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잊혀진 독립운동 단파방송 수신 특집 다큐멘타리

감효전(甘曉典) 2012. 2. 10. 22:22

 

 

 
 
잊혀진 독립운동 단파방송 수신 특집 다큐멘타리
 
 
 

 


 
위 사진은 프로덕션 아이앤티디지탈에서
 KBS의뢰를 받아 제작한3.1절 특집 "잊혀진 독립운동
단파방송 수신사건" DVD표지입니다.이 프로그램 제작에
협조하신 분들에 드리기 위해한정판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저는 이 프로 그림을  관심깊에 시청해 주시고
관심 가져 주신 시청자 여러분과 이 프로그램을 기획해주시고
방송 해 주신 KBS, 그리고 어려운 여건에도 성의껏 제작에
임해주신 I&T디지탈과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 해 주신
님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아울러  이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을
좀더 쉬운 내용으로 접 하실 수 있도록 이 글을
써 보았습니다.  다른 내용은 먼저 올려 놓은 글이
있으므로 간략히 쓰겠습니다.
 
3.1절 특집 프로그램은
KBS홈에 가셔서 TV 2007년 3월
1일 밤 10시부터 11시까지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왼쪽 사진부터  조종국, 박용신, 성기석, 송남헌님
 


왼쪽부터  이이덕, 이현, 양재현, 송진근님
 
 


이준순님                   신상운님                이인영님

 
 
위 사진은 단파방송 해 . 내외 연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신 분들이고, 위 분중 조종국, 성기석,
박용신, 홍일범님 등이 건국포장을 받으셨습니다. 
 



 
일본이 대륙을 집어 삼키려는 야망으로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지만 뜻데로 되어 가질
않았습니다.1940년대 들어 전쟁준비를 더욱더 가열차게
전개 하면서모든것이 전쟁에 촛점이 맞추어 졌습니다.
 
세상은 더욱더 암울해지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유수한 신문을 폐간 조치하면서
전파관제 조치를 취해서 외부방송을 못듣게
하므로서외부 세계와 단절시켜 갔습니다.
 
일본방송마져 일본에서 오는 방송은 국내에서
직접 들을수는 없고 경성방송국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도록 채널 조정을 하고 제한적이나마 외부소식을 전해주던
외국선교사들을 추방했으며 국외국방송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는 외국인들 것 까지 모두 회수되었습니다.
외부세계와 단절된 암흑세계가 되고
국내 독립운동도 어려워졌습니다.
 
1941년 11월 28일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고 구미 외교위원회를
설치해서 이승만박사를 위원장으로 삼아 독립운동을
더 한층 강화 해 가던상황에서 일본의 발악은
극에 달해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폭격을 저지르고 동남아를 무차별
침공하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극히 제한작이나마
외국 방송을 들을 수 있는 곳은  그래도
 방송국 밖에 없었습니다.방송국 안에  우수한 성능의
   라디오가 있었고단파수신기를 제조 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서
 그 라디오로 외국방송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비밀리에 듣는 것입니다.
 
 


왼쪽분이 성기석님입니다.  스스로 만드신 단파수신기로  동료들과 해외방송을 같이 듣기도 하고
또 만든 수신기를 동료직원에게 주기도 하셨습니다.  감옥살이를 하시다가 해방되던날 나오셨습니다.
이 사진은 오끼나와에 있는 V0A, 1000Kw송신소를 둘러보기 위해 현장에서 찍은 사진으로
 이인관, 한기선, 이규일님과 송신소장이 함께 하셨습니다.
 
 
 
단파 수신기란 전파가 멀리까지
전달 되는 기능을 갖은 라디오여서
방송국안에서는단파수신기로 멀리서 오는
 방송을 받아 중계방송을하곤 했지만 이 때는
이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이 만든 단파라디오를 가지고
외국방송을 들으려는 호기심에서 이곳 저곳
다이얼을 돌리던 중 일본 나고야 방송체널 부근에서 
이승만 박사의 방송이 희미하게 들려오는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소리 방송이었습니다.
 
밤마다 일본인들 몰래  서로 비밀을
지키면서얘기도 하고 독립운동을 하시는
분들에게 전달 하는 등여러가지 형태로 이
방송의 내용은 국민들에게전해 졌고  독립운동을
하시는 분들에게도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호시탐탐 이런것만 엿보고 있던 일본 경찰에
이 정보가 들어가게 되었고 그 정보의 근원을 찾으려 들던
경찰에  결정적인 덜미가 잡혀 이날 부터 세상이 시끄럽게 되고 
방송국직원들을 비롯해서 관련자들이 줄줄이 끌려가고
방송도 어려워질 만큼 방송국은 텅 비었씁니다.
우리말 방송 책임자 였던 제 2 방송부장은
물러나고 그 자리마져 없어져 해방
될때까지 그대로 갔습니다. 
 
이 때가 1942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 였습니다.
연말 온통 검거선풍이 불고 1943년 일년간 국내는 이일로
시끄러웠습니다.  300여명의 인사가 끌려가  갖가지 고문이
가해지는 조사를 받고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만약에 이런일들이 독립지사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을 걱정한 당사자들은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일의 확산을 막았습니다.
 
감옥살이 하다가 세상을 뜨신분도 있고
또 감옥에서 나오신후 후유증으로 고생 하시다가
돌아 가신분도 있었습니다.
 
최종판결이 날 때 까지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으며  1943년에 있었던 최종판결은
많은 방송인들 포함해서 56분에게 
형을  언도했습니다.
 
이런일들이 오랫동안 얘기로나 지엽적인
기록으로 전해 오다가 1991년 오랫동안 각종 기록을
모아오신 유병은님이 "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이라는
책을 쓰시고 KBS문화사업단이 발간하면서
그 실체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오랫동안 방송에
몸담아 오신 분들의 모임인 한국방송동우회 (약칭 방우회)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KBS서측 2층 옥상에 물망비를 세우고
이를 계기로 세미나도 개최하는 등  제반 노력을 .기울이게
되면서 이 일이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한국 방송 동우회 (동우회)에서는
1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이곳을 찾아
그날의 뜻을 되 새깁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물망비 곁을 지나면서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하거나 단파방송의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던터에 2006년 연말 KBS가 3.1절 특집으로 여기에 관한
방송기획을 한다는 얘기에 접하고 어쩌면 여기에 관한 생생한 방송을 하는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당사자분이 모두 세상을 뜨시고
 한분만 계시기에 ) 기대를 모으고 협조를 아끼지 않던 터에 2007년
3월 1일 저녁 10시 KBS 1TV에 1시간 특집 다큐멘타리로 방영되어
그 의미가 한층 부각 되었음을 보고  고마움의 글을 쓰려던 것이
오늘에야 키보드를 두들기게 되었습니다.
 
 
이 일의 의미를 되살려 보려는 한 사람으로 
 
이 단파 수신 독립운동에 관한  내용에 관심 가져 주신
 
국민 여러분과 관계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2005년 9월 물방비를 찾은 한국방송 동우회 ( 방우회) 회원님 들입니다.
 
 
 

 
 
 
 

 

 

출처 : 춘하추동 방송
글쓴이 : 춘하추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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