의 호경기도 끝나고 경제가 말할 수 없을 만큼 불황에 접어들었습니다. 미제는 조선반도에서 조성된 난국과 그들 자신의 난국을 해결하기 위하여 전쟁의 검은 음모의 손을 내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통일을 기원하는 민중은 이제 2년후에는 이승만이 정권에서 나가떨어지고 아니 그 전이라도 국회에서 남북협상을 결의하고 나선다면 모두 끝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승만은 동경으로 날아가서 맥아더를 만났고 당시의 국무장관인 덜레스가 날아와서 38선을 둘러보고 갔습니다. 덜레스가 둘러보고 간지 1주일도 되지 않아서 전면전쟁이 터졌습니다.
당시 38선에서는 매일같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전투규모도 그냥 무력충돌이 아니라 대대규모에다 어떤 때는 연대 전체가 전투를 벌이는 그야말로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투가 조금 더 지역적으로 규모가 커지면 바로 전면전쟁으로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러한 전면전쟁이 1953년 6월 25일 새벽에 터졌습니다. 한국군 17연대가 옹진반도를 따라 38선 접경지대인 해주를 바라보고 나갔는데 북의 인민군은 의정부 쪽으로 전면공격하면서 17연대를 포위 섬멸했으며 춘천방면으로 공격했고 주문진으로 상륙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미제의 음모와 이승만의 자구책으로 기가 막힌 3년 동안의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3년 동안에 몇 백만의 동포가 죽고 가족을 잃고 가산이 불타고. 수십만의 애국자들이 공산당으로 몰아 처참한 학살을 당했습니다.
전쟁은 처음에는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진격하고 호남을 석권했지만 조선민족의 내부문제에 미제와 그 추종국가들이 간섭하여 국제전으로 전변했습니다. 낙동강까지 진격했던 인민군이 미제의 대량적인 물량을 동원한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통일을 바로 눈앞에 두고 전쟁으로 분단이 영구화될 지경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미제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급속히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만 많은 부대가 후퇴의 길이 막혀 남부에 잔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남부에 남아서 유격전으로 못다 이룬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 했습니다.
지리산의 이현상부대는 전쟁이 나자 지리산에서 내려와 새로이 부대를 재편하여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미군의 후방에 침투하여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을 했는데, 8월의 대후퇴에 북상하다가 덕유산으로 들어와서 지리산에 들어온 부대와 합류하여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노동당 6개도당 산하에 빨치산부대를 포괄하는 통합사령부가 편성되었습니다. 여러 도당 산하의 유격대 부대가 조직되어 활동하면서 부대편성을 마치고 통합되어 가면서 군청 소재지나 읍면의 큰 부락 등을 공격하는 큼직한 전투를 벌이면서 기세를 올렸습니다.
5.
이에 대해 미제와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0월 중순부터 11사단(사단장 최덕신)을 토벌부대로 파견하였습니다. 최덕신은 일제 때 중국의 장개석 중앙군 밑에서 장개석의 토벌작전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작전은 건벽청야라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초토화작전입니다. 50년 겨울에 시작된 작전은 보기로는 대성공을 거둔 것 같지만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같은 수많은 양민을 무리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놓았습니다. 이 작전으로 하여금 빨치산은 지방부대들이 지리산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1951년 11월에 백야전 사령부가 설치되어 휘하에 수도사단, 8사단, 1개사단의 경찰부대들이 지리산의 남과 북에서 포위작전을 벌려 심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1952년 1월에 있었던 대성골의 전투는 토벌부대는 비행기, 야포 등 온갖 현대무기를 동원한 밤낮 연 5일동안 계속된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로 빨치산은 수많은 희생을 내었고, 1953년 9월 18일의 빗전골의 전투로 이현상은 전사했으며, 마지막으로 53년 12월부터 시작되어 이듬해 5월달까지 실시된 토벌작전은 그때까지 남아있던 800명의 빨치산이 140명으로 축소되었고 이 작전에서 주요지휘관으로 빨치산을 끝까지 이끌어왔던 박영발, 김선우, 방준표, 조병하, 박찬봉 등이 전사했습니다. 그후 남은 빨치산도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1954년 가을에 지리산은 총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리산 빨치산은 조국이 눈앞에서 분단되고 있는 시기에 2.7구국투쟁의 결과로 반미 민족해방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조국의 청년들이 이 지리산의 능선과 골짜기마다 붉게 붉게 흘렸습니다. 나는 이 지리산에 올 때마다 이들 선배들이 조국을 위해 흘린 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흘린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이들이 흘린 피는 조국해방과 민주주의를 위해 다시 피는 꽃으로 부활하고 있음을 봅니다.
미제 식민지를 반대하여 지리산에서 피를 뿌려 해마다 봄에는 연붉은 철쭉꽃으로 피고 여름에는 청청한 푸른 기상을 보이다가 가을에는 만산을 뿕게 수놓는 넋으로 태어나며 겨울에는 눈바람으로 원한에 사무친 울부짖음으로 식민지 조선의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외세를 물리치고 겨레의 자주성을 찾아 해방투쟁에서 쓰러진 우리들 선대의 한 맺힌 해방조국의 원망이 아니겠습니까.
6.
전쟁으로 분단이 고착된 지 어언간 반세기를 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청년학생들과 노동계급은 투쟁을 쉬고 있지 않았습니다. 1960년의 4. 19 민중봉기로 이승만 정권을 뒤집어엎고 청년학생들은 자주적 평화통일의 큰길에 들어섰고, 노동계급은 이승만 정권이 만들어놓은 어용노동조합을 엎어버리고 생산기업체마다 새로운 민주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단위 노동조합이 모여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산업노동조합연맹으로 발전시키려고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선대의 해방투쟁의 역사를 이어 새로운 해방투쟁의 대열을 꾸리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새로운 국면을 맞아 미제는 박정희로 하여금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수많은 통일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을 잡아 감옥에 처넣고 교수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투쟁은 군사깡패 파쇼통치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제와 일본군국주의 자본이 이 땅에서 마음 놓고 활개 칠 수 있도록 외자 기업체와 국영기업체에 노동3권을 유린하는 악랄한 노동법을 만들어 노동자의 인권마저 유린했습니다. 소자본기업도 기업주와 정보부 요원이 결탁하여 깡패를 동원하여 노동조합을 만들 기미만 있어도 테로와 공산주의자로 몰아 폭력으로 짓밟고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이에 대한 투쟁의 하나로 청개천 평화시장 피복공장 노동조합 결성을 둘러싼 투쟁에서 전태일 동지가 분신으로 박정희 군사깡패정권에 항거가 있었습니다. 곳곳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었고 군사깡패정권에 대한 민주화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었습니다. 정권에 미친 박정희는 마침내 영구집권을 위해 그 잘난 헌법마저 짓밟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이른바 유신정권이라는 파시즘체제를 만들어냈습니다.
세상에는 더 이상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공개적인 공간, 합법적인 공간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투쟁은 마치 지리산의 선대 빨치산 투쟁의 국면으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노⋅학연대가 제창되어 노동자의 계급의식화운동,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결합,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민족해방운동과의 결합의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민족해방 민주주의운동의 전선을 결성할 일이 우리들 앞에 나서게 되었고, 각계각층의 운동의 핵심적 선진분자들이 모여 운동의 힘을 하나의 조직으로 뭉쳐야 하는 통일전선의 결성이라는 과제를 받아 안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군사깡패는 파쇼의 몽둥이춤을 한참 추다가 그의 수하에게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박정희의 모진 힘으로 버티어 왔던 유신정권은 와르르 무너지고 박정희가 죽어버리자 미제는 박정희가 길러온 전두환으로 하여금 군사파쇼정권을 전두환에게 이어받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몇 달 만에 엄청나게 불어난 민주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광주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을 총검으로 학살했습니다. 나라 안은 다시 군사깡패들의 무법적이고 무소불위로 휘두르는 폭력으로 가히 사람 못살 세상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향하는 민중들의 열망은 더욱 더 불타올랐고 그 혹독한 군사깡패들의 탄압을 정면으로 맞받아 전진했습니다. 군사깡패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미제가 그들을 아무리 두둔해도 날이 갈수록 군사정권의 위상은 떨어졌고 그들의 부패는 폭로되어갔습니다. 미제는 끝까지 남부를 저들의 예속 밑에 두려고 문민정부를 만들어보기도 했으나 오히려 그것은 저들의 예속정권임을 더욱 노출시키는 짓거리만 할 뿐이었습니다. 미제의 이러한 속임수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일뿐인 것입니다.
7.
이제 우리는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의 근원이고 모든 불행의 근원인 식민지적 모순, 즉 저들의 대리정권을 통한 미제의 식민지통치와 미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어 자주성을 구현하고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아우르려는 조선민족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투쟁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6.15 남북공동선언이 선언되고 미제의 대통령이 북의 공화국을 방문하겠다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는 데도, 아직도 잠을 덜 깬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북의 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느니, 그래서 남에서 노동해방을 이루어 북을 해방해야 한다느니, 심지어는 남의 경제력이 우월하니까 북을 개방시켜 북을 흡수통일하고 그 다음에 남북의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사회주의혁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미제의 식민지통치아래에서 그 예속정권이 만든 노동관리를 위한 노동악법이 판을 치고 노동운동을 언제라도 구실을 붙여 탄압할 수 있는 보안법이 있는 상황에서 노동해방을 어떻게 이루겠는가 말입니다.
그들은 미제 독점자본들이 기르다주는 연구소의 논문들, 독점자본의 광고군 행세나 하는 언론이 퍼뜨리는 정보와 통계를 가지고 책상머리에서 머리를 짜낸 것이 고작 식민지 자본주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근사하게 떠들고 있습니다. 한국자본주의는 날 때부터 식민지적 예속과 수탈을 위하여, 미제의 독점자본들이 식민지적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매판자본주주의 일뿐, 그래서 자본의 주체가 없는 반자본주의일 뿐입니다. 한국자본주의의 자본의 주체는 독점자본의 현대적 형태인 다국적 초국적 자본의 모습을 한 미 제국주의 독점자본인 것입니다.
지금 남의 경제는 미제가 주체인 다국적 초국적 자본의 가장 위력한 국제금융자본인 「세계은행」, IMF에게 완전히 굴레가 씌워져 나라의 예산, 노동자의 임금, 공무원의 대우, 국가하부구조의 건설, 금융과 자본의 구조 개혁 등 우리 국민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콩 놓아라, 팥 놓아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을 보면서도 국가독점자본이고 경제력이 북쪽보다 월등하다는 잠꼬대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8.15해방 이후 형성된 새로운 형태를 가진 미제의 식민지의 본질은 아직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민족해방투쟁을 하는 변혁운동가들이 말하는 식민지, 반제, 미제라는 말만 들으면 상투적이라느니, 시대에 뒤떨어진 투쟁이라느니 하면서 가장 현대적인 이론가 행세를 하면서 노동운동전선에 혼란을 안겨주고 분열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노동계급의 사상의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최고의 이상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역사에서 더는 착취와 압제가 없고 세상 사람들이 타고난 성품과 능력대로 일하고 일한 만큼 받는 것이며 사람답게, 즉 사람의 본질적 속성인 자주성을 구현하면서 사는 세상이며, 마침내 사람이 자주적으로 일하고 누구나 필요한 만큼 풍요롭게 받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노동계급의 이상은 과학으로 담보되어야 가능성이 성립되고 이러한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사람들의 투쟁이라는 실천으로 현실성을 보장합니다.
노동계급은 계급적 본성에 따라 생각이 과학적입니다. 노동계급의 과학에는 세상은 언제나 변하지 않아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만물이 변화 발전한다는 변증법적 세계관이 있으며, 이러한 세계관에서 변증법의 법칙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이 변증법의 법칙으로부터 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창출해낼 수 있고 투쟁이 과학성을 보장받아 승리의 길을 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변증법을 열심히 공부하도록 합시다.
세상만물은 언제나 변화 발전한다고 해서 사람을 위한 것으로만 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위해 변화 발전시켜야 합니다.
사람은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자연이나 사회, 즉 세계의 변화발전에 순응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나 사회, 즉 세계를 사람들의 요구에 맞게 변화 발전시킵니다. 그것도 개개의 혼자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유기적인 집단, 즉 사회를 이루어 사회적 활동으로 이루어냅니다.
사람들이 이루는 사회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위해 힘을 합쳐 세계를 사람들의 요구에 맞게 개조 변혁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합니다. 앞선 시대의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토대 위에서 세계를 사람들의 요구에 맞게 새로이 개조 변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개조 변혁운동은 다른 생명체가 살아가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과 다르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법칙, 사회의 법칙을 목적의식적으로 적용하여 세계를 개조 변혁하는 실천입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사람들은 세계를 개조변혁하면서 삶을 더욱 더 풍부하게 하려는 본질적 특성인 자주성을 가지고 있고, 세계의 객관적 법칙을 사람의 요구에 맞게 적용하여 목적하는 바를 이루어내는 본질적 특성인 창조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개조변혁하려는 것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하며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공통된 생각을 실현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본질적 특성인 의식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루는 사회는 자주성을 구현하는 일이며, 사람들의 삶이 뜻이 있는가, 없는가, 말하자면 흥하는가, 망하는가 하는 공동의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사회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낮은 단계에서 여러 가지 높은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인류가 계급사회에 들어와서 착취와 불평등으로 얼룩진 역사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풍요롭고 평화가 넘치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서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언제나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근로민중들이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일해 왔습니다. 그것은 근로민중이야 말로 사람들의 자주성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
지금 우리는 계급사회로는 최후의 단계인 자본제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자본제사회는 근로민중에서 노동계급이 바로 역사발전의 주력군에서 전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양적으로도 그렇지만 질적으로도 모든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나 인류의 이상사회를 창조하려는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으로 각성되어 있고 과학적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역사발전의 주체의 주력군임을 사상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노동계급은 스스로의 힘은 단결에서 나오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노동계급은 단결된 힘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는 아무 물질적인 힘이 없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불패의 힘이 단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본가계급과 자본주의를 지탱해주는 지배체제는 이 노동계급의 단결을 백방으로 저지하고 있습니다. 법으로도 그렇지만 사상의식으로 그렇게 합니다.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한 온갖 허접한 잡 사상을 내오고 온갖 퇴폐문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패의 노동계급은 이러한 온갖 잡사상과 문화를 물리치고 근로민중의 건전하고 밝은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는 새롭고 힘찬 문화를 스스로 창조합니다.
노동계급의 단결된 힘은 처음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노동조합으로 뭉칩니다. 이 노동계급의 단결에 대해서 자본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 공동으로 대항합니다. 그래서 노동계급은 노동조합을 산업별로 조직의 힘을 뭉칩니다. 자본제국가경제의 한 분야가 노동계급의 힘으로 자본에 대항할 때 자본제를 유지할 국가는 공권력으로 저지해 나섭니다. 그것은 국가보안법을 위시하여 각종 노동악법, 인권을 유린하는 집회시위법 등의 무기를 들고 나옵니다. 노동계급은 산업노동조합을 다시 하나로 아울러 노동조합 총연맹을 조직하여 국가의 공권력과 맞서 투쟁합니다.
노동계급은 이러한 노동계급을 전위로 하는 근로민중을 사상의식적으로 하나의 힘으로 뭉치고 노동계급과 농민 그리고 도시소시민들의 이해관계를 위한 투쟁을 전략전술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사령부인 노동자당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과정은 노동계급의 주체의 힘으로 자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투쟁조직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자본은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자본과 지배계급은 그들의 하수인들이 만들어 놓은 온갖 잡 사상을 가진 자들이 가장 노동자를 위하는 척 하면서 운동대열에 쓰며들어 옵니다. 그것은 노동운동은 경제투쟁이지 정치투쟁은 아니라는 개량주의, 노동조합을 단위노조로 노동계급의 단결력을 분산된 힘으로 만들어 문제를 노자간의 협조로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만드는 조합주의, 현대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의 찬밥덩어리를 받아먹고 복지국가를 부르짖는 수정주의 등으로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양각색으로 사상이론을 가지고 있고 노동계급의 조직 내부에 들어와서 조직의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 으르렁거리며 싸우며 종파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개량주의, 조합주의, 수정주의 등 잡사상과 종파분자들의 책동을 사상의식적으로 청산하지 않고서는 일사불란한 단결의 힘을 조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으로 각성된 노동계급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내어야 하고 또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사상의식으로 단결된 노동계급의 힘은 필승불패입니다.
지금 우리는 노동해방, 민중해방, 민족해방의 민중적 민족적 과제를 받아 안고 있습니다. 노동해방 민중해방이 없는 민족해방은 우리들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일제 식민지 해방이 노동해방 민중해방을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제국주의 침략을 맞고 말았다는 사실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식민지체제를 벗어나지 않고 민족의 분단체제를 청산하는 민족해방 없이 노동해방 민중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4.19민중봉기에서 전취한 아주 조그만 과일마저 군사 불한당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는 역사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개량주의, 조합주의, 수정주의 사상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책상머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른바 자칭 노동이론가들이 미제가 평양에 가서 조⋅미간의 평화공존을 논의하는 마당은 보지 못하고 남의 경제력으로 북을 개방시켜 통일을 이루어 나아가서 북을 민주화한다는 둥 잠꼬대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노동계급의 대열에 들어와서 온갖 종파주의적 행동을 자행하여 노동해방이 민족해방과 직결되고 있는 사실에 그 작은 손바닥으로 가리고 해방운동의 대열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이 퍼뜨리는 온갖 잡사상과 퇴폐문화로 흥청거리고 있는 자본제사회에 우리들이 살고 있고 그들 자본에서 노동대열을 분열시키고 있음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퍼뜨리는 잡사상과 잡소리는 곧 역사발전의 과정에서 스스로 마각을 드러내었고 드러낼 것입니다.
그들 중 순진한 사람들은 지난 10.10 조선로동당 창건 55주년 기념행사에 참관해서 자기들이 이때껏 생각해온 것이 사실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고 아마 넋이 붕 뜨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진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마각이 드러나 노동운동 쪽에 발붙일 곳이 없음을 깨닫고 다른 데로 출세의 길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9.
지금 우리들은 50년 전 선대의 해방전사들이 투쟁하던 지리산에 와 있습니다. 세월이 가도 미제가 이 땅을 강점하고 있는 이상 그들이 가진 민족해방민주주의운동의 사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전투의 마당이 지리산이 아니라 도시이고 농촌이라는 것입니다. 곳이야 어디이건 미제를 몰아내고 이 땅에 민주주의정권을 이루어내는 과제는 마찬가지이고 분단을 청산하고 하나 된 조국을 찾는다는 지상과제는 같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노동해방, 민중해방의 길을 열어나가는 것이 이 지리산에서 산화한 선대 해방전사의 못다 한 한을 이루는 것입니다.
경북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청년학생들에게 민족을 말하고 민중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지도하면서 마침내 쫓겨나자 나는 가장 먼저 지리산을 찾았습니다. 뱀사골에서 능선에 올라 반야봉에서 내려뻗는 불무잔등의 갈림 능선에서 한 두어 시간 앉아서 명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얼굴 모르는 선배들을 만났으며 어릴 때 함께 투쟁했던 동무들을 만났습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나 자신 아니, 여기에서 피를 뿌린 선배 동지들에게 물었습니다. 대답은,
‘이제 네가 가던 해방투쟁의 전사의 길이 아닌가.’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재문 동지를 찾았고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조직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처럼 우리들 조선민중 앞에 벽처럼 막아섰던 미제도 물러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제는 저절로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힘이 있습니다. 미제는 이제 조선민족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조선민족의 힘입니다. 그것은 자주성의 힘입니다. 그 힘은 이미 물질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해방투쟁의 승리를 담보하고 있습니다.
이 해방투쟁의 주체는 근로민중이며 가장 큰 전위는 노동계급이고 주력군은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았습니다. 전위의 힘, 동력의 힘, 돌격부대의 용감성은 조직된 힘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조직을 꾸리는 일에 모두 힘을 쏟읍시다. 하나같이 떨쳐나설 수 있는 조직을 말입니다. 민족해방의 전투에서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말입니다. 조국해방, 민중해방, 노동해방을 위한 드넓은 길을 활짝 열어 제칩시다.
조국통일 만세!
민중해방 만세!
노동해방 만세!
(2000. 10. 28. 지리산 피아골에서)
백두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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